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時事/[시사 칼럼]

독서이력제

好學 2011. 5. 2. 20:50

독서이력제

 

 

시인 고은은 1949년 중학교 2학년 때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시집을 길에서 주웠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라며 소록도(小鹿島) 가는 길을 읊은 시를 읽으면서 펑펑 운 소년은 시인이 되기로 했다. 이튿날부터 그는 '남몰래 철이 들어 버린 어른'이 됐다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여학생 시절 책을 읽다가 창밖을 보니 "나무가 그전과는 완전히 달리 보였다"며 문학에 눈떴다.

▶어릴 때 읽은 책은 개인뿐만 아니라 세상을 뒤흔든다.

19세기 독일 시골 목사의 아들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일곱 살 때 '그림 세계사'를 선물로 받았다. 그때까지 트로이전쟁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였지만 슐리만은 실제 역사로 믿었다. 그는 어른이 된 후 트로이성을 발굴해 세계사를 다시 쓰게 했다.

19세기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여덟 살 때부터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읽었다. "아버지의 교육 덕분에 또래들보다 25년 빨리 출발했다"고 한 그가 쉰세 살에 쓴 '자유론'은 민주주의 사상의 고전이 됐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여자였기 때문에 11세 때 학교를 그만뒀다. 그녀는 아버지 서재에서 500여 권을 독파하며 홀로 지성을 쌓았다.

시인·소설가 장정일은 1970년대 중학교를 중퇴한 뒤 잠시 소년원에도 들어갔다. 그는 삼중당 문고 300권을 읽으면서 독학으로 등단해 시 '삼중당 문고'를 썼다.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문고/…/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문고…'

▶초·중·고 12년간 학생들이 독후감을 '독서교육종합지원시스템' 사이트에 입력하는 '독서이력제'가 올해부터 시작됐다. 정부가 책을 읽히겠다고 도입한 제도지만 벌써 입시 수단으로 변질돼 청소년 독서 풍토를 망친다는 비난이 높다. 아이들이 읽지도 않은 책을 학원에서 배운 대로 요약해 기록하거나, 부모가 대신 입력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프랑스의 교사 출신 작가 다니엘 페낙은 '책을 읽고도 말하지 않을 권리'를 독자에게 주라고 했다. 진짜 독서는 과시용이 아니라 안으로 쌓여 영혼의 자양분이 되는 법이다. 청소년 독서 진흥을 위해 시작한 독서이력제가 아이들의 '거짓말 이력제'로 굳어버리기 전에 하루빨리 손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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