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헌신예배] 어떤 그릇이 되어야 합니까?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느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의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보존되어 있으며, 얼마나 오늘도 밝게 빛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신앙의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어떤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느냐? 아름답고 건강하냐? 혹은 그의 재능과 기술이 뛰어 났는가 하는 것은 세상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절대로 우리 기독교인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귀한 인간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얼마나 변화가 일어난 것이 있으며, 또한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얼마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가치의 기준의 요건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가 가진 소유나 기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삶속에서 보람을 얼마나 얻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따라서 본문에서 "그릇"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 교회의 일군'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한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을 비유하여 본문에서는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귀한 그릇들을 열심히 자신을 선한 도구로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쓰임 받고 공급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큰 집에는”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큰집이란? 원어로는 <오이코스>인데 이 말을 혹자는 ‘넓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암시한다.’고 하지만 ‘작게는 가시적인 교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릇의 종류를 다양하게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바울은 다양한 그릇을 기능별로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 절을 롬 9:21-23과 상관된 것으로 보아 '귀히 쓰는 그릇'은 "영광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롬 9:23)이며, '천히 쓰는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해석의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 내에 귀하게 쓰이도록 예비 된 교인과 천하게 쓰이도록 예비 된 교인이 있다.’는 해석이 잇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런데 지상에 그릇 종류가 다양하게 존재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도 여러 가지의 그릇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어떤 그릇인가 살펴보면서 참된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그릇이 되어야 귀한 그릇이 될 수 있겠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랬습니다. 본문에 “쓰는 것”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에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귀한 그릇이란 자기의 일에 충실 하는 꼭 쓸모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한 그릇이란 자기의 임무를 망각하고 소홀히 여겨서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비싼 그릇만이 귀한 그릇이 아니요 쓰이는 그릇이 귀한 그릇이란 점입니다. 여기 금 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네 종류가 나오지만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라도 일단은 쓰임 받아야 좋은 그릇입니다.
대통령이 그 사람을 들어 쓰면 그 사람을 그 순간부터 신분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신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요? 매일 쓰는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쓰지 않고 보관하기만 하는 그릇은 좋은 그릇이 아닙니다. 지금은 아무리 귀해도 시간 지나가면 구식 그릇이 되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맙니다. 옷도 마찬가지지요. 옷처럼 유행 타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아껴 입는다고 장롱에 걸어만 두다가는 나중에는 유행 다 지나가고 맙니다.
어느 분은 “나는 장롱에 숨겨둔 비단이 되기보다 마루 구석에 놓여 진 걸레가 되고 싶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민족지도자 이승훈 선생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한 걸레가 되고 싶다. 민족의 더러움을 씻어 주고 싶다.” 자신이 민족을 위해 사용되어진다면 걸레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한 걸레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책도 아무리 양장본에 금 도련을 하고 아트지를 써서 칼라로 아름다운 모양을 했어도 보지 않는다면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린도전서 4:1절)”고 말씀합니다. 전재(筌齋) '이수정(李樹廷: 1843-1886)'씨는 우리나라 개신교 초기 신자로서 첫 한글성서 번역자의 한 사람입니다.
한국 선교사로 파견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이수정'으로 부터 2개월 간 한국어를 배워 그해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이들 두 선교사의 손에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들려 있었습니다.
이수정씨는 일본의 문화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 및 조운(漕運)시설 등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그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츠다(津田仙.1837∼1908)'씨를 만나 교분을 맺고 근대적인 농법, 법률, 우편제도 등을 배우다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키가 크고 다른 사람은 작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걸머지고 온 보따리를 벗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수정이 "이것이 무엇이냐"하고 묻자 그들은 '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책이냐?"고 다시 묻자, 그들은 "이 책들은 당신 나라의 모든 책들보다도 더 귀중한 책들이다."라고 대답했고 그가 "도대체 무슨 책인데 그렇게 귀하냐?"고 묻자 그들은 "성경책이다."라고 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수정은 자기에게 준책이 바로 꿈의 그 책인 것을 깨닫고 자원하여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7개월 만이었으며 그의 나이 40세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조선정부가 기독교 수용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거기다 그는 정부의 고급 관료였기 때문에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에 입교한 이수정은 '성경을 동포들에게 읽혀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글성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1883년 6월초 복음서 및 사도행전 번역을 끝내고 누가복음과 로마서도 번역했으나 인쇄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한문성서에 우리말 이두(吏讀)식의 토를 단 '신약성서마태전'(新約聖書馬太傳) '신약성서마가전'(新約聖書馬可傳) '신약성서로가전'(新約聖書路可傳) '신약성서약한전'(新約聖書約翰傳) '신약성서사도행전'(新約聖書使徒行傳) 등 5권이 각기 1천부씩 출간되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1885년 2월에는 일반 민중 층을 위한 순 한글성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번역하여 5천부 발행하였습니다. 이 책은 국한문 혼용으로 한문 옆에 한글로 훈을 달았고 고유명사의 경우 가능하면 성서 원어 발음을 따르려 노력했습니다.
이 한글성서가 바로 1885년 4월 5일 인천을 통해 국내에 처음 입국한 개신교 미국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H.G.)와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가지고 들어온 책입니다.
이수정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한국복음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위해서는 '이수정'의 역할이 있었고 이 뒤에는 일본인 '츠다'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츠다' 뒤에는 또 다른 이름 모를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이며,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일군임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합니다.
어떤 분이 LA 해장국 집에 갔는데 어느 자리를 보니 빈 탁자에 빈 그릇들과 주저 젓가락 등이 비닐에 싸여 놓여 있더랍니다. 그리고 거기 표시가 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해장국을 드시던 자리” 라고 되어 있더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보관용에 지나서는 안 됩니다.
한나 여전도회원 여러분들은 지금 쓰고 있는 그릇입니까? 아니면 자리만 차지하는 그릇입니까? 어떤 그릇입니까?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과 교회에 쓰임 받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충성해야 쓰임 받는 그릇이란 말입니다. 일하기 두려워하면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군은 일을 좋아하고 일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하고 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가지 많은 그릇들을 어떻게 어느 곳에 사용할는지는 다 주인의 용도에 따른 것입니다. 그의 필요는 다원적이며 다양합니다. 이 사회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치는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이라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고 필요하게 쓰이면 그 뿐입니다. 절대적인 가치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교환 가치가 상품 가치가 아닌 필요 가치입니다.
이수정씨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나 여전도 회원들과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깨끗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리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카다리조'는 ‘완전히 깨끗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완전한 깨끗함이란 도덕적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그것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만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말은 꺼낼 수조차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 입어 의로운 그런 깨끗한 사람만 되면 하나님께서 귀하고 아름답게 쓰신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들이 번데기를 먹고 죽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번데기를 담았던 자루에 농약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독이 묻어 있는 그릇. 이것은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그릇이어야만 주인이 인정하는 그릇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으로 다섯 가지 요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복수하려고 하는 '복수심', 둘째는 '야망', 셋째는 '질투', 넷째는 '욕심 즉, 소유욕', 그리고 다섯째는 '자존심'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있을 때 그 마음이 더러워진다고 합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현대인의 문제를 묘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위 '타자에 의한 세계관(Other oriented world view)'입니다. 자신에 의한 세계관이 아니오. 그렇다고 하나님에 의한 세계관도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가령 옷을 입는 것에도 자신의 체형이나 기호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하여 선택하는 행위 같은 것입니다. 내 형편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친구가 너무 잘 사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남편을 친구의 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요즈음 현대인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과 질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고 맙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그릇은 쓰여 질수가 없으며, 가치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본문 22절에 '청년의 정욕', '불과 같이 타오르는 정욕', '그 야망과 욕심', 때로는 '환상', <이러한 지나친 것들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깊이 새겨 둘 말씀입니다. 기술도 지식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 명문대학을 나오고 가문이 좋고 권세 있고 부유한 금 그릇이라도 더러우면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 배우고 병들고 없고 천한 나무 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쓰게 됩니다. 금 그릇이지만 오물이 묻어 있는 그릇에 음식을 담아 준다면 먹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금 그릇 은그릇이어도 때가 묻어 있다면 먹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비록 나무 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기분 좋게 밥을 담아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비싼 그릇보다는 깨끗한 그릇을 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세요. 가룟 유다 빼놓고는 대부분 불학무식한 갈릴리 어부나 천한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전1:26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얼굴 보거나 직분보고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령 상태 보시고 쓰십니다. 심령이 더러우면 쓰지 않습니다. 귀한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깨끗하지 못하면 성령의 선물 전하는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국민일보 2002. 12. 30일자 신문을 보면 무기수로 특별 감형된 사형수 '김진태'씨(37)는 아버지를 숨지게 한 패륜아로 낙인찍혀 1993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2002년 마지막 날에 무기수로 특별 감형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감형소식이 전해지자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며 눈물을 적시었습니다.
2남 1녀 중 장남인 그는 초등학교 때만 해조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잦은 가정폭력은 그를 집밖으로 나돌게 만들었고 중학교를 마치지도 못한 채 소년원을 들락거리면서 삐뚤어져 갔습니다. 배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하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관자놀이를 흉기로 찍어 실신케 하는 등의 잔혹한 폭행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1992년 10월13일 그는 이성을 잃고 술에 취한 아버지를 공기총으로 살해하여 사체를 한강에 버리는 인간으로서 씻을 수 없는 범행을 저질렀고, 경찰에 검거되어 대법원에서 '존속살해 및 사체유기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고 신앙의 길을 가도록 권면하면서 청와대로, 법무부로 탄원서를 보내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서울구치소 책임지도 목사인 문장식 목사(66·상문교회)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됐습니다.
사형수들은 3개월마다 방을 바꾸는 관행에 따라 방을 옮길 때만다 동료 미결수들을 상대로 전도했습니다. 그로 인해 '작은 목사님', '전도왕'이란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구치소 내에서 전도한 사람만 600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는 작년 연말부터 1년간 모은 영치금 100만원을 한국장로교복지재단에 기탁해 안양의 부흥사회복지관의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전달되었고 미혼모 보호시설인 '애란원'으로 보내져 따뜻한 사랑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만간 사형집행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사형수들이 좌절하고 불안해할 때도 그는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지난 성탄절을 앞두고 문 목사에게 "사형수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있지만 제가 나서서 위로하고 달래고 있습니다."는 내용과 함께 성탄축하 인사를 담은 카드를 보냈습니다. 어머니 장씨는 2002년 특별 감형된 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가슴 벅차했습니다. "아직 아들과 상의해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아들이 출소하게 된다면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아서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부흥강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기사)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 할 것입니다.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결단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의 '깨끗하게'란 "악한 생각이나 행위를 버리고, 내면적인 정결을 이루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깨끗하다.'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깨진 그릇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실"과 "청결"이 먼저요, 그 다음으로 "인내"와 "순종"과 "충성"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릇에다 무엇을 담았는데 그대로 새어 버리고 만다면 무엇에 쓰이겠습니까? 이미 그릇으로서 가치를 잃은 것은 금 그릇이나 은그릇이라고 아무 소용이 없는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깨어진 인격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리의 귀한 말씀이 그 마음속에 가만히 담겨 있지 못하고 줄줄 새어 사라지는 경우가 정말 허다합니다. 이런 인격에다 무엇을 기대하고 또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필요한 그릇은 깨끗하고 청결한 그릇 그리고 진실과 인내에 기초한 그릇입니다. 주님은 한번 말씀을 받아들이면 꾸준하고 변치 않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 한나 여전도 회원들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이런 변화가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옛날에 선비가 제자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물푸레'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선비는 그 나무를 보자 공손히 그 앞에 허리를 굽히고 세 번 절을 하였습니다. 제자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누구에게 절을 하신 것입니까?” 선비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나무에게 절 한 것이지, '물푸레'나무는 나에게는 가장 영향력을 미친 스승이라네. 내가 어렸을 때, 내가 망나니로 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이 나무를 꺾어서 회초리를 만들어 내 종아리를 피가 나오도록 쳤어. 그 후 나는 새 사람이 되어 바로 살게 되었다네.” 우리 모두 매를 맞고서라도 깨끗한 그릇이 되어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설교할 때마다 "죽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죽기 직전이라도 회개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교인이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랍비여, 우리는 죽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언제 회개해야 합니까?"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만일에 회개하지 못하고 죽게 되면 심판을 받게 되니까요. 모든 일은 뒤로 미룰 수가 있지만 회개는 절대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죽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오늘 회개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왜 지체하십니까? 지금 당장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여 성결의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께 사용해 주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하신다면 지금 회개의 기도를 위해 이 시간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물질 분야에도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크게 쓰임 받으려면 물질에도 철저하게 깨끗해야 합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는 말씀은 바울은 본 절에서 '귀히 쓰는 그릇'의 특징이 "거룩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정결한 제물'과 관계된 것으로 자신을 구별시켜 하나님께 순수하고 온전하게 바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고전 15:33절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하였으며,
살후 3:14절에는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얻은 물질에서 철저하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맡겨주신 물질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용할 줄 아는 회원 여러분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쓰임 받는 귀한 청지기 일군들이 나올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3.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고 약속합니다. 모든 음식에는 그것을 담을 합당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밥그릇에는 밥이 담기고 국그릇에는 국이 담기고 간장은 간장 종제기에 담겨야 합니다. 사람의 혈액도 여러 가지가 있어 수혈을 받을 때도 맞는 피를 받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40대와 41대 대통령을 지낸 허리우드 영화배우 출신의 레이건 대통령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레이건 대통령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새 구두를 맞추어 주려고 구둣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구둣방 아저씨는 레이건에게 어떤 모양으로 구두를 맞추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앞이 둥근 모양이냐 아니면 각이 진 모양이냐고 물었으나 어린 레이건은 처음인지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구두방 아저씨는 "다음에 와서 결정하여라." 하시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구둣방 아저씨는 다시 며칠 뒤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어린 레이건이 구둣방에 찾아갔더니 구두를 한 켤레 내놓으면서 "이 구두가 네가 주문한 구두란다." 하시는데 보니까 구두의 한쪽은 앞이 둥글게 만들고 다른 한 쪽의 구두는 앞이 네모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레이건이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그 이유를 물으니 그 구둣방 아저씨가 하는 말이 "이게 바로 결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구두란다."??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후로 레이건은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즉각 결정을 하고 또 결정을 하였으면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미국의 대통령까지 지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연단하신 것은 신앙의 연단도 있지만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기 위한 적임자를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재능과 달란트가 다 다르지만 나에게 맡겨진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게으르지 말고, 자신의 위치에서 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를 부르지 않아도 찾아가서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 현재 요구하는 그릇은 어떤 그릇일까요?
당장 기도의 그릇이 필요합니다. 한나 여전도 회원들이 앞장서서 시키지 않아도 너도나도 교회로 몰려들어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기도의 멤버가 조직되어 교회와 나라와 일군들을 위한 강한 기도의 운동도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릇도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더 구국기도의 불을 붙입시다.
혹은 헌신의 그릇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옥합을 깨드릴 그릇이 요구됩니다. 우리 교회의 교회사에 남을 아름다운 헌신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어느 교회 이야기입니다. 건축을 하여야 하는 물질이 부족하였습니다. 그 때 결혼을 앞둔 처녀가 결혼할 물질을 다 드렸습니다. 그래도 부족하니까 머리를 잘라 팔아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결혼 자금을 다 드리고 머리까지 깎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자 처녀가 말했습니다. “결혼은 천천히 하면 되지요. 돈은 다시 모으면 되지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지요.” 이 처녀 한 명의 헌신이 온 교회에 헌신의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온 교인들이 일어나서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우리 교회 한나 여전도회원들이 이 헌신의 불을 지필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혹은 전도의 그릇도 필요합니다. 우리 한나 기관이 먼저 부흥해야 교회가 부흥될 것입니다. 세계 선교의 그릇도 필요합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즉, 내가 선교헌금을 드리든지 해야 합니다. 어떤 방향에 쓰임을 받든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딤후2:20-21절에는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각자 맡은바 직분이 있는데 아무리 높은 지위와 직분을 얻었다 해도 올바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지위를 상실당하고 말 것이며, 아무리 낮은 직분이라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게 되면 귀히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한나여전도 회원들과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그릇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귀히 쓰이는 그릇은 주인이 흡족한 마음으로 쓰는 그릇을 의미하며,
'합당하며'라는 뜻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의미를 지닙니다(살후1:11). 우리가 최선을 다해 충성하면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귀히 쓰는 그릇은 선한 일을 행하며 모든 이에게 유익을 끼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릇이 된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한나 여전도 회원들과 우리 모두는 쓰임 받는 그릇, 깨끗한 그릇, 합당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손에 귀히 쓰임 받고 모든 선한 일에 예비 된 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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