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音樂/[대중음악감상]

한국 음악 역사흐름

好學 2009. 3. 16. 02:36

한국음악 (韓國音樂)

 
 

 한민족의 음악.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 서양음악의 3요소인 선율(멜로디)·장단(리듬)·화성(하모니) 가운데 선율과 장단은 갖추었으나 화성에 해당하는 요소가 빠진 점이 서양음악에 비하여 특징적이다.

상고시대
북쪽의 부여(夫餘)·동예와 남쪽의 마한·진한·변한 등 삼한시대 음악에 대해서는 문헌자료나 고고학적 자료 등이 충분하지 않지만,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의 기록을 통해 한국음악은 영고(迎鼓)·무천(舞天) 등의 제천의식(祭天儀式)과 관련된 원시적 가무(歌舞)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변한·진한에 슬(瑟)같이 옆으로 뉘어 타는 현악기가 있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축(筑)과 같았다고 되어 있다. 이 고유 현악기는 그 뒤 생긴 가야금(가얏고) 등 뉘어 타는 현악기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고>라는 한금(韓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고구려
고구려시대 음악에 대한 사료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악지(樂志)>를 비롯하여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 <악지>와 <동이전> 《북사(北史)》 <고구려전> 등 중국 문헌과 《일본후기(日本後紀)》 등 일본 문헌에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문헌 기록 외에도 안악 제3호분(357년) 벽화의 다양한 음악연주도를 통하여 당시 지배계급의 의식·행렬·연회 등에 사용된 악기와 음악을 볼 수 있다. 의장(儀仗) 및 3명의 주악상(奏樂像)이 무릎을 꿇고 앉아 2명은 각각 입고(立鼓)와 소(簫)를 연주하고 1명은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과 회랑의 행렬도에 말탄 4명의 악대가 각각 북과 소·각(角)·요를 연주하며 행진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편 후실의 주악도에는 거문고모양 현악기와 완함(玩咸), 세로로 부는 장적(長笛)을 연주하는 3명의 주악상이 있는데, 여기에 그려진 현악기가 고구려의 대표적 악기인 거문고인 듯하다. 또 퉁거우[通溝(통구)]의 무용총 벽화에 한 연주자가 17개의 괘 위에 4현이 걸린 현악기를 술대로 연주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16괘 6현으로 된 지금의 거문고의 원형이라 여겨진다. 거문고는 궁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전하여졌다. 이 밖에 오현금·쟁·횡취(橫吹)·소(簫)·고(鼓) 등이 연주되었다. 이 가운데 오현금과 횡취(피리의 한 종류)는 서역악기로, 서역음악이 성행하였던 중국 북조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악기편성에서도 현악기 완함이 제외되고 대신 오현금(오현비파)가 수용되어 전기의 <완함시대>에서 <오현비파시대>로 새롭게 전환하였음을 보여준다. 외래악기로 편성한 음악은 궁중에서 외국사신을 위해 연주한 연향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악가(樂歌)로는 《고려사》 <악지>에 고구려의 속악이라고 기록된 《황조가(黃鳥歌)》 《공후인》 《내원성(來遠城)》 《연양(延陽)》 《명주(溟州)》 등이 있다.

백제
백제음악에 관한 자료는 매우 적고, 고유악기로 전래되는 것도 없다. 그러나 대체로 사용악기와 그 편성 그리고 외국사신을 위한 연향악으로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서 그 쓰임새까지도 고구려음악과 같았던 듯하다. 《고려사》 <악지>에 <선운산(禪雲山)> <무등산(無等山)> <정읍(井邑)> 등이 전하는데, 이 가운데 <정읍>은 거문고를 포함한 향악기로 반주하는 향당(鄕黨)의 음악, 즉 민간음악이었다. 한편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에는 고(鼓)·각(角)·공후·쟁·우·지·적(笛) 등 7종의 악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들 악기는 모두 중국 남조에서 수용된 외래악기였다. 백제가 중국 남조의 음악을 수용한 예는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중국 남조의 오(吳)나라 기악무(伎樂舞)를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백제인들에 의해 일본 궁중에 전해진 백제악은 백제의 풍속무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신라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고구려·백제 음악보다 악기 종류가 적었으리라 추측된다. 신라는 가야국 멸망 무렵 가야금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유일한 악기로 신라음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가야금은 6세기 무렵 신라의 대악(大樂;궁중음악)에 채용되었으며 이것 하나로 편성된 연향악이 주종을 이루었고, 가야금은 일본에서 신라금으로 불렸다. 악가로는 《삼국사기》 <악지>에 18곡, 《삼국유사》에 향가 14수, 《균여전》에 향가 11수, 《고려사》 <악지>에 7곡 등이 전하나, 음악 형태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없어 어떻게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가야
가야 음악은 가야금으로 대표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의 풍류가야금과 같이 12줄과 양이두(羊耳頭)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土偶)의 가야금과 일본 나라[奈良(나량)] 쇼소원[正倉院(정창원)]에 소장된 신라금의 모양에서도 알 수 있다. 악사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하여 12곡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9곡이 지방이름으로 되어 있어 가야금 음악은 대부분 지방의 속악(俗樂)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야금 음악은 그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던 연향악으로 신라에 전해져 진흥왕 때 궁중음악으로 채택되어 가야 멸망 뒤에도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당악(唐樂)
당나라 음악으로 정확히 말하면 742년 당나라 현종 이후의 속악을 말한다. 《삼국사기》에는 664년(문무왕 4)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부성(府城)으로 보내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일 뿐 당악 자체에 대한 기록은 없어 신라의 당악 수용에 관한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악지>에 신라의 악기로 소개되는 향비파는 당비파와 대칭되는 명칭으로 당비파의 실재를 암시해 주고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서 쓰이는 <향악>이라는 명칭도 그 대칭으로서의 <당악>을 고려하지 않고는 사용이 불가능하다. 또한 신라의 향악기인 대금·중금·소금에는 중국의 악조인 <황종조(黃鍾調)> <반섭조(盤涉調)> <월조(越調)>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같은 악조명은 754년 당나라 조(調)이름으로 이때 음악이 신라에 수용되었음을 반증해 준다. 한편 신라와 당나라는 빈번한 사신왕래가 있었고 이때마다 중국사신을 위한 사신연(使臣宴)이 있었다면 당악 연주는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신라에서의 당악이 방향과 공후를 함께 편성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계유명아미타불삼존사면석상(癸酉銘阿彌陀佛三尊四面石像)·지증대사적조탑신(智證大師寂照塔身) 및 《고려사》 <악지>의 당악조를 종합하면 통일신라의 당악은 방향·비파·쟁·공후·생·소·척팔(尺八)·피리·당적·고(鼓)를 사용하였다.

범패(梵唄)
범패는 불교 의식 음악이다. 신라에 범패가 들어 온 기록은 하동(河東)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鑒禪師大空塔碑文)에 있으며, 이를 통해 830년 당나라로부터 진감선사가 귀국하여 범패를 보급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전에 이미 범패가 존재한 사실은 《삼국유사》에 760년(경덕왕 19) 월명사(月明師)가 향가만 알고 범패는 모른다고 적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향악(鄕樂)
당악의 대칭어로 민간의 음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당악 수용 이후, 즉 통일신라 후기의 음악을 말한다. 《삼국사기》 <악지>에서 언급한 향악은 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중금·소금·박·대고 등 8종의 악기를 포함하고 있다. 가야금 하나로 노래와 춤을 반주하던 음악에 비하여 매우 확대된 것으로, 여기에는 고구려 악기 거문고, 서역 악기 향비파, 당나라 악기 박판·대고 등이 복합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처럼 향악의 내용이 확대된 까닭은 그 대비가 되는 당악의 악기편성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 《고려사》 <악지>에는 삼국의 음악이라 하여 <동경(東京)> 등의 신라악 3곡 외에 <정읍> 등 백제악 5곡, <명주(溟州)> 등 고구려악 3곡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 삼국의 음악이 거문고 등 악기와 더불어 통일신라 때 수용되었고 이것이 고려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역계악(西域系樂)
당시의 서역악은 향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 나오는 것 중 <월전(月顚)> <속독(束毒)> <산예>는 서역악이고 <금환(金丸)>은 한(漢)나라 산악(散樂)에 해당하는데, 이를 모두 향악이라고 불렀다. 당악이 소개된 뒤 한국악이든 서역악이든 그 이전 것은 모두 향악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전기


아악
종묘·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으로, 처음 들어온 것은 1116년(예종 11) 송(宋)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고려에 들어온 대성아악기는 그 종류가 20여 종에 이르고, 수량은 등가악기 30점, 헌가악기 374점 등 모두 422점이었다. 이처럼 많은 아악기가 수용된 것은 한국음악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송나라에 아악을 청하러 간 고려 사절단은 아악기만 받아 온 게 아니라 송나라에 머물면서 아악을 교습받고 대성부(大晟府)에서 펴낸 악보를 받아와 고려에서 아악 연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당악
고려시대 당악은 엄밀히 말하면 당나라 음악이 아니고 송나라 음악을 가리키며, 문종 때 수입되었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문종 때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 <포구락(抛毬樂)> <구장기(九張機)>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 등이 연주된 기록들이 있으며, 이 밖에 <연화대(蓮花臺)>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곡파(曲破)> <보허자(鎧虛子)> 등이 있다. 1114년(예종 9) 송나라로부터 신악(新樂)이 들어왔는데, 이때 신악이란 1105년 위한진(魏漢津)이 휘종의 중지(中指) 3절(三節)을 1촌으로 삼아 그 촌수로 율관 길이를 정하고, 그 율관으로 조율된 악기들이다. 새로 조율된 송나라의 방향(方響)·생(笙)·소 등이 고려에서 사용되었을 때 재래의 음고(音高)가 큰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취악(鼓吹樂)
임금이 거둥할 때 수레의 앞과 뒤에서 의장과 함께 행진하며 고취가 연주한 것으로, 행진곡이라기보다 여러 의장과 함께 성대한 위의를 보이는 행렬음악이다. 고취는 악대로서 임금이 태묘(太廟)·원구(圓丘) 등의 제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 태악령(太樂令)에 의하여 진설되고 대기된다. 고취악은 당악기로 구성된 교방악(敎坊樂)과 비슷하며 연주인원은 100명이다.

향악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여 신라와 같이 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중금·소금·대고·박으로 편성되었으며, 그 밖에 당악연주에 사용된 장구가 새로 곁들여졌다. 장구는 문종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그 뒤 조선시대까지 당악과 향악 연주에 다같이 사용되었다. 또한 백제악 5곡, 신라악 5곡, 고구려악 5곡 등 삼국의 음악이 통일신라를 거쳐 전래되었다.

후기
1171∼1392년까지 약 200년에 걸친 고려 후기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궁중의 의식음악이 위축되고 민간음악이 활발해진 것이다.

아악
1173년(명종 3) 의종이 무신들에 의해 시해된 사건과 여러 차례 외침에 따른 장기간의 천도로 악공이 흩어지고 아악기가 손실되어 고려 후기 아악은 그 전승에 많은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금·슬·훈이 아악편성에서 빠졌으며, 명종 때부터는 제향의 아헌악(亞獻樂)과 종헌악(終獻樂)에 순전한 아악기 연주 대신 아악기와 향악기의 합주가 끼어들어 아악의 정통성을 어지럽혔다. 1370년(공민왕 19) 명(明)나라에서 편종·편경·생·소·금·슬·배소를 들여오고 이듬해 아악 부흥을 위하여 아악 전담부서인 아악서(雅樂署)를 새로 만들었지만, 아헌과 종헌의 향악교주는 교정되지 못한 채 조선 세종 때 이르러서야 순아악으로 개정되었다.

당악
고려 전기에 들어온 당악은 여러 차례의 외침(外侵)에도 불구하고 후기까지 여전히 연향에서 향악과 대비를 이루어 좌방악·우방악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후기 당악은 악기편성에 몇 가지 변화를 보인다. 즉 고려 전기 당악에서 사용된 쟁이 대쟁과 아쟁으로 바뀌었고, 대고 대신 교방고(敎坊鼓)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퉁소가 새로 채용되었다.

향악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고려의 속악은 곡명만 전하는 것과 그 음악이 조선시대까지 내려와 악보로 전하는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 중 백제악의 《방등산》과 연대미상의 곡 《금강성(金剛城)》, 이제현(李齋賢)의 한시 번역이 있는 《정과정(鄭瓜亭)》 《오관산(五冠山)》 《거사련(居士戀)》 등은 악보로 전하지는 않지만 그 음악이 조선 태종 또는 세종 때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이후 형성된 향악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별곡(別曲)이 있다. 별곡은 중국의 가곡인 정곡(正曲)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고려의 가요를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형식으로 경기체가(景幾體歌)·속요(欲謠)·가사·민요 형식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경기체가 형식은 《한림별곡(翰林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속요 형식은 《서경별곡(西京別曲)》 《청산(靑山別曲)》 《쌍화점(雙花店)》 《만전춘(滿殿春)》, 가사 형식으로는 《사미인곡(思美人曲)》 등이 있다. 별곡의 형식상 특징은 분장(分章)과 후렴에 있으며, 내용상 공통적 특색은 생활감정의 진솔한 표출에 있다.

조선시대


전기
1392년 조선 건국에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200년간이다.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연등회 등과 같은 불교관련 행사가 폐지되고, 예악(禮樂)이 숭상되었으며, 건국의 대업을 기리기 위한 신악(新樂)이창작되었다. 아악기가 새로이 제작되었으며 《악학궤범》과 같은 악서도 발간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악보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기 위해 정간보(井間譜)가 제정된 것인데, 이는 한글창제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악
대개 고려시대 아악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제향의 아헌·종헌·송신에 연주되던 향악교주 전통이 1427년(세종 9) 12월 폐기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아악기 연주로 일관되도록 고쳐졌다. 뿐만 아니라 재래의 아악곡이 폐지되고 새 아악곡이 제정되어 아악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아악 제정작업을 주관한 박연(朴堧)은 봉상시(奉常寺)가 소장한 <조선국 악장>의 관보(管譜) 아악곡 가운데 주례(周禮)의 음양합성(陰陽合聲)제도에 맞지 않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있음을 들어 마땅히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원(元)나라 임우(林宇)의 《대성악보(大晟樂譜)》에 전하는 아악 16곡 중에서 순수히 궁조(宮調)를 사용한 12곡을 각각 12조(調)로 이조한 144곡의 새로운 제사음악을 제정하였다. 이 아악은 1430년 12월 발간된 《아악보》에 실렸다. 이 시기에는 아악기제작사업도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 1425년(세종 7) 악학도감(樂學都監) 박연에 의해 악률(樂律)의 표준이 되는 율관(律管)이 제작되었다. 율관제작은 악기 조율을 가능하게 하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종률법(鍾律法) 연구를 유발시켰다.

신악
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조종(祖宗)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보다 포괄적인 음악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장대한 신악제정이 이루어졌다. 기존 음악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창작곡으로 세종이 창작한 《봉래의(鳳來儀)》 《발상(發祥)》 《보태평》 《정대업》 등이 있다.

당악
고려시대 당악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의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는 조선시대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계승되었고, 그 밖에 조선 전기에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서 창작된 <금척> <수보록> <근천정> <수명명> <하황은(荷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 등의 정재가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첨가되었다. 새로 창작된 춤은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랐고, 가사도 <금척>을 제외하고는 새로 지은 가사를 당악에 그대로 얹어 불렀다.

고취악
조종 공덕을 칭송한 《수보록》 《몽금척》 《근천정》 《수명명》을 포함하지만 악보가 전래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종 때 제정된 신악 가운데 《정대업》 중 <독경>, 《보태평》 중 <계우>, 《발상》 《봉래의》 중 <여민락(與民樂)> 등 고취악은 악보로 전하여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향악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을 계승하였고, 《대악후보(大樂後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및 《금합자보(琴合字譜)》에 악보가 기록되었다. 조선 전기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합자보》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慢大葉)>이다. <만대엽>은 고려시대 음악에는 보이지 않고 《금합자보》에 처음 보이는 음악으로, 형성시기는 대략 조선 전기 끝무렵으로 추측된다. 평조만대엽은 고려시대 향악이 거의 없어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평조·우조·평조계면조·우조계면조의 <중대엽(中大葉)>과 <삭대엽(數大葉)>을 파생시켰고, 평조만대엽은 직업음악이 아닌 선비들 사이에 애탄(愛彈)된 금곡으로 조선시대 새로 나타난 곡이다.

후기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전까지로 전통음악이 창작·발전되던 시기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과 사회적 혼란 시기를 거치면서 음악의 규모가 축소되었음은 물론 그 템포도 늦어졌다. 이전의 당악과 향악의 구분이 없어지고 향악교주에 의해 대체 연행되었으며, 판소리와 가야금 산조가 새로이 나타났다.

아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단절·복구의 격동을 겪었으나, 그 내용면에서는 조선 전기 아악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병자호란 후 약 10년 동안 단절되었던 사직·문묘 등의 제향아악이 축소된 규모로 복구되어 그 명맥을 이었다. 복구된 아악의 규모는 《악학궤범》에서 62명인 등가(登歌) 악공의 수가 20명으로, 헌가(軒架)는 124명이 22명으로 감소되었다.

종묘제례악
아악의 경우와 같이 병자호란 후 10년 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어 그 맥을 이었다. 연주 규모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서 36명이던 등가의 악공은 20명, 72명이던 헌가의 악공은 22명, 등가에서 노래를 담당하였던 가자(歌者)의 수는 인조 때의 6명에서 2명으로 각각 축소되었다. 한편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한 결과 종묘제례악은 향악도 아니고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였다.

연향악(宴鄕樂)
후기에 이르러 당악기와 향악기가 한데 섞여 연주됨으로써 향악과 당악의 구별이 없어졌다. 또 외진연(外進宴)과 내진연(內進宴)에 사용되는 춤의 내용이 각각 구별되어 고정되었으며, 향악정재 중 <아박>과 <무고>에 수반된 한국어 창사(唱詞)가 각각 칠언절구 및 오언율시의 한시로 바뀐 것이 특징이다.

정악(正樂)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킨다. 《영산회상(靈山會相)》 《여민락》 《보허자》 등이 대표적인 곡이며, 이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변천은 《이수삼산재본금보》의 16정간 4대강으로 기보된 음악들이 《신증금보(新證琴譜)》에서는 20정간 4대강 음악으로 변하고 《유예지(遊藝志)》에서는 20정간 4대강 한 장단이 두 장단으로 확대된 것이다. 음악의 속도가 촉급해지는 것을 막고 느린 박자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변천한 것으로, 이같은 변화는 정악의 본분을 고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가사(歌詞)
별곡과 함께 장가(長歌)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歌曲)과 대조를 이룬다. 가곡이 음악 중심인 데 비하여 가사는 음악보다는 사설 중심이다. 가사는 보통 장구와 젓대 반주로 노래하며, 그 반주의 선율은 노랫가락을 그대로 따르는 게 보통이다. 오늘날 전하는 가사는 《죽지사(竹枝詞)》 《어부사(漁父詞)》 《춘면곡(春眠曲)》 《상사별곡(相思別曲)》 《권주가(勸酒歌)》 《백구사(白鷗詞)》 《길군악》 《처사가(處士歌)》 《매화가(梅花歌)》 《양양가(襄陽歌)》 《황계사(黃鷄詞)》 《수양산가(首陽山歌)》 등 12곡이다. 이같은 곡수와 가사의 사설을 조선 후기에 간행된 노래모음집과 비교하면 적지않은 차이가 있다.

시조(時調)
시절가(時節歌)라고도 한다.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 형식에서는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 할 수 있다.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영조 때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일반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이 무렵부터 시조가 음악으로 널리 퍼진 듯 짐작된다. 시조가 처음으로 악보에 기록된 것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字譜)》에서이다.

판소리
긴 이야기를 말(아니리)과 소리로 엮어 부르는 극음악으로, 극적인 내용 전개에 따라 다른 장단을 가진다. 조선 후기에 발생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열두마당 판소리곡이 형성되었다. 후대로 오면서 곡의 수는 줄고 분량은 확대되면서 오늘과 같은 다섯마당으로 정착되었으며, 서민층에서 널리 불렸다.

가야금산조
19세기말 전라남도 광주의 아전 김창조(金昌祖)가 만들어 그의 제자 한성기(韓成基)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그 뒤 오늘날까지 가장 활발하게 연주되는 곡이다. 하나의 기악독주곡 양식으로 정착하여 거문고산조·대금산조·해금산조 등으로 확산되었다.

근대


서양음악의 수용과 발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서양음악과의 접촉이 간헐적으로 있어 오다가 조선 후기 청(淸)나라와의 빈번한 문화교류 및 실학자들의 왕래를 통하여 서양음악과의 접촉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양금(洋琴;dulcimer)이 소개되어 전통음악 편성에 수용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 등의 실학자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이덕무(李德懋)·이규경 등은 이 악기의 사용법과 악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본격적인 서양음악이론의 도입은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의해서였다. 1885년(고종 22) 미국인 선교사 A. 아펜젤러 등이 배재·이화학당을 세우고 찬송가를 가르치면서부터는 서양기독교음악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노래의 패턴과 다른 찬송가는 단순히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기능 외에 한국의 신음악이라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서양음악 수용의 견인차 역할을 한 또 하나의 주체는 서양식 군악대 창설이다. 1900년 처음 창설된 군악대는 이듬해 초빙된 독일인 F. 에케르트의 지도에 의해 매우 빠른 성장을 보여 서양의 군악 및 국가·국민가요, 행진곡 등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1909년(순종 3)에는 한국 전통음악의 전수와 서양음악의 주체적 수용을 목표로 한 새로운 경향의 음악운동이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 운동은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를 탄생시켰다. 1910년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서양음악 발전에 공헌한 선구자들은 김인식·이상준(李尙俊)·홍난파(洪蘭坡)·윤극영(尹克榮)·박태준(朴泰俊)·현제명(玄濟明)·이면상(李冕相)·김순남(金順男)·안기영(安基永)·이건우(李健雨) 등이다. 1930년대 들어 외국에서 정규음악교육을 받은 음악가들이 음악회와 작품집을 출간하는 한편 그 동안 노래 중심으로 펼쳐지던 양악활동이 관현악 등으로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7년 방송을 시작한 중앙경성방송(JODK)이 1933년부터 점차 서양음악방송을 늘려나가 서양음악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창작가곡집을 출간한 현제명과 홍난파는 1930년대의 예술가곡 작곡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32년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채동선(蔡東鮮)은 작곡발표회를 통하여 독일 낭만주의 작품의 견실한 발판을 가지고 현제명·홍난파의 작품경향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이며 한국 음악계에 등장하였고, 뒤를 이어 안기영·김동진(金東振)·김세형(金世炯)·이흥렬(李興裂)·김성태(金聖泰) 등이 가곡을 중심으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전통음악의 변천
서양음악 유입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음악은 큰 수난을 겪었다. 우선 국권피탈 직후 각종 국가의식에 사용되던 음악들이 대폭 축소됨에 따라 국가음악기관의 규모도 크게 줄었다. 조선시대 궁중 음악을 관장하던 장악원(掌樂院)이 1897년 교방사(敎坊司)로, 1907년 장악과(掌樂課)로 그리고 1911년에는 다시 아악대(雅樂隊)로 개칭되고 이 과정에서 모든 악사들이 용원(庸員)으로 격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전통음악의 뼈대를 이어주는 중추적 역할을 한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가 전승한 제례악은 악원의 제도가 축소되면서 제례향사의 종류와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만 남게 되고, 다른 음악은 악보로만 전해질 뿐이다. 연례악 가운데 당시 연주되던 음악으로는 당악계의 《보허자》와 《낙양춘》 그리고 《여민락》과 같은 고취악이 있었고, 향악으로는 《관악영산회상》과 《평조영산회상》을 중심으로 여러 형태로 변개된 음악이 있었다. 또한 빗가락정읍(壽齋天)과 세가락정읍(動動), 현악보허사와 그 변개곡인 <밀도드리> <웃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도드리>와 이들 여러 곡들이 줄풍류의 《영산회상》과 혼합되어 연주되던 별곡, 《여민락》 및 각국 행악(行樂) 등이 전승되었다.

현대


남한


전통음악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1948년 11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아악부의 국영(國營)이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1950년 1월 대통령령으로 국립국악원의 직제가 공포되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개원이 지연되다가 1951년 부산 피난시절 정식으로 개원되어 초대원장에 이주환(李珠煥)이 취임하였다. 1955년 6년제 과정의 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가 설치되었고,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되어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부터 국립국악원과 부설 국악사양성소는 전통음악 발전을 위한 기틀을 잡아가며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가는 데 기여하였는데, 국립국악원의 연주곡목도 전통적 아악과 정악 중심에서 탈피하여 판소리 및 산조 등의 통속악이 포함되었으며, 새로 만든 국악도 발표하는 등 연주회용 음악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접어들면, 한국 전통음악의 흐름은 민간 예능의 재발견과 재구성의 시대로 바뀐다. 전통예능의 르네상스시대라고도 한다. 종래에 무속의식이나 농악(풍물) 계통의 민속음악이나 예능은 조선시대에 배양된 궁정음악이나 귀족사회의 고전음악 같은 값어치는 없다고 해왔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이나 일반 지식인, 또한 서울이나 광주의 대학생 문화활동 사이에서 판소리·민요·민속극·민속놀이(민속무용)·가면극(탈춤) 등은 민족 고유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지닌 예능이라는 것이 재발견되었다. 나아가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과 풍자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예능이었음이 재인식되었다. 이들 민중의 예능활동은 민주화를 추진하는 문화활동이 되었고, 일반 민중의 전통예능에 대한 의식이 크게 변화했다. 특히 가면극은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민중 연극운동이 되었다. 판소리는 그 음악과 가창양식은 전통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대의 도시 극장 등에서 상연할 수 있는 그랜드 오페라 같은 종합무대예술 형식을 갖춘 창극으로 차례차례 재구성되었다. 1978년에 김덕수(金德珠)가 시작한 <사물놀이>라 이름붙여진 네 종류의 타악기(꽹과리·징·북·장구)에 의한 합주음악은 남사당의 리듬주법에 첨가하여 각 고장에 전승되어 온 풍물에서 독특한 리듬을 모아 재구성한 것인데, 서울 시내의 <공간사랑>에서 공연되어 시민의 예능에 대한 의식 개혁을 촉진하였고, 그 뒤 해외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현재 국악원에는 사물놀이라는 과목이 있다. 이러한 전통악기나 전통음악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작품은 창작국악이라고 불린다. 황병기(黃秉冀) 작곡의 가야금독주곡 《비단길(1977)》은 고전음악 못지않은 창작국악 작품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황병기는 가야금 연주가로서도 활약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들과 함께 김영동도 국악의 현대화와 대중화에 힘썼다. 또한 전통악기에 의한 국악합주단은 국가적 규모로 지원받아 1980년대 말에는 KBS 국악관현악단·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국립국악관현악단 및 각 주요도시의 대학에 소속된 국악관현악단 등이 성립되었다. 이들 국악관현악단은 전통음악 연주를 포함하여 민속음악이나 궁정음악의 제재와 소재를 취한 창작국악부터 전혀 새로운 현대음악까지 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현재 1000석 규모의 대홀, 약 600석의 소홀, 야외공연장, 국악박물관, 국악자료실을 갖추고 연간 400회 이상의 공연을 하고 있다. 자료실은 디지털화된 대규모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악보·CD·비디오 등의 제작·출판도 하고 있다. 한편 1993년 임권택(林權澤)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민중의 전통예능에의 회귀를 촉진시켰다. 1994년 국악 발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악의 해가 선포되어 국민의 전통음악에 대한 자각과 자부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및 1996년 국악전용극장인 예악당 개관 등으로 상설공연의 확대와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양음악
1945년 이후 널리 음악이 대중화되면서 크게 발전, 본궤도에 올랐다. 고려교향악단·국제오페라사·서울교향악단·서울오페라단 등이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6·25 이후에는 해군정훈음악대·방송교향악단·국립교향악단·김자경오페라단 등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대학에 음악학과가 설치되었으며, KBS관현악단을 비롯하여 서울시립교향악단 등 여러 도시에서 교향악단·합창단·오페라단·가무단 등이 창설, 운영되어 음악문화 향상에 기여했다.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주로 활동해오던 《한국환상곡》의 작곡자 안익태(安益泰)의 내한공연과 제1회국제음악제 개최, 그리고 젊은 외국유학생들의 귀국연주회와 외국 저명 교향악단의 내한공연 등은 한국 양악의 현대화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의 궁중음악과 도쿄[東京(동경)]의 신화적 소재가 주조를 이루는 동양적인 감수성을 현대 서구기법과 결합하여 독특한 양식으로 표현한 윤이상(尹伊桑)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으며, 한동일(韓東一)·김영욱(金永旭)·강동석(姜東錫)·백건우(白建宇)·최현수(崔顯守)·정경화(鄭京和)·정명화(鄭明和)·정명훈(鄭明勳) 등은 연주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정명훈은 1989년 프랑스 바스티유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김정길·백병동·강석기 등이 활발한 작곡활동을 했다. 연주회장도 국립극장·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하여 1988년 예술의 전당 음악당이 문을 열었으며 1993년에는 예술의 전당 전관이 완공되었다.

북한
1945년 광복 직후 국악은 월북 음악가인 박동실·정희남·조창선·임소향·공기남·안기옥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서양음악은 이면상(李冕相)·김순남(金順男)·안기영·이건우 등 남한 출신 월북 음악가와 김원균(金元均)·윤승진 등이 이끌어 나갔다. 6·25와 문화교류에 의해 소련민요와 중국풍 음악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L. 베토벤·P.I. 차이코프스키 등의 곡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일체의 외국작품을 배제한 채 <예술가곡>이라는 노래가 주종을 이루고 전통음악의 현대화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음계개량운동을 전개, 고유음계인 5도음계가 서양음악의 평균음과 같은 12율(律) 반음체계(半音體系)로 바뀌고 판소리의 탁성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인 민족음악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전통 국악기 개량작업을 하여 가야금은 명주실로 된 줄이 철사줄로 바뀌고 줄수는 12줄에서 13줄·19줄로 늘어났으며 부들[染尾(염미)]을 없애고 다리를 높게 만들었다. 태평소는 음색을 부드럽게 고쳐 장새납으로, 와공후는 눕혀서 연주할 수 있는 옥류금으로 각각 개량되었으며 이 밖에 대피리·양금·해금·당적·편종 등 1963년까지 150여 점의 악기가 개량되었다. 1970년대 이후 오선지 대신 아라비아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관현악 연주 때 개량된 전통 서양악기와 혼합편성하여 협주하는 <주체적 새 관현악편성법>이 등장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 교향곡 《피바다》와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그네 뛰는 처녀》 등이 있다. 또한 민요식 가락과 서양식 화성이 결합한 것, 서양식 발성과 민요식 성악발성이 결합한 것 등이 있고 <합창과 관현악>이라는 새로운 음악형식도 있다. 음악 종류로는 절가(節歌) 형식의 노래를 기본 형상수단으로 하는 가극음악·기악·영화음악·무용음악·가요 등 다양하다. 오늘날에는 경음악이 독자적 무대예술종목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기악곡보다는 성악곡이 활발하고 곡조보다 가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음악무용서사시와 음악무용이야기가 중요시되고 있다. 기악곡은 행진곡과 군가조로 되어 있고 독자적 연주보다 성악곡과 함께 연주되는 때가 많으며, 성악곡은 비성(鼻聲) 중심의 발성을 통한 창법이 주류를 이룬다. 음악단체로는 순수음악단체인 국립교향악단을 비롯하여 피바다가극단·만수대예술단·평양예술단에 소속된 교향악단 등 26개 공연단체가 있다. 북한의 각 공장·기업·협동농장·기관·학교마다 음악소조 또는 음악서클이 조직되어 있고, 학교에서는 누구나 1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루도록 교육시키고 있다.

연표

AD 고구려 제천의식 <동맹> 실시
부여 제천의식 <영고> 실시
동예 제천의식 <무천> 실시
마한 5월·10월 제천의식 실시
28 가악의 시초인 《도솔가》 지음
6 세기중엽 우륵의 가야금 제조
6 세기말 중국 수(隋)나라의 7부기(七部伎)에 고구려기 참여
612 미마지 일본에서 기악무를 가르침
918 팔관회 베풂
1010 연등회 부활
12 세기초 중국 송(宋)나라에서 대성악 전래
1391 아악서 설치
1423 금·슬·대쟁·생·봉소 등의 악기제작
15 세기초 세종 <정간보> 창안
1493 성현 등이 《악학궤범》 편찬
1759 서명응 등이 《대악전보》 《대악후보》 편찬
1886 배재학당에서 처음으로 서양음악에 관한 교육 실시
1900 독일인 F. 에케르트에 의해 양악대인 시위 연대군악대 창설
1904 학교교육의 일부로 음악교육시작, <창가> 교과과정에 삽입
1911 조양구락부(1909년 발족) 조선정악전습소로 개칭
1913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김인식 바이올린 교수
1914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설치
1917 아악생 양성소 설치
1919 경성악우회 창립
1920 김형준 작사 홍난파 작곡 《봉선화》 발표. 경성악대 주최 흑인음악회
1921 창조사 주최 도쿄[東京]음악학생 연주회. 블라디보스톡 조선학생음악회
1923 바이올리니스트 F. 크라이슬러 내한 연주회. 윤심덕·한기주 발표회
1924 조선학생회 1주년 기념 음악회
1925 음악잡지 《음악계》 창간
1929 안익태 첼로독주회
1932 조선음악가협회 결성. 채동선 가곡발표회
1933 송만갑·정정렬·이동백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성악연구회 조직
1934 이종태 지휘 경성관현악단 발족
1936 홍난파 지휘 경성방송관현악단 발족. 안익태 《애국가》 작곡
1940 한국 최초의 민간 심포니오케스트라 조선 교향악단 창단
1944 김성태 작곡 《교향적 기상곡》 이 신경(新京)교향악단에 의해 초연
1945 고려교향악단 창립공연. 종교음악 연구단체 한국오라토리오 창설
1946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신설. 서울교향악협회 조직
1948 이혜구·성경린·장사훈의 발기로 <국악학회> 발족. 국제오페라사 G.F.F. 베르디의 《춘희》 공연
1949 한국음악가협회 결성. 구황실 아악부가 국립국악원으로 발족
1950 서울오페라단 창립, 《춘향전》 공연. 해군정훈음악대 조직. 국제오페라사 G. 비제의 《카르멘》 공연
1951 공군정훈음악대 조직. 국립국악원 개원
1955 윤이상 《현악 4 중주곡 제 1 번》 발간. 안익태 귀국연주회.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설치
1956 한국음악가협회 주최 W.A.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 기념음악회. 방송관현악단 창설, 11월 KBS교향악단으로 개칭
1957 해군정훈음악대 해산하여 서울교향악단 창립. 김생려 지휘 이해랑 연출 오페라 《카르멘》 공연
1959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 신설
1961 대한국악예술인협회 결성. 국악사양성소 1기생 17명 배출
1962 안익태 주선으로 제 1 회국제음악제. 예그린악단 창립. 국립국악원 신국악작곡 공모. 국립국극단 창단, 현제명 작곡 《춘향전》 공연
1963 서울국제음악제 개최
1964 국립오페라단 창립, 장일남 작곡 《왕자호동》 공연. 국립국악원 요미우리[讀賣]신문사 초청으로 일본 공연.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창단
1966 여성 스트링오케스트라 창립. 바로크합주단 창립
1967 레벤트리트콩쿠르에서 정경화, P.주커만과 함께 공동 1위 입상
1968 김자경오페라단 창립, 베르디의 《춘희》 공연
1969 서울심포니에타 연주회. NHK교향악단 내한연주회
1970 정경화 런던심포니, 김영욱 베를린필하모니와 각각 협연. 클리블랜드교향악단 내한 연주회
1971 장일남 작곡 오페라 《원효대사》 초연. 런던교향악단 내한연주회
1972 윤이상 작곡 오페라 《심청》 뮌헨올림픽 개막 예술제에서 초연. 국립국악원 미국 아시아학회 초청으로 미국·캐나다 공연. 국악사양성소 국악고등학교로 개편
1973 한국작곡가협회 창립. 국립국극단 국립창극단으로 개칭. 윤이상 베를린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임명
1974 국립합창단 창단. 차이코프스키콩쿠르에서 정명훈 피아노부문 2위 입상
1975 광복30주년기념음악제. 국립국악원 일본 문부성 초청, 아시아민족예술제 참가
1976 제 1 회 대한민국음악제. 스위스 로망드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백건우 협연. 국립국악원 영국 드럼대학 주최 동양음악제 참가
1977 제29차 세계청소년음악회 개최. 대한민국 작곡상 제정
1978 서울시립합창단 창단.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 예술제에 김자경오페라단 김동진 작곡 《심청》 공연. 국립교향악단 G. 말러 《교향곡 제 8 번》 국내 초연
1979 국립교향악단 미국 순회공연. 국립오페라단 W.R. 바그너의 《탄호이저》 공연
1980 대한민국음악제 운영이 문교부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이관. 부조니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서혜경 수석으로 입상
1981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 제 1 회 대한민국국악제 국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으로 개편. 청소년국악관현악단 창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BBC교향악단 내한공연. 제26차 국제민속음악학회 총회 및 민속음악제 서울 개최
1982 수도오페라단 창단, G.푸치니 《토스카》 공연
1983 정경화·김영욱·강동석 독주회 및 협주회. 이성주·황보엽 협주회. 김자경오페라단 박재열 작곡 《심청가》 공연. 서혜경 뮌헨콩쿠르 피아노부문 3위 입상. 이혜경 포르투갈콩쿠르 바하특별상 수상
1984 D. 바렌보임 지휘 파리관현악단, H.카라얀 지휘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공연. 이윤국 지휘 심모니에타 잘츠부르크 공연. 한동일 연주회 및 뮤직캠프. 정명훈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지휘
1985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창단. 서울시립오페라 창단, U. 조르다노의 《앙드레아세니에》 공연.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카자드쉬콩쿠르에서 김대진 피아노부문 대상 수상
1986 국립창극단 창작극 《용마골장사》 《윤봉길의사》 공연. 소프라노 홍혜경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 《라보엠》 주역으로 발탁. 영국 로열오페라단 G. 비제의 《카르멘》·C.C. 생상스의 《삼손과 델릴라》·푸치니의 《투란도트》 내한 공연. 한국국악교육학회 발족
1987 국립국악원 국악동요발표 및 세미나. 중앙국악관현악단 창단. 국립오페라단 이영조 작곡 《처용》 공연. 정명훈 이탈리아 피렌체오페라하우스 수석 객원지휘자로 추대. 조수미 유럽무대 데뷔 성공
1988 국립국악당 개관. 이탈리아 라스칼라오페라단 푸치니의 《투란도트》 내한 공연. 소련 모스크바필하모니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세계합창제
1989 가야금 산조 여섯바탕전 공연. 대한민국 국악제 서울·부산·전주·청주·춘천에서 분산개최. 볼쇼이오페라단 M.P.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고두노프》 내한 공연. 한국국악관현악단 창단.
1990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대만에서 열리는 동양음악페스티벌 참가. 인간문화재 묵계월 <인생70 소리60> 공연. 정명훈 프랑스 바스티유오페라단 지휘. 최현수 차이코프스키콩쿠르 성악부문 1위 입상. 정경화·정명화·정명훈 피아노 3 중주. 예술의전당 주최 90교향악축제. 서울악회 창단
1991 동랑국악앙상블 창단. 박동진 완창판소리 《수궁가》 《춘향가》 공연. 국립국악원 개원 40주년기념 공연. 김동준(고수)·김죽파(가야금)·한일섭(아쟁 및 태평소연주자) 추모 음악회.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내한 독창회. 일본 환동해국제예술제에서 남북음악교류. 정경화 바이올린 연주회
1992 대한민국국악제가 민간으로 이양되어 개최. 남원민속국악원 개원. 판소리보존회 《판소리유파 발표회》. 율려학회 주최 《한일전통음악연주회》. 국립창극단 《심청전》 일본 공연. 국제음악교육협회 제20차 세계대회 서울 개최. 한국종합예술학교 정식 출범
1993 한·중·일 민족음악교류 및 합동연주회를 목적으로 한 아시아민족악단 창단. 판소리명창 안숙선 쿠모실내악축제에 초청되어 공연. 정순임 《유관순전》 완창. 93아시아현대음악제. 금호현악 4 중주단 창단. J. 카레라스 내한 공연
1994 국악의 해 지정. 바스티유오페라단 내한, 음악 정명훈 연출·앙드레앙젤 R.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공연. 동학 100주년기념 《천명》 공연
1995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
1996 국악전용극장 예악당 개관
1999 이자람 《춘향가》 8시간 완창으로 <기네스북> 오름
2000 KBS 교향악단과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남북 합동연주회
2001 서울시교향악단, 부산에서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연주.국립창극단 두 번째 어린이 창극《토끼와 자라의 용궁여행》
2002 국립창극단,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국립창극단 40년 완판장막창극 《성춘향》
2003

국립국악관현악단, 경주세계 문화 엑스포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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