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虛와 實 - ‘오늘’을 진단한다 1
-한국교회 전도, 무엇이 문제인가? 1.
성경에 충실한 올바른 전도문화 확립 절실
복음전도의 최대목적은 교회의 양적 성장이 아닌 영혼구원
개개인 구원확신을 가지고 성숙한 신자 되어 전도 실천해야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한국교회.
90년대부터 침체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퇴보기에 접어든 듯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교회성장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 나타나는 제반현상은 분명 총체적인 위기의 적신호가 분명하다.
개교회 집회가 줄어들고, 문을 닫는 개척교회가 속출하고 있으며, 교회예배 참석인원이 급감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무임목사가 속출하여 신학교 정원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몇 년 만에 개최한 교회집회에 유명강사를 초빙해도 성도들이 모이질 않아, 집회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방법을 진단하고, 그 방향을 제시한다.
매년 많은 기관에서 수천수만 명의 목회자가 운집하는 초대형 맘모스 교회성장 세미나가 계속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지만 교회침체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예수초청큰잔치, 총동원전도훈련, 능력전도, 전도축제, 이름도 생소한 전도컨퍼런스, ○○전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전도훈련 기관과 전도훈련 강사의 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도의 목적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적성장에 치중한 무분별한 전도
목회자나 평신도에게 전도의 목적을 물으면 대부분이 “교회성장”이라 말한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나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된 교회성장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란 간단히 말하면 ‘구원 받은 성도의 모임’이다. 곧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단지 교인숫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가 말하는 교회성장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닌, 교회에 모이는 교인숫자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교회 성장을 교회의 크기나 성도의 수로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잘못된 방법이다.
교회성장지상주의에 함몰된 일부 목회자는 성경에 나온 여러 숫자를 언급하며, 숫자에 중요성을 두는 관점을 옹호한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숫자자체가 아니라 전체 문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현현되고 사도들의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결과로 나타났던 숫자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말하고 있는 그저 교회에 모여든 숫자가 아니라 ‘믿는 숫자’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주께서 구원 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더라(행 2:47)”,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5:4)”.
여기에 인용된 사도행전의 ‘숫자’가 의미하는 중요한 단어는 믿음· 구원·제자다.
연결해 보면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숫자는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주일날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제자의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성장을 ‘믿고 구원 받은 제자의 수가 많아지는데’ 둔다면 교회는 끝없이 부흥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성장을 지극히 가시적인 사람숫자나 교회의 크기에 두어 교회 대지와 건물의 평수나 자랑하고
단 하루 주일날 모인 교회숫자나 자랑하는 교회성장이라면 그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은 전도의 목적을 교회건물의 크기와 교회에 모여온 사람들의 숫자에 치중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성장’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하고있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 급급한 나머지 신자들의 질적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새 신자 양육이나 기존신자 신앙훈련에 실패한다.
공명심·업적주의로 세속화 심화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에게 숨어 있는 공통점은 공명심과 업적주의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공명심과 업적주의의 뿌리는 명예욕이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욕심이다.
하나님은 “탐욕은 우상숭배(골 3:5)”라며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셨듯이,
새사람이 되려면 옛사람의 대표적인 허물인 탐심을 버려야 한는 것이 진리의 말씀이다.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교회의 양적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몸부림칠 뿐,
신자 개개인의 영혼구원이나 신앙의 질적 성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수천수만 명의 교인들 중 이름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는커녕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 마음속에 무슨 걱정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구원에 관한 영적인 문제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계속 교회성장, 전도를 강조하는 표리부동한 상황이 현재 그들의 모습이다.
교회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목적은 교회성장지상주의자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교회를 개척했으니까 내 교회요, 내가 교회를 부흥시켰으니까 내가 주인노릇을 하는 교회성장지상주의자들은
교회를 마치 개인소유물로 생각하여 군주나 황제로 군림하고 있다.
내 교회니까 내 자식에게 교회를 대물림하는 교회세습이 짜인 각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십 년간 청춘을 모두 바쳐 교회를 성장시켰다고 할지라도,
‘전도와 목회의 목적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신실한 목회자는,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되뇌며 죽도록 충성할 뿐 감히 교회세습은 한 순간이나마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훈련과 순종을 통한 전도 절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전도하면 금방 떠오르는 성경본문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그 명령에는 다섯 개의 동사(명령)가 나온다.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지만 여기서는 전도의 목적은 마지막 동사 ‘지키게 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도의 목적은 한 사람을 인도하여 교회에 등록하는 것도, 세례를 주고 직분을 주는 것도 ,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명령하신 전도의 목적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자의 기본임무인 주일을 성수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의 눈으로 현대교회의 실상을 본다면 지금 우리가 전도해야 할 대상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교회 밖의 불신자의 영혼이 주님의 이름을 온전히 모르는 것처럼, 교회 안의 불신자도 주님을 진실되게 바라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통한 전도 실천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15).” 조금이나마 성경적인 전도를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이 본문의 오묘한 진리에 감탄하게 된다.
짧은 본문 속에 연거푸 사용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어찌’라는 단어로,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그 이유를 열거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믿지도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요?’, ‘주의 이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내용을 좀 더 간략하게 말하면 전도란 보내심을 받고, 나가서 전파한다.
이를 통해 듣게 하고, 믿게 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전도의 최종목적은 ‘구원’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낮고 천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뭇 영혼들의 구원이다.(요 3:16)”.
그러니까 교회의 존재목적은 전도요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다.
“신앙의 마지막은 구원이요(롬 6:22”, “믿음의 결국은 영생이라(벧전 1:9)”는 말만 들어봐도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든 사도 역시, 기독교 신앙의 최후목적은 구원이라 강조하고 있다.
전도의 목적은 구원이다. 수십 년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요직은 다 맡은 중직자라 할지라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바람직한 기독기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현대교회 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인지 의심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성경을 애독하지도 않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 않고, 수년 동안 전도 한 사람 하지 못하는 중직이 부지기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목회자들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교회성장, 전도만 외친다면 바람직한 목회자라 할 수 없다.
목회자의 직무유기이다. 교회 안의 불신자, 그동안 목회자에게 맡겨진 영적 불구자들의 신앙을
철저히 진단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한국교회에 불어야 한다.
성숙한 신자 개개인, 전도 감당해야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이를 위하여…힘을 다해 수고하노라(골 1:28-29)”.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도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쳐 헌신한 바울은, 이 ‘힘을 다해 수고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목회자의 기본자세와 목표를 분명하게 기록하였다.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는 본문은 전도의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중요한 단어만 연결해 보면 전파하여, 권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전한 자 =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구성체 안에서 성숙한 개인’으로 세우는 일이다.
완전히 자란 성숙한 신자다. 산상수훈에 있듯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말한다.
또한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빌 2:15)”를 말할 때, 곧 완전한 자녀를 말하는 것과 같다.
완전한 자는 거듭난 성도요, 믿고 구원 받은 성도요, 전도의 열매를 맺는 성도다.
완전한 자는 곧 영적으로 성숙한 자요, 전도하는 성도다. 특히 본문 중에 ‘각 사람’이란 표현이 있다.
목회자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살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짧은 본문 속에 ‘각 사람을’이라는 말이 연거푸 세 번 나온다.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이 곧 목회자의 사명이요 전도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목회자와 전도자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보살펴야 한다.
바울은 지금 이 일을 위하여 자기의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전도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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