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요한 웨슬레 신학

好學 2011. 12. 11. 22:59

요한 웨슬레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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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연구 목적 방향

논문을 엮어감에 있어서 비판적이고, 비교 분석적인 모습은 있는대로 지양했으며,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신학 전체를 다루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본인의 역량도 부족하여 적게나마 "성화 신학" 부분만을 연구하였다. 특히 "성화 신학" 지닌 '종합' 성격과 '부흥사 Wesley' 아닌 ' 자체의 실천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 모습을 강조한 그의 사상을 더욱 부각시켰으며, '웨슬리 신학 형성의 배경','웨슬리의 성화 신학',그리고 결론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서 전개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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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웨슬리 신학 형성의 배경.

 

1. 요한 웨슬리 신학의 시대적 배경.

웨슬리가 살았던 영국은 "Three Rs' Age"라고 일컬어진다. 첫째는 理性의 시대(the age of reason), 둘째는 復興의 시대(the age of revival), 셋째는 革命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였다. 이성의 시대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일의 合理主義(rationalism) 혹은 啓蒙主義운동(enlightenment) 이어 프랑스의 浪漫主義(romanticism) 혹은 自然主義(naturalism) 바람이, 영국에서는 理神論(deism)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合理的 이성 중심의 哲學은 聖書의 합리적 해석, 구속주 그리스도보다는 歷史的 예수, 道德的 유토피아, 宗敎간의 대화,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배제하는 인간 중심의 역사 해석 등을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合理的 이성 중심의 哲學에 반기를 들고, 17세기 改新敎 正統主義(protestant orthodoxism) 스콜라주의적 경향을 띠는 것에 挑戰하면서 경건주의 부흥운동이 독일에서 시작하여 스페너, 프랑케, 진젠돌프를 거쳐 웨슬리에게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集中的으로 살펴보아야 상황은 웨슬리의 社會的 성화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産業革命이라고 있다. 웨슬리의 시대는 人類의 역사적 運命을 바꾸어 놓은 産業革命의 時代였다. 手工業에서 機械工業으로 발전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1760년경 제임스 하그리브스(Jmaes Hargreaves) 짜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섬유산업의 획기적인 變化를 가져오게 하였다. 하그리브스의 기계로 더욱 튼튼하고 더욱 좋은 실을 만들 있게 되었다. 그가 죽은 10 만인 1778년에는 짜는 기계가 영국 전역에 2 개나 되었다. 에이브라함 다비(Abraham Darby) 1708-9년에 제련에 石炭을 사용하는 것을9 발견하여 開發시킴으로 석탄생산이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1775 제임즈 와트(James Watt) 蒸氣엔진이 發明되어 市場에 나옴으로써 증기의 힘이 철공업 발전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것은 産業革命의 重要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鐵工業과 纖維工業이 도시를 중심으로 發展하게 되자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랜커셔(Lancashire) 인구가 세기동안 배로 증가하였고, 인구 8,000명의 맨체스터(Manchester) 9 5,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産業化에 뒤따르는 不作用으로 勞動者의 처우개선이 問題시되게 되었다. 노동운동은 産業革命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수천 명의 지도자들이 監理敎徒들이었고, 그들에 의해 노동자들이 正義感과 권리의식을 갖도록 의식화되어 갔을 아니라 감리교도들은 노동자들에게 조직화해 가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감리교는 초기 産業革命의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웨슬리의 종교적 영향으로 당시 사회의 노동자들에게 어둠 속에서 빛을 던져 주었다.

또한 産業革命과 함께 激動과 轉換의 시대에 감리교는 광부, 산업 노동자, 농부의 사회속으로 참여함으로써 박해로 시작된 적은수의 신도들이 1800년의 교인수보다 1850 교인수가 6배로 증가하였으며, 구성원은 광부, 노동자, 농민들로 가득찼다.

2. 웨슬리의 생애

이제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기독교의 다른 장을 펼친 웨슬리의 생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웨슬리(1703-1791) 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엡워드의 목사인 사무엘 웨슬리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나 옥스포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726 옥스포드 대학 링컨 컬리지의 특별연구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727-29년까지는 부친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시절에 진지하고, 경건하고, 학구적인 크리스챤들을 모아 신성구락부(holy club) 조직하고, 신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윌리암 로오(William Law,1686-1761) 헨리 모어(Henry More,1614-1687), 토마스 아켐피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1613-1667)등의 영향을 대학 시절에 받았다. 그는 1738 5 24 올더스게이트 가의 모임에서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론이 낭독될 회심의 경험을 갖게 되었으며, 1739 킹스우드 광부들 앞에서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1744년에 평신도 설교자들의 회의를 열었으며, 1760 미국에서 감리회 조직이 소규모 형태에서 점차 발전하여 1768년에 감리교회가 뉴욕에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에 웨슬리는 토마스 코크박사(1747-18914)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감리회 조직이 영국 성공회안에서 하나의 신앙운동이 되기를 바랐으나 점차적으로 독립적 조직으로 성장해 나가게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의 豫定論에 반대했으며, 1741 조지 화이트 필드와 단절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웨슬리의 사망당시, 영국은 194명의 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미국에는 190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이 있었다. 그는 동생 찰스와 화이트 필드보다 감리회 전도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시대의 가장 위대한 크리스챤들 중의 하나였다는 The Oxfo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는 말하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웨슬리에 대한 연구는 1935년에 죠지 (George Cell) 그의 저서 [ 웨슬리의 재발견](The Rediscovery of John Wesley)에서 웨슬리의 신학적 경향이 반칼빈적이라는 기존적인 해석을 부정하고 오히려 칼빈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필두로 하여서 웨슬리를 신학자로서 연구하는 사조가 일어나게 되었다. 1913년에 프랑스의 역사학자 엘리 할레비(Elie Halevy) 웨슬리를 18세기의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이끈 위대한 사회 운동가로 평가한 이래 웨슬리 신학의 사회 윤리성이 논의되어오고 있다. 웨슬리는 생애를 전도자,신학자,그리고 사회 개혁자로서의 일생을 보냈다. 이제 그가 모라비안으로 가지않고,종교 개혁자의 모습을 갖추게되는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살펴보자.

3.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웨슬리가 웨슬리 되게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의 논란이 있으나 우리는 그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중요시 하지 않을 없다. 먼저 그의 1738 5 24일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5 24 수요일 "그는 영광과 덕으로 가장 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신의 성품을 함께 가지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베드로 1:4) 내가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는 것이 오늘 아침 5시경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나오기 직전에 읽은 말씀은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마가12:34) 말씀이었다. 오후에 나는 세인트 교회에 오라는 청을 받았다. 거기서 부른 찬송가는 이런 것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저녁에는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은 올더스게이트 (Aldersgate street)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 15분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나는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악의적으로 나를 이용했거나 박해한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생전 처음 마음속에 느낀 것을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터놓고 간증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서 원수같은 마귀는 넌지시 이렇게 속삭였다. "이것은 믿음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쁨은 어디 있냐?" 그때에 나는 배웠다. 평화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뿐만아니라 보통 처음에 생기는 황홀한 기쁨 특히 깊이 애통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주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 나는 여러가지 시험으로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소리로 외쳤더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시험은 자꾸 돌아왔다. 그럴때마다 나는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자 주께서는 "주의 거룩한 곳으로부터 나에게 도움을 보내주셨다." 나는 여기서 이런 체험과 주로 전에 일관되었던 나의 신앙상태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싸웠다. 그렇다. 나는 율법아래서 뿐만 아니라 은총 아래서 역시 있은 힘을 다하여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주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현재에는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올더스게이트 체험을 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하나는 체험으로 인해 웨슬리의 윤리관의 변화와 다른 하나는 의인관의 변화를 알아 보고자 한다.

a) 올더스게이트 체험 전후의 의인관의 변화

먼저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웨슬리의 사상에는 인간은 도덕적인 선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노력과 노력의 도덕적 영적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웨슬리는 하나의 의식주의자(methodist)였다. 이와 같은 행위에 의한 구원관은 웨슬리 부모의 의인관에 기인한다. 이런 그가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Aldersgate street) 있는 신앙 동지들의 집회에서 참석하여 「로마서 서문」낭독을 듣고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경험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웨슬리의 신학의 시대적 배경, 생애, 그리고 회심의 계기가 올더스게이트 체험의 바탕 아래 웨슬리는 그의 중심신학인 성화사상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으며, 다양한 신학을 정립해 나갔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성화 신학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b)올더스게이트 체험 이전과 이후의 사회윤리관의 변화

웨슬리는 신앙을 윤리로부터 분리 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사회 윤리는 크리스챤의 완전과 성화에 관한 그의 신학으로부터 분리될 없으며, 특히 올더스게이트 이전과 이후의 그의 윤리관이 차이가 있음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웨슬리의 접근 방법은 카톨릭적 이었다면, 이후에는 신앙과 윤리와의 관계를 복음주의적 의미에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의 실천적 의의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올더스게이트 이전에 웨슬리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신앙) 사람과의 관계(사회 윤리)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주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는 길이 그의 인격과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웨슬리는 이해했다. 그리고 올더스게이트 이후에 그는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했다. 단순히 표현하면, 이것이 바로 다른 점이다. 올더스게이트 이전에 그의 사회윤리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깊은 관심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올더스게이트 이후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새로운 애정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줄수 있게 되었다. 전에, 그는 의인의 은총과는 별도로 聖火를 구했다. 크리스챤이 되기 위하여 그는 기도, 금식, (조지아에로의)순례를 통하여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봉사를 통하여 거룩한 삶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펠라기아니즘(pelagianism)이었다. 그러나 그는 1738 체험이후 그는 하나님을 얻기 위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던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것이 되었다. 그의 선행(사랑) 믿음을 낳은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서 역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믿음이 사랑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동기부여에 있어서 올더스게이트 이전에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했으나 체험 이후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할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게 되었다.

B. 웨슬리의 성화 신학

 

1. 성화신학의 배경

a) 성서적 배경

웨슬리의 성화신학은 강한 성서적 배경속에 기초하고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천적인 근거가 된다. 가지 신학적 기준 - 성서, 이성, 전통, 경험 - 중에서 성서가 가장 근본적 기준이 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성서적 해석 없이 성화의 교리를 취급하지 않는다. 그의 중요한 논문 "크리스챤의 완전" (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1725-77)) "원죄" (original sin ,(1756)) 그가 성서를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의 교과서는 산상수훈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완전이란 점진적 성장 과정의 개념이다. 이런 과정의 개념은 빌립보서 3 12절에 나타나 있다. "나는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하여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완전한 성화의 과정이다. 그의 설교 "완전"(on perfection) 본문이 히브리서 6 1 "...성숙한 경지(완전) 나아갑시다"이다. 그는 우리가 끊임없이 완전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b) 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동방교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게되어 인간이 완전에 관계되는 은혜와 선행의 상호협조를 강조한다. 그리고 성화개념은 동방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영향을 받아 그를 통해 구원의 신인 협조질서를 배웠다.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구원의 질서이다. 인간의 책임성은 신앙과 회개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신앙과 회개는 자유 의지라는 동전의 양면인것이다. 은혜가 먼저 역사하면 자유 의지(신앙과 회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회개만이 인간의 책임이다. 점이 웨슬리가 크리소스톰과 다른 점이다. 크리소스톰이나 웨슬리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으며,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웨슬리 신학의 역사적 배경은 동방교회적 배경 - 성화의 점진적 과정과 은총과 자유의지의 신인 협조적 구원관 - 서방교회적 전통 - 어거스틴과 루터의 신앙의인화 - '종합'한 3 변증법적 신학을 형성 하였다.

 

2.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1)구원에 있어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으며, 2)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 3)또한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 것으로 귀결된다.

선행은총은 웨슬리 은총론의 출발점으로서, 그의 은총론의 특징을 나타낸다. 웨슬리의 은총론은 보편적 은총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인을 위해, 만인안에서"역사한다. 선행은총에 응답하고 자기 양심에 복종하는 인간이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회개, 칭의, 중생의 은총으로 인도되어 것이며, 은혜에서 은혜로 더욱 나아가면 성화의 은총을 경험하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신 선행은총의 불꽃을 더욱 돋우어야 한다.

선행은총에 의한 자유의지의 회복으로 오늘날 인간은 "책임적 존재"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책임사상은 기독자 윤리의 중심이 된다. 점에서 선행은총은 기독교 윤리의 전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응답과 책임은 언제나 "은총 안에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웨슬리의 신학이 인본주의로 오해받는 이유가 "은총 안에서의 응답"이라는 것을 모르는데서 기인한다.

웨슬리의 이러한 선행적 은총은 "불가항력적" 아닌 "가항력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역사하는 그리고 은총에 응답하는 복음적 신인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임을 있다.

3.

웨슬리는 의인화의 은총을 1 복이라고 보았고, 성화를 2 복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의인화의 은총만을 강조하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주는 의인화와 성화의 차원적 은총을 말한다. 웨슬리는 칼빈이 이해한 성화의 교리를 더욱 발전시킨다. 칼빈은 성화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은혜라고 해석했지만, 웨슬리는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은혜요, 성화는 성령의 은혜라고 해석한다. 계속해서 그는 거듭남과 성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거듭남은 순간에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성도의 겸손은 자만과 섞여 있다. 거듭난 성도는 온유하나 때때로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용해되지 못한 것이라고 웨슬리는 해석한다.그리고 거듭남이 순간적 탄생이라면, 성화는 태어난 아기가 계속 자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지 아니하면 온전한 겸손, 온전한 온유, 온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

웨슬리는 의인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지듯 성화도 믿음으로 출발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며, 믿음의 본질은 내적이지만 믿음의 증거는 사회적 행동임을 강조한다. 루터는 로마서를 높이 평가하면서 - 믿음의 책이기에 - 야고보서의 행위의인화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행함이기에 행함의 중요성을 중시했고 선행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로마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75 갈대아우를 떠날 때의 믿음을 뜻하는 것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100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의 헌신적 행위를 말하기에 야고보서의 행함은 로마서적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지 믿음이전의 선행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행동을 강조하는 산상수훈을 중요한 설교본문으로 택했으며 산상수훈 설교는 그의 성화 신학을 표현해 주고 있다. 칼빈과 더불어 산상수훈 등에 나타난 율법을 성화생활의 좋은 교훈과 채찍질로 생각한다. 칼빈은 율법을 단순히 죄를 깨닫게 하는 (1 용법)이나,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공민법을 어긴 악한 사람을 다스리는 (2 용법)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성화의 생활을 훈련시키기 위한 채찍질로서도(3 용법)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는 1 용법이나 2 용법으로만 이해했다. 웨슬리는 3 용법까지도 받아들였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구원의 확증과 풍성한 구원 또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행함과 사랑을 배제할 없는데 율법의 3 용법은 산상수훈 같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도록 채찍질한다. 성화를 통한 구원의 완성이 있음을 웨슬리는 히브리서 12 14절을 통해 강조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거룩함, 성화)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위에서 있듯이 칼빈의 선행-율법을 준수하고 복종하는 행동- 성령의 역사다. 그러나 웨슬리의 선행이해는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적극적 응답과 참여로 표현되어 있음 있다.웨슬리는 순간적으로 부어지는 성화가 성화의 출발점이지만, 그후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미 미국의 해방 신학자 데오도어 러년(Theodore Runyon) 웨슬리의 성화에 대해 이렇게 해석한다.

성화 -혹은 기독교인의 완전- 결국 소극적으로 죄가 없는 상태로 정의되어서는 안되며,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표현되는 능동적인 사랑의 현존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정의 되어져야 한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향하며,인간 존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 동료에게 향한다. 이것이 현시대에 인간화의 충격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권능인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몇몇 기독교인들이 가능한 세상과의 교섭을 피하기 위하여 "죄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자"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그들이 세상에서 물러난다면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소명을 어떻게 성취할 있겠는가 하고 웨슬리는 묻는다. "당신 주의에 있는 모든 것을 맛있게(의미있게) 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본분이다...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섞어 놓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모든 은총이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있도록 하신 이유인 것이다.성화는 하나님 자신의 사업-그의 창조의 구속- 개인이 참가하는 것이다.

 

4. 성화의 특징

웨슬리 신학의 특징은 크게 '성결', '사랑', '사회 참여로의 성화' 구분할 있다.

a) 성 결(Passive)

웨슬리는 행동 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간에 용서함을 받고, 내적 죄는 성령의 역사로 성화의 과정에서 성결함을 받는다. 내적 죄는 교만, 자기 의지, 분노, 불신앙, 온갖 욕망 등이다. 내적 죄는 죄의 뿌리 혹은 원죄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행위의 죄들은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 의인화의 순간에 - 내적 죄악은 계속 성도들에게 남아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죄가 이상 성도들을 지배하거나 다스리거나 조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도들도 완전의 은혜에 의해 성결함을 받을 때까지 우리의 내적 죄악을 계속 회개해야 한다. 완전의 은혜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크리스챤을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에 있어서 의인화가 행위의 죄를 용서하는 객관적 은총이라면, 거듭남과 성화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주관적 은총이다. 거듭남은 성화의 출발점이요, 거기서부터 성령이 우리 안에 계속 역사하여 완전한 성화로 영적 성장을 이룬다. 의인화는 거듭남과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다만 논리적으로(in thinking) 의인화가 거듭남에 앞서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동시에 성화가 시작한다. 의인화가 상대적, 관계적 변화라면, 거듭남과 성화는 실제적 변화를 말한다. 까닭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는 의인화로부터 전적으로 구분되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은사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완전은 세상에서도 - 죽음 이전에도 - 가능하다. 그렇지만 지상에서 절대적 완전히 가능한 것은 믿지 않는다. 완전은 상대적이요, 동기적이다. 죽음 이전의 완전한 성화의 개념은 사랑과 선행을 온전히 실천함을 의미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소극적 방법은 성결 혹은 없음이지만, 보다 적극적 성화의 방법은 사랑이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성결이 성화의 요소이지만, 세상으로 찾아가는 성육신적 행동과 사회 참여로서의 사랑과 선행이 성화의 요소이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성도의 궁극적 목표이다.

b) 사 랑(Active)

무엇이 성화요, 무엇이 완전인가? 웨슬리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단순한 마음이라고 한다. 사랑은 모든 죄를 싫어하고 영혼의 모든 가능성을 마음속에 채우는 것이다. 이것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이다(살전 5 : 16-18). 사랑이 신앙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신앙이다. 신앙 없이는 어떤 인간도 성화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그가 믿을때까지 성화될수 없다. 신앙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인가 하면, 사랑은 신인 협조적인 행동이다.

사랑은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 : 19). 웨슬리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랑의 종노릇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설교 "중요한 질문"(the important question)에서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방문하고,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웨슬리는 그의 설교 "사랑에 관하여"에서 고전13:1-3 본문으로 삼고 '사랑'에 대한 설교중 사랑의 본질에 대해 가지로 정의한다.첫째는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척도인 동시에 겸손의 척도로 제시됨을 있다. 둘째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하였으며 셋째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라고 한다.그리고 오래 참음은 단순히 몇번의 모욕들이 아닌 하나님이 인간과 악마에게 주고자하는 "모두"를 견디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웨슬리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설교에도 있듯이 그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리고 감리교도들의 회심 경험은 인간 존재에 대한 선교적 봉사로 직접 연결되게 되었다. 세리, 창녀, 죄인, 소외된 자들이 대우받던 예수시대처럼 웨슬리시대에도 인간답게 인정받게 되었다. 루터에게서 사랑은 신앙의 나무에서 저절로 맺히는 열매이지만, 웨슬리에게서 사랑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신인 협조적 응답으로서의 선행이다. 루터는 사랑을 주어지는 은총으로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사랑을 주어질 아니라 참여하는 은총으로 보았다.

c) 사회 참여로서의 성화

웨슬리는 사랑의 성화를 성육신 사회참여(incarnationol social participation) 해석한다.

크리스챤의 선포는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크리스챤 공동체는 사회 개혁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을 공허하게 만들게 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정의, 평화, 그리고 사랑의 뜻이 성취되어야 한다. 매일의 생활속에서의 사회적 증거는 내적 신앙의 어떤 내재적 체험의 필연적 확신이다. 웨슬리의 성화교리를 통하여 불건전한 복음주의(unhealthy evangelism) 비판한다. 불건전한 복음주의는 자기 (self-righteousness)만을 강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주장하는 신앙 유형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당신은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하늘나라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질문만을 던진다고 아우틀러는 비판한다. 그러나 건전한 복음주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질문할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역사안에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개념"을 설교하였다. 또한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이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웨슬리의 성화 사상을 맺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웨슬리가 교회에 미친 공헌을 살펴보고, 웨슬리 신학의 특색과 한국 교회의 과제를 끝으로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는 연구에 있어서 "요한 웨슬레의 성화 신학의 독특성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예장 통합측의 사회 참여에 대한 수동적인 모습과 교회들의 피상적이며, 주체성없는 사회 선교 모습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그러던 웨슬리 신학에 대해 접하게 되었을 그의 신학은 이런 안타까운 심정에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특히 그의 '종합적인 성격은 - 때때로 한쪽으로 치우치면 곁길로 빠질 위험이 내재하지만 - 지금 우리들에게 도전을 주며, 과거의 양적 성장에서 이제는 질적 성장을 요구하게 된다. 또한 박해 받았던 감리교가 '부흥의 시대'를 펼칠 있었던 사회 참여에 대한 능동적인 선교였음을 우리는 있다. 많은 영향들이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사회 참여 운동은 당시의 가장 소외당한 노동자, 농부, 그리고 광부들에게 구석 구석까지 도움의 손길을 펼친 운동의 결과 였음을 있다. 결과 감리교는 광부, 노동자, 농부들이 교인의 대다수였다. 이제 우리도 한국 초기 기독교가 들어 왔을 세워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깨뜨리고 우리 현실에 맞는 선교정책을 수립하여 전개해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겠다. 마지막으로 웨슬리 신학의 공헌과 특색,그리고 한국교회의 과제를 끝으로 논문을 맺고자 한다.

웨슬리는 오늘의 교회에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선교(mission of the church) 주는 신학적 의의가 크다고 본다.

첫째로, 선교 특히 인간 구원에 있어서의 사랑의 협력은 가능성과 責任의 餘地를 認定한다. 인간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 재강조하는 현대 改新敎神學은 구원에서의 인간과 도덕적 책임을 거의 等閑視한다. 以信得儀의 교리를 保護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追從者들은 사람을 아주 무능한 자로 몰아 놓을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호응할 접촉점( point of contact)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정통주의 신학은 선교라는 수고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 염려가 있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사랑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행적 은총의 역사로 이미 이니시어티브를 취하고 계시지만 사람은 회개하고 믿을 책임이 있다고 한다.

번째로, 이와 같은 웨슬리의 사상은 기독교의 他宗敎의 대화의 근거를 제시한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법이나 종교는 중립적이 아니요, 은총의 보편적 역사의 영향아래서 생겨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는 교회는 세속세계라고 일컬어지는 일반문화, 철학, 과학과의 대화의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고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진리는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만 온전한 진리인 , 이것이 문화, 타종교안에 있는 것들을 分別하는 표준이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함으로 웨슬리는 교회와 세상과의 계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독성을 주장한다.

번째로, 이와 같은 웨슬리의 사상은 교회 선교에 대한 소망과 힘을 제공하고 있다. 웨슬리의 신학은 교회 선교에 있어서의 비관주의에서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 "하나님이 역사심으로써 가능하다"(possibility in grace)라는 믿음으로 대치에 놓을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웨슬리의 사상의 특징은 앞에서 살펴본 성화에 대한 이해에서 보다더 具體的으로, 그리고 힘차게 表現되어 있다. 그리고 웨슬리 신학의 특색은 우리가 알아온것처럼 신학의 독특성에서 찾아 있다. 웨슬리가 宗敎改革者들처럼 신약성서에 있는 중요한 要素들을 강조하되 신학형성에 있어서 교회안에 있는 여러 학파의 장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creative synthesis)하였다는데서 찾을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참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그들의 신학을 재해석 내지 是正하여 보다 성서적이고 인격적인 기독교 복음의 역동성을 되찾는데 이르렀다고 본다.

위와같은 웨슬리 신학의 장점과 더불어 지금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들만의 편협되고, 개인 아집이 강한 자세에서부터 나오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종교다원주의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하며 세상은 우리에게 문을 활짝 열고 있는데 비해, 우리들은 我와 非我를 엄격히 구분하여 대립시키는 이분법적이며 배타적인 단선적 투쟁사로서의 역사 이해만을 추구하고 있다.그러나 이제는 이것을 극복해야되며, 자신이 속한 교단에의 애정은 가지되 한계를 넘어설 아는 열려진 마음과, 신앙고백적인 성령운동에 대한 관심 내지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과제이다. 더불어 성령운동에 있어서도 십자가 없는 성령운동 내지는 하나님 없는 성령운동의 많은 문제점들을 밝히 보면서도, 자체가 안고 있는 아주 좋은 유산인 체험적이며 축제적인 요소를 간직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 가운데에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관심을 두어 결단하고 행위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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