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4.

好學 2011. 12. 17. 06:07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4.

 

 

 11. 카타리나의 성경지식
 루터는 바쁘게 살아가는 아내 케테가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도록 마음 따뜻한 좋은 조언을 늘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도록 권면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녀 역시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 번은 루터가 아내에게 재미있는 약속을 하였는데, 부활절이 오기 전까지 만약 아내 케테가 성경 전체를 다 읽을 경우 독일 돈 50 굴덴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돈을 그녀가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부지간에 표출되는 숨길 수 없는 흥겨운 사랑만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내 케테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거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성급하다. 루터는 종종 아내의 성경 지식이 뛰어남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이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것을 볼 때 늘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한 번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하는 아브라함을 루터가 해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아내 케테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가질 수 있는 고통에 대하여 루터가 언급하였을 때, 부인 케테는 다른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들을 살해하라 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루터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심을 결코 망설이지 않으셨다고 대답하였다.

 12. 루터가 보낸 편지들
 또한 우리는 루터 부부의 편지를 볼 수 있다. 부인 케테가 남편 루터에게 쓴 편지는 유감스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루터가 아내 케테에게 보낸 편지들은 상당수 남아있어 부부지간의 사랑을 우리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1523년 2월 27일 루터는 외유 중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케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부뤽 박사가 휴가를 내어 곧 내가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갈 계획이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구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사히 그리고 건강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오. 어제 저녁 나는 잠을 잘 잤소. 여섯 일곱 시간을 푹 잤고, 연이어 두 세시간을 또 잤소. 아마도 맥주 덕분인 것 같구려. 아무튼 빨리 당신이 있는 비텐베르그에 가고 싶구려.”


 1541년 9월 18일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스도르프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소식이 없으니 놀랍구려. 과연 이곳의 우리가 잘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는지 말이요. ... 어쨌든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땅을) 사시고 또는 계약을 하시구려 그리고 제발 빨리 집으로 오시구려.” 루터는 당시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3. 피난의 세월 속에서
 구교와 개신교의 입장에 선 위정자들 사이에 발생한 여러 번의 내란, 터어키 군과 프랑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의 충돌들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힘들게 하였다. 루터가 아내 케테와 21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1546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럴 때마다 케테는 아이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한 번은 교황측의 군대에 의해 비텐베르그가 포위되었을 때, 케테는 자녀들과 함께 마그데부르그(Magdeburg)로 도피해야만 했다.

 점령군이 철수하고 그녀가 가족과 함께 다시 비텐베르그로 돌아왔을 때, 밭의 곡식들은 온통 못쓰게 되었으며, 가축들은 점령군에 의해 잡혀 먹혔고, 가옥은 불에 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이 반복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흑사병은 무참히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는데, 이러한 전염병이 휩쓸 때에도 사람들은 특별한 대책이 없어 또 다시 피난의 길을 떠나야 했다.

 

한 번은 케테가 아들 바울과 딸 마가레타를 데리고 이 흑사병을 피해 토르가우(Torgau)로 가서 전염병이 수그러질 때까지 그 곳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카타리나 부인이 말을 타고 다소 험한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얼음물이 고여있는 무덤 옆을 지나다 미끄러져 마차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그녀는 토르가우로 옮겨졌고 당시 18세의 딸 마가레타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3개월 후 1550년 12월 20일 51세의 나이로 길지 않은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여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간 남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보다 4년 10개월 뒤에 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긴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16세기에 등장한 교회 속의 한 여성, 특히 가장 첫 번째 목사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를 향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자 루터의 아내라는 이유가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의 기대는 조금은 달랐는데, 교회사 속의 한 여인으로서 그녀의 독자적인 활약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었다. 이를 향한 우리의 기대는 그렇게 충족되지 못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중 필자는 첫째, 그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빈곤을 우선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주로 역사가들은 루터를 연구하는 중 만나게 되는 그녀에 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 루터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나지는 카타리나 폰 보라 부인의 모습이 우선적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인데, 이러한 자료의 빈곤은 결국 연구의 한계성으로 부각 되어진다. 둘째, 당시 16세기가 비록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전환의 순간을 창출해내고 경험하는 역사적 창조적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여인들의 교회적, 사회적 위치와 활약 그리고 봉사에 대한 기대가 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여인들의 역할이 주로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집안 생활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여인들의 또 다른 활약에 건 기대가 얼마나 미약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미약한 기대는 결국 여인들의 다른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이후 여인들의 역할이 꼭 가정사(家庭事)에만 제한 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성경에 대두되고 있는 수많은 여인들의 훌륭한 역할이 결코 그러하지만은 아니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의를 표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예수님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그리고 예수께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에 의한 사회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여성은 남성과 동일하게 예수께는 구원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며, 천국복음 전파의 일군으로 기꺼이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대두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서로 상이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끝을 맺어야 하겠다.

 첫째, 종교개혁 이후 가장 첫 번째 개신교 목사 부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에게 있어서 확인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적-신학적 역할은 크고 위대했는데, 수도사 출신 루터와 수녀 출신 카타리나의 개인적 신앙결단에도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여기서 신학적이란 이신칭의에 의한 종교개혁적 새로운 인간실존이 선언하는 진정한 삶의 유형을 성직자 독신생활의 굴레를 벗기고 축복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자유의 모습으로 떳떳이 제시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나타나는 종교개혁적 신학의 선언적 의미가 놀랍다.. 사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중요한 신학원리 위에 세워놓고 있다. 일반 성도와 성직자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종교개혁적 만인제사장직을 부정하는 외적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한 독신생활적 금욕주의를 하나의 행위구원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 로마교회가 말하는 결혼관은 한 마디로 말해서 결혼하지 않은 ‘거룩한’ 성직자와 결혼으로 자녀를 가지는 ‘속된’ 일반 신도들을 나누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카타리나는 정숙한 목사의 사모, 신앙의 아내, 종교개혁자 루터의 지혜로운 조언자였으며, 다섯 자녀들의 성실한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겁고 힘겨운 역할을 위기의 시대에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다.

아내로서 그녀는 인격과 용기, 예민성과 강직함, 강한 의지와 큰 사랑을 소유하였다. 수많은 사상적 대적들을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종교개혁자 남편 루터에게 그녀의 따뜻하며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공개적인 활약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카타리나의 모습은 어쩌면 남편 루터의 여성관 내지는 가정관에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루터에게 부과되는 너무도 막중한 종교개혁적 사명이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역할을 기대하게 못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즉 오직 이 위대한 종교개혁자 남편을 위해서 부름받은 신실한 여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지혜로운 아내 숨은 동역자 카타리나와 함께 이루어진 신적(神的) 작품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의미있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카타리나를 통해서 제시되는 개신교 첫 번째 사모의 모습은 오는 시대 개신교 목사 부인들의 상(像)을 그리는 데 있어서 어렵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참고.
1) Roland H. Bainton, Frauen der Reformation. Von Katharina von Bora bis
2) Anna Zwingli, GTB 1442, Gütersloh 1996(3판), 17-39.
3) Heinrich Boehmer, Luthers Ehe, in: Lutherjahrbuch VII, 1925, 40-69.
4) Martin Brecht, Luther, in: TRE 21, 513-530.
5) Ernst Kroker, Katharina von Bora, Leipzig 1906.
6) Albrecht Thoma, Katharina von Bora, Berlin 1900.
7) Gerhard Wehr, Martin Luther, Novalis Verlag 1983. 179-186.
8) M.A. Kleeberg und G. Lemme(Hrsg.), Auf den Lebenswegen Martin    
  Luthers. In Wort und Bild erzählt, Berlin 1964(2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