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헌신예배] 교사 교육의 가치 (시 14:1-4)
시편 14:1 어리석은 者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腐敗하고 所行이 可憎하여 善을 行하는 者가 없도다
시편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人生을 굽어 살피사 知覺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者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편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者가 되고 善을 行하는 者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4 罪惡을 行하는 者는 다 無知하뇨 저희가 떡먹듯이 내 百姓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14:5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義人의 世代에 계심이로다
시편 14:6 너희가 가난한 者의 經營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避難處가 되시도다
시편 14:7 이스라엘의 救援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願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百姓의 捕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 도다."
본문 시편 14편 1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다윗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소위 '무신론자'를 가리켜서 혹은' 무신론'을 가리켜서 '어리석다.'라는 표현을 다윗은 선언했습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은 희브리어의 본래 '나발'이라는 말입니다. '나팔'이 아니라 '나발'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보시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사무엘 상 25장에 나옵니다. 그가 다윗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평화롭게 살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이 '나발'이라는 부자였기 때문에 혹시 다윗과 함께 살면 자기 재산에 축이 나고 손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악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아내 '아비가일'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성경은 사무엘 상 25장 3절에 보시면 그에 대하여 그는 완악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이름처럼 악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나발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리석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하다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난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거다란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에 대해서 오늘 시편 14편 4절에 보시면 동시에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엡스키'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서운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 말은 모든 질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선언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컴퓨터 기업으로 유명한 IBM은 ‘엘빈토플러’를 고문으로 모신 그런 회사였습니다. 이 토플러 는 1965년에 소위 "미래의 충격"이 라고 하는 "future socke"라는 책을 섰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제3의 물결"이라는 책 그리고 90년대에 와서는 "권력이 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면 서 그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 보면 그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상당한 부분에 서 맞아 들어가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론에서 "우리가 쇼크 흔히 말하는 충격을 왜 받는가 하면 그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변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지 않아도 어느 날 우리가 옷만 바꿔 입고 와도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 변화라는 것이 우리 에게 굉장한 위기가 되기도 하고 유익이 되기도 하는데 이제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변화가 너무 커서 그 변화의 급류에 우리가 이루어 놓은 좋은 문화와 가치 체계들이 함께 떠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우리가 잘 이루어 놓은 것도 그 변화의 급류 속에 떠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충격 속에서 우리가 더 무섭게 여겨야 할 충격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다는 사실을 마치 진짜요. 사실인 것처럼 조성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세속적 변화의 급류 속에서 하나님 없는 문화, '무신론 문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사신 문화' 즉, '신은 죽었다.'는 거짓 진리가 난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충격들에 대해 적응력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도덕을 파괴시키고, 문화를 파괴시키는 무감각하고 돌발적이고, 발작적인 이러한 삶의 형태들이 오늘 우리 주변 에 많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좀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앞으로 우리가 경제는 좀 회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르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라는 점은 불투명하기에 이제는 심각하게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위험 수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겠구나?”를 깊이??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창조해놓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 도전했다가 실패함으로써 땀 흘리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고 흑암이 세상을 뒤덮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아브라함도 위기에 처하자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했습니다. 다윗도 역시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신중히 돌아보게 됐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없다며 교만해질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했지만 망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자들도 ‘진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시대에도 악한 자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했는데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점점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탓에 악령에 사로잡혀 결국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삶, 그런 인생의 모습은 결국 '바다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데 문제는 그런 이론과 인식과 접하는 일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 현대인들에게 무섭고도 위험한 사탄의 계책이요, 멸망으로 달려가는 길이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위기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고", 구원받은 영혼까지 미혹하여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마귀, 사탄이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인들을 넘어지게 할지 모릅니다. 동시에??사탄의 유혹에 빠져 어떤 불행과 위기를 더 가져다줄지 우리로서는 미래가 예측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통곡과 한탄의 기도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와 타락과 죄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한 가운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참 다윗은 인품이나 신앙이나 지도력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나 자기의 처지나 자기의 권력이나 자기의 어떤 정치적 출세나 그런 입지를 위해서 하나님께 한탄 하며, 통곡하며 눈물 흘려 기도한 것 이 아니라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이 백성 속에 점점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고, 존재자체를 부인하는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는 것으로 자꾸만 굴러가고 있다고 하는 것 입니다.
한번 교독하십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 도다."
본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에서 '어리석은 자'는 다윗이 본시에서 자세히 규명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발'(* )은 그저 지혜가 부족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이는 외면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로운 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기준 없이 마음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를 가리킵니다(Craigie). 하나님 없는 모습에 대 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은 부패했습니다. 그야 말로 썩었습니다. 소행이 가증 하고 위선과 더러움이 가득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은 '다 치우쳐있다.'는 말씀에서 이 치우쳐 있다는 것은 '다른 길로 빠졌다.'는 뜻입니다. 한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사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신앙교육의 가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특별히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교사 여러분들은 자신의 신앙과 스스로 어떤 가치관을 정립해 놓고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가르치고 계십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우리가 이 시간 짧은 시간 이지만 정말 무엇이 우리 교육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지 '교육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의 교육, 우리가 정의 중심, 가치관 세계관 이것의 당연한 논리가 무엇입니까???어린이의 영혼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바집니다. 즉, 지옥에 떨어집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운전을 하는 사람이 중앙선을 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중앙선을 넘는 모습과 같은 일들이 너무나 쉽게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쉽게 쉽게 중앙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고 적당하게 함께 더러워져가 고 있고 함께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 다윗은 하나님이 없는 자. 어리석은 자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고 사람들이가 지고 있는 보편적 조성에 대해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을 부정하면서 이런 죄악성은 더욱 크게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없을 때 어리석음과 악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리석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지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대하여 무지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악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의로움에 대해 정의에 대해 거절하며,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의적으로 하나님 없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으로 하나님 없는 것으로 하 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뇨?"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하나님에 대해 무식 하는가? 아니라는 얘 기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없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기도하는데 찬송하는데 실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실천 적 무신론자"라고 얘기합니다. 혹은 "크리스천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언젠가도 제가 한번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싸웁니다. 기도했으면 안 싸워야 하는데 싸우기에 ‘왜 기도하고 싸우느냐?’고 했더니 기도하고 힘 얻어서 싸운다고 하더랍니다.??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아서 되겠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데 실제적으로는 실천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 정말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삶의 가치가 내 속에 분명히 있는 것인가? 여러분 어떤 신앙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 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하 나님을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말하고 기도하면서도 개가 없고, 헌신이 없습니다. 화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합니다. 혹시 오늘 우리들이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 신앙의 교육 가정의 교육의 가치는 바로 이 하나님이 없음을 배격하고, 하나님 계심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우치고 증거 하는 것이 교회요. 가르치는 분이 주일학교 교사인 것입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닙니다. 여기는 친교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서 식사하고 교제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님 살아 계심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심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곳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깃발이 꽂혀져 있는 곳입니다. 다른 세상의 깃발과 사람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사실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신앙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계심을 증거하고 가르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문 3절에서"치우쳤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 )는 '제 고집대로 행하다.', '완고하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입니다(출 32:8). 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제 고집대로 행한 것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내 가정 속에 내 자녀들에게 교사들은 어린 심령에게 우리의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가르쳐야겠습니까?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 와 내 가정 속에 내 자녀들에게 또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Significance). 몇 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자연이 저절로 생겼습니까? '진화론'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이치는 그럴지 모릅니다만 사실 자연 이 제멋대로 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자연 속에는 질서와 규칙이 있습니다. 조화가 있습니다. 기능이 있습니다. 자연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하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불완전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자녀들과 여행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신비함과 위대한 창조적 능력을 발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게서 죽으심을 뛰어넘어 부활, 승천하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영생의 완성을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한 사건을오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 여러분들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계심을 알아차리게 하도록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어린 생명들이 되도록 신앙 교육을 '구세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인도'를 철저하게 잘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 앞의 신앙인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의 핵심이 ‘구속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그 구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 교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이 귀한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님이 아직 믿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중매쟁이 역할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믿지 않으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에게 정말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할 수 있는 신실한 뜨거운 중매쟁이가 되어야 참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교사 사명의 완성이요. 예수님을 만나는 생명이 되도록 인도하는 교사가 '사랑의 빚진 자'로써, '성령 받은 자'로서 '직분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는 구원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는 것이 교사의 가장 귀한 본연의 사명임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교사로서의 더 큰 가치와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적인 증언입니다. 계속 확신을 갖게 하는 공급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교사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길, 하나님을 찾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법,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는 것,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 자와 지키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교사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어린 생명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가감 없이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고 계십니까? 나중에 우리 아이들은 반드시 그 가르침을 받은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오. 하나님은 반석이시오. 하나님은 요새요. 하나님은 전능자요.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시며, 여호와 이레가 되시며, 여호와는 평강(샬롬)이 되시며,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고 사랑의 아버지이시라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확신 있게 증거 해야 합니다. 설교를 할 때 간혹 교사들이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걸요?’ 이렇게 전하는 불행하고, 불확실한 신앙을 가진 교사는 자신의 영혼도, 맡겨준 어린 생명들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결국 잡아먹히게 됩니다. 분명히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네번 째 기도의 사람이 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음을 전하되 능력 있게 전하고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지식 전달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을 변화 시키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이 통로는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가르치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내게 맡겨주신 어린 영혼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전화선, 수도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가 하나님과 먼저 기도의 불통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에 게으르면 하나님을 아는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타내는 것을 중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낮 예배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응답과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어린 생명들을 면화시켜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진리의 말씀이 듣는 심령들에게 깨달아지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야말로 통로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 생명들을 위해 교사들이 결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스바교회 교사 여러분들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위대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어제 제가 육군훈련소에 3,500명을 세례주고 왔습니다. 설교하러 초청된 이재완 총회장, 세례 문답을 한 국방부 군종실장은 교사와 주일학생 사이였습니다. 어릴 때 입가에 거품과 침이 가득하면서 열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더니 총회장이 되었고, 그 가르침 덕분에 한국 군종목사단의 총수가인 군목으로 함께 영광 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사의 사명을 참으로 위대합니다. 한 영혼의 운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귀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미스바교회 교사 여러분! 몸속의 심장 혈관 통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막히면 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기도는 심장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뇌의 혈관이 막히면 두뇌 세포가 죽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막히면 영적으로 맡겨주신 어린 생명들의 영혼들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우리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강권해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교사들의 기도를 통해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하는 말씀에 성령께서 강권하여 권세 있게 역사하심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살아계심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사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사신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봉사와 섬김과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교사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집사, 권사, 장로님들이 저렇게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계심이 분명하다.’라고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일에 우리 미스바교회 교사들과 모든 분들이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 했습니까? 100세에 나은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한나는 서원하여 나은 사무엘을 주의 종으로 바침으로, 엘리사벳은 사도요한을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바침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 과 희생은 어린 자녀들과 주일학생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교육은 단순한 교육활동이 아닙니다. 교육은 물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이라고 해서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육은 인간을 지배하는 폭군이다.”, “교육은 더욱 똑똑한 사기꾼과 악마를 만들 뿐이다.”, “무식한 사람은 칼을 가지고 한 사람을 죽이지만 유식한 사람은 펜을 가지고 수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육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교육의 가치추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해 주는 말들입니다.
참되고, 올바른 교육의 가치를 알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교육을 통해 폐해를 막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하는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최고의 가치가 무엇이며, 최고의 삶은 무엇인가?’를 가쳐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 교육을 통해 알려주지 못하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하는 구원의 교육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계심의 교육을 통해 ?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시켜야 하는 귀한 사명이 교회 교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말씀과 기도와 예수그리스도와 봉사와 헌신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 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교육의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치가 있을 때 질서, 조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뒤죽박죽되면 모든 것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여러분 영어로 산다는 것을 "LIVE"라고 합니다. 그러나 단어의 배열을 거꾸로 해보면 "EVIL"이 됩니다. 즉, ‘악’이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인생들은 생명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악하게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가리치고, 구원의 복음이 필요하며, 교사들은 이 귀한 진리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미스바교회 교사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이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우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불완전하기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중매쟁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시되 기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권세 있게 귀한 생명들을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더욱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변화시키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귀한 교사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적인 교육으로 멸망으로 향할 수 있는 귀한 어린 생명들을 살려내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아울러 이 시간 충성된 교사 여러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시는 헌신에 감사드리며, 복된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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