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인간론 - 제2부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好學 2011. 12. 25. 14:17

인간론 - 제2부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죄의 기원

죄의 역사적 견해들

죄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인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죄의 기원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죄가 낙원에서의 아담의 의도적인 범죄와 그로 인한 타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선재설을 말하며 인간의 영혼은 선재의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범죄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죄의 상태로 들어온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죄의 연계 사상을 많이 받아들이는 어거스틴적 예석을 했으나 반 펠라기우스적인 방법으로 더 많이 해석하기도 했다. 칸트는 악을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

죄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근거

성경에서는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명백히 규정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 범법자로 묘사된다. 그럼 인간은 그의 본성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또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죄의 조서자로 간주될 수 없다. 그리고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이 죄는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의 죄악은 죄의 전형으로서 이를 통해서 참돈 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 최초의 타락은 유혹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 유혹은 뱀으로부터 나온것이지만 성경은 이 뱀이 사탄의 도구로 쓰여짐을 말하고 있다. 뱀은 사탄의 도구로서 죄를 의인화한 것이요, 죄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성격과 사람을 죽이는 독침과도 같은 성격을 상징한 것이다.

죄의 본질적 특성

성경적 죄의 개념

죄는 악의 구체적인 형식이다. 죄든 죄가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는 악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죄는 절대성을 갖는다. 죄는 선의 정도가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을 말한다. 이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과의 관계를 생가하지 않고는 죄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가질 수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죄는 죄책과 부패를 포함한다. 죄책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죄는 마음속에 거한다. 죄는 지성, 의지, 감서, 나아가서는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죄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죄는 행위와 성벽(기질)과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

인간에게는 선한일을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의미의 자유가 부여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했듯이 선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죄는 개별적인 의미에서 의지의 잘못된 선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죄악된 본성이라든지 죄악된 성품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원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기본적인 펠라기우스주의의 전제는 양심과 하니님 말씀에 완전히 모순되며 인간의 의지와 본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는 심각한 죄의 문제와 은혜로서 구원의 역사를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죄는 악과 구별된다. 죄는 악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이다. 모든 악은 죄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죄는 악이 될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개념은 악보다 더 넓게 포함하는 것이다. 이 죄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죄의 기준이 되는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율법이 없었으면 죄는 세상에 있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죄는 항상 세상에 있으며 그 죄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죄를 짓는 것과 구원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행위 율법의 카테고리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죄로 인해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은 왜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했으며, 인간을 왜 죄의 문제로 그렇게도 고민하고 있는가? 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

죄가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한다면 매일 기도하고 죄를 아뢰며 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의 회개를 강조하는 교회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렇게 본다면 교회는 구원만을 위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구원 받은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죄의 전이

A. 역사적 개관

1. 종교개혁 이전

이레니우스,터툴리안은 인간의 죄악된 상태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라고 한다. 오리겐은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의 상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는 전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직접 또는 즉각적으로 전달된다고는 보지 않았다. 펠라기우스는 죄의 상관성을 거부하였다.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정직성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셀름,헤일스의 알렉산더, 보나벤투라 등은 죄의 상관성을 실재론적으로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몸의 한 지체의 행위가 전인의 행위로 간주되듯이 인류라는 유기체에 속한 한 지체의 죄는 전 유기체에 전가된다고 했다.

2. 종교개혁 이후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우리안에 내주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자 뿌리이기 때문에 모든 그의 후손들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며, 이는 생득적인 부패성으로 후손에게 전가되는 것이라 한다. 사우무르 학파의 플라케우스는 아담으로부터 죄악된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마치 원초적인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이된다는 교리를 전적으로 불신한다.

바르트,부룬너의 경우, 인류의 보편적인 죄성을 아담의 죄의 결과로 간주하지 않는다.

B. 죄의 보편성

종교사의 철학사는 죄의 보편성을 입증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도덕적 악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성경은 죄의 보편성을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 곧 죄는 원초적인 어떤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저주아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필요로 한다고 가르친다.

C. 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와의 관계

1. 관련을 부인하는 견해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과 소지니주의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죄는 개별적인 것이므로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인 것이고 아담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약한 면모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학파(뉴헤이븐)

이론에서는 단지 인간은 선천적으로 죄를 지을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보며 이러한 경향이 곧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위기신학에서는 인류의 죄의 연대성을 강조하나 아담과의 관련성을 부정되고 있다.

그 외에 관련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으로는 실재론은 인간의 본성이 포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단일한 단위를 구성한다고 보며 아담은 전인류의 계약의 대표였기 때문에 언약의 관계에서 볼때 그의 불순종은 모든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간접적 전가론의 입장에서는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것은 부인하며 단지 후손들은 자연적인 출생과정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내적인 부패를 물려받았으며 아담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생득적인 부패성 때문에 그들도 역시 배역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곧 아담안에서 죄책을 짊어졌기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패했기 때문에 죄책을 진 자로 간주된 것을 뜻한다.

죄의 전이는 아담의 죄의 전가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계약신학이 등장하면서 아담이 인류의 대표라는 생각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죄책의 전이와 죄의 부패의 전이를 엄격히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선천적인 부패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아담의 죄책이 그가 계약의 머리로서 대표한 모든 인류에게 "즉각적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의 전이를 말 할 수 있다.


인류의 삶에 나타난 죄

원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안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를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른다.

역사적 개관

펠라기우스적는 의지의 자유는 타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신체적 부페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희랍 교회에 나타난 경향은 원죄를 단호하게 거부한 펠라기우스주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반 펠라기우스적 입장은 온 인류가 아담의 타락에 관여 했으며, 인간의 본성은 유전적인 죄에 의해서 오염되었고, 온 인류는 본질상 악을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어떤 선행도 이룩할 수 어벗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과 원죄의 죄책,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범죄

자범죄라는 용어는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인 행위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안간의 선천적인 본성 및 경향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이나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성경은 악으로 범한 죄와 무지나 연약성이나 실수로 인하여 부지중에 범한 죄를 구분한다.

죄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는 죄는 증거와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성령의 증거를 의식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중상함과 동시에 질시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일로 돌리는 행위를 말한다.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개념으로 인해서 죄가 후세에게 전가 되었다면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의 해결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을때,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로 인한 다른 문제로 인한 것인가? 개혁주의 견해에서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인해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죄의 형벌

죄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율법 수여자를 공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를 형성하는 신성 불가침의 하나님의 의를 침범하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거룩한 살을 살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흠없는 거룩함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자연적인 형벌과 적극적인 형벌

형벌은 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은 회개와 용서를 통해 이 형벌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리고 적극적인 형벌은 일반적이고 법적인 의미의 형벌이다. 이 형벌은 범법의 본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형벌이 아니라 거룩한 법령에 의하여 범법에 가해지는 형벌이다.

형벌의 본질과 목적

형벌은 죄때문에 가해지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벌을 말한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공의에 기인하는 일종의 빚이다.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거룩한 의 또는 정의의 수호를 위해서이다.

2. 죄인을 교정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3.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죄에 대한 실제적 형벌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은 성경적인 죽음이다. 그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말한다. 또한 그 형벌은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나타난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한다. 이 도전에 대해서는 그 응당한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럼 죄를 짓는 인간은 왜 하나님에게 그 댓가로 바로 응당한 형벌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벌은 더디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모아서 오는 것인가?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이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이라면 모든 이런 현상들은 죄의 댓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명되지 않는 것을 죄의 명목으로 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형벌이 그때 그때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과 정의를 수호하거나 죄인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가? 그렇게 된다면 형벌의 원래의 목적달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