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자들] 생애

어거스틴 신학 2

好學 2011. 12. 11. 22:38

어거스틴 신학 2

 

◈ 제 7권.신의 본성 악의 본질 기독론 문제에 대하여 ◈

 

성서안에는 절대적인 것이 증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증거의 수단은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이세상에 오셨을때는 제한성에 들어온 것이다. 성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배제한다.

성서안에 언어,문화, 세계관은 상대적인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모두 절대적인 줄 알았다가, 성경안에서 상대적인 것을 발견했을 때, 성서안에 모든 것이 동등하기에 절대적인 것까지도 상대화시켜 버리게 되면 성경은 성경이 아니게 되며, 신앙을 저버리게 된다.

하늘의 영원한 보배가 인간이라는 질그릇에 담겨져 있기에 충돌될 필요가 없다. 질그릇은 성서의 내용을 보호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신학은 일관성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consistancy) : 기독교 신앙의 체계에 대해서 내용의 합리성(이치에 맞아 야한다). 성경안에 이런 저런 내용이 서로 합리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연관성(coherency) : 하나님은 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 세상의 만물을 다루는 학문과도 연관성이 있다. 이것을 신학이 다루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신학이라고 한다면 만물을 연구하는 학문과 연결 을 짓는 것이 좋다. 방향을 전해주고 가치를 주는 신학으로 지향해서 우리의 눈을 넓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라고 한다면 만물에 대한 연구를 두려움 없이 시도되어야 한다.

1-7 장 에서는 부적절한 신론

8-14장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참다운 신론에로 인도

15-21장 플라톤주의 결여된 점

1장.신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1) 인간의 형체를 가진 하나님 처럼 생각했다. 마니교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형체외에는 생각할수 없었다. 교회에서는 신인동형론을 용납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큰 실물적인 실체로 모든 것에 침투해 있다고 생각.

나중에야 영적인 존재로 이해하였다.

3장. 자유의지와 악의 문제.

(4) 하나님은 창조주임을 믿었다. 하나님을 불변하는 존재임을 믿었다.

그들이 악의 원인을 탐구하지만 ~ : 마니교의 이원론

(5) 악은 자유의지 때문에 생겼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Credo ① ut intelligam ② 신앙하고 이해하려는 노선위에 어거스틴도 서있다.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또 원하고 있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주체는 나다." 의지를 악용하는 것이나 왜곡하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이다.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할 경우 그것은 자유의지의 남용에 대한 심판.

4장. 하나님은 최고선이시다.

(6)

안셀름의 존재론적 증명

ⅰ. 가장 위대한 존재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수 없다.

"하나님은 그 이상 생각할수 없는 완전한 존재." - 이것이 전제.

안셀름은 사물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더라. 어리석은 사람을 빼놓고는 하나님은 더 이상 위대할수 없는 존재이다.

아퀴나스 : 제일원인이 하나님이다. 사물의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ⅱ.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하느냐 객관적으로 존재하느냐 ?

마음안에만 계시다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수 있다. 마음밖에도 계시고 마음안에도 계신 존재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안에만 존재하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수 있기에, 더 이상 위대할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객관적으로 계시다.

우리의 개념으로만 존재한다면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재로도 계시는 최고 존재가 하나님이다.

능력과 뜻이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존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알게된다.존재가 전제되고 알게된다.

하나님은 앎으로써 존재케 한다. 하나님은 아시고 존재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5장. 악의 원인을 찾아서.

(7) 악을 나 밖에서 찾는다. 자기가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이태까지 내가 악의 원인을 찾지 못한 것은 방법이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니까 악이 존재할수 없다.

"본래부터 어떤 악한 질료가 있었는데~".플라톤의 "Timaeum 의 요수"라는책에 나오는 창조설

태초에 하나님이 데미오고스가 세상을 창조 했다. 이데아가 있고 질료가 있다.

데미오고스(목수) ---> 이데아 (청사진)

↖ ↗

↖ ↗

질료 (재목, 구약의 혼돈과 같다)

이미 있었던 질료를 이데아에 맞추어서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 : 목수는 청사진대로 집을 지으려고 하지만 청사진 처럼 안된다. 재료 때문에. 재목은 집을 짓는 조력자가 되지만, 완전한 청사진에 대한 저항세력도 된다.

플라톤의 신은 재목에 제한을 받는 유한한 하나님이 된다. 재목이 저항못하도록 형상화했으면 이 세상에 악이 없을 것이 아니냐고 어거스틴이 질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다면 모든 것을 좋게 만들텐데, 전능하시다면 악한 질료가 거슬리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셨을까 ?

7장. 악의 원인에 대해 어거스틴의 고민.

(11)

부인 : 행복이란 낚시줄을 드리우고 참는것처럼 나에게도 참는 것

내가 말을 할 때 신문을 읽지 않는 것이다

남편 : 행복이란 내가 신문을 읽을 때 내 부인이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했던 말을 또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악에 대해 계속 반복하는 이유 : 악에 대한 해결되지 않는 신비때문에.

존재 / 불변 /심판/ 구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론 /구원을 보장하는 성서의 증거를 믿었다. 전통적이다. 그러나, 악의 원인에 대해 고민.

인간의 내면성 :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마음인데 마음밖에서 찾으려 했다.

하나님

인간

사물 - 육체

내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사물을 들을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관계가 될 때 안정이 되고 주님이 나의 기쁨이 된다.

이것이 본래적인 삶인데, 하나님과 나의 사이에 틈바구니에 사물이 들어왔다.

하나님

사물

인간

8장.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불안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극이다.

9장. 성서와 플파톤파의 철학

(13) Marius ,Victorius 회심이후 삼위일체론 썼다. 플로티니우스 책을 번역했다.

이 책을 어거스틴이 구입했다.

(14) 플라톤주의 책과 성서의 책이 거의 같았다.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언급한다.

플라톤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실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상대적인 세계에 못들어 온다는 것이다. 성육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데아가 질료에 들어오지 못한다.

(15) 황금- 애굽에서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서의 보배를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애굽에 있지만 황금은 황금이다.

아덴 - 희랍철학,플라톤철학. 2세기에는 플로티니우스(애굽의 알렉산드리아 사람)철학으로 이어진다.

황금은 플라톤주의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철학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신학의 방법으로 삼았다.

플라톤 철학을 신학의 방법으로 쓸수는 있으나, 종교를 만들지 마라.

황금은 좋으나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지는 말아라.

10장. 신적인 빛에 의한 진리로의 접근

(16) 플로티누스 -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으로 들어간다" - 플라톤 철학 : "당신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독교적이다

안에서 들어가 위를 바라본다. 위는 초월.

 

※ 어거스틴 사상의 기본적인 틀

"오 영원한 진리여! 참다운 사랑이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영 원

진 리

사 랑

영원한 존재를 말한다.

하나님은being이다(출3:14)

나는 존재한다. 내가 안다고 하는 내 존재의 원인은 하나님 존재 자체이다.

->내 존재원인을 다루는 것을 창조론에서 다룬다.


성부

존재론

I am

(신국론)

truth .빛을 말한다.

나는 안다.본다.


-> 조명설.



성자

인식론

I know

(그리스도를 통한 조명- 교사론)

Love

나는 사랑한다 .나의 의지


-> 어떻게 행복하느냐 하면 사랑의 대상을 발견함으로써 행복해진다. 이것을 행복론에서 다룬다.

성령

도덕철학

I love

(행복론)


우리는 삼위일체의 영상으로서 I am / I know / I love 하나님을 이해.인식.

진리의 빛에 의해서 인식을 하고 , 내 존재의 원인을 통해서 신을 인식한다.

신국론 11권24절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계시되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근원을 물을 때 신이 창조되었다고 대답한다. 지혜가 어디서 오는 가 물으면 신이 조명했다고 묻는다. 축복이 어디서 오느냐고 신이 보낸다고 말한다.

신의 생명이 , 신의 진리의 빛이, 그의 선하심이 우리의즐거움이 된다.

11장 . 참존재 비존재 존재

틸리히 1권 이성과 계시 being I am 존재의 문제

존재와 신의 문제를 다룬다

2권 실존과 그리스도 truth I know 인식의 문제

3권 생명과 영

역사와 kingdom of god love I love 사랑의 문제

신과 인간의 문제는 co relate

( 하나님 )true being , being itself

(세상) nothing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To be(being)

無에서왔으니 not to be(non -being)


참으로 존재하는 것 = 존재 자체true being , being itself 영원한 존재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못한 것을 창조하셨다 = 창조자와 피조자의 차별성

낳다 -> 동일성 성부 - 성자

창조 -> 차별성 하나님 - 인간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 無 nothing

무에는 두가지가 있다 prope nihil 거의 무 상대적인 무/ 무형의 물질/가능태

/흑암

omnino nihil 절대적인 무

절대적인 무에서 -> 거의무(흑암)를 창조하셨고, -> 상대무에서 세상을 만드셨다.

12권 8장 / 13권33장(519쪽)

하나님께서 절대무에서 세상을 창조가 아니라, 거의무에서 창조. 창세기의 흑암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할까봐 사45:7에는 나는 빛도 어둠도 창조했다.

cf)슐라이에르 마허는 무로부터 창조의 의미를 절대의존으로 말한다.(감정으로 설명)

어거스틴은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

존재라고 하는 것과 비존재라고 하는 것이 섞여 있다. 이 세상의 존재는 유한한데 그것은 to be와 not to be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고무줄을 한쪽에 묶고 잡아 당기면(not to be -> to be), 잡고 있는한 to be 이다. 그러나 고무는 제자리로 돌아가려는(not to be) 경향이 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모든 것은 not to be 無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인간으로 말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to be라고 하는 것은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잡고 있는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붙드시는,보존해 주시는 분이시다.

to be를 의지하고 not to be를 물리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간속에서 나타난다. 시간은 미래에서 오고 과거로 남는다(to be -> not to be)

따라서, 나(I am) 는 하나님( being ) 에 의존되어 있다.

 

Creatio ex nihilo

누가 집을 지었다고 하면 - 두가지 질문이 가능.

질문 1>무엇으로 지었는가 ? 라고 할 때

세가지의 가능성을 본다 -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고백록13권519쪽 (1) non de te 당신으로부터가 아니요(유출설을 거부)

플로티누스 -'유출설' : 일자,완전자는 말로 표현할수 없다. 너무 완전하기에 창조하지 않는다. 완전한 것은 산출한다. 정신이 흘러나왔고 -> 영혼 -> 물질이 흘러나왔다.

유출설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하나님이된다. 범신론에 빠진다. 모든 것이 신성을 가지고 있다. 범신론이 가면 만물 숭배로 빠진다. 창세기는 바벨론의 만물숭배(모든 것이 신들이라는) 사상을 뒤엎는다. p문서기자는 하나님이 창조했으니,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2) non de aliquia 질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맞서있는 것에서 하나님이 노력해서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제작설을 말한다.

플라톤의 timaeus 라는 책.

데미오고스라는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이데아가 있었고 질료가 있었는데, 질료를 이데아에 비춰 형성해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목수가 자료를 청사진에 의해 집을 짓듯이, 데미오고스가 하나님전에 있었던 질료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기에 악과 혼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것도 아니라고 한다. - 목수가 청사진대로 집을 지을 수 있는가? 질료는 목수를 도와주는 질료도 되지만, 제한하는 세력도 된다. 자기 뜻대로 지을수 없는 데미오고스의 신세, 유한한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질료까지라도 하나님이 만드셨다. 무로부터 만드셨다.

(3) 무로부터 창조했다.

무로부터의 창조의 신학적인 의미 -

①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한다. 신과 세계의 차별성을 두면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차별성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 세계관.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은 좋다. 기독교 신앙에서 무는 나쁘다.

"무가 되는 것보다는 지옥에서 타는 것이 낫다." 지옥에 타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 존재가 좋다. 하나님은 존재자체이기에. 존재 하는한 존재자체에 참여한다.

②의존성은 가변성 - 가변성이기에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좋다

③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다 좋다. 본래는 좋다. 창조의 존재론적 구조는 좋다. 악은 존재 구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에서 생긴 것이다.

④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한 목적이 있다.

질문 2> 언제 지었는가 ?

언제 세상이 창조되었는가 ? 신국론 11권 하나님은 세상을 시간안에서 창조하지 않으시고 시간과 함께 창조했다.

@ 시간안에서 세상 창조했다고 하면, ⅰ.창조이전에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마니주의 교도들의 질문) ⅱ.하나님과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몇살 ?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은 시간이 없다. 영원자. 창조이전에는 시간이 없다.

@창조는 절대시간,시작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다. 왜냐면, 시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창조, 다스리는 분이시다.

절대시작이 있기에 언젠가는 종말,완성이 있다. 종말은 하나는 끝finis 을 의미하고, 하나는 완성teros 을 의미한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성서적인가 ?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명령한다. 무로부터 창조했다. 절대주권자이다. 하나님의 세력에는 도전하는 것이 없다.

사45:7, (마카비2권 7장 28절)여기서 처음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한다. "하나님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줄 모르느냐"

쉐퍼드 "목회서신" - - - 어거스틴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정착시킨다.

12장 . 모든 존재는 다 선하다.

(본래는) 좋은 것이 나빠졌다 하더라도 다시 좋아질수 있다 = 구원론.

창조 자체는 좋다. 존재론적 구조는 좋다. 역사적인 사건의 잘못으로 인해서 나빠졌다. 그러므로 다시 좋아질수 있다. 나빠지게 된 것이 역사적인 사건의 사건의 잘못으로 나빠졌으니, 역사적인 사건(그리스도의 성육식)을 통해서 좋아질수 있다

그래서 첫째 둘째 아담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선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은 아주좋은 선이 아니라, 중간적인 선이다. 그러기에 타락할수 있고 좋아질수 있다. 나빠진다고 하는

아주 좋은 것이 타락하면 아주 나빠진다. corruption of best is worst

존재와 선은 일치한다. 좋은 것을 다 상실하면 존재도 상실한다. 좋은 것과 존재란 같다. Whatever is, is good .*존재하는 것은 좋다.

천사의 타락이나 아담의 타락이나 같다. 선하신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기에.

하나님이외에 존재론적 질료,세력 인정하지 않는다 = 절대유일신사상

리챠드 니이버"극단적인 유일신사상과 서양문화라는 책에서 존재하는 것은 다 좋다"

모든 것을 동등하게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존재의 계층과 선의 계층은 같이 간다

존재의 계층에 따라서 선의 계층이 있다. 이런 것이 함께 있으면 좋다.

13장.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함.

(19) 다 조화된다. 생태계의 조화를 말한다. 불필요한 것이 없다. (모기도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공헌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서는 조화되는지 모른다.

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화가 된다 .

라이프니찌히 - 하나님이 창조할수 있는 것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다.

14장. 온전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 즐거워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창조의 피조세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먹이사슬.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자연악 .

악은 두가지(자연악 / 인간악)이 있다. 자연악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인간의 잘못으로 생태계도 파괴되었다.

어거스틴은 말년에 가서는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예정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15장. 시간과 영원 .

하나님이 붙들고 지지해 주기에 존재한다. 틸리히 "하나님은 존재의 기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 성전을 위로 짓는다.

하나님은 땅에 계셔 -> 지하 성전을 짓는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기에 지나가는 시간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아래서 시간은 흐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16장 .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음이 악이다.

빵이 문제가 아니라, 병든이 입이 문제다. 빛이 문제가 아니라 병든 눈이 문제다.그런데 사람들은 병든 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빛에 대해서만 말한다.

창조의 계층이 여러개 있는데

높은층에 있을수록 하나님과 닮음이요

낮은 층에 있을수록 하나님과 덜 닯음

인간은 중간에서 하나님과 더 닮아야하지 않겠는가 ? 인간답게 살아라.

17장.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방해하는지

아름답다는 표준이 있으니 이 꽃은 아름답고 저 꽃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표준이 안된다. 그 표준에 의해서 이것은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 내 위에 어떤 표준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내면성의 원리 : 밖에서 시작해서 관찰하는데서부터 자기 안으로 들어오고(내면성) 자기 밖으로 초월한다(신비주의) - 플로티누스의 영향 .

플로티누스는 일자에서 유출해서 多에서 위로 올라간다(신비주의).

7권 신비주의 - 플로티누스 적이요 개인적인 신비주의

9권 10장에도 기독교적인 신비주의 체험이 나온다. 기독교적인것

10권 25,27,28장은 신비체험 =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체험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물체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부터 영혼으로 감각을 평가하는 지각에 다다랐다.점점 하나님께 올라간다.

습관의 세력에서 벗긴다 :

신비주의에는 3단계 :

(3) 교제 하나님과 연합 union 교제의 신비 (communion)

(2) 명상 concentration (하나에 집중한다)

(1) 정화 purification

냄새는 맡았다. 그러나 맛을 보지 못했다.

기독교인은 already - Not yet

아직 먹지 못했다. 그러나 향기는 맡았다. 구원의 확신을 어느정도 얻었다. 냄새를 맡은 것은 먹은것과 거의 같다. 그래서 당신을 즐기는데 알맞는 힘은 중보자 = 그리스도.

18장.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기독론을 말할 때 두가지를 생각한다. 삼위일체론과 연결된다.

person (who 인격)

work (what 사역)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때 삼위일체론 확정. 어거스틴은 논쟁적이지 않다.

325-381년에 정착했기에 이미 정착된 것을 어거스틴이 다룬다.

삼위일체론 = 하나님과 예수그리도의 관계가 무엇인가 ?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동질성을 말한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논쟁. 삼위일체론이 확정되자 예수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451년칼케돈 회의때 기독론 결정. (430년 어거스틴 사망) 어거스틴이 451년 기독론 확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요10:31 아버지와 나와 같으시다. 14:28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하나는 동질성을 하나는 차별성을 말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어거스틴 : 예수그리스도의 인품을 두가지로 본다(빌2장) 하나님본체로서의 아들 종의 형체로서의 아들.

희랍성경 : (하나님의 본체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들 = 영원한 아들 로서의 로고스를 말하는 것이다. 이면에서는 아버지와 나는 같다.

그러나 종의 형상을 입고 태어난 아들 이것은 성육신 하신 아들이기에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고 함.

영원한 형상으로서의 아들 (신성을 의미) 종의 형태로서의 아들 (인간성을 말한다.

20장. 플라톤주의 자들의 책을 읽음

마니교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것으로 보던 견해에서, 영적인 것으로 실체를 보는데 눈을 뜨게 된다. 유물론을 극복하게 된다.

플라톤주의 자들은 교만하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차별을 말한다.

플라톤주의는 겸손이 없다. 철학은 교만하고 기독교는 고백한다.

플라톤과 기독교의 차이를 말하고자 한다

1) 무로부터의 창조

2) 플라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아 못들어온다. 로고스가 이 변화무쌍한 세상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플라톤 : 이데아의 세계를 아는 것은 예지 지혜 /형상의 세계를 아는 것은 역견

위에서 출발

기독교 :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아래로부터(믿음이) 출발이다.

3) 가치를 찾아가는 것 : 하나님이 먼저오시는 그래서 우리의길이 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온다.

4)우리의 몸,세계가 중요하지 않다 : 본래 좋은 것이다. 세계와 우리의 몸을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말이 안된다.

5) 윤회적 시간 : 직선적인 시간

6) 교만 과 겸손의 차이. 겸손은 고백을 말한다. 플라톤주의에는 고백이 없다. 회개의 눈물, 성만찬이있었는가 ?

이론(7권)을 다 다루었지만 회심에로 인도되지 않는다 .회심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이다.

 

◈ 제 8 권.어거스틴의 회심 ◈

 

8권은 하이라이트이다. 어거스틴의 회심을 말하면서 의지의 왜곡을 말한다.자유의지의 왜곡을 알고자 한다면 8권을 보면된다.

1. 장.고민 끝에 심플리키아누스 사제를 찾아감.

(1)마니교에서는 결정론(신이 우리의 행동을 이미 결정했다)을 말한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결정론인가 ? 본래 자유스러운 인간의 의지가 죄의 쇠사슬에 의해서 노예화in Bondape 되었다(의지의 노예화). 노예의 상태가 되었다. 묶여 있는 것이다. 은혜가 와서 사슬을 풀어주었다. 마니교의 결정론은 영원히 결정되었다. 그러나 예정론은 그렇지 않다.

1)intellectual conversion : 어거스틴은 7권에서 지적인 확신intellectual conversion ,지적인 회심은 어느정도 되었다.

2) Existential conversion : 하나님을 지적으로 용납하였다고 해도 하나님을 실존적인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8권에서는 실존적인 conversion 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신앙적인 고백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하게 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결단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ex 빌리그래함)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결단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런데 등을 졌던 사람들이 결단에 있어서 배를 맞춘다. 결단에 가서는 한침대에서 잔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결단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고 한다.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간 이유는 암부로시우스가 너무 바빠서, 암부로시우스를 보좌하는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갔다.

교황이 암부로시우스의 스승 심플리키아누스를 밀라노로 보내서 암부로시우스를 보좌하도록 했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신플라톤주의 학자이다. 밀라노에 와서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세웠다. 그래서 암부로시우스의 설교에 플라톤주의색이 나오기에 어거스틴이 관심하게 된 것이다.

(2)이전에 어거스틴을 사로잡았던(명예 돈 )으로부터는 풀려났다. 여자로부터는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실 기독교에서는 독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19 나면서 홀로된 사람이 ~

예수님, 바울도 그렇다.

중세기 동안에 교회가 너무 타락을 하게 되었다. 그런

기독교 천년의 역사를 한국교회 100년이 반복하고 있다. (목사가 자기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있고, 총회장당선되기 위해 돈을 쓰고 있다.)

그래서 라튜란 종교회의에서 사제들 독신을 법제화했다.

2장. 빅토리누스의 참회에 대하여

3-4세기의 유명한 교부이다. 어거스틴의 빛에 가리운 사람 .[삼위일체론]

플로티누스의 책을 희랍어를 라틴어로 번역. 아리스토틀의 10범주 번역. 이사람하고 심플리키아누스와 친구. 심플리키아누스 때문에 교회로 오게되었다.

어거스틴이 심플리키아누스와 접촉하게 된 것은 플라톤주의에 접촉하게 된 것이다.

(3) 왜 심플리키아누스를 찾아갔는가 ?

학자들은 "자기의 구부러진 인생길을 고쳐보려고 /플라토니즘을 더 알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고백은 자기만의 고백만이 아니라, 제자, 부모님의 삶의 고백, 빅토리아누스의 고백을 말한다. 그래서 고백록이 복수(고백들)로 되어있다.

(4) 빅토리아누스는 기독교 책을 읽고 기독교 진리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은 기독교 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intellectual conversion 을 의미한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하나가 될 때 교인이라고 한다. 어거스틴 너도 신플라톤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빅토리아누스의 대답 "교회의 벽이 교인을 만드는가 ? "

세례는 공동체 예배 석상에서 받아야 한다. 공동체와 연합하는 것이 세례이기에 신앙공동체 앞에서 세례를 주어야 한다. 병원에서 임종직전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님 한분이라고 가야 한다.

5장. 내적 투쟁.

빅토리누스의 이야기를 듣고 어거스틴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 243p.

빅토리누스는 어떤 사람인가 ?

아프리카 사람이다.

플라톤 철학자이다.

수사학자이다 .

어거스틴과 너무 같은 점이 많다. 그러나, 빅토리누스는 수사학을 버리고 세례를 받은 것이 다르다. 어거스틴은 빅토리누스와 같이 되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는 이유를 말한다. 자기 의지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의지(선택)의 자유① 왜곡된 의지에서 ->② 욕심(libido)-> ③ 버릇(습관)cosuetudo -> ④필연(의지의 노예,종 : 여기는 자유가 없다)

** 번역에서 빠진부분 243p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그래서 나는 그것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노예(종)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왜곡된 의지 앞에는 의지의 자유,선택의 자유가 있다. 선택의 자유가 있기에 의지의 왜곡이 있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가 탐욕으로 빠지고 이것을 계속함으로 버릇이 생기고, 이것을 반복함으로 굳어져 숙명같은 필연,쇠사슬에 묶인다. 여기는 자유가 없다.

중독자는 스스로 결단해서 빠져 나올수 없다. 중독에서 빠져나갈수 있는 것은 밖에서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이 밖에서의 도움을 어거스틴은 은혜라고 한다.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어거스틴은 세가지 라틴어를 사용한다

①posse non peccre (able not to sin) - 의지의 자유 아담 타락이전

②non posse non (not able not to sin) - 타락이후 모든 인류는 필연 중독 상태 어쩔수 없이 죄를 지을수밖에 없는 상태

③non posse peccare (not able to sin) - 구원받은 사람, 죄를 지을수 없는 상태

펠라기우스 : 모든 아이가 태어날때는 아담타락 이전의 상태로 태어난다고 했지만

어거스틴은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그래서 나는 그것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노예(종)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243쪽 빠진 문구

'쇠사슬의 고리'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 아담이후에 세대들이 역사적으로 고리처럼 연결되어서 우리 인간을 노예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놓았다. 이것을 원죄라고 한다.

@ 개인적으로 실존적으로 어거스틴이 죄를 저질를 선택의 자유가 있었으나 의지의 [왜곡 -> 욕심-> 버릇 - > 필연]이라는 종의상태에 놓여있다. 인류를 말하기도 하고 자기를 말하기도 한다. 인류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어거스틴은 인류가 죄에 있어 죄의 상태에 있을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구원의 소망은 은혜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11) 진리인식은 이미 되어 있지만 그것갖고는 안된다.

(12) 결단을 말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잠에 비유한다.

습관의 폭력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자기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처음은 자기가 한 것이다. 자기 힘으로 안된다. 은혜의 부상.

어거스틴 이전에는 도덕적인(율법적인)해석이 많았다, 어거스틴에 와서는 기독교를 도덕적으로 해석(펠라기우스)하지 않고, 은혜의 종교로 말한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에게 졌다면 기독교는 도덕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은혜를 통해서 살아나면 도덕이 완성된다. 사랑안에서 율법이 완성되는 것처럼.

어거스틴을 처음 회심으로 인도한 것은 빅토리누스의 이야기.

두 번째는 안토니우스 이야기이다.

6장. 안토니우스(251~356)에 대한 이야기.

(15) 아타나시우가 쓴책이다. 5인가6 번인가 유배를 당했다. 그래서 애굽의 사막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성 안토니를 만났다. 아타나시우가 다시 블란서로 유배를 가게되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서방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다.

7장. 자기성찰.

안토니우스의 이야기를 듣고 어거스틴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

"I seek in order to find

and I find in order to seek."

자유의지론 3권을 쓰는데, 회심후 돌아올 때 로마에서 쉬면서 1권을 쓴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제2권을 쓴다. 1권과 2권에 사상의 차이가 보인다.

가장 악한 악은 선한 의지라는 가면을 쓰고 저질러진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장으로 가면서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검토(성찰)되어지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자신으로부터 나와 자신의 신앙,삶에 대해서 reffledct 해야 한다.

(16) 날개 = 사랑의 날개

"내가 날개를 치고 하나님께로 가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공기를 날개아래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갈수 없습니다."

8장. 정원에서

정원 = 동산

어거스틴의 책에서 정원이라는 말이 나올 때, 그것은 수도원을 의미한다.

(20) 자기분열

+--wish (will) =본질 .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그 | 러나 우리의 삶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수 없다.

+--I can't = 실존

하나님은 본질과 실존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 불면증이다. 시험공부하려고 하면 더 졸려.잠을 자서는 안되겠다 하면 졸려. 반대로 잠안온다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뒤의 생각은 안자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것도 해답이 안된다.

9장. 두가지의 의지.

자기분열의 원인을 말한다.

문제해결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을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을 왜 할수 없느냐 ? 쇠사슬에 묶여 있기에. 왜 쇠사슬에 묶여 있는가 ? 전적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분열 때문에 100% 원하지 않는다 . 이것은 의지의 병이다. 아담의 후손의 죄로 인해서 그러는지.

습관과 애인을 같이 말한다. 습관이 애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유혹된다.

11장. 영과 육의 싸움.

(26) 습관을 인격화시켜 여자에 비유했다.

(27) 인간의 노력을 암시.

12장. 어거스틴의 참회

(28) 배나무밑에서 죄인인 어거스틴.

무화과 나무 = 십자가의 나무. 새사람으로 바뀐다.

(29) "들고 먹어라." 뱀이 "따먹어라." 라고 한 것.

어린이는 은근히 아기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은혜의 박사.Doctor Gratia "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총을 일생동안 설명하고 신학적인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회심후에 카시키아훔(밀라노에서 70km)에 가서 6개월 동안 4권의 책

(회의론 반박, 행복론, 질서론, 독백론)을 썼다.그리고 나서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알리피우스, 아들과 함께)

1) [자유의지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로마와 오스티아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해안이 봉쇄되어 1년연기되어 어머니는 죽고 , 로마로 가서 자유의지론 1권(LiberaDoctor Gratia)을 썼다.

고향으로 가서 사제가 되기 직전에 2권을 썼다. 396년에 감독이 된 후에 3권을 끝났다. 쓰는 과정에서 사상이 변한다.

1권은 대화의 형식,2,3권은 서술형식으로 썼다.

2)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낸 제 문제에 대한 답]

396년 감독이 된 후에 회심을 도와준 심플리키아누스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준다.

3) 고백록 8권

1) 자유의지론

악이란 두가지 인간이 행하는 악(자연재해) / 인간이 겪는 악이다.

인간이 겪는 악은 인간이 범한 악에 대한 벌이다. 두가지 다 인간의 의지의 남용으로 인해 생긴 벌이기에 두가지 다 자유의지에 결과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악의 원인을 인간의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인간의 내적인 욕심,탐욕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래서, 악의 원인은 내적동기에서 찾아볼려고 한다.

존재의 가층이 있듯이, 가치의 계층이 있는데 가치의 계층에 따라서 사랑을 해야 하는데, 악인은 상층보다는 하층의 것을 사랑하고, 선인은 상층의 것을 사랑해서 최고의 것을 사랑한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의지이다. 이것은 자유결정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고로 이 의지가 어디로 향하는가에 따라서 선한의지/악한 의지가 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지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되고 결정된다는 자유의지의 결정론을 말한다. 그것은 곧 영원한 진리에 등을 돌리고 가변적인 상황으로 돌리는 가변적인 의지. 자연사물이 악한 것이 아니라 전도된 의지의 상황의 결정이 악을 행하게 된다.

: 원하면 의지는 상승할수 있다는 것이다. 1권에서는의지와 능력을 구분하지 않는다. 악이란 높은 가치에서 돌아서서 밑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

괴로움,고난등은 악한의지의 결과이다. 인간의 책임이다.

2권에서는 하나님이 왜 죄를 범할 의지를 주셨는가 ?

자유의지는 오용할 가능성이 있으나 의지 자체는 선한것이라고 한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선을 행할수도 없다.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의 의지를 중간적인 선이라고 한다. 위로 올라갈수도 밑으로 내려갈수 있는 선이라는 것이다.

선용할수도 악용할수도 있기에 중간적인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

중간적인 선은 최고의 선은 아니다. 상하로 선택하여 전향할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선을, 이러한 의지의 방향전환은 강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되어지는 것이기에 벌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의지전향의 원인은 무엇인가 ? 알기 힘들다고 말한다.

무로 향하는 의지는 결핍의 운동이다. 무를 잘 모르는 것처럼 , 무로 향하는 의지는 결핍의 운동으로서 잘 모른다. 결핍의 운동은 무에서 유래된다고 말한다.

그러한 결핍은 의지적이기에 인간능력의 한계에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결핍의 운동으로 본성이 파손되고 훼손되고 결함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파손과 결함을 낳는 것이 악덕이다. 악덕속으로 떨어진 인간은 자력으로 서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된다는 것을 말한다.

어거스티은 처음으로 죄를 범한 인간의 현실성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3권 - 자유의지가 쉽게 선을 원하게 되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악에로의 의지이지 인간의지의 현실성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아담때는 최고의 선을 자연스럽게 사랑할수 있었다.그러나 타락이후 하층의 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제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했기에 책임이 있다. 선을 안다는 것과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을 구분한다. 아담의 타락이후 최고의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지의 실존상태는 비참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비참은 원죄의 결과이다. 원죄에서 인간의 비참이 생기고 비참의 결과는 무지와 곤란이다. 무지는 당연히 해야할 일에 대한 지식의 결여,곤란은 해야할 일을 할수 없는 나약성이다. 이것은 도덕적인 나약성이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알수 없고 알아도 할수 없다, 이것이 벌이다.

인간의 본성은 습관의 폭력에 의해 부패되어 제2의 천성으로 만들어 졌다. 그 결과 우리의 현실은 1무지로 인해서 선을 알지 못하고,/ 2혹은 알아도 행하지를 원치않으며,/3 원해도 그것을 행하지 못한다.

마니교에 결정론의 반대하여 자유의지의 비결정론을 주장해고

인간의 현실적인 비극적인 상황을 통찰하므로써 , 원죄를 주장하게 된다.

원죄를 어떻게 극복할수 있을까 ?

우리는 위에서 원죄로 인한 무지와 곤란을 말했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무엇을 할수 있었던 때에 그것을 바로 행하지 않으면, 인간은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을 행해야 하는 당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행위를 동반하지 않으면 지식을 상실하게 된다.'

지식과 자유의지도 행하지 않으면 ,무지와 태만으로 빠진다.

의지의 태만은 인간의 고유의 죄다.

무지와 곤란에서도 완성에로의 출발로 삼아야 한다.

무지와 곤란이 있더라도, 인간은 더욱 선과 악을 구분하고 하나님을 향해 전진하면 유덕할수 있다.

태만이라는 부덕이 있더라도 완성과 행복으로 향할수 있는 위대한 존엄성이 있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경향은 아닌가 ? 이에 대해 이것은 오해라고 한다.

자기는 자유의지론에서 악의 기원을 논했지 악에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재고록에서 펠라기우스파 사람들은 우리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했다고 생각하나 그들의 생각은 무익하다. 실재 자유의지란 죄를 범할, 선을 행할가능성을 말한다.

2) 심플리키아누스에 대한 제문제에 대한

396년 감독이 된 이후에 썼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재평가를 한다.

책2권을 보낸다. 1권에 나온 두답을 한다.

1번째 답은 로마서 7:7-25절을 토대로 답한다.(성서해석)

불트만의 해석과 거의같다. 2번째 답은 9:10-21절로 답한다.

1번째 답 - 롬7장의 인간의 상황은 영적인 사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인간,쾌감으로 악을행하도록 끌려가는 인간을기술하고 있다. 누구든지 금지된 것을 알면서 행하는 자는 노예이다. 1권17에 나온다.

노예된 인간이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수행하는 행동을 구분한다.

그는 율법의 지식에 관한한 율법에 동의하지만 행동에 관한한 죄에 굴복한다 .

노예는 자유가 없다. 바울은 이것을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어떻게 인간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알수 있는가 ? 바울은 어떻게 자신안에 선한 것이 없는 줄 알았는가 ?하나는 원죄의 유산으로 이어받은 본성, 하나는 쾌락에 심취되는 습관이다. 죽음은 원죄에 대한 벌이요 쾌락에로의 심취는 죄를 반복함으로 생긴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쾌락에로의 심취를 증가시킨다. 인간은 그것을 극복할수 없게 된다. 그런 인간에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인가 ? 롬7:18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의지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수 있는 현실적인 능력이 무력해졌다.무력한 의지는 원죄에 대한 벌의결과이다.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의 제2본성이라고 말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죄와 죽음을 반복하는 습관에 압도되어 선을 행할수 없다. "노예가 된 인간"이라고 말한다. 1권1장14절

죽을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자유의지의 한가지 사실은 원하는 대로 의를 행할것이 아니라 의를 행할 수 있는 분에게로 회심해야 한다. 회심의 가능성은 will.

자유의지가 죄에 노예가 되었어도 ,하나님에게 향할수 있는 것도 자유의지이다.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의는 신앙을 통해서 획득되어진다. 1권 제 2문제에 대한 답.

2번째 질문 답 : 롬9:10-29 예정과 선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자유의지와 은혜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1권에서는 신앙에 의해서 은혜가 획득되어진다고 했으나, 2권에서는 신앙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배경에는 인간의 원죄설이 놓여있다. 온인류는 죄덩어리이다. 근거는 두가지. 하나는 바울의 성서해석통한 신학적 통찰 두 번째는 자신의 견해이다.

신앙의 은혜는 선한행동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행한다.

은혜는 선한행동을 선행하는 것이지 선한행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통한 은혜없이는 선한행위도 할수없다. 선한행위는 내적인 곤고와 외적인 곤고로 인한 것인데, 외적인 곤고는 성례,설교, 내적인 곤고는 성령의 감화.

외적, 내적 곤고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신앙도 하나님의 먼저 부르시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부름과 선택은 다르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사 부르시는 것이다. 이 부름에 따라 신앙이 생기고, 이 신앙으로 의롭게 되며, 그 결과로 능력을 받아 선한행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

⊙ 자비(은혜) -> 부르심 - > 신앙 -> 의롭게 됨 -> 선행 -> 택함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자비가 선한 행위에 철저히 선행한다.

어거스틴은 고전 4:7말씀을 늘한다.

신앙과 자유의지와의 관계

신앙을 야기시키는 것은 부름(외적 : 성례,설교 내적 : 성령의 감화)로 주어진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겸허하게 받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택함으로 가느냐는 의지문제이다.

많은 사람이 부름받으나 택함받은 사람은 원하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롬9 장16절을 인용하여 인간 의지의 참여를 부정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면 우리의 원하는 바가 아무 소용없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가 소용없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나님의 자비가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우리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하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는 자유의지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행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다.

선한의지는 하나님의 선을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이 선행한다.

부르심이 없이는 원하지도 못한다. 1권 2문제 12절

이상의 인용구를 보면, 어거스틴은 신인협동설을 배격한다.

cf)신인협동설 - 아퀴나스,에라스무스.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나의 의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 칼빈 .

도덕론 - 웨슬레

왜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했을까 ? 네번째로,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

(고전 15:22) 인류는 죄인의 집단, 죄의 덩어리이다. 이말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현실적으로 죄의 노예상태이다. 이런 노예상태에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령의 선물,은혜의 주입이다. 인간의 의지를 내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회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점에서 어거스틴은 "오직 은혜로"라는 말을 드러낸 교부신학자이다.

7권 17장(23) 내 자신의 무게 = 이것을 어거스틴은 육체의 버릇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적인 이분법이 아니다. 여기서 육체라는 것은 인간의지의 존재방식이다. 의지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서 인간의지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의지의 존재방식에 의해서 악이 규명된다.

이것을 나중에는 의지의 쇠사슬이라고 말한다.

8권 5장 (10) 왜곡된 의지 -> 욕심(Libido) -> 버릇 -> 필연

이것은 서로 연결되어 노예로 만든다.

역사적으로 실존적으로,개인적으로 말할수 있다.

역사적 : 타락이후 인간의 모든 행동은 쇠고리처럼 연결되어 우리까지 왔다.

아담안에 내가 있고 내안에 아담이 잇다. 온 인류가 죄의 덩어리이다.

개인적으로도 내안의 죄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죄된 행동은 본성에 변화를 일으키어 버릇이 생기고 필연이 생긴다. 제 2의 본성이 생긴다. 인간의 노예상태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필연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영과 육의 싸움 : 육의 의지와 영의 의지

하나님을 향한 영의 의지와 습관의 폭력에 의한 육의 의지의 싸움이다.

이것을 혼의 병이라고 한다. 그 원인을 자신안에 죄라고 표현을했다. 자발적으로 죄를 지은 아담으로부터 온 것인데, 어거스틴도 아담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 신학적인 인간론 : 내 자유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회심이전에는 옛의지의 압력에 의해 노예상태에 있었다. 그것을 잠에서 깨어 나고 싶어도 깨어날 수 없는 상태로 비유.

 

◈ 제 9 권.어거스틴의 세례와 모니카의 죽음 ◈

 

1장. 죄에서 해방된 영혼

(1)행동에 죄

말,혀의 죄

의지의 죄 - 여기서 다 터져나온다.

그렇게 안되는데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낙관론

자유의지가 살아나온다. Enabling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고 스스로 원하도록 했다.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비에서 call이 나오고 거기에서 신앙이 나온다.

욕심이 3가지 - 명예와 이득과 정욕(결혼)

필연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론이 아니다. 결정론은 어떻게 할수 없다. 변화가 없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말하는 필연은 노예화된 의지,쇠사슬에 묶인의지를 말한다. 쇠사슬을 끓으면 자유의지가 힘을 발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즐겁게 하게된다.

인격적인 관계 - 어린아이 같은 어거스틴 : 하나님

2장. 교수직의 사표를 고려함.

(2) 수사학 - 언변을 파는 시장.

(4) 폐가 약해져 - 웅변을 잘하려면 폐가 건강해야 하는데, 폐=수사학을 못하도록 하심.

4장. 카시키아쿰에서

학자들은 어거스틴이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아직도 어거스틴은 학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회의론 비판, 행복한 생활, 질서론, 독백록- 6개월동안.

6장. 세례를 받음 (387.4.25 or 26)

회심은 세례와 연결되어야 한다. 세례는 외적인 증거이다.

10장. 오스티아에서 본 비젼.

정원 : 하나님과 자기와의 1:1로 대화할수 있는 조용한곳.

7권에서의 신비체험은 플라톤적인 체험.개인으로 말한다.

신비체험 - 회심하고 기독교인이 되어 체험.개인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한다. 미래적인 연합을 기다린다. 성도의 교제 그리고, 미래에서 기대하는 것.

11장. 모니카의 죽음 .

하나님에게는 먼곳이 없다. 원근법이 없다. 영원한 현존앞에 인간은 같은 거리에 있다.

12장. 모니카의 장례와 어거스틴의 애도.

왜 눈을 뜨고 죽었는가? 열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장례 - 어머니는 불쌍하게 죽은 것도 아주 죽은 것도 아니다.

이 증거는 어머니의 선한생활,믿음,이성 이 세가지가 영생을 증거한다.

1) 선한생활은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 (칸트).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

2)영생에 대한 믿음

3)이성 : 인간은 가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이성의 근거.

기독교인의 장례는 축제여야 한다.

*① 하나님의 자비 ②하나님의 부르심 ③믿음 ④칭의 ⑤선행 ⑥선택(함)

왜 선택이 선행다음에 오는가 ? 택함이 의롭게 함을 선행하지 않는다.

ACC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내는 논설(396년 초기작품) - "따라서, 사람은 선택되지 않았다. 선한행동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고, 선하게된 것은 선한행동을 하도록 해가지고 선택되었다."

후기(428~9)에가서는 - [성도의 예정] 펠라기우스 주의도 아닌, 어거스틴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므로 쓴 책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도 선택받은 자만부르신다.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하고 말았다.

예정 - 그런고로 하나님의 예정은 은혜를 받도록 준비시킨다. (따라서,칼빈은 어거스틴의 후기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은혜라고 하는 것은 예정의 결과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예정된 자들을 부르셔서 예정하신 그 아들에 멤버로 삼으셨다(32장).

34장 - 그런고로 그들은 예정에 의해서 예정과 함께 만세전부터 선택되었다.

{예정 -> ① 하나님의 자비 ②하나님의 부르심 ③믿음 ④칭의 ⑤선행 ⑥선택(함)}

하나님이 먼저 예정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부르셨다. 부르실때는 선택된 사람들을 부르셨다. 따라서, 선한 것은 예정과 부름의 결과이다.

 

◈ 제 10 권.기억의 신비 ◈

 

10권의 테두리 : 10권부터는 현재를 고백한다.

2장. 모든 은밀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은혜 - 내 공로는 없다.

3장 고백의 효용.

(3) 고백록이 기록된 이후 사람들이어거스틴이 고백록에서 말한 것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한마디로 대답한다. 이 고백은 신앙공동체의 형제들에게 하는 것이다.

(4) 무슨목적으로 고백을 하는가 ? 현재 나는 기독교인,감독이 되었지만 역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또 죄를 짓게될 여건속에서 모든 시험을 받게 된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성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4장. 고백의 목적

(6) 현재는 10권 미래에 대해 있을 일은 11-13권에서 말하려 한다.

5장. 제한된 인간의 지식.

(하나님을 알게되어 가는 과정을 말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가는 모습, 그리고 나중에는 이세상에서 시험을 받게 되는 것을말한다)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나에게 어두움은 남아있다.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정오)때까지 .

6장.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식 (어떻게 하나님을 알수 있는가 )

(9) 세상의 사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니다.

조화와 미는 창조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밖에서부터 세상사물에서부터 인간의 마음안으로 들어간다.

외부(피조물)에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영혼이육체보다 낫다. 인간을 말할때는 영혼을 말한다.

"내 시선의 특사" -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찾을 수없다. 내적인 영혼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7장. 감각만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함.

외부 -> 인간의 내면 -> 상승에로 초월(신비주의와 거의 같다)

영혼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기 때문에 영혼을 통해야 위로 올라간다. 지각의능력은 동물도 가지고 있다. 지각만 가지고는 하나님을 알수 없다. 내면의 세계로 들어오면,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8장. 기억의 힘.

우리는 흔히 기억이라 하면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데, 10권에서 기억이라함은 의식계와 무의식계를 총 망라해서, 영혼의 내적인 모든 것을 종합해서 기억이라 한다.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서 상상을 통한 개념들이 들어있고, 수학적인 원리같은 모든 것이 들어 있어 내가 원할 때 불러오는 의식계를 말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의식계,무의식계를 총망라해서 기억이라 한다. 기억이라는 창고에서 불러내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개념이다.

기억을 초월한다는 것은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찾아간다 할 때, 여기에 행복(진리)가 있다.

20장. 모든 사람이 찾는 행복.

하나님추구 = 행복추구 = 진리추구

"내 육신은 영혼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고, 내 영혼은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 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느냐 ? 행복했다가 행복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행복을 알지 못하면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모든 인류가 아담의 타락한 죄에 참여한 것처럼, 아담이 한때 행복했었던 것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아담이 잊어버린 행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진리를 찾는 것이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25장. 기억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변하기에 인간의 마음에도 없다.

27장.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

완전한 합일은 아니다. 왜냐면,목말라 하니까.하나님과 우리가 합일을 한다는 것은 미래 종말론적으로 오는 것을 말한다.이미(순간적인 것) 미래에 연합하게 될것이다.

29장.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

신비의 경험을 비추인다. 겸손을 자랑하는 것도 교만이다.

40장.비참한 인간의 실존

10권의 요약이다. 인간의 혼으로 들어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42장. 거짓중보자.

내가 하나님에게 상승해도 습관의 무게로 떨어진다. 그래도 가능하면 하나님께 가고자 하면 중보자가 필요하다.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수 있다.

죄인,적대자라 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못본다는 말이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같아야하고 동시에 인간과도 같아야 한다" CF(칼케돈 신조)

** 안셀름 [만족설] 왜 만족이라고 했는가 ?

속죄론은 교부가 없다. 어거스틴 사상과 안셀름의 신학에 나온다. 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는가 ?해서 안셀름이 쓴책이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안셀름은 어거스틴 계열의 사람.

※ 속죄론에서 3가지 유형

1) 이원론 :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는 이원론에 근거해서 속죄론을 전개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자기를 악마에게 넘겼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에게 속해있기에 다시 하나님께 오려면 악마에게 보상을 해주고 인간이 올수 있다. 예수를 대속물로 속해주고 인간을 풀어주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대립에서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주었다.

2) 만족설 : 여기서는 악마를 제거시킨다. 하나님은 악마에게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충돌은 하나님과 악마와의 충돌이 아닌 하나님안에서 정의와 자비가 충돌한다. 정의와 자비를 어떻게 해소시키는가? 여기서 안셀름의 속죄론이 나온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빚을 졌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했는데, 현실은 하나님을 배반해서 불행하게 되었다. 불복종,배반으로 빚을 졌다. 하나님께 갚아야한다.

①행복은 하나님께 복종해야 오는 것인데.

②죄(배반,불복종)

③빚은 갚아야 한다. 인간이 갚을수 없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인격과 권위와 정비례한다. 평행한다.개를 보고 발길로차면 아무 관계없다. 개라고 하는 존엄성은 없기에. 그러나 학생한테는 똑같은 행동이라도 하면 안된다. 왜냐면, 학생은 존엄성이 있기에. 죄는 권위와 인격에 정비례한다.

내가 하나님에게 지은죄는 빚은 하나님은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자에게 짓는 빚은 무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④인간은 빚을 갚을 수 없다.

⑤누가 갚아야 하는가 ? 인간이 빚을 졌기에 인간이 갚아야 한다.

⑥누가 갚을수있느냐 (능력)? 무한자.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다.

⑦우리와 화해하실 분은 죄를 갚아줄 분은

참 하나님이여야 하고 참 인간이여야 한다.

 

◈ 제 11 권. 시간과 영원 ◈

 

2장.성서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기원함

(3)"나 자신만을 위함이 아니요 ~ "

리차드 니버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 ? "교회의 목적은 사람들사이에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3장. 천지창조에 대하여.

(5) "나의 시작에"대해서도 말하고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도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 " 신학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를 하되 합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4장. 피조물이 창조자를 증거함.

CONTIN GENCY 우발적인 존재이다. 전에 없었던 것이 있고, 지금 있는 것이 없어진다. TO BE 와 NOT TO BE 가 섞여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기에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름답기에 내가 아름답다. 그러나, 똑같이 수평선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대문자로 인간은 소문자로

God is - Being - Good

I am - being - good

5장.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공작

시간과 공간인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디서, 언제 만드셨는가 ?

어거스틴의 대답은 천지창조 이전에는 공간도 시간도 없다. 세상을 창조할때는 걁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창조했다. God Alone 극단적인 유일신 사상.

창조는 말씀안에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시간안에서 창조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함께 창조했다."

시간안에서 창조하셨다면 시간의 지배를 받게되고 영원자가 되지 않는다.백발 하나님이 된다.

6장.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다르다.

공간을 통해 들려오는 말과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9장.하나님의 지혜

태초에 라는 말을 어거스틴은 두가지로 쓴다

1) 시작에. 시작이라는 말을 말씀으로 해석한다. 말씀안에서

2) 시간의 첫 번,태초

말씀안에서 / 태초에 라는 두가지 뜻이 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것을 사모하는 사랑" like and unlike 내가 하나님과 어떤 면에서는 같기에 불타지만,가까이 하고, 같지 않기에 두려워 떨고 있다.

10장.창조이전의 시간을 묻는자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이시다. 세상창조이전에 아무것도 없었다. 도중에 창조하시기로 하셨다. 한때 없었던 것을 창조하겠다고 하셨는가 ? 창조하겠다는 생각이 영원부터 있었느냐 ?

한때 없었던 것을 하겠다고 하신다면, 없었던 것(의지)가 있게 되는 것 아니냐,하나님 안에도 없었던 것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 변화가 있는 것 아닌가 ?

어거스틴 "내 능력밖이다."

틸리히 "우리는 현실적으로는 영원하지 않지만 잠재적으로서는 우리는 영원하다.

우리는 시간적인 존재지만 잠재적으로는 영원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이데아에 영원히 있었기 때문이다."

11장.영원과 시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영원이란 항상 머물러 있는 것"

지금 사람들은 영원이란 무한히 흐르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NO라고 한다. 영원은 항상 머물러 있는것이지만 시간은 항상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다.항상 흘러가는시간이다. (무상)

영원에 대한 정의 : "동시적/ 현재적/"

하나님의 영원안에서 시간이 흐른다. 하나님의 영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12장. 창조 이전을 묻는 자에게 주는 대답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

절대시작에서 시간을 창조하신것이아니라 창조와 함께 시간을 창조하셨는데, 절대시간에 하나님이 창조이전에는 시간이 없었는데, 시간밖에는 "이전"이란 말이 없는데 어떻게 창조이전을 묻는가?

13장.창조이전의 시간이란 없다.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 아니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

무한한 시간의 연장이 영원이 아니라, 영원의 탁월성(시간을 초월해있다)

천사의 시간이 있는가 ? 천사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잊는다.

하나님

천사

인간

질료(무): 시간이 없다. 무시간성 : 천사, 질료

14장 . 시간이란 무엇인가 ?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

시간이라 하면 시계의, 시계바늘의 운동을 본다.시간을 못보고 공간화된 시간을 본다. 그것은 바늘의 운동, 공간이다. 시간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다 .답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인간밖에서 시간을 찾으면 ,시간밖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묻는자가 없으면) 자기가 의식의 세계에서 시간체험을하고 있다.시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누가 물어서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시간아닌 다른 것으로 표현하기에 모르는 것과 같다.

시간체험 : 경험세계에서 체험된 인간의 삶의 시간(이것을 시간성이라고 한다)이다. 시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는 내적체험을 말한다.

시간성을 분석해보니 ①과거는 이미 없다. What is time? 이라 할때 시간의 본질은 무엇what 이다. 현재 is이다. 그러나 이미 없다. is가 아니다.

②미래는 아직 없다. not yet 과거로 흘러가지 않으면 영원이다. 영원은 머물러 있는 것이기에. 시간이란 non being로 흘러간다.

③우리에게 현재란 있는가 ? 없다. 과거와 미래와 교차되는 순간(현재)가 있는데, 너무 빨리교차되어 없다.

그러면, 시간이란 없는 것인가 ? 있다. 우리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현재 미래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다. 시간은 없는 것이지만 , 있기에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밖에서 찾지 아니하고 내면의 세계에서 찾을 때, 시간은 이미 없지만 과거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포착되고 ,미래는 기대속에서 포착되고, 현재는 지나가지만 직관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영혼안에서 (삶과 관계된,체험적 시간)존재"

"과거일의 현재 현재일의 현재 미래일의 현재" :

기억, 기억 기대,직관은 현재의 form이다. 이렇게 시간을 내면에서 포착하면 현재로 들어온다. 영원한 하나님도 현재라고 한다면 우리도 시간내에서 기억,기대,직관이란 현재적인 것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하나님과 접촉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현재는 하나님의 현재와는 다른 쪽에 떨어진 영원(과거의 현재,현재의 현재,미래의 현재) 아니겠는가 ? 그러나 이 현재라는 것은 기억이라는 것에 기대라는 것에 직관이라는 것에 떨어지기에 인간은 불안하다.

이 불안한 증상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면 ?

인간의 시간의식이 기억,직관,기대라는 것으로 흐트러진 것을 Distentio animae(심리적인 묘사가 강하다)영원의(혼의) 분열(팽창)이다. 현재가 기억과 직관 기대라는 것으로 분열, 쪼개졌다.그래서 이 세계속에서 인간은 비참하다.

기대하는 것이 직관을 통해 기억으로 떨어지기에 인간의 삶은 불안정하다.

Dissilatio animae (실존적으로 불안)

29장.많은것에서 한분에게로

인간은 시간속에서 영원한 세계를 직관함으로 영원한 현재를 맛볼수 있을까 ? 우리는 안된다. 그리스도안에서 가능. 영원자이시면서 시간적인 존재이기에, 시간적인 존재와 접근을 하고 영원자에게 갈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붙잡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나를 붙잡은 것을 내가 붙잡아야 한다.

영원의 분열Distentio animae,Dissilatio animae 을 극복하는 방법은 영원에 집중,지향성이다. 하나님과 연합할 때 분열을 극복할수 있다.

31장.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아신다.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현재로 있으니까 전지하시다.

 

Ⅰ. 도나투스 논쟁.

(1) 역사적인 배경.

초대교회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력이 많았다. 고대교회 감독들은 대개 순교로 마쳤다. (요새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감독,노회장 되려고 애쓰지는 않을 텐데)가장 큰 박해는 64년에 네로의 박해이다. 이때 베드로,바울이 순교했다.

이 박해는 로마시에 한정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95년 도미시안황제박해는 제국전체의 박해이다. 이때 기록된 책이 계시록이다. 250년경의 로마 황제의 상에 제사를 드려라. 제사를 드리지 않은 기독교인은 순교, 제사를 드린 사람은 직명을 받았다. 배교한 사람은 어떻게 할것인가 ? 문제가 제기되었다. 303-305년의 Dioclentia황제가 기독교를 없앨려고 했다.모든 성서를 당국에 바치게 했다(성서가 없어지면 기독교가 자연히 없어질것이라고 생각)

성서바친 사람을 배교자(Traditor )라 하고 박해후에 배교했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올 때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다. 강경파에 속한 사람이 도나투스파이다. 교회는 본래 거룩한 공동체이다. 배교자가 있으면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2) 직접적인 요인 : 카르타고 교회의 분열이다.311-312년 (콘스탄틴황제가 서방교회 통일312년)에 카르타고의 감독 Mensurianus 가 죽어 후임으로 Caecillianus 이 감독으로 세워진다. 문제 발단은, Lucilla 라는 돈많은 여자 (사제로 있을때)가 순교자의 뼈를 교회성당에 가져와서 입에 맞추고 뺨에 뼈를 대고, 이 사제가 무안을 주었다. 그때 이 여자가 앙심을 품고 있었다. 감독이 되자, 이 여자가 그 지방의 70인감독을 자극시켜 Caecillianus 의 감독직을 무효화 시키려했다. 감독이 되려면 3사람의 감독이 안수를 주어야 하는데, 안수를 준 사람중의 한 사람 felix 이 성서를 바친 배교자이기에 안수는 무효라고 주장. 그리고 자기들의 감독으로 Majorinus를 세웠는데, 일년도 못되서 세상을떠났다. 그후의 감독으로 선임한 사람이 도나투스이다. 40년동안 감독으로 있으면서 전통 카토릭과 싸웠다. 그래서, 도나투스파 교회가 탄생.

*특징은 북아프리카 지방에만 제한된 지역파 교회이다.

반 로마제국감정과 함께 퍼져갔다.

라틴어를 쓰지 않고 , 베르베의 지방언어를 쓰는 사람으로 이루어졌다.

*콘스탄틴과 도나투스파와의 관계

콘스탄틴황제가 312년에 서방 로마를 통일하고 박해를 중지시키고 교회에 혜택을 준다. 문제는 카르타고 교회가 두 개이다. 정통적인 카토릭과 도나투스파교회.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통해서 로마를 통일시키고자 했는데, 기독교 때문에 제국이 분열된다. 호시우스를 보내서 상황을 조사하게 한다.호시우스 감독은 정통적인 카토릭파이기에 Caecillianus 감독의 교파의 교회가 정통이라고 보고해, 콘스탄틴은 Caecillianus 교회에만 특혜를 주게 되고, 도나투스파 교파는 콘스탄틴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내게 된다. 두봉투를 가져왔다 . 봉한 고발 봉투위에는 탄원서제목이 쓰여있었고, 봉하지 않은 봉투위에 글은 "황제에게 호소합니다. 각하의 부친께서는 다른 황제와 달라 박해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가울지방에서 판사를 보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 주십시오."

황제가 메시지를 받고 처음에는 대단히 분노했다가, 종교회의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로마 라테란 궁에서 카토릭 11명, 도나투스파 11명, 가울(블란서)지방 3명,이태리 15명, 교황 1인이 모여 종교회의 개최.(315년 니케아 회의 이전의 312년 최초의 교회회의)이다. 결과는 "페릭스이 성경을 바친 근거가 없다. 도나투스파 교회는 재세례를 준 교회이다. " 주의를 주고 회의는 마쳤다.도나투스파들은 그것이 승복하지 않았다. 회의를 요청하고 회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호소하여 라테란 교회회의 무효화,페린의 성경바친 것을 조사해달라고 호소. 알레스 회의를 열어서 결론을 내린다. "페릭스감독은 성경을 바친적이 없으며, 페릭스 감독 고발한 사람은 징계, 배교한 사람이 발견되면 사표를 내게하지만 감독직은 그대로 두게하라."

황제 개인이 나서서 문제 해결해 달라고 다시 요청. 소요사태가 날 가능성이 있어서 내려가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결정을 내렸다.

"Caecillianus 감독은 무죄하다. 반대파는 중상자이다.

알레스 교회회의에 승복하지않으면 엄벌에 처한다."

317년 도나투스파 유배,재산몰수명령. 카르타고에 대성전을 지어주었다.

도나투스파가 폭력배들을 보내 교회를 탈취했다.

폭력배 (circumcellion) 사당에서 제사있을 때, 주변에서 기거하면서 떡을 얻어먹 는 사람들. 칼을 들지 말라고 했기에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제를 치고 성전을 빼앗고 소금물로 다시 씻는다. 그들의 구호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들의 지도 자는 도나투스파 사람들이다.

이렇게 나오니까, 카르타고의 카토릭계통의 감독들은 황제에게 간섭해 달라고 호소한다. 처음에는 어거스틴은 참석하지 않았다가, 후에 참석

405년에 호놀리우스라는 황제가 교회통합의 칙령을 내려 재세례를 금하고 도나투스파교회를 정죄. 이단과 분열을 같이 보게한다.

마셀리우스를 카르타고에 보내 회의(411년6월)를 열게한다. 카토릭 286명, 도나투스파 279명참석하여 목욕탕강단에서 3일간 회의를 열었는데, 바울이 이단과는 앉지도 말라해서 도나투스파가 서서 하기에 모두 서서회의를 했다.

412년에는 교회 일치칙령에 복종할 것, 국가의 힘에 의해서 교회분규는 끝이 나고 강제로 통합되었다.

(3) 어거스틴과 도나투스파들의 신학논쟁

니케아 회의 325년

콘스탄틴노플회의 381

에베소회의 431

칼케돈회의 451 - 기독론

marks of the church - " 교회는 one ,holy ,Catholic,apostolic"

도나투스파는 이 네가지 중에서 거룩에만 중심,어거스틴은 모두에 중심

391년에 감독이 되어 히포로 돌아간다. 히포시(3만명)의 사람들이 대부분이 도나투스파교인들. 카토릭교인에게는 빵도 안파는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시를 만들어 보급을 했다.-> 도나투스파의 역사적 배경, 신학적 타당성 알려주고,-> 회의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글을 통해서 -> 감독회의를 통해서 국가에 해결요청.

 

 

1.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여야 한다. 결코 분열되어서는 안된다. 단일성 일치성을 가지고있다.단일성은 그리스도의 옷이 한폭으로 되어있듯이 결코 찢어서는 안된다.

하나됨은 교회의 연합,일치성,사랑에 근거한 것인데, 도나투스파는 사랑의 본질을 위배한 것이다. 분열은 배교자체보다도 나쁘다.

2) 거룩성 - 초대교회부터 흠과 티가 없는 교회를 말해왔다. 초대교회에서 세례이후의 죄를 어떻게 할것인가 ?터툴리안 "한번은 용서해주자. " 용서받을수 없는죄 우상숭배, 간음, 배교

온건파에서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속죄하게 해주자는 주장도 있었다.

배교자가 있는교회가 어떻게 거룩할수 있는가 ? : 도나투스파의 주장

(1)도나투스파의 거룩은 -사회적으로 경험적으로 현실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거룩치 못한 너희들 -----> 분리

거룩한 우리들

현실적으로 너희들 거룩치 못해 구원 없다. -----> 분리

우리는 거룩해 구원받는다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거룩해야 한다.

(2) 어거스틴의 거룩

- 도나투스파의 폭력배의 행동은 거룩한가 ?

- 성경을 바치지 않은것에 거룩성을 두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 교회의 거룩함은 교인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이룩한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 교회는 밀알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있는 밭이다.누가 가라지를 뽑을 것인가 ? 추수때까지 기다리라. 분리시킬때는 종말때요, 뽑을 분은 하나님이시다. "

어거스틴 이전의 감독 시플리안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방주다.교회밖에 있으면 홍수에 죽고 교회 안에 있으면 산다" -> 교회밖에 있는 사람, 교회안에 있는 사람 둘로 나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수정해 "방주안에도 정결한 짐승과 정결치 못한 짐승이 섞여 있다. 교회는 거룩한 거룩치 못한 교인이 섞여 있다." 거룩한 공동체는 100% 이룩하지 못한다는 말.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이다.

교회는 현실적으로 완전한 하늘 나라의 불완전한 이미지이다.

교회는 불완전해도 거룩하지 못해도 觧찮은가 ? 그것은 아니다.

"머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몸도 거룩해지도록 노력,성화의 과정의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를 거룩한 너희와 거룩치 못한 우리 구별,분리하지 말라.

교회와 세계를 분리시키지 말라." 모든 사람을 세계를 포괄하는 교회관을 수립한다.

3) 보편성 (전세계적)

도나투스파들은 북아프리카에만 한하기에 거룩성만 주장하다가 보편성도 거룩성에 들어온다. 거룩성과 보편성을 같이 본다.

어거스틴은 보편성에 대해서 "교회는 세계적이여야 한다. 세계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도 단일성을 유지하고 모든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다. 이것이 카토릭교회이다. 행1:8을 인용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아프리카 교회의 지방색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카토릭적인 세계적인 것을 주장했음이 놀랍다)

4) 사도성.

도나투스파들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은 거룩성에만 두기에 사도성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사도성을 중요시한다. 도나투스파는 로마교회의 사도계승족보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로마교회의 사도성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방의 사도적 교좌(바울이 세운 아시아교회)도 포함한다.

2. 세례

도나투스파 :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거룩하지 못한 배교한 사제들에 의해서 준세례는 거룩하지 못하기에 무효이기에 다시 받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대답 : 역사적으로 교회는 재세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례의은혜는 인간의 생활과 행동으로 부패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례를 둘로 나눈다. 타당성(validity )과 효과성을 말한다.

타당성 :세례의 타당성이 인간의 거룩성에 있다면 세례줄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

세례는 사제의 거룩성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에 근거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준 모든 세례는 객관적으로 타당하다.

효과성 : 사랑의 덕으로 줄 때 그 효과가 나타난다.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는 말은 도나투스파들이 준 세례도 타당하다. 용납한다. 그들의 세례로 교회가 통일되는데 장애가 되지 않게 한다. (에큐메니칼적이다)

3.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논할 때 도나투스 논쟁을 설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을 비판하는 교회사가는 교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국가의 힘을 빌린 처음 케이스라고 비판한다.

1) 어거스틴이 국가의힘을 빌린 두가지 이유는

(1)어거스틴은 마니교와 싸울 때, 국가의 세력을 빌리지 않고 합리적인 설득,방법으로 이해시키고 극복할수 있었다.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도 글,토론,회의를 통해서 해결할수 있으리라 믿었으나 실패했다.

(2)폭력단의 등장으로 설득을 포기했다. 어거스틴이 교회설교하러 가다가폭력당들 이 길가에서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내자가 어거스틴을 잘못 인도해서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마지막으로 다른 감독들이 황제에게 호소하자고 할 때 싸인을 했다.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황제에게 호소한다.

2) 국가의 힘을 빌린데 대한 어거스틴의 변증

(1) 황제에게 제일 먼저 호소한 사람은 도나투스파들인데, 황제가 듣지 않자 자기 들은 황제와 상관없다고 했다. (어거스틴이 먼저 황제에게 호소한 것이 아니다)

(2) 폭력당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힘만 가지고는 안된다. 교회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할수없이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을수 없었다.

어거스틴의 국가관 " 하나님은 목자를 주었지 왕을 주지 않았다.원래는 목자의 역할이었는데, 인간이 악하다 보니까, 국가가 형성되고 왕에게 권리를 주어서 악한 사람이 더 악한일을 못하도록 제어하는 소극적인 방법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인간의 악함을 전제로 하고 제어하는 수단으로 국가의 힘을 말한다.

(3) 국가의 개입으로 도나투스파의 폭력이 무서워 눈치를 보던 교인들이 자기 결단으로 카토릭으로 넘어왔다. 교인들의 자유결단을 위해서 국가 개입을 요청했다.

(4) 국가개입으로 교회가 평안해지니까, 어거스틴은 보다 적극적으로 눅15:16 "사람들로 강권해서 내집을 채워라"는 말씀을 인용해서 국가의개입을 강하게 요청하고 강제로 끌고 들어가며,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킨다. 강압에서 타성과 습관에서 벗어나 교회가 평안해지니까 정당화시킨다.

(5) 당시의 국가권력의 개입은 외부의 압력의개입이 아닌, 교회 자체가 행한 교회의 훈계라고 본다. 황제도 교인이다. 황제가 교회밖에 세속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 있다. 황제에게 호소하는 세속에호소하는것과 다르다. 교회일원황제에게 호소함으로 길잃은 양떼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은 이교도들을 강제로 교회로 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객관적인 타당성 -> Ex opere operato

"내적인 마음자세로 인함이 아니라, 의식자체로 은혜가 내려진다."

효과성 -> Ex opere operatio 로 발전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개입으로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된다고 주장할수도 있다. 너무 자신의 교리만을 주장할것이 아니다. (카토릭과 개신교의 일치성)


 

Ⅱ. 펠라기우스 논쟁

.도나투스 논쟁이 마무리 될무렵 어거스틴은 다른논쟁에 휘말린다.

도나투스 논쟁은 북아프리카에 한정.펠라기우스 논쟁은 전 기독교 세계,그리고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온 것이다.

이 논쟁에서 은총론, 예정론, 원죄론이 나오게 된다. 어거스틴 이전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1. 역사적인 배경.

펠라기우스는 390년경에 영국에서 로마로 왔다. 로마의 부패를 개혁하려고 한 수도사였다. 많은 로마사람이 존경했고 추종했다. 그는 도덕론자요 윤리적 기독교를 주장한 사람이다. 펠라기우스와 생사를 같이한 변호사 Caelestius 와 감독 줄리안이 펠라기우스와 평생을 같이 했다.

오트족이 로마를 침략하자 410년경 Caelestius 와 함께 로마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갔다. 북아프리카의 어거스틴을 만나려고 갔었지만, 어거스틴은 도나투스 논쟁으로 카르타고에 가 있었다.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어거스틴을 멀리서만 보았다. Caelestius 는 카르타고에서 안수받아 자기 이론(펠라기우꾁의 이론)을 설파하려 했다.412년 카르타고에서는 Caelestius 의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고,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래서, Caelestius 는 에베소에 가서 사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위험한주장을 인식하고 글을 내고 회의를 통해펠라기우스를 규탄했다.

415,416년에 아프리카에서는 교회회의를 열어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파문했다. 418년 200여명의 감독이 모여 원죄론, 절대은총의 필요성등 9개교리를 정해 교황에게 보냈고 교황은 그것을 받아들여 교서를 각교회에 시달하였다. 그 내용은 펠라기우스와 Caelestius 는이단이다. 원죄론 주장. 구원에 필요한 은혜, 세례의 효력을 주장했고, 이교서에 모든 감독들은 서명할 것을 명령했다.

남이탈리아의 줄리안감독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해서 위배를 가게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논쟁중에서 쓴책이 많다.

[유아세례에 대하여 / 영과 경문 / 인간의 본성과 은혜에 대하여 / 인간의 의의 완성에 대하여 / 그리스도의 은총과 원죄/ 결혼과 정욕/율리안 감독 반박/ 은총과 자유의지/ 성도의 예정]

430년 에베소회의를 열려고 할 때, 로마 교황과 어거스틴을초대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430년 8월에 죽었다.그래서, 회의 연기해서 431년에 열어 네스토리우스와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2. 펠라기우스의 주장.

고백록 10권 29장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행할수 있도록 하게 해주시고." 이글을 읽고 나서,펠라기우스는 "이러한 글은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을 위태롭게 한다."

Caelestius 는 기독교인은 다 책임있는 존재이기에 도덕적으로 온전해져야 한다.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결단을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을행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담의 타락이후에도 인간의 본질적 본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유의지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도 하나의 모범이지 우리의 결단없이는 안된다.

1)은혜 2)자유 의지 3)원죄와 4)세례에 대해서 논한다.

1) 은혜

(1) 하나님이 인간을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존재로 창조했다.

자유의지는 선을 행할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의 능력을 전제했기에 주신 것이다.

(2)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따름으로 선을 행할수 있게 하셨다. 율법도 은혜이다.

(3) 예수를 보내서 인간을 가르치시고 모범이 되게 하셨다.

(4) 죄의 용서, 약속과 선행에 대한 보상도 은혜다.

비판 : 합리적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만 본 것이다.

2) 죄

(1) 인간의 불가피한 상태나 조건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잘못선택한 행동이 죄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현재에 영향을 준 것이 죄라고 한다.

"sin as act" 죄란 인간 본성 외부에 있어 죄는 인간본성을 깨뜨리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소다.

죄를 철과 녹에 비유해서, 녹은 철의 외적요소인것처럼, 죄가 인간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금욕, 회개를 통해 죄짓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기독교인이 말하는 은혜를 새로운 율법이라고 해석한다.

3) 자유의지

(1)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킬수 없는 법을 주시지 않았다. 자유의지란 선을 행할 능력, 가능성을 말한다.

(2) 인간은 태어날 때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났다. 창조때 주신 선물이다.

이 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면 지상에서도 인간은 죄없는 삶을 살수 있다고 말한다.

(3) 하나님은 정의롭기에 편견을 갖고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예정,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한다.

4) 원죄, 세례

(1) 모든 인간은 동등한조건에서 출생했고, 인간의 본성은 항상 같다.어린이는 아담의 타락이전의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죄를 안지을 수 있다.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요 후손의 죄는 후손의 죄다. 후손에게 아담의 죄 책임을 물을수없다. 죄의연대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원죄를 뎶는데 세례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원죄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다. 죽음이란 죄값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다. 아담이 죄를 짓지않았어도 죽게마련이다. 인간은 원래 유한한 존재였다.

비판 : 도덕적, 인본주의적이다

3. 어거스틴의주장 (8권)

어거스틴이 초기에는 마니주의를 반대해서, 선한창조,자유의지를 주장했다.

후기에 와서는 죄로 얼룩진 현실을 통찰하게 된다. 현실은 철저히 타락한 상태이기에 은혜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1) 죄

(1) 펠라기우스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도덕적인 교훈정도이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은 "sin as state "이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악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펠라기우에게 있어서 은혜는 외적이다. 그리고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행위를 단절된 비연속성으로 본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죄를 연속된 쇠사슬로 본다. 8권 5장. 습관은 본성에 변질을 가져온다.(녹이 철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선한 의지를 계속 사용하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죄를 지으면 그 결과 일방적인 방향으로 나빠진다. 다시 상승,호전할수 없게 된다. 인간은 타락하는 자유밖에 없다.

죄를 짓지 않을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인간은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수 없다. 이러한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본성을 내면에서부터 치료해 변화시킨다. 의지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동인(EnablinGrace) 본질적인 변화를 준다. 이것을 선행은총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지 인간의 노력의 결정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온 인류는 죄의 덩어리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러한 상태를 교정하거나 통제할수없다.

원죄로인해 내부로부터 오염되있어 인간자신이 구원할수없고, 하나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2) 은혜

(1)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 펠라기우스의 말에 가깝다.

이말은 "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이렇게 하라고 명하신다." 와 상통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지 못하는 사람을 도우신다.(선행은총)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돕지 못하는 사람을 돕게한다.(협력의 은총) "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의지를 FORM 형성하고 REFORM 재형성하고 creat 창조하고 recreat 재창조한다. 그래서, 그가 명하는 것을 하게 하신다. 이러한 은총은 믿음을 통해서 받게된다.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것이다 . (루터는 의롭게 칭한다고했지만)

은혜는 율법을 완성하게 한다.은혜는 자유의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 자유의지를 바로 세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없이 역사하셔서 우리가 원할수 있도록, 우리 없이 역사하신다. (빌2:13)

그다음에는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은 협력하셔서 우리가 원상태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계속 선을 행하게 하신다. - 은혜와 자유의지 34권.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행은총으로 새 의지를 우리에게 주시고, 협력의 은혜로 새의지를 완성시키신다. 내적으로 움직이고 선을 행하게 한다

점점 의롭게 되어 성화의 과정을 밟아 간다. 그러나, 기독자는 회심후에도 성화의 과정에서도 이 세상을 살아갈때 시험과 유혹과 싸우며 걸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지을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을수 없는 상태는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교회관을 말한다

도나투스는 흠없는 교회를 말하고 펠라기우스는 도덕적 사회,교회를 말하지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온전한, 거룩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도나투스,펠라기우스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식민지와 같은 교회이다.

그 안에서 금욕생활을 하는 분리된 종파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전세계에 퍼져있는, 밀알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은 카토릭적인 교회, 역사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요양을 병원과 같은 것으로 서 원시교회가 말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교회를 말하지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펠라기우스는 고대교회의 마지막 대표자와 같다. 율법적인 종교 . 그러나, 어거스틴은 도덕적인 것을 초월하는, 고대교회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아닌, 계속해서 성화시키고 치유하는 대리자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다시 나타난다.

3) 예정론

(1) 필연적으로 예정론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되었기에 예정론으로 귀결될수밖에 없다. 펠라기우스주의자는 어거스틴을 마니교(결정론자)라고 비난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은 바울사상에 근거해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택한 것이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다. 보편적 구원은 없다. 야곱은 택하고 에서는 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신앙이란 것도 하나님의 부름에 인간이 응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켜 믿게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왜 의로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을 버리셨는가 ?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예정은 하나님의 정의에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야곱,에서 할것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비가 멸망받을 사람중에 택하셔서 구원받게 하신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인내를 주셔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실까 ? 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되 묻는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을까 ?  

ⅰ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어거스틴개인의 삶의 토대로서 이해해야한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택했음을 어거스틴은 고백한다.

어거스틴이 설교를 하다보니까 설교를 듣는 사람은 듣고 , 안듣는 사람은 안듣는다.여깃 예정을 선택한다.

ⅱ. 성서적이다. 성서에 근거한 것이다.

ⅲ. 그리스도인에게 격려하는 희망의 메시지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했다고 하는 예정론은 어거스틴 당시 불안한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격려와 희망을 준다.

좋은 의도에서 예정론이 쓰여졌다.

폴 틸리히 : 만일 어거스틴이 아닌 펠라기우스가 승리했다면, 기독교는 도덕적 종교로 전락했을 것이다.

어거스틴이 싸운 것은 마니주의,도나투스,펠라기우스.

이 세부류가 관통하는 것(공통점)은 도덕주의, 금욕주의(인본주의 사상).

초기에 마니주의를 비판한 어거스틴에게서 도나투스,펠라기우스파와의 논쟁을 예견할수있다고 하는 것이다.

** 공처가가 목사님께 상담

목사 : 네가 쥐새끼냐 남자냐 ?

공처가 : 내가 남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 부인은 쥐새끼를 무서워 해요.

** 자동차 수리공 힘들게 하루를 보내, 자주 허리가 아파. 그런데도,아들이 야구 하자니까 야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부 인 : 쉬지 무슨 야구예요.

수리공 : 내가 지금 허리아픈 것이 나중에 아들 때문에 골치아픈 것보다 낫다.

** 부흥설교를 하는데 , 신부가 어린아이를 내려다 보고 조금찌푸리니까

부인이 자식을 내려다 보더니 안고 나가니까, 미안해서 설교를 중단하고 부인에게

신부 :부인 나가지 마시오 내 설교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인이 자식을 안고 뒤돌아보면서,

부인 : 내 자식이 신부님 설교에 방해가 되서 나가는게 아니라 , 신부님 설교가 내 자식 자는데 방해가 되서 나갑니다.

** 천국에 가니까 장로님이 식당에서 보이를 하시는 거야.

어찌된 일입니까 ? 장로님.

하도 대접만 많이 받아서 천국에서라도 봉사를 하라고 하신다

목사님은요 ?

배달나가셨어.

** 부부가 감자를 먹다가

남편은 고추장에 찍어먹는다고 부인은 설탕에 찍어 먹는다고 하다가 결국 양가싸움으로 번져 이혼까지 하려고 하게 되었다. 교수가 그소식을 듣고 ,

교수 - 난 도저히 이해할수 없소. 겨우 감자 때문에 이혼이라니.

우리집은 소금에 찍어먹는데.

** 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남편에게 친구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 친구들이 물었다.

"어떻게 지내나 ?"

-"이제 무릎을 꿇고 나한테 말해."

"아니 무릎을 꿇고 ? 어떻게 그렇게 했어?"

-"무릎을 꿇고 말이야. 침대밑에다 대고 야이 새끼야. 너 안나와?"

** 헌금

카토릭 사제 : 나는 줄을 긋고 헌금을 하늘로 던져 오른쪽에 떨어지면 하나님께 드 리고,왼쪽에 떨어지면 내가 갖는다.

개신교 목사 : 나는 헌금 바구니를 놓고 하늘로 헌금을 던져 바구니에 들어가면 하 나님께 드리고 바구니 밖의 것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유대교 랍비 : 나는 헌금을 하늘로 던져 하늘에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땅에 떨 어지면 내가 갖는다.

** 목사

집안에서 아이가 동전을 삼켰다. 남편과 부인이 "어떻게 하냐 ?"

남편 : "목사님을 불러와."

부인 : 아니 의사를 불러와야지. 왜 목사님을 불러와 ?

남편 : 요새 목사는 누구에게든지 돈을 빼낼 재간이 있어.

** 교황 바올로 2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던중에 3가지 질문을 한다.

하나님 사제가 결혼할때가 오겠습니까 ?

- 글쎄 언젠가는 될 때가 있겠지만. 생전에는 안될거야

수녀가 사제 안수 받을때가 오겠습니까 ?

- 글세, 되더라도 네생전에는 안될거야 .

폴란드 사람이 교황이 될 수 있습니까 ?

- 내(하나님) 생전에는 안될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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