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교회 (서울 종로구 도렴동)
종교교회 연혁 (출처- http://chongkyo.net/)
1896. 05 좌옹 윤치호의 요청으로 리드(C.F.Reid)목사 한국선교사로 내한
1900. 04. 15 캠벨부인이 설립한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부활주일 예배드림 ( 자골교회라 칭함)
1901. 09 지금의 서울시경옆 내자아파트자리에 2층으로 된 붉은벽돌예배당신축
(건축비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Louise Walker Chaple로 명명)
1904. 03 R.Hardie 선교사의 서울부흥회 주최하여 대부흥
1909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초대 정춘수 목사 취임(민족대표33인중 한명)
1910. 06. 09 지금의 도렴동자리에 십자형벽돌 2층 성전신축하고 종교교회라 칭함
1916. 01 웹?청년회가 종교노동야학강습소를 운영하고 영신축하동서양음악회 개최
1919 - 1921 양주삼목사 봉직
1930. 12. 08 북감리교회(정동,상동,동대문의 동자 계열)와 남감리교회(종교,자교,수표교등 교자 계열) 가 양주삼목사와 윤치호선생의 노력으로 통합. 양주삼목사가 통합감리교단 초대 총리사로 취임
현 교회 내부
파이프올르간 (출처- http://cafe.daum.net/organist)
파이프올르간
남감리회와 종교교회 탄생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그의 아버지인 윤웅렬이 연루되어 입장이 난처해지자 상해로 망명겸 유학길을 떠나 남감리교회가 운영한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그곳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면서 켄들러 박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가 모은 돈 200불을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켄들러와 엘랜 중서원장에게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하였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리드 선교사는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고,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고 1897년 캠벨부인이 입국하여 1898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학교내에 예배처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자교와 종교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박사
1976년 10월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윤치호의 동상
켄들러 박사
리드 선교사
캠벨 선교사
남감리회 교회성장
종교교회의 이름은 아무래도 종침교의 이름을 따서 종교화 한 것 같다. 이 종침교의 유래는 이러하다. 연산군의 통치하에 허종과 허침이란 형제신하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난설이란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림을 잘 그리고 학식이 높은 시인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그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소문속에 왕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두 형제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수락하든 거절하든 곤경에 빠질 정치적 입장에 놓여 난설이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두 오라버니가 입궁하러 가되, 적당한 장소에서 난동을 피워서라도 어전회의에 불참할 것을 권하였다. 두 형제는 양반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가게의 다리밑으로 떨어져 수선을 피워 시간을 끌다 어전회의의 참석을 면하여 의제 결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이 다리를 두 형제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 불리워졌다. 이렇게 종침교의 이름이 시작되었다. 1900년 켐벨 선교사에 의해 배화학당에 예배드리던 모임이 교회를 독립하게 되어 하나는 자하교 근처에서 시작하여 자교로,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모임은 이제 설명한 종침교 근처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종교교회라 이름하고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 100여년을 예배드려오고 있다. 1910년 초대 정춘수 목사가 십자가형 교회를 지어 예배당으로 사용한 이래 세 번째 성전 건축을 건축하게 된것이다. 이후 감리교의 역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민중계몽운동과 같은 민족의식 계발로부터 일제에 대한 무력저항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는 침체된 교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감소해가는 교세를 만회할 뿐 아니라 우리 민족과 상관없는 남-북 감리교회란 분열 체제를 극복하고, 단일 감리교회를 이룩하자는 두 감리교회의 합동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4년 두 교회 안에 '진흥방침연구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된 두 교회의 합동 운동은 결국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이름의 하나된 한국 감리교회를 탄생시켰다.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한국적 교회"를 목적으로 형성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창립 총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우리교회 4대 목사로 시무하였던 양주삼(梁柱三)목사를 초대 총리사(摠理使, 현재의 감독)로 선출하여 자치 교회 시대로 접어들었다.
순교자 양주삼 목사
1879년1월25일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으며 중국 중서학원에서 공부하고 미국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하였다. 종교교회 목사와
협성신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30년 남, 북 감리교 통합에 공을 세워 제1대 총리사가 되었다. 6.25 때 8월23일에 공산군에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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