好學의 神學/[조직신학組織神學]

한국교회 사회윤리학 정립을

好學 2012. 1. 21. 06:55


한국교회 사회윤리학 정립을

 

 


<1>

우리는 역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한국사회 내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 현실은 오히려 더욱 병들어 가고있어 '열매맺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 대한 심각한 재고가 요청되고 있다.더우기 성서 자체가 '하나님과 무관한 하나님 종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고,예언자들은 표면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야훼께로 전향할 것을 거듭 말하고 있어 우리의 '신앙 자체 ' 대한 심각한 검토를 위해 일단 멈춤이 필요하다.

역사는 기독교의 타락한 신앙 모습에 대해 많은 자료들을 제공해주고 있다.18,19c모험적인 기독교인들은 갑판 위에서는 찬송가를 작곡하면서 선창 밑으로는 노예를 운반하고,어린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면서도 교회에 십일조는 꼬박꼬박 바치고,노동조합의 결성을 악마의 창조물이라고 반대하면서도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위한 고아원을 지을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또한 본회퍼 당시에는 나찌정권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신앙의 기준으로까지 여겼던 "독일 크리스찬들"같은 부류의 신앙인들이 있었고,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역사적 실존형태"(볼프강 후버)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 속에는'예수를 닮지 않았던 교회들' 편만하게 현존해 있었다.,이러한 이유로 " 제도적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따르기를 어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역사 속에서 생각있는 신앙인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으로 제기되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오류들을 극복하고 예언자들과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었던 바른 '여호와 신앙에로의 전향' 가까이 나아갈 있도록 '비판적 개방성' 가지고 맑스의 종교비판을 받아들여야 것이다.이러한 방법과 성경의 근본원리들을 재발견함으로써 우리는 교회의 '진정한 경건' 회복단계에 나갈 있을 것이며,역사 속에서 '소유보다는 존재' 소중히 여기고,'자본에서 인간'으로 나아갈 있도록 대안을 제시할 있는 사회윤리학의 개념들도 풍성히 가질 있을 것이다.

논자는 역사 속에서 교회의 바른 실존(사회윤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야훼신앙의 회복을 위해 성경의 중심 개념들을 몇가지 정리할 것이며,소유나 민주주의,혁명과 같은 기독교윤리학의 주요주제들과 연결지어 생각할 것이다.그리고 '대안없는 문제제기' 글이 끝나지 않도록 역사속에 등장했던 여러 대안들을 이끌어와 성경의 원리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성육신화 것이다.

 

<2>

2.1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없느니라 "

예수의 메시지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소유욕에 대한 경책'이다(6:9,6:24,12:5,16-21). 예수께서는 물질과 마음을 서로 결합시키셨다(6:21.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뿐만 아니라 그는 '재물을 모으는 '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립시키고 계신다(6:33).이러한 물질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제자됨의 댓가에서도 나타나는데 사적소유에 대한 포기와 대가족에 의한 경제적,사회적 보호의 포기,그리고 자기 결정에 대한 포기가 그것이다(14:25,26).이러한 원리에서 보건데 예수의 윤리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윤리와는 많은 거리가 있음을 보게된다.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내적인 핵심은 '돈을 생산하는 (이자)'인데 이것에 대해 성서와 그리스 철학,중세의 로마 가톨릭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의떤 종류의 신용에 의거하든지 간에 '이자취득' 엄금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과 자본주의 윤리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가져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14:28-15:8,23:20).

우리는 물질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절정을 16 13절에서 보게된다.이는 십계명중 1계명과 같은 내용으로 물질을 섬김이 하나님과는 대적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살펴야 하나는 성서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것은 무신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라는 것이다.성서가 인간에게 제기하는 중요한 질문은 그가 신을 믿느냐 믿느냐가 아니고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신이 '어떤 '이냐 하는 것이다.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는 종교의 완전한 형태와 다름 아니다.자본주의는 인간에게서 자신과의 관계,이웃과의 관계,세계와의 관계를 빼앗아 가고 그대신 물신적인 피조물을 통해 관계를 중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의 억압보다 깊은 억압의 근본적인 뿌리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서로를 지배하며 군립하도록 야기시키는 명성,권력,그리고 부에 대한 사랑으로 봄으로 물질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자본주의의 통치력을 지적해 주셨다.

이와같이 '인권보다 자본을' 소중히 여기는 거대한 구조에 대해 뒷셀은 약소국의 부에 대한 약탈은 무수한 인간들의 생명을 악마적으로 숨어서 '사람을 잡아 먹는 자본-'에게 잡아 바치는 것으로 도둑질,약탈,착취가 이제는 버젓이 민주주의,자유,문명의 이름으로 심화되고,기술적으로 되고,일반화 되어 이러한 범죄의 기계적인 구조가 세상 통치자들에게 지대한 관심거리가 되었다고 자본주의 우상론을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민주주의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에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안에서-필연적인 역사적 한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온전하게 실현될 있다고 강조한다.

H.F.Ward 예수의 윤리와 자본주의 윤리의 비교에서 예수의 윤리가 당시(1929) 서구의 자본주의 경제윤리와는 정면으로 충돌된다고 보았다 '도덕적 가치들보다는 물질적 가치' 우선하는 전제위에 사회가 서있기 때문이었다.그는 기독교가 자본주의 질서를 회개시키고 변혁시키지 못하면 결국 기독교도 멸망하게 것이라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이렇듯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편리한 것을 인간에게 있을런지 모르지만 우선권의 문제로 인해 파괴되는 자유,정의 ,우정관계 등을 중요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소유권에 대한바르트의 이해는 우리의 생각을 여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데,그는내 것은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어느 사회주의 문헌에서 보다도 예수에게서 정죄된다며 예수는 어느 사회주의자들보다도 사회주의자이다고 정리했다. 사유재산에 대한 예수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바르트의 이해처럼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커다란 구조적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터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예수의 윤리' 대한 순환적인 해석으로 의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바르트는 말씀에 의한 그의 전환에 대해 진정한 크리스챤은,만일 그가 기독교의 개혁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만일 그에게 사회주의개혁의 과재가 놓여 있다면 크리스챤이 밖에 없다고 자신의 확신을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주의를 동일화 시킨 것은 아니다.단지 본질적 가르침에 있어서의 유기적인 관련성을 강조한 뿐이다 .

원래 기독교는 공산주의적 소유형태와 무관하지 않았다.초대교회의 재산 공유제는 말할 없고,가톨릭의 수도원이나,개신교의 형제단들이 모두 '소유질서로서의 공산주의' 찬양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Marxist 들과 대화를 Barth Moltmann,GollWitzer 등은 이구동성으로 맑시즘과 토론,논쟁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가져서는 않된다.온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이루어 졌어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 나라가 없으며,실제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은 이론과 다르기 때문이다.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사유재산이 재거되었는데도 노동의 소외,인간 자유의 소외가 다시 나타나는 (관료주의,새로운 계급,특정인의 숭배)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원인에 대해 보니노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간의 소외' 아주 심각하고 깊이있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력의 문제,인간의 이기주의,문제,인간관계의 문제 등을 말한다.마르크스의 윤리의 핵심은 '이기주의보다 연대성(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될 있는데 이것은 자본주의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적인 자기 본위에 대한 거부를 나타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가?

최근에 동구권을 살피고 돌아온 한완상 교수는 국민들은대체로 평등하게 가난한데 간부들과 정부 고위관리들을 부정과 부패로 자본주의체제의 특권층 못지않게 사치스럽게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또한 의욕을 제거하는 체제,특히 사유욕과 축적욕을 제거해 주는 체제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 있을 지는 몰라도 일의 능률만은 크게 손상시켰음에 들림없다고 사회주의의 타율성에 의한 의욕부진을 설명했다. 이러한 것들을 볼때 제도에 의한 사유재산의 몰수는 다른 타율을 만들어 냄을 알게된다.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충만한 초대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사유재산을 내어 놓음으로써 가난을 종식시키는 기적적 경제행동을 최고의 모델로 삼을 있을 것이다.

 

2.2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본질적인 야훼신앙의 명제는 기독교의 본질이 이웃과의 '관계성' 있음을 말하고 있다.인간의 욕구(배고픔,병치료...) 거룩한 관습들보다 휠씬 중요하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자비를 원하시고 희생제물을 원하시지 않기"때문이다.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한 여호와 경배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회심해야 한다.첫째는 그리스도를 향해서,그리고 그와 함께 세상을 향애서 회심해야 한다.이는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가 일차적으로 세상에서 곤궁한 사람을 돕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러나 방법에 있어서는 B.C 8C A.D 1C 방식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다.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보다 현대같이 복잡하고 구조적인 사회 속에서는 보다 고아가 발생하지 않토록 제도적 장치를 행하는 것이 이웃사랑의 방법이다.그럼으로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효율적으로 행하기 위해 맑시즘의 도구적이해는 기독교인들에게 수용되어야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 말하는 구절(22:16,9:23,4:6,6:6,6:6-8) 예언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들이다.그것은 '사랑과 정의와 의를 실천하는 ' 의미하는 것이다.예언서에 자주 언급되는 "야훼를으라" 말은 하나님께로의 전향을 말하며, 내용성은 자신의 생활을 하나님 자신의 행동-정의,사랑- 일치시키는 것이다(9:23,22:).그래서 정의를 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신약에서도 요한은 예언자의 전통을 따라 사랑과 정의를 '동일시'하고 있다(1 2:29,3:10).그래서 요한복음의 사랑을 '역사적인 행동'이라 한다.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행동에 전적으로 투신하고 참여하지 않고서는 없다.

성서에는 추상적인 원리가 없다.사랑,정의 혹은 자유는 일반적인 가치 혹은 이상적인 규범으로 결코 칭찬되거나 요구되지 않고 항상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 가난한 ,고아,과부와 외국인에 대한 정의이다.그것은 특별한 이웃,혹은 특수한 원수에 대한 사랑이고 특별한 노예상태로부터의 자유, 정치적,경제적인 자유이며 혹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혹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현실과 통떨어진 영혼의 종교적 감정이나 고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매맞고,피흘리고,아우성 치면서까지 우리들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 하시려는 전투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요한복음3:16에서 이러한 속죄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배워 요한일서 3:16절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2.3"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바울의 역설적인 권유인 '고난을 즐거워 하라' 가운데는 기독교 영성의 가장 깊은 비밀과 정열이 담겨 있다.이는 낡은 세상은 예수의 나타나심을 증오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듯이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대우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당연하게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우리는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결코 안락한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함을 새로운 삶의 본질로 수용하는 것이다.불의로 인한 고난,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흔적을 남기므로 생명의 역사를 잉태케 된다.이런 의미에서 희생,섬김,봉사,의행등은 십자가로 인해 주어지는 진실된 인간성 회복의 징조들 이다.또한 사랑,기쁨,평화,절제 등은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므로누리게 되는 영원한 부활에의 전조들이되는 것이다.

본회퍼는 당시 독일복음주의 교회의 치명적인 문제를 '싸구려 은혜' '복종없는 신앙'으로 파악했다.그는 '싸구려 복음'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것은 마치 보부상의 상품처럼 시장에서 팔리우는 은혜,성례전,사죄,종교,위안들을 헐값으로 넘기고 있는 은혜,교회가 질문도 묻지 않고,한계들도 정하지 않고,관대하게 축복을 소나기처럼 주는 교회의 무진장한 보물 창고같은 은혜,말하자면 계산이 이미 되어있기 때문에,모든 것은 거저 가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은혜이다.그것은 교리,원리,개념으로서의 은혜를 의미한다.그것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사죄의 설교요,훈련없는 세례,신앙고백없는 성만찬,개인적인 고백없는 사면이다.이것이 싸구려 은혜이다"라고했다.

본회퍼는 '값싼 은혜' 대항하여 '값비싼 은혜' 말하고 있다.그것은 제자됨의 값을 치루는 것이요,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8:11-13).이는 본회퍼의 신학개념인 "대리직으로서의 "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을 위한 대리적 행동처럼 우리도 세상의 죄와 고난을 대신져 주는 "타인을 위해 고난받는 " 사는 것이다.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도 참된 교회의 모습과 제자의 길을 바로 '고난에 참여하는 '으로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타인을 위한 삶은 종교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의 영역까지도 포함하고 있다.이것은 본회퍼 개인이 경험한 상황 속에서 결심되었던 것으로 그는 1940년대를 전환점으로 교회내 운동에서 사회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그는 히틀러에 대한 태도를 다음의 유명한 비유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교회는 다만 바퀴 아래있는 희생자들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것만이 아니라,미친 사람이 몰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를 멈추게 해야 한다"

 

<3>

우리는 앞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 몇가지를 정리하여 보았다. 역사 속에서 교회의 참된 실존을 위해서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며,소외된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며,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는

삶인 것이다.정말로 인간이 새로와지고,세계가 새로와지고,물질구조가 새로와지는 세계를 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혁명' 수행해 나가야 것이다.까마라도 세상에 혁명을 일으키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그것은 우리가 실제적인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면서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풀이해 주었다.

비록 교회가 세계의 중대문제들-기아문제,인구팽창,전쟁,생태계...- 해결할 없지만 단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일을 해야 한다.본회퍼는 이를 정리해 주었다."교회는 오직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이다.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교회는 모든 소유물을 고난받는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남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야 한다...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통해서..."그래서 까마라처럼,본회퍼처럼,예수 그리스도처럼 권리를 빼앗긴 자들,고문을 당하는 자들,굶주리는 자들이 잊혀지지 않토록 '대변해 주는 ' 해야 것이다. 구체적인 대변 방법으로는 탄원서나 대표위원 파견같은 통상적인 설득의 방법의 한계를 깨닫고 '물리적인 저항' 방법을 사용한 간디의 원리들에게서 배울 있을 것이다. 시민불복종,불매운동,파업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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