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클랜머

好學 2011. 8. 20. 22:00

클랜머(고후1:3-11)

 


 

● 기독교 교파 가운데 ‘성공회’라고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겉모양은 성당 같은데 교리는 개신교에 가까운 독특한 개신교회로, 우리나라에는 그리 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지 않지만, 이전 대영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나라에서는 성공회 교회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공회, 혹은 영국국교회, 앵글리칸 처치’라고도 불리는 성공회는 영국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발생하였으며, 오늘은 성공회를 탄생시킨 영국의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토마스 클랜머에 관해 살펴보겠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유럽대륙의 종교개혁과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종교적인 문제에서 출발되었다기보다 정치적인 문제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으며,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기보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많은 사람에 의해 조금씩 개혁 쪽으로 이동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은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나라였기 때문에, 기독교가 전파된 초창기 때부터 켈틱교회라고 불리는, 로마 카톨릭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매우 민족적이고 독자적인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따라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권에 대한 개혁운동이 유럽에서 전개되었을 때, 영국에도 신속히 이같은 개혁사상이 전파되었으며, 교황이 부과하는 과중한 세금과 지나친 간섭, 그리고 성직자들의 비성경적인 권위, 또한 신비주의에 대한 지나친 의존 등으로부터 벗어나, 정체된 신앙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기운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로마교황은 이런 기운을 무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려고만 했다. 이런 과정에서 영국 민족의 민족적 자존심이 발동했고, 이러한 때에 영국왕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헨리 8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 종주국이었던 스페인과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장남 아더와 스페인왕의 공주 캐서린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킨다. 당시 영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약소국이었다. 하지만 장남 아더는 결혼한지 6개월만에 죽어버리고 만다. 그러자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 과부가 된 딸 캐서린을 죽은 아더의 동생인 헨리 8세와 재혼시키게 만들었고, 약소국의 왕자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이 형수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는데, 그 딸들도 다 죽고 오직 메리만 살아남게 된다. 나중에 이 살아남은 딸 메리가 바로 유명한 ‘피의 여왕’ 메리가 된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시에는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헨리 8세가 형수 캐서린과 결혼을 한 것은, 교회법에 어긋나는 근친상간이었으나, 국가 이익을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캐서린이 아들을 출산하지 못함으로 해서 영국은 또 다시 정치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트 7세는 헨리 8세의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당시 교황은 독일왕의 보호 아래 있었는데, 독일왕은 바로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임 교황이 허락한 것을 무효로 선언하게 되면 교황의 권위는 더욱 추락하여, 이미 독일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종교개혁의 불길이 더욱 거세게 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결혼무효 청원이 거부당하자 헨리 8세는 반교황주의 편에 서있던 클랜머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영국에서의 교황권 제한령을 발동시킨다. 또한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는 ‘영국은 어떠한 외국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결의를 하고, 국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삼는 수장령을 통과시킴으로써 드디어 영국 국교회, 곧 영국성공회가 탄생하게 된다. 이리하여 교황의 권한이 더 이상 영국 내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헨리 8세는 적법하게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이란 여인과 재혼하게 되는데, 앤에게서 태어난 딸이 나중에 에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된다.

 

이렇게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는데, 근본적인 동기는 교황을 비롯 외국의 지배를 벗어나 왕권과 강력한 국가를 이루려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국민의식이 바탕이 되어 시작된 것이었다.

 

● 클랜머는 이처럼 헨리 8세 때 등장하여 영국성공회의 탄생을 주도했고, 영국교회의 개혁운동에 앞장서는 인물이 된다. 토마스 클랜머는 1489년 노팅엄셔주 애스럭턴에서 아버지 토마스 크랜머와 어머니 아그네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지역 학교에서 공부한 후 14세때 부터 캠브리지의 예수 대학에 진학하여 라틴어와 고전에 기초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1523년 34세에 그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대학의 특별연구원에 선출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성경을 라틴어 번역본으로 읽기 보다는 원어로 읽고 연구하는 등, 사려깊고, 조직적이며, 설득력 있게 신학을 연구하였습니다.

 

클랜머는 결혼하여 얼마간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으나 그의 젊은 아내가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나자 이후로 학문연구에만 매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530년, 41세에 대집사가 되었고 1532년, 43세에 영국 왕실을 관장하는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됩니다. 클랜머는 캠브리지 대학 학생 시절부터 새로운 학문에 열성이었고 철저한 반교황주의자였습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클랜머는 모든 교회에 끼치고 있는 교황의 지배권 주장이, 성경에 의해서나 교회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클랜머는 로마 카톨릭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왕에게 조언함으로써 헨리 8세의 신임을 얻게 되어, 이로 인해 클랜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으로 이후 클랜머는 거의 24년동안 영국교회의 중요한 시기에 매우 중대한 책임있는 위치에 앉아 영국교회를 개혁하게 됩니다. 클랜머는 각국의 통치자가 각국의 교회를 지배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말해 그는 교황의 우월성을 대신하여 왕의 우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 때문에 그는 어려운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헨리 8세는 여러명의 아내를 취하고 버렸는데, 아내를 버릴 때는 몇차례 간통죄와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하는 등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릅니다. 헨리 8세도 교황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하나님의 대리자는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주교로서 그는 왕의 처신에 대한 종교적 합법성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오는 2월25일, 다음주 월요일은 새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입니다. 노무현대통령 5년 임기가 끝나고 대한민국 제17대 이명박대통령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역대 어느 대통령이나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온 국민은 새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살펴볼 때, 역대 대통령들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들은 많은 의욕을 가지고 국정을 시작했지만,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으며, 퇴임 후에도 박수받고 칭찬받는 대통령은 몇 되지 않습니다. 암살 당하거나 감옥에 가거나 계란 세례를 받아야 하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대통령도 한 사람의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써도 하루 24시간을 하루 30시간으로 늘려 사용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인간입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신실한 신앙을 가진 교회의 장로로서, 철저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그리고 지혜롭게 국정을 잘 이끌어 주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5년후 그의 퇴임 때 어떤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명박대통령 자신의 아름다운 이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이 겨레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어쩌면 가장 냉철한 감시자가 되어 대통령이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충고하고 견제하며 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클랜머는 중세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교회의 개혁을 위해 국왕과 손을 잡긴 잡았으나, 세상의 왕 역시 교황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클랜머는 잘못된 교리나 미신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예배에 대한 개혁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라틴어로 집례되는 미사에 출석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개혁이 종교개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대주교가 마음대로 교회예배를 개정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클랜머는 성심을 다해 국왕을 설득해 나가는데, 회중들에게 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 등을 영어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였으며, 결국에는 국왕으로 하여금 각 교회에 새로운 영어 번역 성경을 비치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클랜머는 탁월한 영어 기도문을 간행하여 국민들에게 보급하게 되는데, 이 기도문은 지금까지도 성공회 예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헨리 8세가 죽자 세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에드워드 6세는 부왕의 종교개혁 의지를 계승하여 대주교의 순수한 종교개혁을 더욱 강력하게 지지하였습니다. 그래서 클랜머는 즉시 영어(영국의 국어)로 드리는 예배를 목표로 세우고 그 수단을 강구하였고, 드디어 영국 교회는 라틴어로 집례되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가 아니라, 자기 나라 말로 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42신조를 작성하여 개혁파 영국교회에 교리적인 기초를 제공하게 되는데, 클랜머의 종교개혁은 철저히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기초하면서도 전통을 존경하는 입장으로, 중세 및 교황의 오류들과 이단들을 거절하면서 동시에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들의 과격함도 거절하는, 일종의 중도적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 그러나 클랜머의 종교개혁은 6년 후,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가 16세에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메리여왕은 바로 헨리 8세가 처음 결혼했던 형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영국 개신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여왕으로 유명합니다.

 

왕위에 오른 메리는 모친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영국의 가톨릭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메리여왕은 모친 캐서린이 이혼당하면서 사생아로 취급받는 등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왕 헨리 8세의 시절과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의 시절에 세워진 법령들을 상당수 번복하여, 부왕 헨리 8세와 어머니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고, 에드워드 6세의 모든 종교개혁적인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에 만들어진 반-교황적인 법령들도 무효화시켰습니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영왕은 중세적인 예배 전통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영어로 드리는 성공회의 예배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습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과 이단 규제법을 발동시킴으로써, 이때부터 개신교도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메리여왕은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답게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으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이리하여 그동안 모든 클랜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가혹하게 종교개혁 지도자를 체포한 메리 여왕은 영국을 로마교회로부터 이탈시켜 이단으로 이끌어갔다는 이유로 클랜머를 극형에 처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여왕이 보기에 대주교 클랜머는 교황에 대한 서약을 파기하고 자국 사람들의 영혼을 좌절하게 만든 대죄인이었습니다.

 

클랜머는 대반역과 이단의 혐의를 받고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감옥 속에서 클랜머는 심각한 회의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의 꿈은 영국교회가 교황의 권위나 모든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국가교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어 다스리는 것이 그의 종교적 권위의 기본이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메리여왕을 크리스천 왕으로서 충실하게 우러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영국교회의 수장인 여왕이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비성경적인 교황의 권위 아래로 영국을 다시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클랜머는 죽기 전 감옥에서 혹독한 내적 갈등을 통해,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교황과 여왕 양자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게 됩니다. 영국을 다시 한번 교황의 전제와 비성경적인 로마카톨릭의 교리에 얽어매려는 왕권에 반박하면서, 클랜머는 모든 세속적 권력을 초월한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절대적인 신앙양심에 따라 항변하였습니다.

 

1556년 67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화형장에 들어선 클랜머는, 자신의 최후를 지켜보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 앞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과 대치되는 로마 카톨릭 교리를 거부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확인하였고, 그는 이전에 그같은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이는데 사용되었던 자신의 손을 먼저 불에 태우기 위해 불에다 올려놓습니다. 그리하여 클랜머는 영국의 종교개혁의 순교자로 생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클랜머의 종교개혁운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클랜머의 순교 현장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영국 시민들은, 순교 직전 클랜머가 남긴 유언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의회와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피에 굶주린 듯 무자비하게 신교도를 탄압하던 메리여왕은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되었으며 결국 정신병 환자같은 상태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죽어진다고 그것이 진짜 죽은 것이 아님을 깨닫기 바란다. 죽어지는 것이 사는 것이요 살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삶의 현장, 교회봉사와 사역의 현장의 문제는 죽지 않는 것이 문제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이 살아있음으로해서, 진짜 살려야 할 것, 살아야 할 것들이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메리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의 종교대립을 막기 위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지속적으로 종교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여 많은 점에서 영국교회를 칼빈 유형의 개혁교회로 세워 나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1588년, 무력으로 압력을 가하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서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서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를 놓게 됩니다.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황금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세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과 같은 문인과 학자들이 속출하여 영국의 영광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성공회는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전형식과 신앙은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오늘날 수많은 종파와 교단으로 나누인 기독교계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에큐메니칼 모델로 기독교계에서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