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나는 어떤 일군인가? (딤후 4:9-12)

好學 2011. 9. 26. 20:25

 

나는 어떤 일군인가? (딤후 4:9-12)

 


이 시간에 “나는 어떤 일군인가?”라는 제목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군입니까? 여기 바울을 도왔던 하나님의 일군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이름은 약 여섯 명이지만 9절이 디모데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모두 일곱 명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 세 종류의 일군을 발견합니다.

1. 데마와 같은 일군입니다.

본문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골4:14을 보면 데마는 과거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힐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일시적으로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히자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항해 떠나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 바울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저렇게 헌신한 사람을 이토록 옥에 갇히고 비참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회의, 아마 그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진정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복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어요. 세상의 영광과 복을 구하는 사람은 고난이 오면 언제든지 그만 둘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산 고신대학 다니는 학생의 말을 들으니 처음 입학하면 90%는 목회자 사모가 되겠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2학년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사모 되겠다는 사람은 몇 %도 남지 않는답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 보이니까 그러나 목회자 사모가 된 선배들을 보면서 마음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시적 감정으로는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곧 그만 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고난이 와도 핍박이 와도 반대가 와도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는 데마라면 진정 회개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2. 마가와 같은 일군입니다.

14절에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했습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가는 120명의 문도들이 기도하다 성령 받은 다락방 주인집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방을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뿌리가 깊은 사람이에요. 그러한 마가는 어떤 고난도 각오하고 제 1차 전도사역 때 바울과 바나바를 돕는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복음사역에 외로움과 박해와 고난이 심해지자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뒤돌아서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제 1차 전도는 마가에 있어서는 실패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데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제 2차 때 또 다시 뉘우치고 바울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제 1차 때 제 맘대로 한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행 15:39). 그래서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둘로 갈라져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뉘우치고 나중에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혔을 때 늘 찾아가서 만나며 바울을 돕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한 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골4:10이나 벧전5:13 등을 볼 때 사도들이 인정할 만큼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이 마가입니다. 감상적으로 하다가 말다가 하는 약한 마가였지만 진실로 변화 받은 마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에는 못했다면 지금은 뉘우치고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만이 보면 일군이지만 과거에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나서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도 마가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사람이 두려워 숨어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속히 회개하여 하나님이 인정하고 교회에 실망을 주지 않는 참된 일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누가와 같은 일군이 있습니다.

11절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바울에게 분신같이 있으면서 바울을 도왔던 사람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가복음을 쓴 집필가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의사는 유망한 직업으로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포기하고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함께 동행했습니다. 사도행전 곳곳에 보면 누가가 바울을 극진히 수종을 들면서 함께 했던 흔적들이 있지만 누가는 우리라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고 충성된 일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더구나 일생 목회를 도와 말없이 교회를 섬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같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는데도 한결같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교인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저도 간혹 그런 생각해 봅니다. 내가 교인이라면 어떤 교인이 되었을까? 좋은 교인이었을까? 가시 같은 교인이었을까?

그러나 누가는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바울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노라’ 숱한 고난 속에서도 낙망치 않고 바울의 위로자가 되어주었고 모든 수고를 감내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속적인 영광을 버리고 오직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바울과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굶고 헐벗은 누가였습니다. 가서 보십시다만 하나님 나라에 바울의 상이 크겠지만 이와 똑 같이 상을 받은 사람이 누가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회원 여러분!

예수님은 충성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군을 찾으십니다. 데마와 같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외면하는 자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마가와 같다면 속히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누가와 같이 한결같이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사랑하는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