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14] 이제키아스의 항아리 그림
- ▲ 아킬레스와 펜테실레아.
고대 그리스에는 걸출한 화가가 많았으나 전해오는 작품이 거의 없다. 그 대신 그리스 회화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현재까지 수천 점이 남아 있는 항아리 그림들이다. 그리스인들은 술이나 물, 또는 기름 등을 담아두는 용도로 사용하던 항아리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항아리 그림에는 적색 표면에 검은색의 인물이 그려 있는 흑색상(黑色像)과, 흑색 표면에 적색 인물이 그려진 적색상(赤色像)이 있다. 적색상이 더 후기에 만들어진 항아리들이다.
항아리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은 벽화를 그리던 화가보다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 그래도 화공이나 도공(陶工) 중에는 자신의 이름을 항아리에 적어놓은 경우가 있었다. 아테네의 가장 탁월한 화공이자 도공이었던 이제키아스는 자신이 만든 항아리에 마치 항아리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키아스가 저를 그렸습니다" "이제키아스가 저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썼다. 자기 직업과 작업에 대한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키아스의 유명한 흑색상 '아킬레스와 펜테실레아'는 기원전 525년에 제작된 항아리 그림으로 호머의 '일리아드' 중 한 장면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인 아킬레스는 긴 창으로 무릎을 꿇고 넘어진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의 목을 겨누고 있다. 펜테실레아는 트로이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압박을 가하는 아킬레스의 강한 대각선과 표범의 가죽 옷을 입은 펜테실레아의 작은 대각선은 서로 평행이 되는 구도를 이룬다.
펜테실레아의 투구가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나는데, 바로 이때 아킬레스는 이 아름다운 여왕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펜테실레아 역시 죽는 순간 아킬레스의 눈에서 사랑을 읽는다. 검은 투구 속에서 번뜩이는 아킬레스의 눈과 순간적으로 머리를 돌려 아킬레스를 마주 보는 펜테실레아의 흰 얼굴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여왕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죽고 아킬레스는 슬픔에 빠지고 만다.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찰나의 긴박한 장면이 작은 항아리 그림 속에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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