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종교)韓國 의 宗敎들

한국 유교의 흐름(1)

好學 2009. 4. 19. 18:10

한국유교의 흐름

역사적 개관

고대에서 고려시대까지

한국유교의 시원에 관한 견해는 대체로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BC 12세기경 은(殷)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범금팔조(犯禁八條)로 우리 사회를 교화했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이 있지만, 한국 유교의 전통적 자부심을 확고히 해주었다. 둘째, 고조선과 인접한 전국시대 연(燕)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이 전래되었다는 견해이다. 중국 사료와 문헌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셋째,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한사군(漢四郡:BC 108~AD 313)이 설치되면서 중국 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우리 땅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다.

삼국시대 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372년(소수림왕 2)에 고구려에서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太學)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에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백제에서도 상당한 깊이의 유교사상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까지 한자와 유교사상을 전파했다. 광개토대왕비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는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자세를 보여준다. 이처럼 삼국의 유교문화는 경전교육에 기초한 실천적 성격을 띠며, 사회제도의 정비에 바탕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전반기에는 과거제도를 비롯하여 국가의례제도 등 유교문화의 제도적 정비가 확산되어갔다>(→ 색인 : 고려의 유학). 최승로(崔承老)의 상소문에 내재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 당시 유학자들의 이념적 각성이 뚜렷이 드러나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이는 유교적 역사의식도 이 시대 유교사상의 심화양상을 보여준다. 고려 후반기의 충렬왕 때 안향이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들여와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여 활기를 띠었다. 이색·정몽주 등의 학자들은 이 학풍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정도전·권근은 조선왕조의 창업에 이념적 뒷받침이 되어 유교적 사회제도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조선은 유교, 곧 성리학의 철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도학(道學)을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실행했다. 조선 초기를 통하여 역대 임금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제도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 세종 때에는 유교적 국가의례와 제도를 정비했으며, 유교적 교화체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유교사회의 기틀을 확립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들 중에서 공신과 관료의 기존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도학정신의 실천에 진력하던 신진세력인 사림파(士林派) 사이에 대립을 보여 여러 차례 사림파의 선비들이 희생당하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조선 중기인 16세기에는 도학의 이상정치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에 의해 추구되다가 실패했지만, 결국 이들이 정치의 담당자가 되는 사림정치시대를 열었다. 사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자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파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비롯하여 서원 설립이 활발해져서 향촌의 유림활동이 확산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향약(鄕約)을 시행하면서 향촌 질서의 유교적 교화가 심화되었다. 이 시대에 성리학의 이론적 논쟁이 인간의 심성문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면서 성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황(李滉)·이이(李珥)에 이르러 불붙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쟁은 당시의 대표적인 성리학 논쟁으로서, 학문적인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조선 후기에는 가정의례를 중심으로 예학(禮學)의 발전과 성리학적 논쟁의 확대, 청나라를 배척하는 의리론의 강화에 따라 정통도학도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사변적 공허성과 의리론의 비실리적 명분주의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현실 사회제도의 개혁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실학이 대두했다. 18세기초에는 심학파(心學派:陽明學)가 형성되었다. 당시 새로 전래해온 서유럽 문물(西學)을 수용하면서 로마 가톨릭교 신앙운동이 일어나자, 도학파는 이단사설로 배척하고 정부는 형벌로 금압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신념들이 서로 비판하는 다원적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한말에서 현대까지

19세기말 서유럽 열강과 일본의 침략위협이 높아지면서 도학자들은 강경한 저항논리로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제기하여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뒷받침했다. 한말 도학자들은 침략자에 대한 배척이론의 강화와 의병운동의 전개 사이에서 다양하고 열렬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무력 위협 앞에 마침내 개항했으며, 프랑스와의 통상조약에 의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1896년 민비시해사건 이후 유학자들은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다. 1910년 조선 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국가종교로서의 유교체계는 허물어졌다. 그러나 도학파의 선비들은 의리론적 신념에 의해 의병운동을 일으켜 항거하거나, 단발령, 창씨개명, 일본어 사용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비타협적 저항을 전개함으로써 전통수호의 보수적 태도를 지켜갔다. 소수의 각성된 유학자들은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고 유교개혁을 추구하여, 1910년경 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대동교(大同敎)를 조직했고, 1920년경 이병헌(李炳憲)은 공교(孔敎)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보수적 유학자들과 서민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8·15해방 후 1946년 성균관(成均館) 유도회(儒道會)의 조직이 유림독립운동가의 대표적 인물인 김창숙(金昌淑)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그뒤에도 유림분규를 수습하여 조직을 재건하고, 도덕운동을 중심으로 사회교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유교적 규범형식과 가치관은 아직도 전통을 고수하는 데 머무르고 있어서, 현대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국문화와 유교

유교의 기본윤리인 삼강오륜은 전통사회의 일상적 실천원리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부터 〈효경 孝經〉이 중요시되면서 효(孝)의 덕목이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충(忠)의 규범은 국가 성장기의 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忠·孝·勇·信·仁)도 유교윤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강(三綱:忠·孝·烈)의 규범은 조선 초기 세종 때의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를 통해 모범적 인물들이 포상되고 사회적으로 장려되었다. 3강과 5륜의 규범이 대중 속에 널리 확산되어 사회윤리로 정립되면서, 전통사회의 도덕규범과 가치관의 근거로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선시대의 도학이념은 의리정신을 유교윤리의 표준으로 확인하여, 절의(節義)가 숭상되고 불의에 대한 강인한 저항정신을 실현했으며, 청백(淸白)의 풍속과 염치(廉恥)의 도덕성이 사회기강의 핵심을 이루었다. 다만 지나친 도덕적 순수성의 추구로 물질적 가치와 욕망의 현실성이 무시되는 문제점은 실학파의 실용적 관심을 통해 그의 보완이 탐색되기도 한다.

유교사회에서 풍속의 교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법의 제도를 들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양(辭讓)의 예법을 비롯한 각종 유교예절이 삼국시대이래 시행되어 풍속을 이루었으며, 이 때문에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불려왔다. 특히 〈주자가례 朱子家禮〉가 들어온 뒤로, 조선시대에는 이에 따른 의례절차의 모든 법식이 대중 속에 확산되어 실천되었다. 유교의례가 대중생활 속에 확산되면서 전통사회는 미풍양속을 확립했으나, 반면 의례의 형식주의에 빠지는 폐단을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유교의 사회제도는 신분계급의식과 장자(長子) 중심의 종법(宗法)제도를 기초로 한다. 사대부(良班)·중인·양인·천인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하여, 사회적 진출과 통혼(通婚)의 범위가 한정되며, 의복과 언어까지도 차이를 두는 상하의 수직적 계층질서를 형성한다. 조상에 대한 제사권은 장자만이 지닐 수 있고, 남녀 사이도 실질적으로 남자 중심의 차별을 바탕으로 한 수직적 질서를 확립한다. 유교사회는 가족제도에 기초하며, 군신관계의 모범을 부자관계에서 찾았다. 대가족 형태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친족 중심의 공동체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전통사회에 안정의 기초를 확보해주었다. 국가도 가족의 확산으로 인식함으로써 사회의 유기적 공동체 의식을 확보하지만, 폐쇄적 문벌주의로 서로 대립하여 분파적 대립을 일으킬 위험도 있다. 유교의 정치이념은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민심 속에서 천명을 발견하고, 덕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민본(民本)사상과 덕치(德治)주의에 근거한다. 따라서 백성의 교화에 도덕을 앞세우며, 법률은 유교의 기본윤리를 확립하는 수단으로 제정된다. 지배층과 백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로(言路)를 넓히고, 그 임무를 전담시키기 위해 언관(言官)의 비중을 높여놓았다. 또한 임금도 경전을 비롯한 유교 교육을 받는 경연(經筵)제도를 통해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유교 교육을 받은 사람만 과거(科擧)를 통하여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고, 관리의 업적이 유교적 통치목표에 따라 평가되게 함으로써 전통사회는 치밀하게 유교정신으로 다스려지도록 했다. 유교문화는 한자의 문자생활을 통해 중국 문화의 신속한 수용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자는 대중의 문맹화를 초래했고, 더구나 우리 언어의 고유한 세계를 한자에 예속시킴으로써 문화적 예속성을 초래하게 했다. 한문의 시가(詩歌)는 우리의 고유 음률과 어긋남에 따라, 중국문화를 지향하는 사대부 문화와 우리의 고유문화를 보존하는 서민 문화 사이의 이질성을 보여주게 된다.

교단과 의례

성균관

재단법인 성균관(>성균관재단)은 유교조직을 대표하는 중앙기구이고, 산하조직으로서 각 시도별 향교재단이 있으며, 그 아래 전국(남한) 231개소의 각 지방 향교(鄕校)가 있다. 성균관재단은 그 목적을 도의의 천명, 윤리의 부식, 문화의 발전, 공덕의 작흥 등으로 밝히고 그 기본사업은 문묘향사(文廟享祀), 성균관 및 지방향교의 통할관리, 교화 및 사회사업의 경영 및 보조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균관재단은 이사장이 대표하고, 이사회가 최고의결기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서울의 성균관은 관장·부관장·전의(典儀)·전학(典學) 등 임원이 있고, 성균관총회를 최고의결기구로 한다. 지방의 향교는 전교(典校)·장의(掌議) 등의 임원이 있다.

유도회(儒道會)

유교의 전국적 조직으로서 유교인의 단체이다. 중앙에 유도회총본부가 있고, 각 시도에 본부, 구·시·군에 지부, 통·리·동의 단위에 지회를 둔다. 시도의 본부는 1969년 결성이 완료되었으나, 지회는 아직 결성되지 않은 곳도 많은 형편이다. 총본부에는 유도회 총회가 최고의결기구이며, 위원장·부위원장·중앙위원회·상임위원회·감찰위원회의 조직이 있으며, 중앙위원회에는 사무총장이 사무를 집행한다. 유도회의 산하기구로서 여성유도회·청년유도회가 있다. 1975년 여성유도회가 창립되었고, 1976년 한국청년유도회가 창립되어 여성과 청년 유교인의 조직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유교조직의 기관지는 1964년 창간된 〈유림시보 儒林時報〉에서 시작하여, 그후 〈유림월보〉로 개칭되어 월간으로 간행되다가, 1987년 격주간의 〈유교신보 儒敎新報〉로 간행되고 있다. 그밖에 연관조직으로는 성균관의 교육사업에 따라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고, 유학대학에서는 유학과를 중심으로 유교사상을 교육하고 있으며, 유학대학원에서는 유교지도자를 교육하고, 그밖에 유림의 계획적인 훈련·연수 기구도 있다.

제사의례

국가의례로서 제천(祭天)의례는 고려 전기, 조선초의 세조 때 및 대한제국의 성립 후 일시적으로 지냈다. 사직제(社稷祭)와 종묘제(宗廟祭)는 국가의례의 대표적 제사로서, 삼국시대 이후로는 비교적 잘 지속되어왔으나, 일제강점기 사직제는 단절되고, 종묘제는 전주이씨의 가족의례가 되고 말아 유교적 국가의례로서는 소멸되었다. 성균관·향교의 문묘(文廟)에서 공자와 선현(先賢)을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는 유교정신의 계승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중기 이후로 서원의 사우(祠宇)에서도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가 매우 성행했다. 가묘(家廟)에서 조상에 제사하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확립된 유교제례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조선시대에는 4대의 조상에 제사드리는 전통(四代奉祀)이 성립되었으며, 가정의례로서 관례(冠禮)·혼례·상례(喪禮)·제례는 광범하게 실천되었다.

현대의 유교

변혁요구와 대응

오늘의 한국사회는 서유럽적 근대화 과정에 따라 전통의 형식이 광범하게 변화를 겪었으며, 유교전통은 밖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품성교육은 높은 교육열과 함께 노동인력을 질적으로 향상시켜 놓았다. 이러한 점이 한국사회가 근대적 산업사회로 발전하는 데에 가속력을 주는 요소로 작용한데 대해 서구의 물질문명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따라서 오늘의 한국 유교가 지닌 최대의 과제는 전통적인 낡은 형식을 떨쳐버리고 유교정신의 핵심적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다.

교세와 활동

1982년 교세의 지표가 되는 유교인의 수를 700만(690만 9,960) 명이라 했지만, 1983년에 정부의 전국 상주인구조사에서는 유교인의 수가 80만 명에 못 미치는 78만 6,955명 으로 나타났다. 그 원인은 유교조직의 허술함과 소속감의 애매성으로 나타났다. 유교조직의 지도층이 현실인식이 첨예하지 못한 노인층이고 세대교체나 세대간의 역할분담이 원만하지 못한 점이 제도와 의식의 개혁을 더디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근래에는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서 '도의선양대회'를 개최하고, '윤리선언문 및 실천요강'(1973)을 발표하여 사회도덕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공자학회(1980)·유교학회(1985)·예학회(1989) 등이 유교 연구단체로 등장하여 전문 유교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유교학회와 성균관의 협력으로 〈유교대백과사전〉(1990)이 편찬되어 한국 유교의 한 단계를 결산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