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基督論]성경.교회.예배.

교회론 [敎會論]

好學 2011. 12. 24. 22:16

교회론 [敎 會 論]


"분명히 예수께서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의 정신으로 인류에게 봉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 그의 추종자들의 사회를 형성할 것을 계획하셨다 그러나 그는 조직체를 형성하거나 그의 조직체를 다스릴 수 있는 정치적 계획을 꾸미지는 않았다... 그는 조직 보다 더 위대한 그의 생명을 주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주위에 그의 추종자들을 불러 모음으로써 추종자들의 사회를 형성시켰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 계식 때에 될 수 있는껏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의 생명과 그의 정신과 그의 목적을 전해 주려고 노력하셨다. 그는 또한 세상 끝날까지 그의 사회 즉 그의 교회에게 그의 생명을 계속해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께서 그의 교회에게 주신 선물 중에 가장 위대한 선물을 예수께서 자신을 교회에게 주신 일이다."
- Robert Hastings Nichols -


개 요

I. 교회의 본질 (The Natureof the Chruch)

1. 말씀이 교회에 대하여 설명한다.

2. 말씀이 크리스챤에 대하여 설명한다.

a. 형제들 b. 신자들

c. 성도들 d. 택함을 받은 자들

e. 제자들 f. 크리스챤들 g. 성도를 좇는 사람들

3. 교회에 대한 실례들

a. 그리스도의 몸 b. 하나님의 권능 c. 그리스도의 신부


II. 교회의 설립(The Founding of the Church)

1. 예언적 고찰

2. 역사적 고찰

III. 교회의 회원권 (The Membership of the Church)

IV. 교회의 사업 (The Work of the Church)

1. 구원을 구하는 일

2. 예배의 수단을 제공하는 일

3. 종교적 친교를 제공하는 일

4. 도덕적 표준을 유지하는 일

V. 교회의 의식 (The Ordinaneces of the Church)

1. 세 례

a. 양식 b. 형식 c. 세례를 받는 자 d. 효험 e. 의미

2. 성찬식

a. 기념 b. 교훈 c. 확신 d. 확신 e. 책임

VI. 교회의 예배 (The Worship of the Church)

1. 공중 예배

2. 가정 예배

VII. 교회의 조직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1. 교회의 정치

2. 교횡의 정도

a. 일반적이고 예언적 전도

b. 지방적이고 실천적 전도



I. 교회의 본질 (The Nature of the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 봄으로써 그 해답을 얻어 보기로 하자. (1) 말씀은 교회에 대하여 설명한다. (2) 말씀은 크리스챤에 대하여 설명한다. (3) 몇 가지 실례는 교회에 대하여 설명한다.


1. 말씀은 교회에 대하여 설명한다.

신약 성서 헬라어로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ecclesia)인데 그뜻은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회"라는 의미이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은 것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 도시에 있는 크리스챤의 전체를 의미한다 (행11:22,12:1). (2) 회중을 뜻한다. (고전 14:19,35,롬16:5) (3) 지상에 있는 신자들의 전체를 의미한다.(엡5:42).

영어로 교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춰 - 치"(Church)라는 말은 "쿠리아케"(Kuriake)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님에게 속한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란 세상에서 불러내심을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 충성을 다하는 자들의 무리를 뜻한다.

2. 말씀은 크리스챤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a) 형제들
교회란 영적으로 형제가 되어 친교를 맺는 자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갈라 놓는 모든 장벽이 교회 안에서는 무너진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는 것이다" 종교사에 근거를 두고 있는 모든 심각한 분렬은 극복되어야 한다. "헬라인도 야만인도 없다." 문화적인 심각한 분렬도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인도 종도 없다." 사회와 경제적 심각한 분렬도 극복되지 않으면 안된다. "남자도 여자도 없다." 모든 인간의 심각한 분렬도 극복되어야 한다.

(b) 신자들
기독 교인들을 가리켜 신자들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기독 교인들의 특징은 주 예수를 믿는 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c) 성도들
기독 교인들을 가리켜 "성도들"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헌신키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었기 때문이다.

(d) 택함을 받은 자들
기독 교인들을 가르켜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저들은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동시에 또한 영광스러운 운명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e) 제자들
기독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영감을 받은 자들의 영적 지도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f) 크리스챤들
저들의 가리켜 크리스챤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저들의 종교의 중심은 그리스도 인격에 있기 때문이다.

(g) 도를 좇는 사람들
초대 교회 당시에 크리스챤들을 가리켜 "도를 좇는 자들"이라고 종종 불리워졌던 것이다. (행9:2). 왜 그러냐 하면 저들은 인생의 특수한 도리를 따라서 살았기 때문이다.

3. 교회에 대한 실례들

(a) 그리스도의 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 가신지도 벌서 1900여년이 되었다. 비록 육체로는 떠나 있으나 아직도 그는 영으로는 세상에 계시다. 즉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되는 교회를 통하여 임재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에 인간의 몸을 입고 사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도 그는 모든 족속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 즉 교회 속에 신비스럽게 살고 계신다. 우리들은 복음서들의 마지막에 "끝"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찾아 볼 수 업다. 차라리 복음서는 후편으로 계속될 성질의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나타났다는 증거를 우리들은 사도행전과 기독교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게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는 이 새로운 몸(교회)에 대한 책임을 질것을 약속하였다.그러나 그는 또 다른 하나의 실례를 들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 없는 포도 나무를 완전한 포도 나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 나무로부터 떨어져나온 가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널리 전파될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그의 생며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한 것이다. 교회가 그의 머리되는 그리스도와 밀접한 접촉을 갖는 정도에 따라서 그의 생명과 체험을 나누는 일의 밀도로 짙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요단가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 것 처럼 교회는 오순절에 기름 부음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심령이 상한자를 고쳐주셨으며 포로된 자들을 놓아 주신 것과 같이 참다운 교회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했던 것이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1서4: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치적 위험 인물로 오인되어 핍박을 받았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 처럼 교회도 핍박하는 통치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것 처럼 교회도 핍박하는 통치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적이 한 두번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 교회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것 처럼 교회도 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교회 속에 있음으로 교회는 파멸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사상을 바울의 마음 속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것이다. "내가 이제 너희는 위하여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위에 열거한 실례를 볼 것 같으면 교회는 단순한 하나의 조직체란 개인들이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자진하여 한데모인 단체를 의미한다. 우애 조합 (Fraternal Organization) 이나 노동 조합 (Trade union)같은 것이 조직체이다. 유기체는 타고난 생명에 의하여 발전하고 성장하는 생명체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발전하고 성장하는 생명체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유기체란 상호 관련된 여러 부분의 종합체를 의미한다. 이 유기체에서는 각 부분이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뿐만 아니라 각 부분이 전체와도 관게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차는 여러가지 기계의 부속품으로 조립된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여러 지체로 조직되어 있으며 또한 여러 기관이 생명에 의하여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이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의 단일체이다. 그러나 수백만의 살아 있는 세포로 조직되 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되는 교회도 하나이다. 그러나 이는 무수하게 많은 중생한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에 의하여 생기를 공급받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되는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생기를 공급 받는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위에서 설명한 몇 가지 사실은 기독교의 독특한 면을 지적해 주고 있다

던피(W.H.Dunphy)씨는 다음과 같은 말은 하였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 중에서 그리스도 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영구히 결합케 하는 영원한 유기체이다.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기독 교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일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것이다. 부처도 그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을 한데 결합하여 불교를 창시하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관계는 다만 외적인 것이다. 즉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이다. 그의 추종자들을 한데 결합시키는 힘은 그의 생명이 아니라 그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죠로아스터와 스크라데스와 모하멧과 기타 다른 종교적 천재들도 이와 같은 면에 있어서는 부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기독 교인들의 위대한 교사 일뿐만 아니라 바로 기독 교인의 생명이 된신다. 그리스도께서 창시한 것은 그의 사상을 연구하여 전파시키기 위한 하나의 종교 단체가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면서 인도하시는 하나의 유기체 즉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생을 영위하는 그의 몸된 교회이다."

(b) 하나님의 전 (벧전 2:5,6)
하나님의 전이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물론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시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저 할 때는 찾을 수도 있도록 그는 특수한 곳에 특별히 계신다.(출25:9,왕상8:27). 과거에 하나님께서 성막과 성전에 계셨던 것과 같이 오늘도 그는 그의 성령으로 교회 안에 계신다.(엡2:21,22,고전2:16,17) 이 영적인 하나님의 전에서 기독교인들은 제사장의 자격으로 영적인 기도와 선행의 제물을 드린다.

(c) 그리스도의 신부
이와 같은 실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결합과 교제를 나타내기 위하여 신약과 구약에 다 같이 사용되었다. (고후11:2,엡5:25,계19:7,22:17,21:2). 그러나 이와 같은 비유는 하난의 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상징을 상요하는 목적은 진리의 어떤 면을 특별히 나타내고자 하는데 이는 것이지 어떤 교리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II. 교회의 설립 (The Founding of the Church)

1. 예언적 고찰
이스라엘을 가리켜 교회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모든 다른 나라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냈기 때문이다.(행7:38)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이스라엘의) 회중이라는 말을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교회 (church)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회중 또는 교회이었다. 유대인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거부한 후에 그는 새로운 회중 즉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실 것을 예언하셨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로서 그리스도의 사업을 지상에서 계속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마16:18)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오순절에 탄생하여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2. 역사적 고찰
그리스도의 교회가 오순절에 탄생하게 되었을 때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헌납되었다. 성막이 지어졌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함으로 성락이 성별되었던 것과 꼭 같이 (출30:34) 최초의 교회원들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교회는 성별되었던 것이다. 초대 기독 교인들을 이 사건에서 속죄소(shekinah)의 복죄를 보았다. 이 속죄소는 성전으로부터 오랫 동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어떤 랍비들은 이 속죄소가 없음으로 대단히 슬퍼했던 것이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재료들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솔로몬이 이 성전의 건축을 완공시켰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교회를 세울 재료들을 이 땅 위에 계실 때에 모두 수집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성령에 의하여 교회의 설립을 보게된 것이다. 실제로 사도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저들을 설교와 가르침과 조직에 의하여 교회의 기초를 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이다.


III. 교회의 회원권 (The Menbership of Church)

신약은 교회의 회원권을 위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진정한 신앙이다.(엡16:31).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대한 상징적 간증으로서 물세례를 받는 일과 입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신앙 고백이다. (롬10:9,10) (물세례를 받는 일은 교회의 회원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초대 교회가 시작될 무렵에 모든 교회원들은 참으로 중생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47).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조직체의 일 회원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포도 나무의 한 가지로 접붙임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려감에 따라 교회는 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 물세례는 참다운 개종자에게 주어지기 보다는 교리 문답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하여 교회원의 수는 대단히 증가하게 되어 마음 속에 새로운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도 교회에 들어와 기독 교인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지 기독 교계의 상태가 다소를 불문하고 이와 같은 경향으로 흘러온 것은 사실이다.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중에도 참 이스라엘이 있을 것과 같이 오늘날 교회 중에도 참 교회가 있는 것이다. 다만 입으로만 기독 교인이라고하는 기독 교인들이 있는 반면에 참다운 신앙심을 소유하고 있는 기독 교인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기서 온갖 교파에 속한 참다운 기독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유형적 교회를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자는 하늘 나라의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후자는 교회의 교인 명부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이 마태복음 13장에 암시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천국의 비밀"이라는 표현은 "기독교국" (Christendom)이라는 일반적 명칭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본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기독교의 영적 역사를 취급하고 있다. 우리드은 여기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안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한데 섞여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교회는 정화될 것이며 진짜 교인과 가짜 교인은 구분될 것이다. (마13:36-43,47-49)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진리를 어떤 큰집에는 귀히 쓰이는 그릇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천히 쓰이는 그릇도 있다는 비유의 말씀을 함으로써 잘 나타내 주었다. (딤후2:19-21) 그러면 교회의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인가? 교회 시대가 천국의 일 양상이라는 점이 마16:18.19.속에 암시되어 있으며 또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바울이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등에 의하여 교회와 하늘 나를 동일시 했다는 암시를 엿볼 수 있다.(골4:11). "하늘 나라"라는 말은 포괄적 용어이기 때문에 교회를 하늘 나라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일니노이스주를 미국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고 윌리암 이반즈 (William Evans)는 말하였다.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 출생할 수 있다는 멧세지를 전하고 있다. (요3:3-5, 벧전1:23).


IV. 교회의 사업 (The Work of the Church)

1.구원을 전하는 일
만민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업이요 사명이다.(마28:19,20) 그리고 또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구원의 계힉의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교회의 사업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심으로써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 구원을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구원을 실제화해야 한다.

2. 예배의 수단을 제공하는 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예배 제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들이 인생의 어떤 위기에 처해 있을 때와 또한 궁핍 속에 빠졌을 때에 저들은 이 예배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이 곳에서 인간의 예배와 간증과 기도를 들으신다.

3. 종교적 친교를 제공하는 일
인간은 사회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제를 갈망하고 있으며 또한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고 있다. 자연히 인간은 이해 관계가 있고 같은 경험과 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일을 친교의 기반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란 결국 같은 영적 체험을 나누는 사람들이 하나의 형제로 모인 유기체이다. 따뜻한 우정을 어디서든지 찾아 볼 수 있었던 현상이 초대 교회의 현저한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와 같은 로마 제국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개인의 인격은 무시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고독과 절망의 의식을 망각해 버릴수 있는 정다운 교제를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의 힘을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운 친교의 힘이었다. 이와 같은 교회 안에서의 친교는 세속적 사교와는 엄연히
이와 같은 교회 안에서의 친교는 세속적 사교와는 엄연히 구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교회 안에서는 계급이나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남녀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도덕적 표준을 유지하는 일
교회는 도덕적 無知를 추방해버리 "세상의 빛"이요, 또한 도덕적 부패로부터 세상을 보존시키는 "세상의 소금"이다. 교회는 인간에게 올바르게 죽는 방법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방법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인간의 행위와 생활의 영역에 있어서의 모든 규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는 도덕적 경고를 발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도덕적 위험 지구에 횃불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V. 교회의 의식 (The Ordinances of the Church)

초대 기독교는 결코 의식 주의적 종교는 아니었다. 언제는 초대 기독교의 중심은 성령을 통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있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딱딱하고 요지부동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그 시대와 장소에 가장 적합한 예배 의식을 채욕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의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매우 긴요한 의식이다. 이 의식들은 성격상으로 보아 매우 신성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다. 즉 물세례와 성찬식은 매우 긴요한 의식이다. 이 의식들은 성격상으로 보아 매우 신성하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聖禮 라고 칭한다. 또한 이들을 가리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정해주신 하나의 예식이기 때문에 물세례는 기독교에 입교하는 하나의 으식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성찬의 의식으로 영적 생명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례는 한번 받으면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영적 생활이 시작되는 때눈 한번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찬식에는 자주 참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영적 생명은 끊임 없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1. 세 례

(a) 방 법
"세례를 주다"(Baptize)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물속에 잠기는 것을 뜻한다. 세례는 원래 물 속에 잠기는 것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는 점에 대하여 헬라어 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약식 세례를 베푸는 교회에 속한 신학작들도 본래의 세례의 방법은 침례였다는 점을 시인하다. 더욱이 사도시대의 유대인들이 받은 세례가 침례였다는 점을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 저들은 이미 "개종자의 세례"(Proselyte`s Baptism)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이 개종자의 세례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받는 세례를 의미한다. 이 개종자의 세례를 받을 때에 사람들은 물이 목에까지 올라오는데 서서 율법서를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그 율법서의 낭독이 끝나면 그는 물속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아빙 종교의 모든 더러운 죄로부터 깨끗이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표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물을 찍어 베푸는 약식 세례를 어디서 유래하였는가? 기독교가 신약의 단순성을 저버리고 이방 사상의 영향을 받아 물세례에 대하여 비성서적인 중요성을 첨가하게 되었다. 물세례를 중생하게 절대적으로 긴요한 조건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병자와 죽어가고 있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이르렀다. 병자와 죽어가 있는 사람에게 침례는 도저히 베풀 수 없기 때문에 침례 대신에 약식 세례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침례보다는 약식 세례가 베풀기에 편리함으로 약식 세례가 일반화하게 되었다. 또한 침례를 베풀 만큼 충분한 물이 없을 때에는 물을 머리 위에 부어서 세례를 베푸는 것도 허용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제 2세기 사람의 글인데 세례에 관한 것이므로 잘 참고하기 바란다.
" 세례에 관하여 논할 것 같으면 세례는 이렇게 베풀라. 세례를 베풀때에 흐르는 물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괴어 있는 물에서 세례를 베풀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찬물로 세례를 베 풀수 없을 때에는 더운 물로 세례를 베풀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만일 찬물이나 더운 물 속에서 침례를 베풀수 없는 경우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이름도 세례를 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무를 세 번 붓도 세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세례의 본래의 방법은 침례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침례를 통해서만 죽음과 장사지냄과 부활에 대한 세례의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롬6:1-4)

(b) 형 식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라는 말씀과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베드로의 명령과 어떻게 원만한 조화를 이룰수 있을가?(행2:38). 베드로가 명령한 말씀은 세례의 형식에 관계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이 말씀은 세례를 받는 자들은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시인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주후 190년경에 기록된 어떤 글에서 볼 것 같으면 기독 교인의 세례를 말할때는 주 예수의 세례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세례의 형식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는 성부,성자,성신 삼위의 이름이 다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세를 하나님의 보내 준 인도자와 교사로 받아 드렸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전적으로 자신을 예수에게 의탁하고 그는 하늘이 보내주신 구세주로 받아 드리며 그의 인도하심에 따르겠다는 결의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세례의 형식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것을 마태복음 28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행2:38,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으라"이다. 데이어의 레시콘(Thayer`s Lexicon)에 의할 것 같으면 이는 유대인들이 그의 메시야의 권위에 대하여 신뢰심을 갖고 또한 소망을 두었던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삼위 일체의 형식은 하나의 체험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에 의하여 저들이 삼위 일체의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 너희 무리와 함게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말할 수 있다.

(c) 세례를 받는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산 신앙을 갖게 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사도 시대의 교회내에서 세례식을 베풀 때는 다음과 같은 외적 표현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1) 신앙 고백 (행8:37) (2) 기도 (행22 :16) (3) 헌신의 서약 (벧전3:21)
유아들은 회개할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확실한 신앙 고백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물세례를 받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이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을 결코 금하는 것은 아니다. (마19:13,14) 왜 그러냐 하면 공중 집회시에 하나님께 어린이들을 바치는 헌아식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d) 효 험
물세례 그 자체는 구원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함이 아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물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긴요한 요소하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물세례가 완전한 순종을 나타내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는 있다.우리 나라의 대통령을 선출하여 그의 취임식을 갖임으로써 그가 대통령으로 온전히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개종자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택함에 있서 공적으로 이 사실을 나타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온전히 인정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e) 의 미
물세례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을 나타내 주고 있다.

(1) 구원, 물세례는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를 나타내 주는 성스러운 극이다 (만일 물세례를 가리켜 성스러운 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개종자를 물 속에 잠그기 위하여 눕히는 행동은 성취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물 속에 개종자를 잠그는 행동자체는 그리스도의 장사지내신 바 됨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종자가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2) 체험, 개종자가 세례를 받았는 사실은 그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물속에 잠긴다는 것은 "이 사람을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죽는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종자가 물 속에서 올라오는 것은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게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다.
(3) 중생.중생의 체험을 가리켜 씻음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딛3:5) 왜 그러냐 하면 이 중생의 씻음을 통하여 옛 생활의 온갖 더러움과 조기 씻음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물로써 인간의 몸을 씻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성경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을 씻으신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이와 같은 중생의 씻음을 나타내 준다.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22:16) (4) 간증."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물세례를 개종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뜻한다. 즉 군인들이 군복을 입으면 군인인 줄을 사람들이 보아 알듯이 개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옷입을 것 같으면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개종자가 세례의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라의 제복을 입게 되는 것이다.

2. 성찬식

성찬식은 기독교의 독특한 성례전으로서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기 전날 밤에 시작하여 하나의 제도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회생을 기념하는 것이 되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신자의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더욱 증가케하는 은혜의 수단도 되는 것이다. 이 의식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a) 기 념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해마다 미국 국민들은 7월4일을 독립 기념일로 기억하고 기념한다. 곧 미국 국민들이 자유스러운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 교인들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일 때 마다. 저들은 저들을 죄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하게 기념하는 것이다. 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그의 모든 다른 사건 보다 죽음을 더욱 중요시하여 기억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그의 단순한 생활과 교훈에 의하여 된것이 아니라 (물론 그의 생활과 교훈도 신령한 것이다) 그의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된 것이기 때문이다.

(b) 교 훈
주의 성만찬은 복음의 두 가지 기본적 진리를 나타내 주는 거룩한 실물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1) 성육신 (The Incarnation) 우리들이 떡을 떼고 있는 동안에 사도 요한의 다음과 같은 말슴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우리들은 또한 주님께서 선언하시는 말씀도 듣게 된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며을 주는 것이니라" (요6:33). (2) 속죄 (The atonment) 그리스도의 성윳신에 포함되어 있는 축복들은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곧 육체와 생명이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살과 피가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살과 피가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영적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는 많은 심령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생명의 떡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그의 몸을 깨뜨려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굶주린 심령들에게 양식과 소생케 하는 능력을 주며 죄를 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는데 포도주는 그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다.

(c) 영 감
특별히 포도주는 우리들이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본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즉 그리스도와 친밀한 "사귐"을 갖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준다. 우리들이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취할 때에 우리들은 믿음에 의하여 참으로 그의 영을 받아 그의 인격을 우리들 속에서 나타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d) 확 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에서 곧 너희는 위하여 붓는 것이다." 고대의 가장 엄숙한 형태의 계약은 피의 언약이었던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약서에는 희생의 피로써 서명 날인했던 것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피의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조건들을 제시해 놓은 것을 그의 백성들은 받아드렸던 것이다. 모세가 희생의 피를 양푼에 가득히 담아 가지고 그 반은 제단에 뿌렸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지킬 것이라는 뜻이요 나머지 반은 백성에게 부었는데 이는 백성들로 이 언약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출24:3-8).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새로운 언약은 피의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드렸다. (히9:14-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와 자비로 대하신다는 하나님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일이다. (롬3:24 ,6) 다음으로 우리들은 새로운 언약의 피뿌림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벧전1:2).

(e) 책 임
그러면 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바울은 성만찬에 참여할 가치를 지니고 잇는 사람과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에 대하여 고전 11:20-34 속에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그러면 오직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주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무도 우리들 중에 그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인간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의 자비를 받아 드리겠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합당치 않다는 말은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라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주의 성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기에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주님앞에 모든 죄를 자복하는 사람이야 말로 주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으리로움을 갖고 주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영적인 사람만이 자기의 무가치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은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합당치 않은 행동과 태도를 갖지 말도록 우리들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러면 주의 성만찬에 합당치 않게 참여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주의 성만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엄숙하기 않고 경건치 않은 태도로 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행동과 태도가 합당치 못한 행동과 태도라고 할 수 잇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행동과 태도가 극도로 합당치 못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포도주를 과하게 마시어 취하는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VI. 교회의 예배 (The Worship of the Church)

바울이 서신을 볼 것 같으면 예배를 위한 두 가지 종류의 집회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첫째, 집회는 기도와 찬양과 설교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요, 둘째 것은 애찬(Love Feast) 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였다. 전자를 가르켜 공중 예배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신자만이 모여 드리는 가정 예배하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신자만이 모여 드리는 가정 예배라고 할 수 있다.


1. 공중 예배
공중 집회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행하여졌다고 로버드 헤이스팅 니콜스 (Robert. Hastings Nichols) 씨는 말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또한 첨가하였다. "기도를 드렸고 간증을 했으며 교훈함이 있엇다. 시의 노래가 있었으며 제 일세기에 기록되기 시작한 찬송이 불리워졌던 것이다. 구약 성겨을 읽고 해석하는 일이 있었으며 예수의 행적과 말씀의 기록을 읽거나 또는 암송하는 일도 있었다. 사도들이 그들의 서한들을 교회에 보냈는데 이들도 또한 교회에서 읽혀졌던 것이다. 이 서한들은 오늘날 신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매우 단순한 예배가 행하여 질 때 언제든지 예언과 방언과 방언 통역의 형식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이같은 것이 다른 순서를 대치했던 것이다. 어떤 교파에 속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그가 교회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초대교회의 이와같은 예배 양식의 특징을 곧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예배는 불신자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는 능력있는 수단이 되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고던 14:24, 25)

2. 가정예배
우리들은 초대 교회의 교인들이 "떡을 떼는 일" 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행 2:42) 이 떡을 뗀다는 말은 평범한 일상적 식사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렇치 않으면 주의 성만찬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마 두 가지를 다 포함했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되어 성만찬과 일상적 식사가 한데 합쳐 졌을 것이다. 최초에 예수의 제자들의 친교는 너무나도 가까웁고 또 생명적이었기 때문에 항상 삭사를 같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들이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려고 음식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리도록 식기도를 드릴 때마다 저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마지막으로 든 유월절의 식사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올라 이 이상 더 참을 수 없게 되어 저들의 식기도는 자연히 예배로 확대되어 저들이 일상적인 식사를 드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만찬에 참여 하는 것인지 확연히 구별을 지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저들의 종교는 예배와 생활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 즉 저들의 생활이 곧 예배였으며 또 저들의 예배가 곧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찌기 두 가지 행위 즉 떡을 떼는 일과 주의 성만찬은 구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던 것이다. 일정한 날에 기독 교인들은 애찬이라는 식사를 나누며 거룩한 교제를 하기 위하여 모였던 것이다. 이 애찬은 형제의 사랑을 상징하는 즐겁고 성스러운 식사였다.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갖고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것이다. (고전11:21,22)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꾸짖었다. 애찬이 끝난 뒤에 주의 성만찬을 대개 들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를 살펴 볼 것 같으면 어떤 사람들은 애찬을 들 때에 이미 너무 과음하여 취한 나머지 주의 성만찬에는 분별 없이 합당치 못한 태도로 참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후 제 일세기에는 주의 성만찬과 애찬을 분리하여 성만찬과 애찬을 분리하여 성만찬은 주일날 아침에 들었던 것이다.

VII. 교회의 조직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1. 교회의 정치.
주 예수께서 그의 뒤를 따른 추종자들의 사회를 조직하여 인류에게 그의 복음을 전하고 또한 자기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도록 하고저 했던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직을 형성치 않었다. 즉 다스릴 수 있는 정치의 기관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신앙과 실천의 상세한 규율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세례식과 성만찬식을 제정하셨다. 예수께서는 조직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보혜사가 임하시면 사도들을 이 모든 것에 관하여 진리로 인도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신 일은 단순히 조직을 주는데 그치신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좀 더 고상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주어 교회로 하여금 생명이 약동하는 유기체가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몸되시는 교회는 생명이 약동하는 유기체로서 자유로이 그 환경과 필요에 따라 조직의 형체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훈과 사도들의 교훈에 위반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발전할 자유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가 성서의 원리에 배반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도리어 부패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 이후 얼마 동안 신자들은 실제로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들은 저들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기도 시간을 성전에서 지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 예배와 가도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로 보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교회는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하나의 조직체로서 말전을 보게 되었다. 첫째로, 행 6:1-5 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어껀 비상 상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임원의 수를 더하게 되었다. 들째로, 영적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전도의 사명을 완수케 하였다.
초대 교회는 정치에 있어서 민주적이었다. 초대 교회의 환경은 누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아 특별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과 장노들이 사무적인 집회를 사회하였으며 또 임원을 임명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일을 할 때에 회중들과 협력하였던 것이다. (행 6:3-6, 15:22, 고전16:3, 고후 8:19, 빌 2:25)
행 14:23과 닫 1:5 을 볼 것 같으면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가 장노들을 임명하는 일에 있어서 회중들과 의논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믿을 만한 교회사가 들에 의할 것 같으면 보통 장노들을 선출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교인들의 투표에 의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신약을 살펴 볼 것 같으면 교회가 단순히 교전 제도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기계와 같이 되었다는 흔적을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전 교회를 다스리는 중앙 집권적 통치 기관이 없었다. 각 개교회가 자치 제도를 갖고 마음대로 개 교회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자연히 "열두 사도들"은 저들이 그리스도와 맺고 있었던 관계 때문에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또 권위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 15참조) 이방 교회들은 대개 바울의 감독을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위는 순전히 영적 권위이지 결코 조직체가 부여하는 직책상의 권위가 아니 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이 개교회들은 행정상으로는 독립적이었으나 서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롬 15:26, 27, 고후 8:19, 갈 2:10, 롬 15:1, 요3서 8). "초대 교회 시대에 개 교회들은 한 몸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각기 독립적이었고 자치제였다. 그리고 저들은 모든 교회를 하나로 포섭하는 정치적 조직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친밀한 우애를 통하여 상호 서신을 교환하고 서로 협조하는 일에 의하여 상호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2. 교회의 전도
우리들은 신약에서 두 가지 전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1) 일반적이고 예언적 전도. 일반적인 성격은 어느 특정된 한 교회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예언적 성격은 성령의 은사를 갖고 전도를 한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 지방적이고 실천적 전도. 지방적 성격은 개 교회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고 실천적 성격은 교회의 행정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a) 일반적이고 예언적 전도.

1. 사도들
사도들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며 (마 10:5. 갈 1:1)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를 본 사람들이다.(행1:22,고전9:1) 또한 저들은 특별한 영감을 받았으며 (갈1:11,12,살전2:13)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를 갖고 있었으며 (고전 5:3-6,고후10:8,요20:22,23) 초자연적 신임장을 갖고 있었으며 (고후12:12) 저들의 중요한 사업은 새로운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고후10:16). 저들은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고 성령 충만하였으며 교회를 다스리고 전도의 단체를 조직한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열 두 사도와 바울 (바울도 사도의 반렬에 들어갈 수 있다) 은 가장 뛰어난 사도들이다. 그러나 이 사도라는 칭호는 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그 밖에 사람에게도 주어졌던 것이다. "사도"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선교사"이다 (행14:14,롬6:7) 열 두 사도와 바울 이후에 사도들이 존재하였는가? 열 두 사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독특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사도라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들이 쌓놓은 사업은 사도적 업적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2. 예언자들
예언자들은 영감을 받아 예언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초대 교회가 시작될 때로부터 제 2세기 말엽까지 기독교 내에 남자 예언자와 여자 예언자가 끊임없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반하여 (갈2:7,8) 예언자들은 주로 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모든 개 교회 안에 예언자가 있기는 있었으나 오늘날의 부흥사들과 같이 당시의 예언자들은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순회하면서 전도했던 것이다.

3. 교사들
교사들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로 예언자들과 같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4. 실천적이고 실천적 전도
교회가 임명한 개교회의 임원들은 다음과 같은데 그들은 일정한 자격을 구비해야만 했다. (딤전3장)

5. 감독들 (또는 장로들)
장로들에게는 "감독"(Bisthop)이라는 명칭도 부여 되었는데 그 뜻은 감독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개 교회를 총감독하였다. 특별히 목회에 관한 일과 징계에 관한 일에 관련된 것을 감독하였다. 저들의 의무는 주로 영적인 성격을 띄운 것이었다. 때때로 저들을 가리켜 "목사"(Pastors) 또는 "목자"(Spepherds)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엡4:11,참조)
초대 교회 당시에 모든 기독 교인의 사회는 장로들 또는 감독들의 모임에 의하여 다스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 목사들이 하는 것처럼 교회를 다스리는 일을 어떤 한 사람이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제3세기 초에 목사 또는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진 한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되도록 제도상의 변혁이 일어났다.

6. 집사들
장로들을 보좌하는 교회의 임원으로서 남 집사들과 (행6:1-4 딤전3:8-13,빌1:1) 여 집사들이 있었다. (롬 16:빌4:3) 그런데 이들의 일은 주로 집집 마다 다니며 심방하는 일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쓸것을 나누어주는 실천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딤전5:8-11) 집사들은 주의 성만찬을 거행하는 일에 있어서 장로들을 돕는 일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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