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가인(2)

好學 2011. 2. 25. 23:24

 

가인(2)
         

에덴 동편 놋 땅

창4;16-1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 지라.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4;16-17)

마귀는 파괴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헬라어로 디아블로스입니다. 디아블로스란 <틈을 내어 가르는 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마귀는 가르는 자입니다. 틈을 내는 자입니다. 무엇에 틈을 냅니까?

1.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틈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가 같이 살다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중간은 마귀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을 내고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살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라>라고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을 하던 아담이 선악과 사건후에는 <저 여자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라고 하와를 감싸지 않고 핑계를 댔습니다.

3. 자연과 사람 사이에 틈을 내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땅이 소출을 제대로 내주지 않았습니다.

4. 자기와 자기 사이에 틈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와 자기의 갈등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온갖 죄악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생각속에 들어와 생각을 파괴시키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도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가룟 유다가 팔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를 하수인으로 썼습니다. 유다는 마귀에게 속아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

이같이 마귀는 생각을 파괴시키는 자입니다. 본문은 그 대표적이 예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그의 아들 가인은 살인하였습니다. 죄는 반복성이 있고 죄는 성장성이 있습니다. 불순종죄는 살인죄로 성장하였습니다.
가인은 인류 역사상 첫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롤 죽였느뇨>(1요3;12)

악한 자란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살인의 생각이 들어서 아우를 죽인 것입니다.

1. 에덴 동편 놋 땅의 가인
가인은 아우를 죽인 후 에덴 동편 놋 땅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땅 이름이 주는 의미가 깊습니다.

(1) 놋 땅
<놋>이라는 히브리말은 <방황><흔들림>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떠난 사람은 방황하고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를 흔들리고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다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집을 떠난 탕자는 흔들렸습니다. 방황하였습니다
돼지우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돼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경멸하는 동물중에 하나입니다.
놋이라는 말의 원어는 <누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드라는 말에서 놋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드라는 말이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몇 곳만 들어 봅니다.

(1) 떠돌아 다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까닭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 하느니라>(잠26;2)

이곳에서 <떠도는>이라는 말이 바로 <누드>요 <놋>으로 되어 있습니다. 에덴을 떠난 자는 참새처럼 방황하는 자가 됩니다.
참새는 목표가 없습니다. 살아가니까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2) 슬퍼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욥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도로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조각 하나와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욥42;11)

여기에서 <슬퍼한다>는 말이 바로 <누드>요 <놋>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슬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16) 라는 말씀에서 여호와 앞이라는 히브리어는 <파님>이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떠난 이들은 이같이 방황하고 떠돌아 다니고 슬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가인이 살 때 그 땅 이름이 놋이 되었습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같이 방황하고 슬픈 존재가 됩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놋이라는 말에 반대입니다.

에덴의 뜻은 <부드럽다><즐기다>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을 떠나면 놋이 됩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안에서 만이 참 안식을 누릴 수가 있나이다>
온 인류가 다 하나님 품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2) 에덴 동편
놋 땅은 에덴 동편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동산에서 가인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에덴 동편 놋 땅으로 쫓으셨습니다.
에덴 동편이라는 강조점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미드라쉬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벨이 기르고 있는 양 한 마리가 가인이 경작하는 밭에 들어와서 온갖 농작물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가인의 농사를 망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인은 양을 미워하지 않고 양 주인 아벨을 미워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벨아! 무슨 권리로 네 양이 내 밭에 와서 짓밟고 있느냐?  내 밭이 네 양의 초장이냐?>
아벨은 지지 않고 말대꾸 하였습니다.
<형은 무슨 권리로 내 양에서 나온 것들을 사용하는 거예요. 우유나 양 털로 짠 옷이나 양 고기를 먹을 권리가 어디서 났단 말이요. 형! 양가죽 옷이나 양 털 옷을 벗으시오. 양고기 값을 내시오. 그러면 나도 내 양이 형 땅에 못 들어가게 하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형 땅을 지나야 할 경우가 생기면 공중으로 날라 다니겠어요>
가인이 더 화가 치밀었습니다.
<내가 너를 죽여 버리면 누가 네 피 값을 달라고 요구할 것같으냐?>
아벨이 말했습니다.
<우리를 이 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이 내 피값을 형에게서 찾을 것이요. 하나님이 내 원수를 반드시 갚을 것이요. 그리고 형의 손에서 피값을 받아내 주실 것이 분명하지요. 만일 형이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은 악인에게 악을 갚으시고 의인에게 의를 갚으시는 정확하신 심판관이신 것을 알아야 해요. 형이 나를 죽이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보시고 형에게 응분의 벌을 내리실 것이요>
이 말을 듣고 가인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에게 달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이 가인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결사적으로 달려 들었습니다.

아벨은 형에게 그렇게 하지 말기를 빌었습니다. 화를 풀고 진정하기를 애걸하였습니다.
아벨은 형에게 달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기려고 하면 자기가 이길 수 있는 데도 형에게 당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순한 양같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에게 성난 이리같이 달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악인은 선을 낳을 수 없습니다. 의인은 악행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창조 이래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가장 잔인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친 것이 치명적이 되어 아벨이 죽었는 데도 가인은 몰랐습니다.

돌을 들어 아벨의 온 몸을 계속 쳤습니다. 목을 비롯한 온 몸에 상처 투성이가 되었고 피로 물들여 지게 되었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정신없이 도망하였습니다. 부모를 멀리 떠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도망치면서 중얼 거렸습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아벨을 찾아 내라고 요구하실 것이다. 이 땅에는 우리 밖에 없으니 당연하다>
이런 걱정을 하면서 도망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가인아! 너는 네 부모로부터 도망칠 수는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나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내가 만들었는 데 이 세상 어느 곳에 숨은 들 내가 찾지 못 할 줄 아느냐? 네가 아벨에게 자비를 베플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을... 아벨이 너보다 더 힘이 세었지만 그가 져주었다.아벨은 너에게 대항하지 않고 죽어 준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그러나 하나님은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지키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진실을 말하고 싶습니다.하나님! 내가 아우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벨을 죽이게 악한 마음을 주신 분이 바로 당신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고 하셨으니 내 마음도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살인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내가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얼굴은 어두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예물을 받으시고 나에게 웃음을 주셨더면 나는 아벨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의 상처마다 피를 토하고 있고 상처마다 내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벨의 허리에서 나오는 피소리가 내게 들리고 있다>
지금 아벨의 영혼은 살인자 가인을 저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벨의 영혼이 머므를 곳에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면서 놋 땅으로 간 것입니다. 에덴동편이었습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동편으로 갔습니다. 서편이 아닙니다. 남쪽이나 북쪽도 아닙니다. 동편입니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입니다.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곳입니다. 동쪽의 첫 인상은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동쪽으로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망이십니다.
그리스도안에는 곁코 정죄함이 없으며 그리스도안에는 절대 절망이 없습니다. 홍해도 가를 수 있습니다. 사자굴도 천사굴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물도 포도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살인범이라고 동편에 가서 방황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추수하는 자리에서 방황하면 룻과 같이 이삭을 주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돌덩어리 위에 가서 방황하면 안 됩니다.

2. 에녹성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 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4;16-17)

놋 땅에 살면서 에녹을 낳았습니다. 놋 땅에서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을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300년간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과 같은 에녹이 아닙니다(창5;18-20)
그 에녹은 셋의 후손이고 본문의 에녹은 가인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이름의 뜻은 같습니다.

에녹이란 <가르치다>라는 의미입니다.
가인은 이 곳으로 도망하여 하나님앞에 반역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성을 쌓았습니다.
자기 아성을 만들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을 쌓으면 하나님도 못 들어 올 줄로 착각하고 있는 가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화과 나무 치마를 입고 숨으면 하나님도 못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와 같습니다. 배밑에 들어가 숨으면 하나님도 못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요나와 같은 맥락입니다.
죄짓고 숨을 곳은 이 땅에 아무 곳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모르게 죄를 짓고 아무도 모른다고 편안한 자기 성속에는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부류입니다.

(2) 에녹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가르친다>는 뜻입니다.사람은 사람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할 뿐입니다.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이야 말로 가르치는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바벨탑은 후대에만 쌓은 것이 아니라 가인도 쌓았습니다.
다윗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목동 아이였을 때일입니다. 그는 사울왕이 살고 있는 왕궁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궁중으로 들어 갔습니다.
온 나라 대신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왕곁에 있는 하프를 연주할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사울왕이 말했습니다.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이 하프를 만든 사람에게 속았다. 나를 위하여 정성껏 만들었다고 특별히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어떤 명사가 연주하여도 불협화음만 났다. 도저히 맑은 소리가 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계속 요청하였습니다. 사울은 한번 해보라고 기대하지 않고 허락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손에 하프가 닿자 아름다운 음을 내면서 온 궁중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기쁨이 환하게 나타났습니다.
다윗의 연주가 끝났을 때 모두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감격의 기쁨을 감추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악기에서 소리도 못 내었는 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연주를 잘하니? 비결이 무엇이냐?>
다윗이 말했습니다.
<예. 저는 이 하프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였지요. 나는 이 하프에게 새들이 와서 노래하는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리고 나뭇잎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왕이 하프소리를 들으면서 기뻐하실 때 이 하프는 바로 기쁜 소리를 낼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날 사람들이 하프를 만들려 나무를 도끼로 자르고 대패로 밀고 하는 슬픔과 고통의 순간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 하프는 슬픔의 소리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또 하프에게 그 아픔이 결코 헛된 아픔이 아니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하는 악기가 되었음을 하프에게 알려 주었지요. 하프는 자기가 그런 귀한 존재가 되었음을 알자 또 기쁨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땅 놋땅으로 가서 회개하거나 자복하지 않고 자기 아성을 쌓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에녹성이란 이름은 자기가 붙인 이름입니다.
성 이름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으로 짓지 않고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아들 이름을딴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삼손은 물을 발견하고 엔학고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삼손이 나귀턱 뼈로 블레셋 사람을 친 후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을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모든 신앙적인 이들은 이름을 붙일 때에도 신앙적인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들은 자기 이름을 넣거나 아들 이름을 넣습니다.
이같이 가인은 인본주의로 살았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에덴을 잃어버리고 놋 땅에 거하며 놋 땅중에도 에녹성을 쌓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곳이 한 곳 있습니다. 도로 가야 합니다. 곧 에덴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 지라.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4;16-17)

우리는 놋을 떠나야 합니다. 에녹성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새 에덴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복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본래 시민권은 에덴의 시민권입니다. 한국인이 아무리 미국을 이민갔어도 한국인입니다.죽을 때까지 한국인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받고 살아도 한국인입니다. 우리는 놋 땅에 살아도 에덴인입니다.
그 곳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주님은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에덴으로 갈 수 있을 가요?

1. 놋을 버려야 합니다. 에녹성을 떠나야 합니다.
버려야 긍정이 옵니다. 부정해야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갈데아 우르를 떠나야 가나안 땅에 전개됩니다.

애급을 부정하여야 가나안이 됩니다.

2. 믿어야 합니다.
에덴은 더 좋은 땅임을 믿어야 합니다. 거냥 주님 품에 안기면 안겨지는 것입니다. 놋을 떠나야 합니다.

에녹성을 헐어야 합니다.
그리고 에덴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이십니다.

 

가인(Cain)과 아벨(Abel)

실낙원 사건, 즉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음으로 에덴동산을 쫓겨나는 사건에 이어서 형제(가인과 아벨) 사이의 살인(fratricide)과 최초의 순교사건을 소개하는 성경의 내용(창4:1∼15)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은 지옥과 다름없는 인간사회의 비극, 즉 모든 전쟁과 살인과 갈등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이라 할 수 있고, 그 대답의 뿌리에 (원)죄, 즉 하나님께 대한 첫 사람 아담의 반역과 불순종이 있었음을 가르친다.

아울러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4:9)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인간 사이의 수평적 대인(對人)적 관계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원초적 질문, 즉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라는 질문(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대신(對神)적 관계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킴으로써 죄악의 뿌리 그리고 지옥과 같은 모든 무질서(개인적 정체성 위기, 형제간의 불화, 사회계층 간의 갈등, 민족 간의 전쟁 등)와 비극이 대신적 관계의 결렬에서 비롯된 것임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히 12:24; 마 23:35; 눅 11:51) 가인(악인)이 아벨(의인)을 살해한 사건은 결국 온 인류가 달려들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건으로 귀결되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요 5:39) 인류 최초의 형제살해 사건은 (아벨처럼 묵묵히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예표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예고도 결국 의인 아벨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고한 죽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이 사건을 놓고 제기하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나 하는 것이다.

적어도 5000년 전의 사건을 다룬 구약적 맥락에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얻기 힘들다.

요세푸스의 설명(Ant. I,54)에 의하면, 인간의 공력이 들어간 농산물(곡식; 율법주의)보다는 인간의 공력이 덜 들어간 축산물(양; 은혜주의)을 하나님께서 더 선호하셨기 때문이라 했고, 어떤 주석가는 “세월이 지난 뒤에”(창 4:3) 농산물 가운데 마지막 열등한 부분을 제물로 바친 가인의 제사보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4:4) 중 극상품을 드린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선호하셨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지만, 신약의 해석이 더 명확하다.

즉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 곧 믿음으로 제사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의롭다고 인정받았다(以信得義)는 것이다(히 11:4, 6).

아벨은 하나님의 존재(사랑과 공의)를 믿었고, 가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으며, 이와 같은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교만·분노·뻔뻔함 등으로 표출된) 악행으로 평가되었다(창 4:6∼7; 요일 3:12).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가인의 비극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교만과 불신과 시기의 열매라면, ‘하나님의 형상’인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질투와 무관심 가운데 매일 살인의 열매를 맺고 있는 우리도 주님의 보혈이 필요한 가인의 후예가 아닌가?

'好學의 聖經信仰 > [종합]인물.말씀.강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와  (0) 2011.03.05
요나단  (0) 2011.03.05
가인(1)   (0) 2011.02.24
예레미야  (0) 2011.02.23
느브갓네살  (0) 2011.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