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好學 2011. 8. 15. 21:52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

 

1987년은 아브라함 카이퍼 탄생 150주년이었다. 화란에서는 작년에 신문과 잡지들에서 카이퍼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재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란에서는 카이퍼의 출생지인 마슬부이스에서 카이퍼의 특별 전시회를 갖는 한편 다방면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일본 칼빈 학회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 세미나를 가졌으며 금번에는 R. E. S.의 Theologrcal Forisn에서 아브라함 카이퍼 특집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이 주최가 되어 카이퍼 전시화와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있어서 아브라함 카이퍼 만큼 개혁신학의 장을 크게 발전시키고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

 

그는 조국 화란에서 삶의 전 영역에 위대한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개혁주의 교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카이퍼는 그의 생존시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찬사와 비평을 동시에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활동 범위는 너무나 폭 넓게 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신학자로서만 카이퍼를 볼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한 사역을 동시적으로 평가 할 때만 가능하다. 물론 아브라함 카이퍼 만큼 그 시대의 사상에는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상 속에는 19세기적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적 사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과 신학에 항거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왕권을 위한 칼빈주의적인 삶이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퍼의 영향은 모든 개혁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이퍼는 너무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반대한 사람들마저도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20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가 서거했을 때 전 세계 120여개 신문들은 그의 타계를 애도하면서 '제 2의 칼빈이 잠들었다.'고 논평했으며, 그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위해서(Pro Rege) 일했던 위대한 신학자요, 교회 개혁자요, 정당의 총재, 국회의원, 수상 그리고 대 학자요, 교육가였고 한평생 필봉을 휘두르던 기독교 언론인이었다고 격찬하였다. 그는 칼빈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반은총을 강조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화란의 마슬루이스에서 화란 갱신교회의 Dis Kuyper 카이퍼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여 더 브리스 교수에게서 성경원어와 문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신학부에서 스콜턴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으며 약관 25세의 나이로 「요한 칼빈과 요한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한 제목의 논문을 쓰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6세에 결혼했으며 첫 목회지인 베이스드 교회로 부임해서 청년목사로 일할 때, 그는 여전히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의 신봉자가 되어서 목회하였다. 그런던 중 그 교회의 진실한 신앙의 부인이었던 발투스의 충고로 자유주의적인 현대신학에 회의를 품고,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카이퍼는 한 젊은 여성이 그를 향하여 하나님 주권이라는 성경적이고 신앙 고백적인 도전을 했을 때 꺼꾸러지고 말았다. 그는 베이스드교회를 떠나는 마지막 설교에서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채로 목사가 되었고, 베이스드교회에 부임한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이제는 개혁주의 신앙에 불타는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즈음 카이퍼는 사상적인 스승이며 칼빈주의적 정치 운동에 동기를 부여했던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나게 된다.

 

카이퍼는 우트레흐트 대 교회의 목사로 청빙 받고 이전 목회자와 다른 개혁주의자로서 새로운 발돋움을 한다. 흐룬 봔 프린스터의 문하생이 된 카이퍼는 칼빈주의적인 세계관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기독교인의 활동을 강하게 주장한 걸작인 「불 신앙과 혁명」이란 책을 읽음으로서 확신하게 된다. 1864년부터 카이퍼는 19세기의 위대한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충격을 주었던 노 정객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남으로서 카이퍼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흐룬 봔 프린스터는 카이퍼에게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교회, 국가, 학문 그 밖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가능한 형태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항하여 나타나야 한다고 확신시켜주었다. 흐룬 봔 프린스터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교회와 국가에서 개혁주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영적 지도자로서 아브라함 카이퍼를 지명하게 된 것이다.

 

 

그후 카이퍼는 A.R.P. 정당의 총재가 된다. 이 정당은 흐룬 봔 프린스터가 창설한 것으로 불란서 혁명이 하나님 없는 무신론적 바탕에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정당정책을 폈다. 그러나 본래 A.R.P. 정당은 대중들의 지지를 크게 받지는 못했으나 아브라함 카이퍼가 총재를 맡은 후에는 면모를 일신하여 중산층에게 인기있는 정당이 되었고 대중들에게 깊이 있게 파고드는 정당으로 활성화 되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는 기독교 언론인으로서의 생애이다. 그는 1870년 A.R.P.정당 소속의 일간지로 스텐다드지를 창간하고 주필로 취임하였고 곧 이어서 기독교 주간지인 더 헤타우트지의 편집인이 되어서 약 50년간 필봉을 휘둘렀다.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설교집, 명상록, 수필집, 시집, 논문 등이 일간지와 주간지에 고했던 글을 모은 것이었다. 평소 카이퍼의 지론은 하나님의 주권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지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언론도 예의는 아니었다. 카이퍼의 사역은 거기에 머물지는 아니했다. 그는 국 공립대학의 무신론적, 반 기독교적 성향에 반하여 성경적인 기독교 사립 대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1880년에 뿌라야 대학을 설립하고 그 유명한 영역 주권을 제창하였다. 물론 이 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니지만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흐룬 봔 프린스터로부터 배워서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영역주권이란 한 마디로 우주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땅에 행사 할 때는 한 사람 또는 한 기관에 독자적으로 행사 할 수 없고 삶의 여러 영역들에 분산되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슨 어떤 영역에서든지 하나님이 거기에 주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역주권 사상은 비판적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상은 칼빈주의 시상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퍼의 생각은 복음이 인간의 전 생애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삶이 구체적인 삶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야만 한다고 믿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은 그가 항상 즐겨 사용한 "Pro Rege(왕을 위하여)"라는 말로서 잘 표현되었다. 이 Pro Rege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적, 나아가서 그의 우주적 통치를 드높이자는 것이다. 이 주제는 환란 중에 있는 모든 나라와 모든 방언이 그의 왕권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수상이 되었으며, 교수와 총장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기장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기독교 사회사업가로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였다.

 

 그의 삶의 폭이 너무나 넓었기에 거의 손대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카이퍼를 단순히 조직신학자로서만 비판하거나 저울질하는 것은 카이퍼의 일부분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카이퍼 박사는 교육과 과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공헌을 세웠다.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 원칙과 싸웠으며 반위(Antithesis)의 원칙을 세웠다. 즉 모든 삶의 체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중생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체계가 있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중생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칼빈주의적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기독교의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사상체계, 즉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것이 1898년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강의한 유명한 「칼빈주의 」란 제목이었다. 카이퍼는 신학과 과학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매일 매일의 삶도 하나님 중심으로 개혁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세상에는 예수님께서 이것이 내 땅이 아니라고 할 땅은 한 치도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카이퍼는 불을 튀기는 설교자로서, 교회의 개혁자로서, 신학자로서, 정치가로서, 교육가로서, 언론인으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왕권을 위해서 일한 위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는 평생에 2백23권의 책을 저술한 다작가로서 어느 분야에 손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대로 그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학 방법에 있어서는 스콜라적인 요소와 19세기의 이상주의, 낭만주의 사상의 잔재가 엿보이기도 한다. 누구이던 허물이 없으리오마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한 웅장한 삶은 여전히 칼빈주의의 찬란한 별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 할 수 있다. 신앙의 이원론적 삶의 체계로 고민하는 한국 성도들에게 카이퍼의 칼빈주의적인 삶은 새로운 이정표를 주리라고 본다.

 

 

(기독신보, 1988-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