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남아메리카

파라과이 공화국

好學 2010. 7. 10. 11:44

 

파라과이 공화국

 

República del Paraguay
Têta Paraguái
파라과이의 국기 파라과이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Paz y justicia
(평화와 정의)
국가: 파라과이에게 공화국이 아니면 죽음을!
파라과이의 위치
수도 아순시온
25°16′S 57°40′W / 25.267°S 57.667°W / -25.267; -57.667
공용어 스페인어, 과라니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공화정
페르난도 루고
독립
 • 독립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11년 5월 14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406,750㎢ (59위)
2.3%
인구
 • 2005년 어림
 • 인구 밀도
 
6,158,000명 (101위)
15명/㎢ (161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309억 (94위)
$4,900 (137위)
HDI
 • 2006년 조사

0.752 (98위)
통화 과라니 (ISO 4217:PYG)
시간대
 • 여름 시간
(UTC-4)
(UTC-3) 
ISO 3166-1  600
ISO 3166-1 alpha-2  PY
ISO 3166-1 alpha-3  PRY
인터넷 도메인 .py
국제 전화 +59

 

 

 (스페인어: República del Paraguay 레푸블리카 델 파라과이[*], 과라니어: Têta Paraguái 테타 파라구아이, 문화어: 빠라과이)는 볼리비아와 더불어 남아메리카의 내륙국이다. 파라과이 강이 지나며,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와, 동북쪽으로는 브라질과, 북서쪽으로는 볼리비아와 맞닿아있다. 남아메리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나라라서, 때로는 "아메리카의 심장"(Corazón de América)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도는 아순시온이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국기를 앞면과 뒷면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국호 유래

"파라과이"라는 국호는 북에서 남으로 이 나라의 중심을 지나는 파라과이 강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강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넷 이상의 설이 있다. 과라니어로 말그대로 번역하자면 Para는 '여러 색깔의', Gua는 '~에서, ~에 속하는, 장소', Y는 '물, 강 혹은 호수'를 뜻한다. 즉 '강물의 여러 색깔'(가령 햇빛이 수면에 비친 색이나 물가의 앵무새 따위)이란 뜻이 된다.


지리

파라과이 지도

파라과이는 파라과이 강을 기준으로 동부 지역(공식적으로는 동부 파라과이Paraguay Oriental이며, 파라네냐paraneña라고도 한다)과 서부 지역(공식적으로는 서부 파라과이Paraguay Occidental이며 차코Chaco라고도 한다.)으로 나누어진다.

남동부 국경은 파라냐 강이며, 브라질과 파라과이 사이에 이곳의 이타이푸 댐이 있다. 이 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수력 발전소로 파라과이에 필요한 모든 전력을 공급한다.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이타이푸 댐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 댐 전력에서 50%의 권리를 가진다. 파라과이는 여기서 생산되는 10% 이하 밖에 쓰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나머지 전력을 브라질에 판매한다. 파라냐 강의 다른 거대 수력 발전소로는 야시레타 댐이 있는데,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공유하고 있다.

지형은 동쪽에는 초지와 숲이 울창한 언덕으로 되어 있고, 서쪽은 저지의 습지 평야이다.

이 지역의 기후는 아열대에서 온대 사이로, 동부 지역은 강수량이 상당하나 서쪽 끝으로는 반-건조 기후를 보인다.


역사

콜롬부스 이전 시대에 파라과이는 숲이 우거졌고 비옥한 땅이었다. 그곳에서 半유목 생활을 하며 과라니어를 쓰는 부족들이 살았으며, 용맹한 전사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525년 에스파냐 A.가르시아가 파라과이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로 1536년부터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1537년 8월 15일 아순시온에스파냐 탐험가 후안 데 살라사르 이 에스피노사가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18세기 남아메리카에 정착한 예수회의 선교지였으며, 에스파냐 식민지의 지방 중심지가 되었다. 동부 파라과이에 예수회 공회도소가 설치되어 150여년간 번성했으나 1767년에 에스파냐 왕가가 예수회를 추방했다. 파라과이는 1811년 5월 14일에 에스파냐 지역 정부를 전복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파라과이의 역사는 공산주의 정부와 정치적 불안정과 내분, 이웃나라와의 전쟁으로 점철되고 있다.

 

파라과이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살라노 로페스
 

독립 후, 프란시아의 중심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했다. 그의 아들인 C.A.로베스동안에도 외국자본을 들어오게 하여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삼국동맹전쟁에서 5년간 남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1870년에 패배하여 나라가 파괴되고 인구가 크게 줄었다. 특히 파라과이 남자인구의 90%에 달하는 인구가 이 전쟁을 목숨을 잃어 수많은 전쟁미망인이 양산되기도 했다. 파라과이는 이구아수 폭포의 상당 부분을 뺏기는 등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영토를 크게 잃었다. 그리고 친아르헨티나, 친브라질로 대립하다가, 1930년대 차코 전쟁에서 파라과이는 볼리비아를 무찔렀다. 파라과이는 차코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되찾았으며, 평화의 대가로 영토를 더 얻었다.

역사가와 교육자, 정치가들은 파라과이 역사에 대해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적 사건, 특히 전쟁에 대한 공식적인 서술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난다. 콜로라도당과 자유당은 파라과이 역사의 독특한 공식 서술을 유지했다. 1869년 아순시온 점령 당시 브라질 제국군은 파라과이 국립 문서기록소 자료를 찾아 히우 지 자네이루로 가져가서 비밀로 지켰으며, 그래서 파라과이의 식민 시대와 초기 역사를 연구하기는 힘들다.

좌파 정치가 페르난도 루고 전 주교는 2008년 4월에 파라과이 대선에서 여당 후보를 누르고 61년간의 보수 정치를 종식하여 역사적인 승리를 했다. 루고는 41%에 가까운 득표율로, 콜로라도당의 블랑카 오벨라르는 약 31%에 그쳤다.

파라과이의 행정 구역

수도아순시온이다.

기후

기후는 전체적으로 아열대 기후에 속하며 온화한 편이다. 동부 지방에는 타지역에 비해 비가 많이 내리는 편이지만 동쪽 국경 지대는 반건조 기후이다.

정치

1811년에 최초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이후 1992년 6월 20일에 현행 신헌법이 발효되었다. 정치체제는 대통령중심제로,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5년 임기로 단임제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상원 45석, 하원 8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회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실시되며, 상원은 전국구 비례대표제, 하원은 지방별 비례대표제로 선출되고, 임기는 5년이다. 주요 정당으로 현 여당인 홍당(PC: Partido Colorado)과 야당인 급진정통자유당(PLRA: Partido Liberal Radical Autentico) 등이 있다. 현 대통령은 2003년 8월15에 취임한 두아르테 (Nicanor Duarte) 대통령으로, 총체적 국가개혁을 천명하고, 최우선 국정과제로 부정부패 척결, 경제활성화, 빈곤퇴치를 선정하였다. 현재 파라과이는 무토지농민에 대한 토지분배문제와 빈곤심화에 따른 치안불안이 핵심이슈이다.

대외적으로, 파라과이는 반공·자유주의 국가와의 제휴 강화를 기본방침으로 하며, 중남미 여러 나라, 특히 메르코수르(MERCOSUR)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중심으로 한다. 정치적인 친서방 반공국가였으나, 1989년 로드리게스(Rodriguez) 대통령 집권 이후 소련 해체 등의 여파로 동구권과도 외교관계 수립하였다. 미주기구(OAS), 리오그룹 등 역내 기구와의 협력증진을 중시하고 있으며, 1991년 3월 남미공동시장(MERCOSUR)의 출범에 따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 역내 회원국과 제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볼리비아, 칠레 등 인접국과 선린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대외 관계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의 국가 중 유일하게 중화민국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다.

국민

파라과이인의 90% 이상이 황인종계인 과라니족등의 인디오스페인인 사이의 혼혈(메스티소)이다.

이것은, 정복 당시 처음에 이 땅에 살고 있던 과라니족이, 스페인인과 동맹해 다른 인디오를 깨는 과정에서 서로가 적극적으로 혼혈을 받아들이고, 그 후로는 온 예수회의 전도사가 과라니족에게 전도하는 과정에서 과라니 문화가 전승, 보존되고, 예수회가 추방된 후도 파라과이에서는 도시가 자라지 않고, 다른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와 비교해 크리오요 지배층이 너무 강력한 존재가 되지 않았고, 1811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도의 독립을 거부해 독자적인 국가로서 독립한 다음은, 파라과이의 초대 국가원수 프란시아가 정책적으로 이인종 간의 결혼을 추천 또는 강제로 했고 그때에 저항 세력이 될 것 같은 크리오요은 거의 추방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파라과이인은 인디오(과라니족)의 혈통을 이어받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민으로서는 독일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아랍인등이 있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서는 브라질인아르헨티나인의 두 집단의 존재가 가장 크다.

언어

에스파냐어과라니어공용어이다. 원주민들은 조파라어라는 둘을 혼합한 언어를 사용한다.

종교

콘셉시온에 있는 가톨릭 성당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 국교였으며 90%가 믿는다. 그러나 정교 분리 원칙이 있기 때문에 종교 선택이 자유롭다.

대한 관계

파라과이는 1962년에 대한민국(남한)과 수교하였으며 북한과는 수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과 문화협정(1973), 과학·기술협력협정(1975), 무역협정(1981), 사증면제협정(1982), 투자보장협정(1992), 범죄인 인도협정(1996) 등을 체결하였다. 전통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해 우호정책을 취하고 각급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해왔으며,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기업의 투자진출 및 경제, 기술, 교육 등의 분야에서 대한민국과의 실질적인 협력관계 증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유명인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자국팀을 응원하던 라리사 리퀠메가 파라과이녀 혹은 핸드폰녀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