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1.

好學 2011. 12. 17. 06:05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1.

 

 

1. 들어가는 말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여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일 것이다.“교회 속의 여인들”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자료의 빈곤을 실감하게 된다. 자료의 빈곤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의 여인들의 역할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부족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여인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의 결여 내지는 부족은 역사적 자료의 빈곤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루터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를 향한 그녀의 만만치 않은 야무진 역할이 더욱 그녀를 소문나게 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16세기 당시 교회의 한 여인으로서, 게다가 그 유명한 종교개혁자의 아내로서 과연 어떠한 역사적 생애를 이룩하였을까?

 2. 극적인 수녀원 탈출
 1499년 1월 태어난 그녀는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위치한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위시하여 전 유럽에 열화와 같이 번져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루터의 저술을 수녀원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마음은 과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9명의 님브센 수녀들이 자신들의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루터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조언하면서, 이를 위해 루터 역시 나름대로 도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루터가 있는 독일의 작센(Sachsen) 지역은 신앙적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작 게오르그(Georg)가 통치하는 지역은 여전히 카톨릭을 지지하며, 다른 한쪽은 루터의 친구이면서 또한 생명의 은인으로 역사 가운데 소문이 나있는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통치하는 개신교 지역이었다. 그런데 카타리나 폰 보라가 소속되어있는 님브센 수녀원은 다름아닌 게오르그가 다스리는 카톨릭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매우 강경하여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루터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한 상인 토르가우(Torgau) 출신 레온하르트 코페(Leonhard Koppe)와 함께 특별한 수송작전으로 원하는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키는 그러한 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하면, 탈출하고자 하는 수녀들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절 그날 저녁에 수송작전에 참여하여 부활절이 끝난 다음 화요일에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 학생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여기에 도착한 한 마차 사건보다 더 흥미 진지한 이야기는 없다. 그 마차는 처녀들을 가득가득 짐으로 싫어왔다. ...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신랑들을 책임지실 것이라면, 이 살벌한 기간에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루터 역시 이들의 장래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곧 이들이 다른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수녀는 교사가 되었으며, 둘은 어느 가정에 집안 일을 돌보게 되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 중에서 카타리나 폰 보라는 2년 동안 비텐베르그의 한 가정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훌륭하게 가사를 몸에 익혔다.

 3. 매력적인 여인
 사실 카타리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 중 제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덴마크의 왕이 피신하여 이 곳 비텐베르그에 거하였는데, 그는 그녀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또한 뉘른베르그 출신 히에로니무스 바움개르트너(Hieronymus Baumgärtner)는 25세의 귀족 가문의 청년으로서 당시 24세의 카타리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루터가 편지를 썼다. “여보게 빨리 일을 진행시키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각 히에로니무스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총각의 태도를 루터는 나무라지 않았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함이 옳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루터는 카타리나를 글라츠(Glatz) 박사에게 중매하였으나, 그녀는 루터의 그러한 호의를 박절하게 사양할 수 없어 암스돌프(Amsdorf) 박사를 통하여 거절하였다.

 4. 루터에게 향하는 카타리나
 사실 카타리나의 마음에 드는 신랑감으로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그토록 호의를 베푸는 루터와 암스돌프가 바로 그러한 남자들이었다. 카타리나는 루터나 암스돌프를 가까이 하면서 여러 면에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두 남자들은 아직 독신들이었으나, 자신들과 카타리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연령차로 인하여 결혼은 아예 생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의 나이 차는 루터가 16세나 연상이었다.

루터가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과연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독신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를 숙고한 끝에, 루터는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 것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7년 후에는 결혼을 하여 아버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큰 너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1520년 루터가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농부로 변장하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에 칩거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문은 비텐베르그에서 몇몇 수도사들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루터는 “오 하나님! 우리 비텐베르그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한 사건이 1524년에도 있었는데,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Argula von Grumbach)가 루터에게 결혼을 통하여 복음의 확신을 제시하기를 강요하였을 때도 루터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 때 루터는 그녀에게 “나는 결혼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소”라고 말하면서, “내가 나무와 쇠로 만들어져서도 아니며, 나의 육체와 정욕이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나는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이단이라도 된 것처럼 무서운 죽음의 위험이 시시때때로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