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화성[발안] 제암리 사건

好學 2010. 7. 25. 21:05

 

- 화성 제암리 사건 -

 

 

(일본에 의해 불타버린 마을입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출처)

 

 

 

< 모티의 미니 전시관 >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출처입니다)

< 메티 월콕스 노블의 증언 >

(해석본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참고로 해석본 길어요...)

 

 

(발굴된 사건의 피해자 시신...)

 

( 스코필드 선교사가 몰래 숨겨둔 사진기로 찰영한 모습 )

 

 

 

 

( 불타버린 제암리 )

 

 

( 당시의 제암교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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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제암리학살 주범, 일제 무죄선고
입력: 2006년 02월 28일 18:17:24
 
3·1운동 때 제암리학살을 주도했던 일본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군사재판에 회부된 지 4개월 만에 무죄로 방면됐음을 확인시켜주는 문서가 발굴됐다. 이는 당시 일제가 국내외의 여론을 의식, 학살·방화 장본인을 군사재판에 부쳐놓고도 비밀리에 ‘무죄’를 선고, 끝내 일제 앞잡이를 보호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자료여서 주목된다.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채영국 연구교수는 최근 일본 방위청연구소에서 아리타 도시오를 무죄 판결한 문서를 발견, 87주년 3·1절을 맞아 28일 공개했다. ‘아리타 중위 관련 재판 선고건의 보고’라는 이 문서는 일본 군법회의 심리 내용을 모두 13쪽에 요약, 정리하고 있다. 문서에는 29명이 집단 학살·방화된 제암리교회 사건의 총지휘자인 아리타 도시오가 천안에서 수원으로 파견된 경위·학살 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문서에 따르면, ‘폭동 진압’의 명을 받고 4월13일 경기 수원군(지금의 화성)으로 부임한 아리타는 수원 지역 만세시위의 배후에 종교 세력 있다는 첩보를 받고 제암리 학살을 계획한다.

15일 오후 3시 아리타는 부하들에게 지시, 기독교·천도교 신자의 분포가 많은 제암리와 고주리의 주민 가운데 청장년층 남자 27명을 모아 총살했다. 사살 현장에서 아리타 역시 부녀자 2명을 사살했다. 이어 아리타 군경은 제암리의 교회당과 신자들의 집 27가구를 전소시키기에 이른다.

재판 기록은 스코필드 등 당시 선교사들이 전하는 학살 전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군사재판부는 제암리의 학살을 인정하면서도 아리타에 대해서는 ‘범죄를 일으키려는 뜻이 없고, 정당한 폭동진압’이라며 무죄라고 선고했다. 그가 부녀자 2명을 사살한 것은 ‘직무수행상의 과실’이라며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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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스러운 ‘제암리 교회’모습 국내 첫 공개
[쿠키뉴스 2005-11-04 07:21]

[쿠키포토] ○…일제 강점기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진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교회의 불 타기 전 평화로운 모습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예총 화성지부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일제의 침략사’를 주제로 17일부터 화성시청에서 여는 전시에는 1908년 초가지붕의 제암리 교회당 모습이 선보여진다.

사진속의 가옥은 교회 본체로 그 옆에 선교사 부인이 아이를 안고 한복입은 어린이들과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다.국민일보 쿠키뉴스제휴사/경기일보 이명관 기자 mklee@kgib.co.kr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 국민일보 쿠키뉴스(www.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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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에서, 청년 학생들은 애당초 집회장소로 계획되었던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시작으로 전국에 걸쳐 일파만파의 도미노현상을 일으키며 무려 2달 가까이나 계속된다.

이때의 만세운동은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는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이를 제압하였던 일본 헌병들의 만행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정도로 모질고도 잔인한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특히 화성 제암리교회당에서의 집단 학살행위는 시위군중과의 직접적인 충돌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거사 뒤의 보복행위여서 더욱 일제의 잔인성이 확인되는 역사현장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헌병이 두렁바위마을의 기독교주민 23명을 집단 학살한 만행 유적지이다.

1905년으로 교회 청년들은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4월 5일 이웃에 있는 발안장날에 만세운동을 하기로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시간에 교회 청년들이 발안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니 장터에 모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응하였고 이에 당황한 일경의 무차별 매질 진압은 많은 청년들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날 밤 제암리청년들은 다시 뒷산에올라 봉화를 올리니 주민들의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그 10일 후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 78연대소속 아리타중위등 헌병 30명이 제암리에 와서 발안장날 심한 매질에 대한 사과를 하겠다며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화당에 모이게 한다.

이렇게 21명의 신도가 모이자 일본 헌병들은 교회당 밖에서 문에 못을 치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고 총을 난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불길 솟는 교회 앞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부르는 두 아낙의 목을 베고 볏짚으로 불을 놓았다.

그들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민가에 불을 지르니 외딴집 한채만 남고 그 마을의 32채나 되는 초가가 모두 불탔다. 이때 이웃동네 오산에서도 그 불길이 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고도 헌병들의 감시가 심해 몇날이 지나도록 피해자의 유해를 치우지 못하였는데, 4월 17일 이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에 의해서야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만행은 비단 이곳에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였지만, 제암리사건이 서방에 알려지게 된 것은 스코필드가 제암리사건을 전세계에 폭로하면서이다.

이일을 계기로 일제는 전세계인들의 비난을 면하기위하여 궁여지책으로 그때까지 행했던 군사력에 의한 무단정치를 문화정책으로 바꾸게 된다.

당시의 사건장소였던 교회당이 있던 자리는 이 사건의 목격자인 미망인 전동례의 증언과 최응식의 도움을 받아 이 일대에 대한 유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문화공보부의 민족수난사 현장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을 사적 제 299호로 지정하였다,

또 이들 유골은 대형관에 입관되어 1982년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새로 지어진 제암리 교회 뒤편에 마련된 합동묘지에 안장하여 순국선열로 추서하였다. 제암리 교회당과 연결된 건물에는 기념관도 마련하여 유해 발굴 때 사진과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지금은 정식으로 전시관 건물을 따로 짓기위해 교회 바로 옆 공터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23위의 선열들이 합동으로 잠들어 있는 묘지는 그날의 참삼이 새삼스러워 보일정도로 평화롭고 따스해 보이지만 왠만한 왕릉에 버금가는 커다란 봉분은 그날이 마치 어제인 듯 울분이 솟구치게 한다.




일본의 사료를 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군요.

1919년 3·1의거 당시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뿐만 아니라 인근 수원지방 16개 마을과 5개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만행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또 고종황제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는 내용의 문건을 파리강화 회의에 전달하려다 밀사였던 하란사(河蘭史) 전도사 등이 체포되는 바람에 일본의 사주에 의해 독살됐으며,이 과정에서 황실의 외척인 윤덕영(尹德榮·순종황후 윤비의 큰아버지)이 깊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1892년부터 1934년까지 42년간 남편과 함께한국 선교사로 근무했던 미국 북감리교의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여·1872∼1956)가 당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육필일기와 문건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이 자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담임목사 조영준) 역사관 김대구상임연구위원(54) 일행이 지난해 미국에서 노블 여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 최근 ‘3·1운동,그날의 기록’이란책자로 간행됐다.

‘제암리사건’과 관련,그동안 드러난 기록에는 4월15일 일본 군경이 제암리교회에 불을 지르고 23명을 살해한 데 이어 고주리 마을에서 6명을 총살하는 등 모두 29명을 죽인 것으로만 돼 있다.그러나 노블 여사의 일기에 따르면,일경은 제암리교회 뿐만 아니라 4월19일을 전후해 인근 수원지방 16개마을과 5개 교회에서 추가로 주민 학살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는 이날자 일기에서 “그들(로이드 영국 대리공사 등)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그들이 알기로는 그 지역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다”고 밝혔다. ‘수원지역 구조활동 보고서’에서는 “사강리에서 326채의 가옥이 불타고 1,6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며,39명이 살해됐고,일경 한 명도 돌에 맞아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밖에 당시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제암리사건의 파문이 확산되자 “교회 재건을 위해 교회당 500엔,그리고 불탄 집 한 채당 50엔씩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미국 선교사들에게 당부하며 사건 은폐를 시도한 사실도 밝히고 있다.

김대구 연구위원은 “3·1의거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의 기록인만큼 사료가치가 우수하다”며 “노블 여사의 일기를 근거로 경기도 화성군 일대의 감리교회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에 대한 현지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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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판 제암리사건' 공개,日軍 만주서도 한인 집단학살
경향신문 2000-08-09 17면
1919년 경기 화성 제암리에서 일어난 일본군에 의한 한인 집단 학살사건이 만주에서도 벌어진 사실이 현장조사를 통해 최초로 확인됐다. 국가보훈처는 8일 "일본군이 1920년 12월쯤 만주 룽징시 장암동(현 룽징시 동성룡 동명촌 사대)에서 한인 33명을 교회에 집결시킨 뒤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죽창.칼 등으로 찔러 몰살시킨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일본의 한인학살사건은 보훈처의 지원으로 지난 6월27일부터 7월31일까지 만주 지역을 답사한 항일독립운동 사적지 한.중합동조사단(단장 朴桓 수원대 교수)의 실태조사 결과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일본군에 의한 만주지역 한인 집단학살사건은 그동안 학계에서만 연구자료 등에 서술됐을 뿐 이처럼 현장 답사를 통해 밝혀지기는 처음이다. 조사단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 14사단 15연대 제3대대 소속의 무장군인 77명은 룽징 동북쪽 25㎞ 지점에 위치한 한인촌 기독교 마을인 장암동을 포위,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포박한 뒤 교회당에 가둔 채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이어 화염을 피해 교회당을 뛰쳐나오는 한인들을 죽창이나 칼 등으로 무차별적으로 찔러 참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군은 특히 숨진 한인 가족들이 숯덩이가 된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냈으나 5∼6일 후 다시 찾아와 가족들에게 무덤을 파게한 뒤 시체를 한 곳에 모아 태워 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같은 사실을 당시 일본군이 작성.보유하고 있던 '육군성보고서'와 이 교회를 이끌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자료 등을 통해 확인한 뒤 한평생 '장암동 참변'을 연구해온 '중국용정역사연구회' 최근갑(崔根甲) 회장의 안내로 현장을 찾는 데 성공했다. 참사현장에는 현재 사과.배밭으로 변한 교회터의 주춧돌만 남아 있으며 '용정 3.13기념 사업회'에서 지난해 6월 건립한 기념비만이 있다.

조사단을 이끈 박환 교수는 "일본군에 의한 이같은 학살은 1920년 10월에 일어난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것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장암동 참상 확인은 그동안 학계에서만 나돌던 '경신년 대참변(庚申年 大慘變)'의 실상을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박교수는 "1920년 경신년은 '3.1운동' 이후 '청산리전투' 등 항일독립전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해로 일본은 이같은 저항을 민간인에 대한 무참한 보복학살로 일관했다"면서 "특히 만주지역 한인들은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는 항일독립운동가들로 역사적 재조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함께 "무고하게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는 일본으로부터 공식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물론 추모사업 등을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사단은 또 ▲만주지역 독립군 최대 참변지인 지린성 지안시 구마링 전투지역 ▲독립군이 조선총독 사이토를 저격한 마시탄대안 의거지 ▲이동휘선생이 설립한 북간도지역 무관학교 북일학교터도 최초로 발견, 이날 공개했다.

구마링참변지는 1925년 3월16일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회의를 하던 참의부 독립군이 불의의 습격을 받아 42명이 전사한 곳으로 당시 작전회의실로 사용됐던 집들은 현재 기둥 등만 남아 있다. 마시탄대안 의거는 독립군들이 조선총독을 향해 직접 사격을 가한 사건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조사단은 1924년 5월19일 참의부 독립군 제2중대 1소대가 마시탄 강변에서 국경을 순시중이던 사이토 조선총독에게 총격을 가했던 지안시 쌍훠룽과 샤훠룽 사이의 무명고개를 처음으로 확인, 공개했다.

북일학교는 1917년 1월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선생이 지린성 훈춘현 다황커우에 설립한 한인사립학교로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이 됐다. 북일학교는 설립 이후 2년여간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오성륜(吳成崙), 김인화(金仁化), 정성규(丁成奎), 김태정(金太靜), 김근(金槿)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