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韓國信仰人]

순교자 백봉렵 전도사 (장로교)

好學 2011. 8. 15. 21:33

 

 

순교자 백봉렵 전도사 (장로교)

 

 

백봉렵 전도사(1906-1948)


백봉엽은 1906년 8월 12일 평북 의주군 피연면 태마동에서 초대교회 성도 백낙승 장로와 김락도 권사의 일곱남매 중 들째아들로 태어났다. 백봉엽 전도사는 1948년 1월 눈쌓인 중국 길림성 회덕현 남가자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팔로군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중국교회도 북한 교회와 마찬가지로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가 맞붙어 대륙을 말발급아래 밟히게 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모택동은 중원땅에서 종교를 몰아내기에 이르렀다. 백봉엽전도사가 섬기는 남가자교회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예배중지를 명령받았지만 일제 치하에서 목숨걸고 선교하던 백봉엽은 중국당국의 요청으로 예배를 중단할 수 는 없었다. 백전도사는 죽음의 순간을 알았을까? 죽기 한달전부터 죽음의 준비를 하듯 기도에 전념했다.

 

1948년 1월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 교회를 찾아온 팔로군을 만났다. 예배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러 온 사람들은 아니고 총을 메고 쩔뜩이는 병사들은 백목사가 성경찬송을 끼고 가는 교인들에게 일일히 인사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총을 들고 백전도사에게 몇방 쏘아댔다." 아버지는 백봉엽이 보통학교를 나올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믿음좋은 어머니 밑에서 신의주 고보를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에서부터 청년회 일까지 도맡아서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법을 배웠다. 형은 왠일인지 돈에 초월한 사람이라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었고 백봉엽은 유기그릇 장사를 시작 도자기도 구워서 중국으로도 수출을했다.

 

그 무렵 청년 백봉엽은 마침 미국유학을 마치고 신의주 제2교회로 부임해 일대 도약의 기회를 맞은 교회 한경직목의 지도를 받으며 소명감을 가지게 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30년 후반기로 오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경직 목사 이하 13명의 신의주 제2교회 교인을 감옥에 같히게 했으니 백봉엽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악랄한 고문으로 가뜩이나 폐결핵을 앓고 있던 한경직목사는 옥중에서 병을 얻었고 고문에 못이겨 천황의 신사에 절했다고 고백하며 노안을 적신 것이 바로 이때였다.

 

김인범 장로가 보증을 서서 출옥을 했지만 13명의 용사들은 찢어진 마음에서 피를 흘리며 울며 뿔뿔이 흩어졌다. 한목사는 교회를 떠나 양로원 원장이 되었고 백봉엽전도사는 중국땅 북경에 망명하여 하북성 석가장에서 석가장교회를 개척설립했으니 1938년 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열리던 해였다. 석가장교회 교세가 확장되어 자립할 형편이 되자 길림성 회덕현으로 옮겨 남가자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남가자교회가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1945년 8.15해방이 되었다. 중국 교포들중에 아주 부자이거나 아주 가난한자 외에는 속속 귀국길에 올랐다.

 

백전도사는 형제들과 아들들은 서둘러 귀국을 시키고 아내 염영선 집사와 모친 김락도 권사만은 함께 남았다. 목자 없는 어린 양들을 두고 자신들만 귀국하는 몰염치를 저지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1월, 중국의 전세는 혼미했고 그런 혼미속에 목회하던 백전도사는 팔로군의 총에 맞아 교회당 뜰에서 순교했다. 총에 맞아 피를 쏟으면서 아내에게 "모친과 함께 고국으로 가시오" "나는 고요히 하늘나라로 먼저 갑니다"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눈을 감았으니 이 때 나이 43세였다. 백전도사의 유족으로 여동생 백은엽 권사가 유일하게 살아 매제 박순복 장로와 함께 영락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