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基督論]성경.교회.예배.

한국교회와 성서교육

好學 2011. 12. 12. 21:54

한국교회와 성서교육

 

은 준 관


 

성서교육

 

1.한국교회 성서교육의 현황과 문제

윙크는 성서교육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며 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의 두뇌활동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왼쪽 두뇌는 인간의 오른쪽 몸을 통제하고, 오른쪽 두뇌는 인간의 왼쪽 몸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왼쪽 두뇌가 오른쪽 몸을 통제할 때는 주로 분석적이며 해석적인 기능이 나타난다. 성서의 과학적 근거, 시대적 상황, 저자 문제, 역사적 근거, 연대 문제 등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이며 분석적인 측면에 주로 촛점을 두는 성서연구는 대개 왼쪽 두뇌가 오른쪽 몸을 통제하는 그런 기능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의 오른쪽 두뇌가 왼쪽 몸을 통제할 때는 그 기능이 분석적이라기 보다는 통합적, 영적, 환상적, 경험적 성격을 띠므로 다분히 감정적인 요소를 지닌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문화가 그렇듯이, 사람들의 기능이 이처럼 양분화되면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분석적인 기능 못지 않게 모든 문제를 통합하는 통전적인 기능과 객관적이고 해석적인 이성적 기능 못지않게 감정적이고도 경험적인 기능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이 포괄적으로 종합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두뇌가 전체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과학화와 전문화 내지는 전자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오른쪽 두뇌에서 왼쪽 몸을 통제하는 영적 차원의 사고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반면에 왼쪽 두뇌에서 오른쪽 몸을 통제하는 분석적이고 해석적인 객관적 차원의 사고의 경향으로 편협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윙크는 이러한 경향 속에서 성서교육도 지나치게 편협화되 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미국에서 나온 해석에 비추어 한국 성서교육을 이같이 단편적으로 평가 할 수 는 없지만, 성서를 보는 분석적 통합적 시각의 양면성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연구를 할 때에 영성과 믿음 부분만을 강조해서도 않되고, 성서를 단지 하나의 문헌적 차원에서 객관성과 역사성만을 강조해서도 안된다. 역사성이 중요한 만큼 그 역사를 꿰뚫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영적 신앙적 차원이 중요하며, 이 두 관점이 합해져서 성서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서를 온전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앞으로의 성서연구는 이런 두 차원이 통합되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의 의사소통의 구조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아래의 이야기는 그것을 풍자적으로 나타내준다.

한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여덟 살이고 동생은 다섯 살이었다. 어느날 이 형제가 외국에서 수입해온 만화 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외국 말에 자막만 우리말로 넣어 만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화면도 보고 우리말로 된 자막도 읽을 줄 아는 여덟 살 난 형이 화면만 보는 동생보다 이 만화 영화를 더 잘 이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동안 만화 영화를 보면서 형은 화면과 자막을 번갈아보면서 열심히 줄거리를 따라갔는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동생은 처음부터 자막읽기를 포기하고 줄곧 화면만 보며 줄거리를 따라 갔다. 이 만화영화의 상영이 끝난 후 전문가가 이 두 아이를 놓고 1시간 동안 누가 더 그 만화의 이야기의 흐름이나 핵심을 잘 이해했는가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상식적으로는 형이 더 잘 이해를 했을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형은 만화 영화의 화면과 자막을 동시에 번갈아 보느라고 이 만화 영화의 전체 흐름이나 리듬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와 반대로 처음부터 읽는 것을 포기하고 만화 영화의 영상이 흐르는 것만을 마냥 따라갔던 동생은, 비록 말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영상에 흐르는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은고로 오히려 혀보다 만화영화의 줄거리와 리듬을 더 깊고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불란서의 기독교 교육학자인 빠에르 빠벨이 시청각 인간이라는 그의 책에서 말한 내용이다.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영상 하나만 보고 그 시청각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으면서 전체 이야기를 이해할 정도로 인간의 체질이 전자화되어 있다고 한다. 빠에르 빠벨은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전자 문명아 도래하면서 전자만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전자에 의해서 체질이 조정되는 새로운 인간이 태동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흑판과 책을 가지고 말과 글로써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비디오나 텔레비젼, 컴퓨터, 녹음기 등의 교육 기재가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 진다는 것이다.지금은 말을 가지고 교육하는 시대가 아니라 보고, 느끼고, 말하는 시청각을 통하여 교육하는 시대다. 인간의 체질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실제로 전달해주는 매체인 미디어(media)의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토론토 대학의 미래 학자인 마샬 맥글란(Marshall Mc lean)은 그의 책 미디어의 인식(Understanding Media)에서 메시지와 미디어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바로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복음은 영원한 진리이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은 끊임없이 새로운 매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사나 주일 학교 교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8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달하는 매체가 변함없이 똑같다. 주일학교에 가보면, 요즘 만화에 심취 되어 온갖 색깔의 환상 속에 빠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얼굴 색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오직 입에 거품만 물고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교사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주면 요즘 아이들은 야곱과 요셉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조른다. 이미 그런 이야기는 옛날에 다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혼자서 진리를 다 지닌 것처럼 떠드나 결국은 40분을 헛되이 소비만 하는 것이 지금의 주일학교의 현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서교육에 있어서 '새 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중요하지만, 이 새 술을 어디에 담느냐 하는 미디어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성서교육에 있어서도 영성과 전문성의 통합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목사들은 대부분 믿음이 좋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목사일수록 그가 경험하고 있는 믿음의 깊이를 목사답게 설교의 전문성을 잘 살려서 선포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목사의 성서관과 신앙관은 평신도를 교육하는 올바른 교육의 틀에서 나와야 하며 선교나 예배에 대한 전문적 지식으로 부터 표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훌륭한 신앙을 지녔다고 하는 힝은 목사들이 설교를 적당히 준비하고는 강단에 올라가 그저 외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과거의 목회 방법에 여전히 젖어 있다. 믿음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믿음을 원색적으로 전파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담는 설교의 형태를 전문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 주일날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의 과정을 무시한 채 자신의 믿음이 좋다는 사실만 내세워 아무렇게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문적인 미디어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만을 중시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싸람의 믿음이 없는 경우도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과 전문성은 동격이 될 수 없으며,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이 전문성으로 표출되는 통합성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대적 요청과 문제성으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최근 TV선교가 유행하고 있다.팟 로버트슨(Pat Robertson),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가 스캔들 때문에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명성을 잃어버린 진 베이커(Zin Baker), 라버 슐러,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그리고 근래에 순복음 계통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스워 가드같은 사람들이 TV선교로 유명하다. 이들의 신앙도 처음에는 순수했지만,돈이 모아지고 차츰차츰 조직이 커지게 되자 그 조직을 유지하려다가 그만 마지막에 가서는 신앙을 완전히 기업화하려는 형태로 전락해버렸다. 심지어 미국의 그 엄청난 모금으로 기독교 왕국을 유지하려 했던 진 베이커는 마지막에 가서는 그가 기르는 개집에까지 에어콘을 설치할 정도로 타락했다고 한다. 이것은 TV선교가 타락한 한 단면에 불과하다. 강단에 서기만 하면 눈물을 질질 흘렸던 스워 가드는 모텔에서 어느 창녀와 생활하다가 그것이 카메라에 의해 발각되어 2년 동안 설교 정지를 당하기까지 했다. 오랄 로버츠는 천막에서 치유한다고 하여 TV에서 생중계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엄청난 돈을 번 다음 그것으로 오랄 로버츠 대학이라는 거대한 대학과 의과대학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그 대학 운영이 적자를 면치 못하자 그는 미국교회를 향하여 "8월달까지 몇 백만불이 모금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갈 것이다"라고 어처구니 없는 협박을 하다가 인기를 잃고 말았다. 이와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례들이 생긴 것은 미국의 TV선교가 TV라는 매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는 전문성만 강조한 나머지 영성이 완전히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의 신자들은 더이상 헌금을 내지 않는다. 갑자기 TV선교의 모금이 줄어들자, 선명회의 헌금도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어 결국 한국 선명회에까지 타격이 왔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영성과 전문성의 한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미국과는 달리, 한국교회는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목회나 교육의 전문성은 지나치게 외면하고 있다. 오로지 믿음만 가지고 새벽부터 밤중까지 뛰다보니 한국 교회의 목사들은 많은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예장통합측인 서울의 평양노회에 속한 어느 한 목사가 목회학 박사 논문 준비로 '목사의 과중한 일과 가정의 파괴와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느라 평양노회의 60명의 목사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 결과 60여명의 목사들 중 40명의 목사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큰 수술을 받았을 뿐 아니라 현재 병에 결려있는 사람도 많았다는 것이다.새벽부터 밤중까지 교인들의 백일잔치, 결혼잔치, 장식 등에 따라다니고,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하는 한국교회의 목사들이니 병이 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아래 전문성을 전혀 배제한 채 100년전 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법의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미국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는 영성을 강조하면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미국교회는 전문성은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영성이 결여되어 있다.앞으로 한국교회 목사들은 교인들 하나하나가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영적으로 성장시킨 다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목회방법을 잘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있어서 성서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자.

게오르그 베버(Georg Weber)는 유니온 신학대학의 교수이면서 이스트 할렘이라고 불리우는 흑인촌에서 27년 동안 살았던 백인 목사였다. 그는 회중 선교 (Congretion Mission) 란 그의 저서에서 자신이 흑인촌에 들어가 흑인들과 직접 접촉하고 살면서 흑인들의 영성을 하나의 공동체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설교나 사회 봉사가 아니라 성서 연구 였다고 말한다. 그가 성서연구를 27년 동안 하고난 후에 얻은 결론은 "올바른 성서연구는 제 2의 회심이 될수 있다"는 것이었다. 1차적인 회심은 부흥회나 기도를 통해 갑자기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죄를 사멸시키고 그리스도의 옷을 덧입게 하는 것인 반면, 2차적인 회심은 대개 성서연구를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이 게오르그 베버의 입장이었다. 그만큼 올바르게 이루어지는 성서연구는 교회뿐 아니라 우리 신앙에 있어서 제 2의 회심을 가능케 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성서교육의 역사적 유산에 대해 알아보려면 그 뿌리를 우선 성서적 유산에서 찾아야 한다.

 

성서적 유산으로는 첫째로 신명기 6:4-9의 쉐마(shema)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찌니라(신6:4-9).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로서 시작되는 이 말씀의 '들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히브리어를 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명기 6:4-9까지를 '쉐마'라고 부르며, 3500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의 엄청난 경험을 오늘날 까지 생생하게 간직해 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가 43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하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이스라엘의 애타는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드디어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부터 해방시켰던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다. 여기에서 모세가 영웅적으로 크게 활약을 했지만, 그렇다고 모세가 잘났기 때문에 출애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서연구를 할 때에는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증거하시고자하는 궁극적이고도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선입견이나 교리적인 것, 개인의 경험으로 부터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하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 예로 박태선은 성경에 나오는 감람나무 하나만 가지고 자신이 바로 동양의 감람나무라고 하면서 전도관 운동을 펼쳤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14만 4천 명이 바로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지도자 숫자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성경은 교주들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그릇되게 해석되고 이용될 수 있다. 여러 해 후에 애굽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2:23-25)
출애굽기 2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결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의역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등장하는 모든 영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세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으로써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연구에 있어서 어느 개인의 영웅화는 극히 위험한 것이므로 지양해야 한다. 출애굽기 3장 이하를 보면 모세는 사실 겁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모세의 손이 문둥병 환자의 손으로 변하는 두가지 이적을 보여주시면서까지 모세를 불러 세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주여 나는 몬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0-13) 하면서 죽어도 못가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억지로 끌어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이스라엘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다.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 요단강 동쪽의 모압 평야에서 3,4개월 동안 정착하던 때 12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를 계승하여 모세가 눈 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비록 모세 자신은 들어가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게 될 그 미래의 신천지를 향해 외치고 설교한 것이 바로 신명기였다. 신명기 중 제일 중요한 부분이 '쉐마'라고 불리우는 신명기 6:4-9이다. '쉐마'에서는 믿음을 '나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게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 이웃이나 후손에게 가르쳐야 하는 교육적인 책임을 수반한다. 이것을 묶어서 '쉐마'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전통을 보면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갔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 '지저스'라고 불리우는 색실로 뜬 목걸이를 '바이미즈마'를 걸친 13세 이상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예배시간에 매도록 하였고 율법의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해 '케피럴'이라고 부르는 가죽박스를 만들어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고 손과 이마에 붙이도록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몸에 간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양껍데기의 털 부분이 아닌 가죽 부분을 하얗게 표백한 다음,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었는데 이것을 '미쉬나'(mishna)라고 불렀다. 문간에 들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거기에다 입을 맞추고 "여호와께서 나의 애굽 탈출을 영원히 지키시리

라"고 기도하면서 집을 드나들었다. 장막절이 되면 엿새 동안 자기 조상들이 광

야에서 살았던 것을 경험하기 위해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장막에서 금식해야

했다. 금식이 끝나면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선조들이 체험한 구원의 이야기를

말로써 가르쳤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쉐마의 전통은 여전히 계승되어오고 있다. 13살 때에

행하는 성인식이 끝나면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그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3500년 전 우리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구원의 이야기를 해주마"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아들들은 4가지 형태로 각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첫째는 그 이야기

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멍청한 아이, 둘째는 반발하는 아이, 세째는 지능지수가

모자라서 아무리 설명해도 못알아 듣는 아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선조들의 구원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버님, 3500년 전 우리 조상들에게 일

어났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때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이미 들은 내용이지만 눈을 감고 다시 한번 기억을 가다듬어 암송

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이미 들은 내용이자만 눈을 감고 다시 한번 기

억을 가다듬어 암송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암송은 보통 암송이 아니라 '역

사적인 암송'이라고 전한다. 그것은 단순한 암송을 뛰어넘어 하나의 여사적인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즉 3500년 전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 시간적으로는 비

록 3500년 전 이라 해도 - 그때의 엄청난 구원의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하게 되고, 그 민족이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맥을 이어왔기 때문

에 오늘날 자기 자신이 이렇게 하나의 유태인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이었다. 3500년 전의 사건에 비추어 오늘날 자신의 운명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적 기억이다. 오늘날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의 한 어린이가 된 것은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들어 구원의 약속을 했던 이

신앙적 유산이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적 자존심을 표

방하는 것이 바로 역사적 기억인 것이다. 구원의 이야기를 단순히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억에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운명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성서연구 중 하나가 성서를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몇 백 번 통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서의 멧시지가 오늘 나의

삶에 반영되고 하나님께서 응용하시고 은총을 베푸셔서 나로 하여금 기독교인답

게 살도록 해주시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것을 성령의 은사로 받아들였을 때에

비로소 성서연구는 그 의미를 찾게 된다. 이것이 유태인의 전통 중의 하나인 '역

사적 기억'이 되는 것이다.

바벨론 유배 시절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 속에서 갈 곳이 없어 헤메다 고향

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모세오경을 상기시키면서 회당을 만들었다. 즉, 성전도

성막도 아닌 회당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는 '하산'이라고 불리는 교사가 나와서

어른과 아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훔밀'이라고 불리우는 예배를 드

렸다. 그러므로 회당의 전통은 제사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예배였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는데, 그 선포의 방법은

다분히 교육적이었다. 교육적인 매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다.

그는 '씨 뿌리는 비유', '달란트의 비유', '들의 백합화', '공중에 나는 새',

'포도 나무와 가지의 비유', '돈에 관한 말씀' 등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실례로써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파하셨다. 그래서 일부의 성

급한 사람들은 예수야말로 2천년 전에 오셨던 가장 유명한 시청각 교육자라고 말

한다. 그만큼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교육적 매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주일학교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즉 교사가 사과를 준비해와서 우선 그것을 아이들에게 먹인 후,

남은 씨를 가지고 그것을 직접 만져 보면서 학교에서 씨에 대해 자연시간에 배운

것을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씨를 땅에 뿌리고 물을 주면 그것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점점 자라 맛있는 사과 열매가 많이 달리는 큰 나무가 된다는 이

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난 후에 교사는 "예수께서 바로 이 씨를 '하나님 나라'

라고 말씀하셨다"라고 이야기 해주면 아이들은 자기가 직접 만져보는 씨와 성경

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가 금방 연결되어 교육적인 효과를 크게 얻게 된다. 그

런데 교사가 게을러 사과를 사오기 싫어서 입으로만 씨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아

이들은 별다른 깨달음 없이 선생님의 손가락만 바라보다가 말게 된다. 이처럼 구

체적인 예를 통한 가르침은 커다란 교육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앙을 지나치게 추상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렇듯 비유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공연한 트집을 잡으려고 할 때 마다 논쟁법을 사용하셨다. 간음하

다가 잡힌 여인을 데려왔을 때, 그리고 동전을 갖고 와서 이것이 가이사의 것인

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인가 하고 시비를 걸었왔을 때 등등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

반 논쟁에 대해 수준높은 지혜의 논조로써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또한 예수

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실 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식의 질문식 대화법을 사용

하셧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교육적으로 전파

하는데 성공한 성서교육자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교회를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초대교회의 태동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교파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교회의 태동을 "베드로, 너는 바위라.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

에 두었으며, 베드로를 시초로 하여 사도권 계승이란 이름 아래 오늘날 까지 교

황이 여전히 사도권을 계승하여 로마카톨릭 교회의 제도를 이루고 있다. 순복음

계통의 경험주의적 교회에서는 대개 교회의 태동을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말한

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는 제도도 아니고 마가 다락방도 아니다. 마가

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의 임재는 교회의 태동 이후에 있었던 사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삼일만에 다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

에서 부터 시작된다.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시작된 것이 초대교회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

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

하신 것이라(요 2:19-21)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께서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배당을 헐라고 말씀하

시는 대목이 나온다. 예수의 말씀은 예배당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교

회는 필요없다는 뜻이었다. 헐어버린 성전을 다시 3일만에 짓겠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자신의 부활을 의미했다. 그의 부활하신 몸이 곧 교회라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 운동 가운데 일차적인 문제는 그릇된 교회론에서 부

터 시작된다. 교리가 곧 교회요 교단이 곧 교리라는 생각은 커다란 착오다. 장로

교도 감리교도 카톨릭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는 것이다. 우리 교단, 우리 교리만이 옳고 남의 교리는 모두

타락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그릇된 자세다. 신구약 성서 전체에는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님이 단번에 우주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구원 약속 외에는 다른 약

속이 없다. 이 사실을 이어받고 증언하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다.

교회가 구원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초대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 모여서 한 일이 있다. 이것을 부활의

후속 사건이라고 부른다.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도가 나와서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부활을 선포하는 설교의 내용(케리그마,kerygma)을 듣고, 초대교

인들은 스스로의 죄를 회개했다. 죄를 회개한 다음에는, 오늘날처럼 헌금을 바치

며 찬송하고 축도한 후에 그냥 흩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한 모든 회중이 하

나님의 말씀을 배웠다. 이것을 '디다케'(didache)라고 불렀다. 이때 가르치는 교

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디다스칼로스'(didaskalos, 선생)로서 예배시간

에 하나님의 말씀을 1시간 남짓 가르쳤다고 전한다. 우리는 2000년동안 이 전통

을 완전히 망각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많이 변질되어 있다. 그런데 변

질된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이것이 진리인줄 착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의 어

려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그 초대교회로 돌아가 거기에서 표현했던 신앙의 양식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관심을 주느냐 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진리라 믿으면서, 그러한 시각에서 초대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오히려 초대교회

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를 5시간씩 드렸다. 1시간씩 예배를 보는 오늘날의 입장에

서 보면 그것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에는 12시 정각에 예배를 끝내지

않으면 "저 목사는 시간관념이 없다"고들 불평한다. 게다가 전자시계까지 발명되

어 12시가 되면 여기저기서 빨리 끝내라고 삑삑거린다.한마디로 현대 기독교인들

은 '12시 노이로제 환자들'이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예배가

있은 후에, '케리그마'(말씀)를 통해 죄를 회개하는 말씀의 선포가 있었고 그 다

음에는 '디다케'로 연결되었다. 오늘날에는 말씀 안에서 죄를 회개하는 일회적

회심의 경험만이 줄곧 계속되는데, 그러한 신앙은 감정주의로 전락하기 쉽다.회

개한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즉 성서에 뿌리를 둔 신

앙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이것이 '디다케' 즉 올바른 성서교육이다. 그래서 제임

스 스마트나 C.H.가드나 위스트 오프같은 학자들은 "현대교회는 교인수는 많지만

감정에 치우친 결과로 무기력해졌다. 그 원인은 설교를 듣고 죄를 회개하는 것으

로만 끝납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숙해야 할 부분이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되

어왔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어느 부흥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갔는데 한 구석에 '귀'들만 잔뜩 들어와 있더란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사도들에게 가서 "저것들이 누구의 귀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귀들이라고 대답하더란다. 한국 교인들은

그저 한평생 동안 귀로 듣는 것만 즐기다보니 결국 천당에 귀들만 올라왔다는 것

이었다. 또 그가 다른 방으로 가봤더니 이번에는 혓바닥만 잔뜩 와 있더란다. 바

로 그것은 한국 목사들의 혓바닥이더라는 것이다. 목사들은 강단에 서서 밤낮 떠

들고, 교인들은 그저 앉아 듣기만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목사들이 몸으로 때우

다보니 나중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처럼 열심이 많으면서도 목회 구조나 교회 구조가 단일화된 곳은 일찍

이 없었다. 부목사가 없는 경우엔 일주일 내내 설교를 해야한다. 새벽기도 7번,

주일 낮예배는 적어도 2번, 밤예배 1번, 수요예배 1번, 구역예배 1번, 거기에다

철야예배까지 합하면 모두 13번이다. 20년 동안 목사가 한 교회에서 일주일에 13

번씩 예배를 드리니 이를 계산해 보면 실로 엄청난 수고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보다도 위대하신 분들이 한국교회의 목사들

이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주일만 되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설교를 목사에게 요

구한다. 세상에 이런 역설이 어디에 있는가? 따라서 한마디로 한국교회 목사들의

설교는 항상 거의 같은 내용의 반복일 뿐이다. 그 책임은 교인들에게 있다. 목회

학에서는 20분의 설교를 준비하는데 적어도 20시간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로 한국교회 목사들이 20시간 동안 공부하도록 교인들이 허락하고 있는가?

설교와 교육은 하나님 말씀의 양면성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교육의 다섯가지 단

계가 있었다. 첫째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은혜의 시간을 갖는 카리스마

가 있었고, 둘째로는 말씀 안에서 죄를 회개하는 '케리그마'가 있었다. 세째로는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교육 즉 '디다케'가 있었고 네째로는 교육을 받는 사람들

이 많은 음식을 장만하고는 함께 나누어 먹는 '코이노니아'가 있었다. 종과 주인

이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로 떡을 나누었다. 다섯째로는 세례식과 성찬식

을 통하여 신앙적 열정을 갖게된 사람들이 다시 세상에 나가 봉사하는 '디아코니

아'가 있었다. 즉 예배의 핵심 부분인 초대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예배

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성서교육을 받았으며, 또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설교를 통해 회개하고 함께 떡을 떼며 세상을 향해 봉사하고 전도하는 온전한 신

앙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하기 시작했으며, 주후 5세

기 때부터는 교회교육의 양상이 세분화되었다. 세례를 중심으로 교육 미사와 성

례전 미사로 구분되었다. 세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미사 페데키노름'이라는

교육 미사를, 세례를 받은 사람은 '미사 페데리움'이라는 성례전 미사를 드리도

록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교육은 세례받기 이전에만 실시하고 세례받은 이후

에는 실시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교회 안에서의 교육은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삼

았으며, 어른들은 미사만을 드렸다. 마틴 루터도 어른은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은

소교리문답믈 공부하도록 규정하였다. 특히 20년전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육제

도'를 받아들이지 않자, 라버 루이스라는 사람은 교회를 떠나 가정집 2층을 빌어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어린이의 교육만을 중시하고 어른의 교

육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물론 근래에 와서는 성서교육의 중요성을 어

느 정도 깨달아 가는 것 같다.

 

루터의 종교개혁 후 루터교회가 출현하였다. 그런데 그 교회가 또 타락하기 시

작했다. 초기에 신앙의 열정이 뜨거울 때는 좋았는데, 그것이 제도화된 교회로

기반을 잡으면서 타락하게 된 것이다. 필립 스페너(Philip Spener)라는 루터교

목사는 주일예배 이후 일주일 내내 흩어져 사는 교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않음

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매주 수요일마다 원하는 자들만을 상대로 자신의 목

사관에서 성서를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설교만 듣던 것과는 다른 차

원에서 신앙의 열기를 되찾은 사람들이 자주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루터교단은 스페너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추방시켰다. 그러나

스페너 목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성서연구모임을 더욱 활성화시켜 '칼레기아

피아스타스' 즉 '경건주의자들의 집단'을 형성했다. 이것이 400 - 500년 전 구라

파에서 일어났던 소위 독일 경건주의의 성서연구운동이다. 후에 그들은 박해를

받기 시작하자, 소속 교단을 탈퇴한 진젠돌프(Zinzendorf)라는 한 부자와 함께

헤른후트(Hernhut)라는 땅을 빌려서 모라비안(Moravian church)를 창설하였다.

본래 모라비안교는 루터계 종파였지만, 신앙생활은 목사와 제도가 없이도 무방하

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기성교회는 신앙으로 모여서 떡을 떼고 예배드리며, 성

서연구도 하고 헌금한 돈으로 예배당을 크게 건축하는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

러나 이 모라비안교는 애당초 "전도함으로 세계선교를 이룩한다"는 목적에서 시

작한 것이었다. 이 모라비안 교도들의 신앙적 열정은 대단했다.

 

영국의 감리교 목사인 웨슬레가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 조지아로 선교

하러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태풍을 만나게 되었다. 옥스포드 출신의 교만

했던 웨슬레는 이 무서운 태풍으로 죽게 될까봐 벌벌 떨고 있는데, 그 모라비안

교도들은 언제 죽음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 폭풍우 속에서도 오히려 평안한 마

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웨슬레는 크게 감

명을 받았다. 옥스포드 출신인 그가 미국의 인디안들에게 선교하러 간다는 자만

에 빠져 있다가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그 뜨거운 열정을 보고

는 몹시 놀랐던 것이다. 그후 웨슬레는 2년간 조지아에서 선교하다가 결국 싫증

을 내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크게 회심하여 뜨거워진 웨

슬레는 부둣가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깡패, 선원, 술주정뱅이들이 하나 둘씩

회개하여 모여들었다. 그 당시 고귀함을 자랑하는 귀족교회가 되어버린 영국교회

에서는 이 부둣가의 술주정뱅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을 전도했던

웨슬레는 그들을 잘 관리하고 양육해야 할 책임을 느끼고 감리교 속회운동을 시

작햇다. 그래서 그는 삼람들을 12명씩 모아 헌금도 바치고 성서연구도 했다.목사

가 부족하게 되자, 몇 명의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그들을 성서연구의 책임자로 선

정하였다.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감리교다.

이렇듯 감리교회는 예배당을 먼저 짓고 속회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회개

한 사람들을 속회운동에로 집결시켜 시작한 교회였다. 그러므로 독일의 경건주의

나 모라비안이나 감리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초기단계는 성서교육에서부터

시작한 교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교파들은 밑에서부터 올라와서 결국 하

나의 교단이 되었는데, 교단이 커지면 죽게 마련이다. 그래서 요즘 미국의 감리

교회에는 속회가 전혀 없다. 말하자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감리교는 오늘날 까지도 속회제도를 존속시켜 실시하고 있다. 한국교

회는 사경회와 함께 성장한 교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하루 아침에

급성장한 것은 아니다. 초기단계부터 부흥회를 가짐으로 성장케 된 것이다.그것

도 밤엔 소위 축제의 부흥회를 개최했지만, 낮에는 반드시 성경공부를 강행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이후엔 성경공부 위주의 교회교육이 실시되어 왔으며, 그후

주일학교 교육이 강조되었고, 지난 15년 전부터는 적극적인 성서연구시대로 돌입

하였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 부터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성서연구를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 예를 든다면 대학교 선교회인 힝.힝.힝 운동, 베델성서연

구, 한스웨버방법, 크로스웨이 등의 성서연구가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힝.힝.힝

운동과 베델성서연구가 한국교회 성서연구의 붐을 일으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힝.힝.힝에서는 10단계의 성서연구교재를 사용한다. 교재로는 두종류가 있는

데, 그중 하나는 학생용 교재다. 주로 신앙생활로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

으며, 입문에서는 예수의 유일성, 1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출발, 2권에서는 그리

스도인의 풍성한 생활, 3권은 그리스도인과 성령에 대해 다루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10권까지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다. 진행을 보면 처음엔 함께 모여서 기도하

고, 요절이 제시되며, 동기부여를 하고 성서연구와 토의를 거친 후에 질문하도록

되어 있다. 그후 영한대조성경을 가지고 성서연구를 하고 요약한 후에 기도시간

을 갖는데, 이 기도는 소위 '순조직'이라고 해서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이다. 보수

적인 이 힝.힝.힝 운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는 성서 연구다. 이 힝.힝.힝 운

동의 장점은 순조직으로 소그룹에서 이루어지는 성서연구라는 데 있다. 이 운동

은 집단적으로 수백명씩 모여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그룹이 모여서 서로

'코이노니아'(성도의 친교)를 갖는 소그룹 성서연구다. 또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

의 생활과 규범을 배우는 데 있어서 초보적이고 체계적이며 소박성을 지니고 있

다. 그런데 영적 차원을 강조하는 이 운동의 결정적인 결점은 시간성과 역사성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가르치지만 그 믿음이 구체화되어야 할 시간성과 역사성

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교리나 신조직이 될 수도 있는 이 힝.

힝.힝 교육방법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고 있는 베델성서연구는 구약과 신약의 구조를

아는 데에는 대단히 큰 공헌을 했다. 그 교재는 구약 20과와 신약 20과, 그리고

해설을 돕는 40장의 성화가 담긴 좋은 교재이다. 이 성서연구방법은 구속사적인

접근을 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은 지나치게 목사 중심인데다가 모든 것을

이 '구속사'라는 끈에 묶어서 성서를 꿰뚫다보니 세계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외

면하여 선교적인 자각에는 소홀하게 되어 있다. 즉 구속사와 세계역사간의 원만

한 연결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베델성서연구의 취약점이다.

한스웨버방법은 실험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폭력'에 관한 성서연구를 한다고

가정하자. 처음엔 폭력에 대한 서론적인 강의부터 시작한다. 이 강의가 끝나면

그곳의 참가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성서에서 폭력을 지지하는 구

절만 찾아내고, 다른 한 그룹은 폭력을 반대하는 비폭력에 대한 성서구절만을 찾

아낸다. 그런 후 인도자가 예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설명한다. 사두개파, 바리

새파, 엣세네파, 열심당(젤롯당), 이 네 파에 대해 설명한 다음, 예수는 과연 어

느 편의 입장에 섰는가에 대해 통일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한스웨버방

법은 매우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성서연구와 토의 그리고 신학적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좋은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준비를 많이 해야 하며 능력을 갖

추어야만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이 방법은 대단히 문학적이고 명상적이며 시청각

적이다. 성경구절 하나를 주제로 삼아 과감하게 파고들면서 연구하는 것이다. 따

라서 이 방법은 본문의 메시지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밀점하게

연결시키는 교육적 방법을 시도했다는데 그 장점이 있다. 반면에 이 한스웨버방

법의 단점은 고도로 훈련된 지도자가 없으면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

이다. 또 이 방법으로는 구약과 신약을 전체적으로 궤뚫고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

의 역사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의 제목을 가지고 연구하기 때문에

실험적으로는 좋지만 연계성을 찾아가는 데에는 부적합한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성서적 유산에서 역사적 유산까지 대략 살펴보았다. 지금 한국교

회는 성서연구의 붐으로 말미암아 제이의 회심으로 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중요한 시기에 있다. 그런데 이렇듯 중대한 역할을 하는 한국교회의 성서연구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로 부터 시작되어 계시록으로 끝나는 성서

본문 그 자체가 본문(text)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서교육 교재를

본문으로 삼고 그 본문화된 교재에다가 성서를 마구 조립하여 인용한 결과, 본문

이 교재가 되고 성서는 참고서로 전락되는 결정적인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

다.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게 오류를 범하고 잇는 교파가 여호와의 증인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 교인들을 철저하게 성서교재로 세뇌시킨다. 그들의 성서교재

를 보면 모두 성서의 여기저기에서 인용한 것이긴 하나, 삼위일체를 부정하기 위

해 성서를 인용하고 있다. 필자가 동덕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을 때, 고등

학교에서 30-40 년 동안 교편을 잡으셨던 원로 장로님 한 분이 계셨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의 딸아이가 어쩌다 여호와의 증인에 말려들었다. 여고 2학년인 그

학생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 부터 공부는 안하고 학교에 갔다오면 이불을 뒤집

어쓰고 밤새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교리 만을 암기하고는 다음날 수업시간에 졸기

만 했다는 것이다. 이에 견딜 수 없었던 부모가 하도 속상해서 이 장로님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나는 일단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교리를 알아야 하

겠기에 그 학생이 학교에 간 사이에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갖고 오도록 하여

일주일 동안 공부하였다. 그리고나서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 성서내용을 모두 인

용하여 준비해놓고는 그 학생과 면담을 가졌다. 나는 일주일 동안 여호와의 증인

의 교리를 공부하면서 기가 막히는 내용을 발견하였다. 이를테면 삼위일체를 부

정하기 위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 성서구절들을 온통

인용하였으며, 예수의 신성(신성)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삭제하였다. 따라서 그

교재만을 보는 그 여학생은 그것이 성서내용의 전부인 줄로 착각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일주일 후 그 여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목사관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나에게 "목사님, 회개하고 여호와의 증인

으로 돌아오십시오"라는 말을 하였다. 처음부터 목사의 기를 꺾으려는 속셈인 듯

싶었다. "당신이 목사지만 얼마나 알겠느냐?"라는 말투였다. 그래서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성서지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은 2000년의 교회

역사를 청산유수로 이야기하였다. 논쟁이 시작되면서 나는 여학생에게 그녀가 모

르고 있었던 생소한 성서구절만을 찾아 읽어주면서, 그 부분에 대한 그녀의 생각

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자기가 막히는 부분에 가서는 반대하거나 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학생은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가볍게 넘겨치고 자기가

자신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런식으로 3시간 이상 논쟁했는데, 마지막

에 가서는 그녀가 당해낼 도리가 없게 되자 벌떡 일어서더니 "목사님, 아무리 지

식이 많아도 여호와의 증인으로 돌아오시지 않으면 힘듭니다"하고는 그냥 가버리

는 것이었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어중간한 교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걸려들기만 하면 꼼

짝없이 당하기 십상이다. 자기들의 교리에다 못을 박고 거기에 들어맞는 말만을

인용하여 교인들에게 암기할 것을 강요하는 거싱 여호와의 증인이다. 성경 66권

을 다 외울 수도 없으니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물론 여호와의

증인인 경우는 가장 극악한 형태다.

한국 성서교육에 공헌한 바가 큰 베델성서연구나 힝.힝.힝 운동, 한스웨버방

법, 크로스웨이방법 등이 비판받아야 할 점은 바로 성서 그 자체가 본문이 되기

보다 교재 그 자체가 본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서연구는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도록 하여, 믿음으로써 그 말씀을 읽는 동안 그 영혼 속

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양면적 효과를 유도

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연구를 교리화된 것으로 끌고가는 한, 아무리 호응이 잘

되는 성서연구라 해도 그것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본문을 읽는 것이 원

초적인 성서연구가 되어져야 하며, 그것을 지도하고 그것의 의미를 알리는 교재

가 만들어져야 한다. 힝.힝.힝 운동의 순조직 소그룹운동이나, 베델성서연구의

구속사적인 성서접근방법은 앞으로도 잘 살려서 개발시켜야 할 장점들이다. 그러

나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새로운 성서연구의 청사진이 한국교회에 제시되어야 한

다. 이제 한국교회가 새롭게 태동하기 위해선 올바른 성서연구를 위한 신학적 근

거의 제시와 새로운 방법론의 제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 한국 성서연구의 방향

구약이 경전화되어 오늘날 39권으로 결정된 것은 주후 100년, 얌니아(Jammia)

회의 때였고, 신약이 오늘날의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Carthage)

회의 때였다. 구약이 경전화될 때에 기존에 있던 성서 모두 경전화된 것은 아니

었다. 포함되지 아니한 것도 많았다. 그것을 개신교회의 공동번욕에서는 외경이

란 말로 표현했다. 그중 예를 하나들면 도마복음이 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경

전의 유산들이 있었지만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66권 만을 정경으로 정한 것

은, 이것만으로도 우리 신앙의 표준으로 삼기에 넉넉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

서가 기록된 것은 하루 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약 1000년의 기간을 두고 기록된

것이다. 이 성서는 두루마기에서부터 파피루스, 돌, 그릇의 깨어진 부분에 이르

기 까지 다양하게 기록되어 유산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이것이 비로소 경전화되

어 인쇄된 것은 불과 몇 백 년 전이다.

 

성서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몇가지 접근방법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리

우는 학파에서는 성서를 극히 도덕주의적인 방법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슐라

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미첼(Mitchell)이라는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시로 보지 아니하고, 인간의 도덕율, 즉 우리가 생

활해 가는 데 꼭 필요한 법칙이 가장 이상적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해석한다. 이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그리스도보다는 모든 인간이 살았던 삶들 가운데 가

장 이상적인 삶을 살았던 역사적 예수를 가장 강조한다. 그래서 예수를 소위 '이

상적 인간' 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모두도 이상적인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한

다. 또한 그 분이 맨 먼저 표준으로 살아가셨기에 우리도 그 분을 따르는 것이라

고 해석한다.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해석을 하게 된 때는 대략 19세기 부터인데,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은 성서를 완전히 인간의 삶의 표본으로만 전락시켰다.

성서해석의 또 다른 하나는 유비적 해석 또는 비유적인 해석방법이다. 여호와

의 증인에서는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을 자기들 지도자 숫자와 맞추고 있고,

초대교부 제롬이라는 성자도 요한복음 21장 11절에 나오는 '물고기'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선택된 일만 명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성서 본문 자체의 메시지와

는 전혀 다르게 왜곡하여 비유적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이렇듯 비유적 성서해

석은 흥미로우면서도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이 방법은 성서를 단지 참고서로 모

셔놓고 이것을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전락하기 쉽다.

흔히 출현하는 사이비 종교는 성서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데서 비롯되는 일이 많

다. 신흥 종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문상기 교수의 말에 의하면, 지금 계룡산에는

한때 성결교회 목사였던 양도천 목사가 살고 있는데, 그는 6.25때 이북에 모든

가족을 남겨두고 단신으로 월남했다고 한다. 그는 서해안 어느 섬에서 혼자 피난

생활을 했는데, 이북에 부인이 엄연히 살고 있으니 남한에서 새 장가를 들 수 도

없고 해서 고심하다가 자기의 성기를 스스로 잘랐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처음에

그는 부흥회를 정상적으로 인도했지만, 계룡산에 들어간 후 부터는 성서를 신비

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 양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고는, 10년 전 갑자기 왕관 하나를 만들어 쓰고 왕으로 자처하

며 20명의 신도를 모으고 16세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한다. 성기를 자른 그

가 어떻게 부부생활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계룡산 한 구석에서 계시록

에 나오는 환상적인 비유들을 자신에게 연결시켜 어린양이라 자처하며 신도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죽었지만 과천에 어린 양이 또 하나 있었다.

모든 신흥종교는 성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나 그 성서가 갖고 있는 역사

성은 무시한 채 문자 몇개에 연연하여 그것을 그릇되게 비유하고, 그 비유를 비

약해서 "내가 감람나무요, 어린 양이요"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비유적

해석이 낳은 커다란 폐단이다. 이 비유적 해석이 흥미는 있지만, 거기엔 커다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또 성서해석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맥락의 역사적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성서가 몇 년에 씌어졌고 성서의 저자는 누구이며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어떠

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방법이든 간에 성서교육의 미래

를 예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서 66권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서연구의 자세

는 "성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다"라는 입장이어야 한다.

성서는 인간에 의해 기록된 책이다. 천 년 동안 영감을 받아 여러 사람에 의해

서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 의해 기록된 성서에는 오류

도 있다. 그런데 왜 그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인가? 그것은 그 말씀을 읽

는 동안에 읽는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그러한 중복되는 과정

속에서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는 동안에

는 거기에 쓰여진 문학적 표현을 보는 것도 아니고, 또 거기에서 어떤 인간적인

규칙을 찾는 것도 아니며, 유비를 찾아서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내가

성서 본문을 읽는 동안은 내 삶과 내 신앙이 거기에 참여되어 열려진 영혼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 말씀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는 성서 봉독은 엄밀한 의미에서 글을 읽

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영혼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어야 하며 또 그것을 구체화

한 내용이 바로 성서이다.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그 말씀을 듣는 길은 성

서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즉 이스라엘과 예수 그

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그 기록을 성서를

통해 읽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새롭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

래서 성서의 기록만을 보면 역사를 보는 것이지만, 그 기록을 읽는 동안 성서에

나타난 역사를 주관하셨던 하나님께 나의 영혼이 열려 있다면, 하나님은 그 성

서 기록을 통해 내 영혼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되고, 성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쓰여진 성서의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는 있어도, 그 말

씀이 끊임없이 오늘날까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한다. 그 중 한 형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즉 에

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그의 부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궁극적인 뜻을

단번에 전 우주에 드러 내셨다. 그러므로 계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된

참된 말씀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글이 바로 성서다. 그 말씀은 영감

을 받은 인간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가 강단에 서서 자

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만을 선포해

야 하는 것이다.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의 역사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

한 기억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의 핵심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적과 십자가와 부활이다. 성서에서 그외에는 아무것도 궁극적으로 하나

님의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다. 강단에서 외치는 목사의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적 근거를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그 목사의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말을 유창하게 잘해서가 아니라

-설사 그것이 인간의 제한된 언어일지라도- 성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성령께서 그 인간의 말을 통해 그 말을 전해 듣는 영혼의 마음 속에 직접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서, 그리고 선포된 말씀인 설교,

이 세가지는 하나로 연결되어진 것으로서 그 중 하나라도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된다.성서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한 그것은 사이비 그리스도가 되

는 것이며, 인간의 말로써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 해도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구세

주로 고백하는 내용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목사의 자기 선전이 될 뿐이다. 계시

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이 세가지가 고루 균형을 갖추어야 비로소

살아 계신 말씀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성서연구의 태도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객관자의

입장으로 밖에서 성서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신앙이나 삶을 거

기에 투영하지 않고 단지 성서를 멋진 문학작품으로만 보는 태도이다. 보스톤 대

학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신학자가 있는데, 학문적으로 그 사람을 앞설 자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학문적으로 기가 막히게 고고학적 증명을 잘하지만,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

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밖에서만 성서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성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주역으로 활동하시

는 그 역사의 무대에 함께 참여하는 태도다. 이것은 세상 밖에서 성서를 바라보

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세계에 직접 들어가 거기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3000년 전의 사건이다. 그러나 성서를 읽

으면서 내 자신이 아브라함의 역사적 사건 안에 들어가 내가 아브라함이 되고 하

나님과 대화해보라! 그리고 그분께서 내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과

연 나도 쉽사리 떠날 수 있겠는 가를 생각해 보라! 또 그분께서 사랑하는 내 아

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바치라고 했을 떼, 나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겠

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성서 이야기 자체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되어

역사의 무대로 들어가 거기에 직접 동참하면서 경험하는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바람직한 성서연구

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성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영적으로 시공을 초월할 때 비로소 성서 이야기를 나의 이야

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역사적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필자가 성서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 반 가량

모 교회의 담임 목사를 하면서 얻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42세된 풋내기 목사가

모 감리교 교회의 목사로 부임되던 첫날, 낮예배 350명에서 400명 가량의 신도가

모였다. 새 목사가 부임하는 날 낮예배에 그 정도 모였으니 저녁예배에는 100명

가량은 더 모일 것으로 예측하고 열심히 예배준비를 했는데, 저녁예배시간이 다

되도록 예배당 맨앞 두 줄 밖엔 자리가 차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신도들이 오질 않아 할 수 없이 강단에 올라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한 겨

울에 건물이 낡아 추운 예배당에서 식은 땀만 뻘뻘흘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

은 채 강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곧 바로 목사관으로 와서는 당장 교회를 사임하

고 신학대학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아내에게 비쳤다. "새로 부임한 목사가 왔으면

인사 치레로라도 저녁예배에 나와야 사리에 맞는 일이지, 이런 교회가 세상에 어

디있겠느냐"고 하면서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 그때 내 아내는 나의 분냄이 가라

앉기를 기다렸다가 슬슬 약을 올리는 것이었다. "여보, 정말 사표 낼 거예요?"

그래서 이미 한마디 했는데 안그런다고 할 수도 없어 "그래, 사표낼거요"라고 했

더니 "당신은 오기도 없어요? 어쨌든 처음으로 42세의 젊은 목사가 모 교회의 목

사로 들어간다 안들어간다 요란을 떨면서 들어왔는데, 한주일도 못되어 사표내고

그만두면 당신 얼굴이나 이 교회 얼굴은 대체 뭐가 되요? 한번 해보지도 않고 비

겁하게 도피부터 할 생각이예요?"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말을 들으니 오기가 되

살아났다. 그래서 한달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주일의 밤예배

나 수요일의 밤예배는 여전히 20명 정도가 올 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 심방을 하기에 앞서 가나다 순으로 속회-감리교회에는 '속회'제도가

있다-심방을 가졌다.

말발 센 권사님들이 계신 속회에 가서 예배 인도를 한 후, "권사님, 왜 밤예배

는 못나오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죄의식이 있었는지, 집안 일이 너무

바쁘고 밤길이 너무 위험하다면서 여러 가지 핑계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해

가 갑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수요예배를 없앱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권사는

자기 자신은 수요예배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오자마자

수요예배를 없앤다고 하니 펄쩍 뛸듯이 야단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요예배를 없

애는 대신 권사님하고 저하고 3년간 계약을 맺읍시다"라고 말했다. "저하고 3년

동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서를 한번 통독합시다. 일주일에 10장씩 읽고 수

요일에 만나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성서공부를 해보는 겁니다." 예배는 드리

지 말고 성서연구를 해보자는 이 제의에 그 권사의 귀가 솔깃한 것 같았다. 그래

서 여론조사를 해봤더니 좋은 반응이 나타났다.그래서 나는 임시 직원회에 이 안

건을 제출하여 동의를 얻었다. 주보에 수요 성서연구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간지

를 넣어 신청서를 받아 마감날 숫자를 모아 보았더니 60명쯤 되었다. 그래도 밤

예배에 나오는 20명보다는 3배나 많은 수이기에 의욕이 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감신대 교수 시절의 연구실에 가서 그동안 쓰여진 성서의 형성사와 거기에 관한

원서를 번역하여 성서연구 자료를 만들어 밤새도록 강의준비를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수요 성서연구 첫날에 신청자 수의 두배인 120명이 모였다.

밤예배 때는 20명이 모이던 곳에 120명이 모이니까 열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목사가 야단났다. 기독교 교육학을 연구한 나는 성서를 읽기는 읽었어도

남을 가르쳐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성서연구를 하겠다고 모인 신도들 중에는 장

로, 권사, 교사 등 중진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수요 성서연구 준비를 위해 책

방을 샅샅이 뒤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관한 서적들을 몽땅 구입하여 화요일

밤부터 수요일 오전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8 - 10시간 가량 성서 해석에 정열을

쏟았다. 매주 수요일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통독하는 분량을 계산해보니 평

균 10장이나 되었다. 이렇게 3년간 성서연구를 했는데, 처음 성서연구 모임에 참

가했던 사람 중 20명만 로테이션이 되고 120명 모두가 끝까지 함께 성서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서연구가 끝난 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변화를 받은 사

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실 본인 자신이 은혜를 받아야 남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교인은 "이렇게 평신도들을 성서학자로 만들어 놓으면 목사

님은 앞으로 설교를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라고 묻기도 했다. 정작 본인 자

신도 겁이 났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망각의 은혜를 주셨

던 것이다. 가르친 성서 대목에서 설교를 해봤는데, 시간이 경과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공부 내용을 잊어버렸다가 그 제목을 듣고 나서 갑자기 윤곽이 떠올

랐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늘 저 목사가 어떻게 접근해갈 것인가?" 하고 오히

려 더 관심을 갖고 설교 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 교회에 내무부 차관을 지냈던 장로님 한 분이 계셨는데, 내가 속회 인도자로 부족한 점이 많아 그분께 속회인도를 간접적으로 부탁한 적이 있었다. 성서공부의 내용을 필기하고 있을 때, 그분만은 유독 맨 뒷자리에 앉아 두 눈을 꼭감고 있었다. 나는 그분이 자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은 머리가 기막히게 좋은 분이었다. 3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교회를 떠난 후 3년쯤 되던 해 경주로 강의하러 가던 중, 기찻간에서 그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그동안 성서통독을 40번이나 마쳤다고 말했다. 그분이 성서공부를 1년쯤 하고나서는 자청해서 두 속회를 인도하겠다고 나섰다. 속회하는 것을 내가 따라가 보니 성서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1년 사이에 그분은 장족의 발전과 변화를 했던 것이다. 그분이 처음엔 질문을 가지고 내게 비평을 가하기 위해 성서공부를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성서본문을 읽어가면서 성령에 의해 붙잡힌 바 되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간이 성서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성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성서를 읽는 동안 그 성서안에 숨어 있는 신비적이고도 살아 역사하는 음성을 듣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깨워주시고 붙잡아주시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는 영적인 해답을 얻게 되며, 또 성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로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이런 교회는 가능성이 있다. 나는 3년간의 이 성서공부를 통하여 거기에 참여했던 대다수 성도들간의 긴밀한 연결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의 목회기억이 생생히 살아있다. 이를 계기로 나는 성서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책도 모으고 강의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성서연구가 그 어떤 때보다도 절실한

시기다. 건전한 교회적 성서연구가 잘 진행되어간다면 한국교회는 제 2의 단계,

즉 회심의 단계를 반드시 경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성서연구에 있어서 사이비적

인 것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사이비는 개인이 성서연구를 마음대로 하는 것

도 포함되지만, 자칫 잘못하면 오류를 범하기 쉬운 내용을 지나친 교리 중심적

방향에서 편리한 방법으로 성서본문들을 조립한 것이다. 성서본문으로 되돌아

가는 성서연구야말로 한국교회를 제 2의 회심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임을 나는 강

조하고 싶다. 이 길만이 올바른 성서연구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러한 대전제 아래 한국교회 성서연구의 밝은 미래를 위한 전제들을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 성서교육에는 성서본문을 읽고 그 분문이 담고있는 시대적 상황과의 과정 속에서 그것을 꿰뚫고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신학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성서연구든지간에 가장 원초적인 차원은 역시 성서본문 그 자체가 본문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목사도 평신도들도 스스로 성서본문을 읽어야 한다. 그후에 설교를 하고 설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쉬운 것 같지만 무척 어렵다. 성서를 읽을 때 편견을 두어서는 안되겠지만 묶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가 하나의 묶음인 창조 기사이고, 창세기 2장 4절에서 2장 마지막까지가 또 하나의 묶음인 창조 기사의 두번째 이야기라는 식의 구분이 필요하다. 묶음을 가지고 성서본을 읽되 그 본문은 본문 되게끔 만든 시대적 상황을 아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이는 역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창세기에 나타난 죄의 문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음으로써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죄에 대한 증언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로만 들을 것아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죄의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성이다. 오늘날 이 사회 속에 만연하고 있는 죄에 대한 이야기의 근원적인 원형은 바로 창세기에서 표출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었다는 이야기는 인류 공동의 죄악된 운명을 대변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단순히 옛날부터 전해오는 신화로 생각해선 안된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연결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그 유산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짧은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파기한 민족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또 그속에는 악이 선을 파괴하고 마치 악이 성행하는 것같은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도 침묵하시는 것같지만 결국 죄를 가인에게 물으시는 이야기도 담겨져 있다. 또한 거기에는 죄를 물으실 뿐 아니라, 셋이란 이름의 다른 아들을 들어 아벨이 이루지 못한 언약의 계보를 이어나가는 구원의 계보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창세기 4장의 이야기

는 설화적이야기로서 그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해도, 그것은 그 사건의 역사성을 통해 오늘 우리 인류가 역시 경험하고 있는 모든 현실적 이야기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지나친 반미주의를 내세우는데, 물론 그 입장을 이

해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열등의식밖에는 안된다. 애국주의를 말할수록 세

계 속에서 호흡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나갈 수 있다. 성서 본문의

시대적 배경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팔레스틴의 것이라 해서 그것을 배척해서는

안된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질을 보아야 한다. 그 본문이 담았던 시대적 상황과

의 연결 속에서 그것을 꿰뚫으면서 하나님께서 성서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드

러내시고자 하는 구원의 숨은 뜻을 찾아야 한다. 성서의 매사건이나 말씀 가운데

에는 하나님께서 겉으로 드러내시지 않은 숨겨진 구원의 의지와 은총이 깔려 있

다. 이것을 주제화 하고 신학화하는 작업이 곧 신학화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주제를 만들어놓고 그 신학에 하나님의 뜻을 꿰어맞추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성서의 사건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앤더슨은 이것을

'상'(상)이라고 표현했다. 즉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뜻이다. 사실은 이 그림 뒤에

숨겨진 의도를 제대로 포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성서공부는 단지 암송일 뿐

이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성서암송대회를 했는데, 한 학생이 요한복음 1장 1절에

서 마지막까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 1등을 했다. 그 교회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시상식을 하는데,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이 그 아

이가 하도 기특해서 "우리 교회에서 천재 성서학자가 나왔다"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상을 주기 전에 "다윗이 돌을 던져 죽였던 그 유명한 블레셋 대장

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

가 그만 세례 요한이라고 말을 했다. 이 간단한 질문에 천재 성서학자가 엉뚱한

대답을 하자, 거거 모였던 온 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 요한복음을 1장부터 마지

막까지 유창하게 외우던 이 어린 성서학자가 왜 이렇게 되었겠는가? 그것은 성서

전체의 흐름은 모르면서 단지 의미없이 암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서연구는 우선 성서본문 중심의 연구가 되어야 하며, 그 성서가 담고 있는 시

대적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꿰뚫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시

고자 하는 숨은 메시지를 찾아내어 이 세 가지를 통합해 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으론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서 설사 성서연구가 통합된다 해도 성서연 구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즉 성서를 공부하는 목사나 평신도들에게 그 성서연구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보다 교회다운 교회로 바뀌어가는 변화가 없는 성서연구는 단지 지적 장난일 뿐이다. 목사들이 설교나 예배중심에서부터 성서연구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려면, 교회의 목회나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매주 11번, 12번 예배드리던 것을 이제는 오늘날 주일에 해당되는 주님의 날에만 모두 모여 5시간 예배를 드렸고, 나머지는 식사 때 기도회를 간단하게 가

졌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성례전 모두를 잃어버렸지만, 앞으로는 주일날 하나님

의 모든 백성들이 20시간씩 준비하여 그날만은 2시간이든 3시간이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고 설교 말씀을 들으며 공동예배를 드려야 하겠다. 예배 횟수가 많다고

해서 은혜를 많이 받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정말 정성을 다해 의

미있는 예배를 드릴수 있다면, 그 값진 경험은 일주일, 한 달, 아니 일 년을 가

도 잊혀지지 않고 마음 속에 남아서 영적인 회심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적당히

준비해서 많이 펼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공동으로 기도하고 준비하여 공동체적인

축제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함께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하

다.

성례전 즉 떡과 포도주를 끌어들여 잊혀진 전통을 되살린다는 전제 아래, 예배

가 반드시 주일 중심이라면 한국교회는 과감하게 수요일을 성서연구의 날로 정하

여 예배체제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요즘 주보를 보면 수요성서연구라는 이름을

붙인 교회를 가끔 볼 수 있다. 그 내용면에 '로마서 5장 1절에서 4절까지' 라는

식으로 몇 구절만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매주 성경을 4절씩만 본다면 창세기부

터 계시록까지 한번 통독하려면 아마 몇 백 년 걸릴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주해

설교이지 수요 성서연구는 아니다. 진정한 수요성서연구 모임이 되려면 그날 기

도회를 과감하게 10분이나 15분으로 줄이고, 탁자를 놓고 앉아서 미리 교인들에

게 배부된 지침서에 따라 10장씩 성서를 직접 읽어오게 하여 대화법이든 시청각

교육법이든간에 목사가 연구하여 준비해온 방식대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래서 성

서를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성서본문 자체의 흐름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흐트러짐 없이 정확히 맥을 짚어가면서 계시록까지 계속해야 한다. 즉 연

계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듯 수요일을 전면적인 교육체제를 바꾸는 데는 교회

의 혁신과 목회체제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이러한 예배의 횟수를 줄이자는 건의를 500명의 목사들이 모인자리에서 재안했

더니 놀랍게도 모두들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반

응들을 보였겠는가! 목사들도 사실은 그러고 싶었지만, 예배 횟수를 줄이면 은혜

없는 목사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평신도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새벽기도회도 목사의 설교없이 그저 함께 모여 자유롭게 기

도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하겠다. 철야기도도 좋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이를 활용하여 철야는 안하고 성서연구를 그룹별로 하는 교회가 있다. 교사는 교

사끼리, 장로는 장로끼리, 이런 식의 그룹별 공부 방법도 바람직하다. 밤을 꼬박

새워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렇지 못하면 받지 못하다는 한국교회에서의 율

법주의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열심있는 신자가 새벽부터 일주일 내내 교회에만

열심히 따라다니면 가정일은 언제 돌보고, 직장일은 언제 돌볼 수 있겠는가? 밤

을 꼬박 새우고 직장에 가서는 잠이나 쿨쿨 자면 결국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만

다. 그렇다고 신비주의운동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설교와

예배 중심을 극대화시켜 두 시간 이상 예배시간을 늘리고 초대교회의 성서연구를

되살려 수요성서연구를 활성화하려면, 많은 체제의 변화와 목사의 충분한 준비와

자료의 수집이 뒤따라야 한다. 초대교회에서의 코이노니아가 떡을 떼는 것이었다

면, 오늘날의 코이노니아는 소그룹운동이라고 말할수 있다. 구역회나 감리교회의

속회운동은 원래 좋은 것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로선 거리가 멀

다.

 

인천의 어느 감리교회에서 속회의수가 천속을 돌파했다고 해서 모두을 깜작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천속이란 숫자에만 목표을 세우고 불과 300속밖에 안되는 것을 3배로 늘려서 천속 돌파가 가능케 된 것이었다. 한국교회에서 이제 숫자 놀음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300속이면 어떻고 1000속이면 또 어떤가? 그 속회 하나하나가 올바른 직무 수행을 잘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20명이 모여 직능 수행을 잘하고 있는데 괜히 숫자만 늘리려고 2-3명씩 찢어놓아 모두을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 되었다. 또한 속회나 구역회가 이런 코이노니아를 잘 나누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속회나 구역회에서 거둔 헌금을 몽땅 본교회 재정에 집어넣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리교회는 교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속회운동이 먼저 일어난 후 이 속회운동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이것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들'이라고 한다.

요즘 소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가령 1,000명이 모였을 경우, 그 집단

을 12-20명씩 하나의 창조적인 소그룹으로 나누어 목요일이나 금요일날 매주 한

번씩 모이도록 해서 간단한 식사와 함께 성서연구 시간을 가지먼 큰 실효를 거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헌금한 돈을 본교회에 바치지 말고 그것을 철저하게 관리

하여 그 작은 교회들이 크고 작은 선교사업을 위해서 한 주간 동안 '흩어진 교

회'(디아스포라)의 모습으로 선교활동을 벌이다면 1,000명이 모이는 교회가 집단

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실로 엄청난 선교사업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대교회주의를 반대하려는것이 아니다. 대교회가 소집단들을 만들어 놓고 오히려

그 작은 교회들을 모두 잡아먹는 것이 문제이다. 앞으로 대교회가 살아남으려면,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안에 창조적인 소공동체들을 많이 만들어 그

것들이 신앙적인 열기를 갖고 선교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대교회가 작은 교회들을 다 잡아먹는다든지, 작은 교회들이 기성교

회가 싫어서 뛰쳐나가든지 하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이

다.

한국교회의 미래에 있어서 소공동체 운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미 로

마가톨릭 교회에서는 '기초공동체'라고 하여 남아메리카와 필리핀에서 커다란 성

과를 거두었다. 처음에는 교황청에서도 이 운동을 꺼려했지만, 지역별로 공동체

운동이 시작되자 로마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평

신도 사육'이란 말이 나왔고 '사도직'이란 말이 나와서 사도가 아닌 평신도들을

과감하게 양성하여 지역마다 기초공동체를 만들었다. 그 공동체는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선교사업도 전개한다.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가 크게 발

전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 이러한 공동체가 있다. 개신교에서는 100년 동안 교

회가 성장했다하여 여의도에 모여 자랑만 늘어놓다가 지금은 조금 침체 상태에

있다. 우리에게는 무언가 모르게 자만병 내지는 숫자 환상병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소공동체 운동은 성서연구에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제 디아

코니아(diakonia;섬김, 구제, 봉사)의 교회는 세계를 향해 과감하게 탈바꿈해야

할 때다. 금번 감리교회가 웨슬레 회심 25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는데, 필자가 그

중 하나의 주제 강의를 맡게 되어 그 준비로써 한국교회의 예산을 조사할 기회를

가졌다. 그 결과 대다수의 한국교회가 1년 예산의 86퍼센트를 교회 살림의 치닥

거리에 다 써버리고, 선교비, 구제비, 교육비, 모두 합치면 14퍼센트밖에 안된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가 아닌 자들의 말을 빌리면 "개신교

교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은혜받은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세상을 위해서 사랑을 나

누는 봉사나 선교에는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다."고 한다. 개신교인들은 입으로

만 먹고 산다며 비난한다. 연세대의 모교수 3-4명이 2, 3년 사이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필자가 그중 한 사람을 만나 심각하게 얘기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개신교에서는 헌금을 강조하고 그 돈을 거두어 무슨 목적으로 쓰는지 모르겠다.

해명없이 돈타령만 하니까 그 소리가 하도 지겨워서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가톨

릭교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돈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것이 바로 가톨릭 교회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 개신교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예배중심이며 말씀중심인 것은

좋지만, 그것만이 강조되고 그 뒤에 따라와야 할 가르침, 즉 소공동체로서의 코

이노니아를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말씀을 실천하고 아픈

자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서연구도 숫자는 많

지만 실제의 모습은 나약한 현실의 개신교를 개혁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성서연구 자체를 위해서만 모인다면 그것은 단지 지적충동의 한 수단이 될 뿐이

다. 그러므로 성서연구의 대전제는 첫째, 본문과 그 본문의 상황을 꿰뚫고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3차원적인 성서적 통합이 일

어나야 한다. 둘째, 성서연구를 교회가 그러한 차원에서 시도한다면 그것은 말씀

의 선포, 가르침, 코이노니아와 선교로 이어지는 교회의 변화까지를 가능케하는

힘을 가진 성서연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대전제 아래 앞으로의 성서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아는 차원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성서학자 앤더슨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미국 대학생들을 위해 [성서속에 열려지는 드라마]라는 책을 성서교재로 내놓았다. 그 책은 5판에 걸쳐 출판될 만큼 다른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성서교재보다 훨씬 인기가 좋았다. 성서연구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공헌한 이 책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를 1막 1장, 1막 2장, 2막 1장, 2막장, 3막 1장, 3막 2장, 종막으로 구분하였으며, 창세기로부터 장차 임할 성

서의 완성까지 하나님을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시는 분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무대에 내려와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고 당신을 거

부했던 인간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어 구원하시는, 세계역사속에서의 구원의 드라

마를 바로 성서가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성서 66권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

사가 담겨 있다. 서막에는 창조에 대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엿새만에 우주 만

물을 창조하셨다. 천문학에서는 우주가 창조된지 30억 년이 지났으며, 앞으로도

30억 년이 더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한편 고고학에서는 창조된지 10억 년이 지났

고 앞으로 10억 년이 더 지나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서에 나타난 "엿새만에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이 창조활

동을 하시는 하루는 인간의 시간 개념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 하루는 천 년

일수도 있고 1역 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성서에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

루 같다"는 시편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하루를 시적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영원

의 하루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의 이야기가 언급된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 쓰여진 시기는 주전

2500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이 우주가 2,500년 전에 생성되었단 말인가? 결코 그

렇지 않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2,500년전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

니라,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몇 천 년, 몇 백 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창조에 관한 신앙고백을 비로서 그때에 이르러서애 글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므

로 시적으로 표현한 신앙고백인 창세기를 과학적으로 뜯어보겠다는 것은 어불성

설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은 설화적인 이야기다. 역사성을 지니면서도

과학적으로 해명되지 않는 설화적인 이야기는 설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

연구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관한 해석의 촛점은 이를 과

학적 근거를 제시하여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의 창조주는 인간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선'자체이

시므로 그분이 창조하신 우주 또한 아름다왔던 것이다. 이렇듯 아름답던 지구가

오늘날에는 생태계의 오염문제로 매우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오염문제의 해

결은 환경을 어떻게 보존하느냐에 달려있지 않다. 영적인 환경문제를 단지 물리

적 환경문제로만 해결하려면 나라간이나 개인간에 이해관계가 얽혀서 어려운 점

이 많이 뒤따른다. 용인의 어느 산꼭대기에서 돼지를 기업적으로 사육하는 사람

들이 있는데, 돼지를 사육하면서 나오는 오물을 한강으로 직접 내보내야 그 기업

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관이 조사를 나올 때는 살짝 다

른 곳으로 내보내는 척하고, 밤만 되면 그 오물을 한강으로 다시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선 남의 건강이야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이기주의적 태도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환경문제는 모름지기 영적 차원에

서만이 진정한 해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는 아

름다웠는데, 왜 오늘날은 이렇게 오염되었을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던 엿

새째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의 형

상대로 만든 인간에게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2,000년 동안 이것을 잘못 해석해왔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라는 것을 착취해도

좋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성서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로서 안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하신 것인데, 인간

은 그 자연을 짓밟고 깨뜨려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렸다. 왜 이렇게까지 자

연환경이 파손되었는가를 이야기하려면 죄의 근본문제에까지 소급된다. 에덴동산

에서 행복하게 살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선악과

를 따먹은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것을 따먹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교만이 죄였다.


 

20세기 라인홀드 니이버는 "자신의 한계성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인간의 교만이 죄다"라고 말함으로써, 죄의 본질을 밝히는 데에 지대한 신학적 공헌을 하였다. 권력의 타락과 경제적 타락도 모두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신앙이 남보다 돈독하다고 생각하는 교만도 포함된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데서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러다보니 긴밀하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u으며, 두려워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벌거벗은 몸을 가리게 되었고, 급기야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자연을 훼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원사적인 이야기를 논하면서 우리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이- 기독교인들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편견에 치우쳤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돌아오지 않는 한 오염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연과 우주를 당신의 뜻대로 관리하도록 인간들에게 위촉하셨음을 깨닫는 영적 회복만이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보존해야하는 책임 때문에, 비록 자신의 이익에는 손해가 되더라도, 자연이나 환경의 훼손을 막아야 하겠다는 영적 책임성으로부터 창조신학이 태동하였다.

창세기 1장에서 4장까지에는 인간의 시작, 근원, 역할, 가능성, 배신에 관한

기사가 압축되어 나온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

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것만 받으신 것으로 되어 있다. 성서를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그의 마음은 바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아벨을 제사를 드릴 때 그의 마음까지도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제사뿐

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까지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기꺼이 받으섰던 것이다. 가인은 이것을 질투했다. 이것이 죄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면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데에 대한 질투로 가득찬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였던 것이다. 결국 의로

운 사람의 피가 악에 의해서 흘려지게 될 것이다. 역사는 악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래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듯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아무도 그 장면

을 본 것 같지 않다. 오늘날의 역사도 그런 것 같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이 득세하는 것 같다. 그 순간에 하나님은 외면하시는 것 같다. 못듣고 못보신

척하신다. 전혀 침묵하시는 듯하다. 오늘날 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

보다 더 고통받는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는 의롭게 살려고 애쓰

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느냐?"고 불평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

가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셨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

버리면 성서에 숨겨진 뜻을 모른다. 그 사건 뒤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 하

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항상 침묵만을 지키고 계시지는 않았다. 아벨이 가인에 의

해 억울하게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아벨과 함께 아파하셨고, 그 장면을

목격하셨으며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셨다. 침묵하시는 듯하던 하나님은 가인을 불

러 죄의 책임을 묻고 그를 추방시켰다. 따라서 구원의 계보는 아벨에서 끊긴 듯

했고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구원을 저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을 보

면 하나님은 다시 아담에게 새 아들 셋을 은총으로 주시어 그를 통해 노아의 계

보를, 아브라함의 계보를, 즉 인류 구원의 계보를 만들어 주셨다. 셋이라는 계보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타락의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고 셋이라는 새

아들을 주셨다. 인간이 포기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다시 구원의 역사를 펼치

신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그 무한한 은총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은혜란 무엇인가? 옛날 시골교회 저녁설교 때,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졸던 할

머니가 설교가 끝난 후 많은 은혜를 받았노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

할머니가 받은 은혜는 바로 실컷 잠자는 은혜다. 버어피네의 말을 빌리면 한국교

회의 은혜는 값싼 은혜라고 한다. 기분이 좋으면 은혜받았다고들 생각하는 것이

다. 비싼 은혜는 한국교회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 교인들 사

고방식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의 아들 딸이 대학에 합격하면 은혜받았다고

생각하고, 대학에 떨어지면 울상이 되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자녀를 둔 어느 교인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는 25년 동안 당신을 착실하게 믿어온 교회 집사입니다. 그동안 십일

조도 잘하고 교회 출석도 잘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고 3 딸이 있는데, 25년동안 당신을 믿어온 정성을 보아서

라도 이번엔 꼭 대학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얘기다. 얼

마나 급했으면 그랬을까? 그는 이어서 "하나님, 만약 대학에 떨어지면 재미 없습

니다" 라는 기도도 드렸다. 25년 동안 하나님 믿어줬는데 그분이 내 딸을 대학에

입학시켜주지 않으면 그를 원망하겠다는 투의 기도였다. 요즘 한국 교인들이 여

기까지 와있다. 목사인 필자 역시 자식 넷을 두었는데 이 아이들이 고 3이 될 때

마다 고민스러웠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목사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

해주실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내일 이 아이가 대학 입시를 보게 되는데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것

에 당신께서 지혜와 용기를 더 주셔서 합격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이 아

이가 실패하게 되더라도 이 아이로 하여금 그 실패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까지

주십시오!" 나는 네 번씩이나 이렇게 기도했다. 그랬더니 두 아이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아버지가 떨어져도 좋다고 했으니까 안심하고 불합격한 것이었다. 그

런데도 내가 후회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이 대학 입시에 실패한 후에 그리 큰 좌

절 없이 잘 견디어 나가는 것을 보았기때문이다. 만약 이 아이가 꼭 합격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가 떨어졌으면 그 아이의 믿음을 내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었겠

는가?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이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마지막 포기의 상황까지 가도록 내버려두신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의 눈으로 요구하고 식별하여 구원의 모든 것

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는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하나님만

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미 포기한 인간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주어 도약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은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고 하는 말을 즐겨 쓴다. 기분이 좋을 때는 은혜로 살고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이 왜 나를 저주하느냐고 하면서 금방 원망한다. 이것은 은혜로 사는 태도

가 아니다.

 

어느 20대 젊은 대학생이 안타깝게도 악성 암으로 6개월밖에 못산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아들이 6개월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을 들은 그 부모는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파 정신을 못차리다가 "이왕 죽는 것, 죽을 때까지 맛있는 음식이나 실컷 먹다 죽어라"고 하면서 온갖 좋다는 음식을 모두 사서는 병실에 들여보냈다. 그러다가 아들의 병세가 좀 미심쩍어 몇 달 후에 정밀검사를 다시 해봤더니, 다행스럽게도 오진이었음이 밝혀졌다. 악성 암이라고 진단이 나왔었는데 그것이 음성 반응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동안 병이 낫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청년이 한 달 후 퇴원하여 세브란스 병원을 나오며 보따리를 냅다 내동댕이치면서 하는 말이 "서울 하늘이 왜 이렇게 푸르냐!"라고 하더란다. 또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더니 "서울 공기가 왜 이렇게 맑으냐!"고 하더란다. 시커멓게 오염된 서울의 하늘과 공기가 갑자기 맑아질리는 없다. 하지만 환경은 똑같은 조건일지라도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다시 바라보니 새롭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은혜란 덤으로 사는 가능성을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은혜가 되는 것이지, 흥정해서 자기 기분이 좋으면 은혜가 되고 나쁘면 저주가 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시기에 고난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실 성서는 그 이야기의 반복이다. 노아, 모세, 예레미야 등의 인물들도 마지막

순간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롭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요즘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 민주화 과정은 하나님께서 직

접 만들어주시는 것이다. 목사든 정치인이든간에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

루기 위해 불러 세우신 종에 불과하다. 그런 차원에서 성서를 보면 우리의 남북

분열의 이야기도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 연계성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 이야기는 3,500년전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 이야기

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며, 세계 모든 민족의 해방의 이야

기인 것이다. 출애굽기 2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

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의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

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2:23-25)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부르

짖음을 먼저 들으셨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결심하신 후에 모세를 구원의

도구로 선택하셨던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게서는 진정으로 억압받는 모든 민족

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시는 것 같아도- 다 들으시며, 구원을 결정하시고 나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선택하신다. 따라서 앞으로 성서연구에 임할 때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성서에 나오는 모세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바울 등을 영웅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우주 전체의 구원의 드라마(drama)에 있어서 쓰임을

받은 하나의 종의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면 앤더슨의 성서 드라마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약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대략 살펴보자.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40년간의 광야생활

을 한다. 모세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

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드디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 그곳에서 12지파 시

대가 펼쳐지다가 얼마 후 12지파가 분열하면서 사사시대가 등장한다. 사사시대

엔 겨우 민주적 명맥을 유지하다가 사무엘이 출현하여 민족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간청한다. 처음엔 하나

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지 않다가 결국에는 그들의 간청에 못이겨 조건을 내세워

허락하셨다. 그것은 이방인들의 왕들처럼 왕에게 모든 절대적 권한을 위임한 것

이 아니라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왕'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초대 왕으로 추대된 사울은 벌

써 사무엘의 제사장권을 침해함으로써, 스스로가 자기의 권리를 하나님의 권리로

바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다. 다윗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지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생명을 건졌

다.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7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13년 동안 성곽을

건축한 후에 후궁 800명을 거느렸으며 나중에는 이방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혼합

하여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솔로몬을 떠나게 되었고,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의 정치는 하나님께서 보낸 여로보암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어느새 무서운

학정으로 변했으며 폭군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 역시 여로보

암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북쪽의 10지파가 한 집단이 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르호보암은 할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와 남왕

국(유다)을 세움으로써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20년 동안 이스라

엘 왕국에서 살인의 혼란기가 계속되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미가, 호세아,

아모스,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예언자들을 일으켜 백성들의 잘못을 책망하셨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이를 받아들이자 않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들어 북왕조

를 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722년전의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스라엘 백

성은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이스라엘 사람의 절반 이상이 외국으로 끌려가 종이

되었고, 남아 있는 이스라엘인들 중 유대인을 제외한 절반 이상이 앗수르인들과

피가 섞이게 되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들이 갈리니나 사마리아 사람들을 전혀

상대하려 하지 않았던 것도 자기들만이 앗수르인들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이

스라엘인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남왕국마저 바벨론에게 망하고 만

다. 그래서 49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다. 그 노예생활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

님을 떠났던 죄의 생활을 청산하고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페르시아를 들어 바벨론을 멸망시킴으로써 포로생활

을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해주셨다. 그러나 포로에서 귀환한 이후에 이스

라엘 민족이 영적인 좌절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은 느혜미야와 에스랴를 보내어

그동안 멀리했던 율법을 다시 온전히 읽힘으로써 그들에게 영적 회복을 가져다

주셨다. 그러다가 유대종교가 등장하면서 사두개파, 엣세네파, 젤롯당 등으로 분

열된 파벌 싸움이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350년 동안 계속된다. 350년 동안의 역

사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 사이에 앗수르, 바벨론, 페르사아, 희랍,

로마로 이어지면서 팔레스틴은 이들에 의해 계속 착취를 당한다.

 

여기까지가 2막 2장까지의 이야기다.

 

3막 1장은 예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부활을 약속하신 내용이다. 그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그 교회 이야기가 3막 2장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시겠다고 재림을 약속하셨는데, 지금 우주는 다가오는 완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앤더슨은 이렇듯 구약과 신약을 하나님의 구원의 총제적인 리듬으로 보았다. 성서를 서막, 종막 3막 6장으로 구분하여 표현했는데,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런 각도에서 구원의 구조를 올바로 파악해야 한다. 성서를 토막토막 아는 지식도 필요하겠지만 토막 지식은 자칫하면 역사적 연계성을 상실하여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이라는 전체적 드라마의 연결 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알아야만 한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성서연구 방향에는 다음의 네 가지 차원이 필수적이다.

첫째,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구조를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차원이다.

둘째, 그 말씀을 해석하는 차원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과 욕심이 곧 죄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에 욕심 만큼 무서운 죄는 없다. 전두환 대통령을 생각하면 한편 불쌍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배가 컸으면 염치도 없이 그렇게 엄청나게 치부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 정말 욕심이란 것은 무섭다. 정치든 경제든 똑같다. 권력이 욕심으로 나타나면 바로 독재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이 죄의 문제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말씀을 해석하는 차원이다. 또 성서에 보면 요셉을 총리대신으로 세우고 이스라엘인들을 환영하며 나일강가의 가장 아름다운 땅까지 주었고 430년 동안 잘살게 해주었던 애굽이 갑자기 이스라엘을 학대하기 시작한 장면을 보게 된다. 성서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즉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갔을 때, 애굽의 왕은 소아시아계의 힉소스 왕이었다. 왕 자신도 애굽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총리 대신 역시 이방인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지혜로왔던 요셉을 기용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애굽 사람들이 봉기하여 힉소스족을 내쫓고 바로 왕조가 들어섰는데, 그 다시 이스라엘 민족의 엄청난 인구의 증가로 애굽인들은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애굽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번창을 막기 위해 학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성서본문에는 드러나지 않는 성서의 배경을 조명한 해석이다. 이것을 알아야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사람들에게 학대받은 이유를 알수 있다. 또 마카비 형제는 예수님이 오시기 160년 전 희랍시대에 반란을 이르켰다. 맛사다의 어느 강가에 있는 섬에 관한 이 이야기는 일종의 저항운동으로 보야 예수시대의 열심당과 연결 될 수 있다. 로마나 희랍에 대한 끊임없는 독립투쟁의 바탕에서 열심당이 태동했으며, 예수를 붙잡으러 왔던 사람들 중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의 과격한 행위도 이런 맥락에서 비로서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성서본문 중심이 되어 그 이면의 배경을 잘 알면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째, 하나님의 말씀에 신앙적으로 응답하는 차원이다. 성서연구를 하다보면 자연히 신앙히 생기게 되고, 신앙을 갖고 성서연구를 하면 그 신앙이 깊어진다. 이는 성령에 붙잡힌바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깊어진 신앙은 믿음 그 자체만으로 끝나서는 안되며, 생활 속의 사건 즉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도 중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훌륭한 기도는 갯세마네에서 예수께서 드렸던 기도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아셨으므로 하나님께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은 확실히 남들과 다르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복종하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절 정적인 기도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복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았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이다. 자신이 20-30년 동안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바로 이 순간 자신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행위가 믿음이다.

네째,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사는 차원이다. 바울은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때문에 비로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이란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 비판과 자기 회개를 거듭하며, 하나님의 뜻을 나의 삶 속에 수용하여 이 땅 위에서 과감하게 펼쳐나 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성서연구를 하면서 자칫 범하기 쉬운 오류는 그것이 지적 충족이나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성서연구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신앙의 삶으로 이어져 그 신앙을 자신이 속한 교회와 일들에 영적으로 성취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코이노니아다. 지금 한국교회에 성서연구의 붐이 일고는 있으나, 이 연구의 결과가 개개인과 교회의 변화로 직결되지 않는 데에 큰 취약점이 있다. 앞으로 목사나 평신도 들은 성서연구가 잘 활성화될수록 이것을 자신의 신앙의 깊이로 심화시켜야 할

뿐 아니라, 그 신앙이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최근 유행하는 창조신학이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은, 인간에게 타락되어가는 우주를 구원하는 데 필요한 임무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교회를 선택하신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증거케 하시기 위함임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나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죤 칼빈은 이것에 대해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이 세계는 타락했지만 이 세계는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가 계속되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무대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세계의 역사, 즉 정치, 경제 등 모든 우리의 삶의 문제가 모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성서연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이웃의 요구에 실존적으로 참여하고 응답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 인들을 양성하는 데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서연구는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 그 뜻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 신앙적으로 '응답하는 것', 그리고 삶에 있어서 실제의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 이 네가지 차원이 서로 연계성을 가져야 한다. 그때 성서연구는 그것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네 가지 차원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성서연구가 한국의 모든 교회에서 행해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목사들이 목회철학을 바꾸어야 한다. 예배중심의 목회철학에서 -비록 예배가 중심을 이루지만- 예배와 설교와 교육과 코이노니아와 선교로 이어지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회복하는 목회철학으로 전환해야 한다. 예배중심에서 교육중심으로, 교육중심에서 소공동체 훈련으로 소공동체 훈련에서 선교로 이어지는 성서연구를 극대화 할 필요가 있다. 이 길만이 앞으로 다가올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인 양성의 유일한 길이다.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10년 안에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각보다도 엄청난 위기가 될 것이다. 지금 개신교 안에는 출석은

잘하지만 성서에 숨겨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체험하지 못하여 방황하다가 신앙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교인이 많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루빨리 목회의 전환을 통하여 교회체제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목사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되며, 목사와 평신도 모두가 함께 꾸준히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 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받은 한국교회의 이 잠재력을 예배와 성서교육운동을 통해 '사건화' 하는 산 신앙으로 바꾸는 데 쏟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다시 소공동체와 선교로 이어져 곳곳에서 제 2의 신앙적 회심을 가져오는 좋은 결실을 많이 맺는 길이 될 것이다.


 

* 은준관

감리교 신학대학 졸업

미국 Duke 대학 졸업(신학사)

미국 Pacific School of Religion (신학박사)

시카고 한인교회 담당역임

감신대 교수, 정동제일교회 목사

현재, 연세대학교 교수 재직중

출전: 김진홍 편, 한국을 성서 위에, 대구:도서출판 두레마을, 1988.

동산교회 제 2청년회 교육연구모임을 위해 199 년 월, 그 내용을 전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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