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救援論]구원.신앙.계시.

인간론 - 제 1 부 원시상태의 인간

好學 2011. 12. 25. 14:15

인간론 - 제 1 부 원시상태의 인간



제 1 부 원시상태의 인간

인간의 기원

교의학에서 인간은 피조물의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각별한 보호의대상이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이중적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창조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이 선행한다.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의 견해는 인간이 생득적인 힘에 의하여 전적으로 통제되는 와전히 자연적이 과정에 의하여 하등 동물의 몸과 혼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진화론이 갖는 주도적인 특징은 동물의 세계와 인간과의 철저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론으로 진화론이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성적 본질

인간 본성의 구성적 요소들

신자들은 인간이 두 부분 곧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있다.이 견해를 이분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 분분 곧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삼분설이라고 한다. 신이 제 3의 본질 또는 중간적 존재를 통해서 물질계와 서로 교류할 수 있다

는 것처럼, 인간의 영도 제 3의 중간적 요소인 혼을 통해서만 몸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혼은 이성 혹은 영을 소유하고 있는 한 불멸의 존재로 간주되지만 몸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는 육적이요,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조약한 형태의 삼분설은 몸을 인간 본성의 물질적인 부분으로 혼을 동물적인 생명의 원리로, 그리고 영을 하나님과 관계하는 합리적인 불변하는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개인의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기독교 신학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혼의 본질, 기원 계속적인 존재등에 관한 끊임없는 논의가있어 왔다.

몸과 혼의 관계를 말함에 있어서 먼저 일원론이 있다.몸과 혼은 원초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이론들이다. 이원론은 본질적인 이원성을 전제하고 양자의 상호관련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개인의 영혼의 기원

선재설

오리겐, 스코투스 에리게나, 율리우스 뮐러와 같은 일부 사변 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현재 상태와는 다른 일종의 전(前)상태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전상태에 어떤 사태가 발생하여 현재와 같은 상태 안에 영혼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성경적, 철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과 몸을 우연의 산물로 본다는 것과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는 것등의 반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전설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혈통을 통하여 전이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은 부모에 의해 자식ㅇ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 유전설은 루터교회의 지도적인 견해가 되었다.

유전설에 대한 반론은 유전설은 영혼의 단순성이라는 철학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 유전설은 현실주의 이론과 잘 접목이 된다.

창조설

각 개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로 간주되었야 한다. 영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사역에 기인한다. 이 이론은 유전설보다 성경의 지배적인 표현들과 부합한다. 원초적인 창조에 관한 수술은 몸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를 엄격히 구분한다. 창조설은 유전설보다 인간 영혼에 더 잘 부합한다. 또 이 이론은 그리스도론에서 빠질 수 밖에 없는 함정을 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의 표현을 더 바르게 평가하고 있다.

이 창조설에 대한 몇 가지의 반론이 있다.

1) 창조설은 만일 영혼이 원래 부패 성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면 하나님을 도덕적인 악의 직접적인 창시자로 만들게 된다. 만일 이 이론이영혼이 순수하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게 되면 하나님은 도덕적인 악의 간접적인 조성자가 된다는 것이다.

2) 창조설은 지상의 아버지가 다만 자식의 몸만을 낳았다는 사실은 부모의 지적, 도덕적 트성이 자식에게 재현되는 현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3) 창조설은 하나님이 현재 세계와 관계하시는 방식과 세계안에서 사역하시는 방식과 조화되지 않는다.


결론

이런 문제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성경은 아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여러 이론들중에서 창조의 이론이 선호받을만 하다. 창조설의 한 형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전설이 빠진 극복하기 어려운 철학적 난점을 마나지 않기 때문이며 유전설이 빠져 들어간 그리스도론의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언약 개념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인간 영혼을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새로운 개인을 낳는 자연적 과정과 아주 밀접학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기원을 말함에 있어서 몇가지 설이 있지만 성경적, 철학적근거에 합당하고 그래도 그리스도론의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창조론이다. 이 또한 한 이론으로써 존재할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사고하고 신앙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인간론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럼이 인간의 이성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게 된다.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경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때 이성을 불어 넣어주셨는가? 아니면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며 인간의 어느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죄도 하나님의 창조된 것인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성이라고 한다. 그럼 모양과 형상은 어떤게 구분되는가? 어떤 이들은 "형상"을 몸, "모양"을 영혼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전자는 지성을 , 후자는 도덕적 기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고의 완전성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원래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완전한 상태, 곧 의와 거룩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로마 카톨릭의 입장은 원의는 단전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인 능력과 기능을 부여받았으며, 이 능력들은 자연적 의를 통해서 서로 완벽하

게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합리주의의 견해는 인간이 순전하고 도덕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중림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자유 의지를 부어받음으로써 선과악 그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온전한 하나님이 모습인가?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을 닮아 있는가? 어거스틴의 말대로 형상이 지성을 가르킨다고 했을때 인간의 지성을 하나님의 지성을 닮아 있다는 것인가? 그럼 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가?

이런 점에서 볼때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할찌라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고는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찌라도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은 변형되었다고 본다.

그 자체가 죄로 인식되고 그 죄에서 구원을 받음이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이라는 견해가 생기게 된다. 만약 이렇게 되었을때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왜곡된 표현은 아니다. 단지 도덕적 인간을 위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을때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였을때 인간은 당연히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행위 언약 속에 있는 인간

인간의 원래의 상태, 곧 무흠의 상태(status integritatis)에 관한 논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특별히 인간의 종교 생활의 기원과 본질을 고찰함으로써 완결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상태에서의 최초의 인류의 삶도 언약 안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 언약은 [자연의 언약] [생명의 언약], [에덴의 언약], [행위의 언약] 등으로 불린다. 이런 언약의 명칭중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어겨지는 것이 "행위의 언약"이다.

개혁주의의 입장으로서의 행위의 언약은 어떠한 인간의 법적입장의 변화도 율법의 권위를 폐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요구하신 순종의 요구는 인간의 타락과 그 파멸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종결된 것은 아니며, 죄의 삯은 사망이며, 완전한 순종은 언제나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들이다.

행위언약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에 관한 한 그렇다. 그리고 조건적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한 또한 폐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긍정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한에 있어서는 언약은 폐기되었다. 또한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서도 행위의 언약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행위언약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따라 생각해 본다. 행위언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자연적 관계에서 아직 유효하고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벌로서도 아직 유효하다 하겠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언약이 폐기되었다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커다란 경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