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音樂/[대중음악감상]

한국가요 시작

好學 2009. 3. 16. 02:31

 

1925년 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 유행했던 일본 유행가를 처음으로 한국말로 부른 노래 《시들은 방초》()를 취입한 사람은 도월색()이었고, 《장한몽()》()을 김산월()이 불렀다. 당시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창 ·명기들이었다. 도월색 ·김산월도 이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가요를 전문으로 부르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요를 노래하는 본격적인 가수의 등장은 1930년대 이후이다. 가요음반이 대중의 기호물이 되면서 연극배우들 중에서 ‘막간무대’에 등장했던 인기배우들이 대거 가요곡을 취입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본격적인 가수가 등장하여 활약했던 1935~1936년까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때 배우로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전옥() ·복혜숙() ·김선초() ·김선영() ·남궁 선() ·강홍식() ·나품심() ·강석연() ·이애리수() ·윤심덕() ·김연실() 등이다. 1932년 신인가수 발굴경연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고복수()가 1933년 OK레코드사에 취입한 손목인() 곡의 《타향살이》 《사막의 한》(이상 작곡)이 히트하여 레코드 가수로서 성공한 첫번째 사람이었다.

순수한 창작가요는 1929년 김서정() 작곡인 《낙화유수》(이정숙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27년에 상영된 극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였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서정(본명 김영환)은 당시 영화 해설자(변사)로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는 계속해서 《세 동무》 《강남 제비》 《봄노래》 등을 발표하여 인기가요로 손꼽히게 되었다. 1932년에는 전수린()이 《황성옛터》(이애리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가요의 계열이 한국적인 가요의 맥락을 이어왔다.

초창기의 창작가요는 대부분 신민요풍의 가요가 특징으로 나타났는데, 《오동나무》 《봄맞이》 《노들강변》 《능수버들》 《맹꽁이타령》 《대한팔경》 《노다지타령》 《피리소리》 《장기타령》 등은 널리 알려진 가요들이다. 1928~1936년 사이에 콜럼비아 ·빅타 ·포리돌 ·OK ·태평 ·시에론 ·리갈 등 각 레코드사들이 레코드 제작을 본격화하면서 1936년을 전후하여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축음기의 판매를 중심으로 레코드의 범주도 다양해졌다. 곧 판소리 ·민요 ·가곡 ·동요 ·극영화해설집 ·드라마 ·만담 ·경음악(주로 미국의 재즈 ·팝송 ·찬송가)과 서양 고전음악 등 다양해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대중가요가 레코드의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취입에서 제품까지는 대부분 일본에서 하였고, 서울에서의 취입과 프레스 등 일반 작업시설의 확장은 1940년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의 유행가 《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채규엽()이 한국말로 취입하여 히트하자, 일본가요의 인기곡은 대개 한국말로 취입되어 한국어판 일본의 엔카[]가 판을 치게 되었다. 한국가요(창작가요)도 일본에서의 녹음과정에서 일본인이 편곡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결과, 일본가요와 한국가요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접근하였으며, 더욱이 1930년대 말기에 이르러 일본말 상용이 강요된 시대의 영향으로 일본가요와 동질화되어 갔다. 한편, 각 레코드사의 문예부에서는 당시의 문필가들이 가사를 창작하였다. 이때 활약한 문필가들로는 김안서() ·이하윤() ·이서구() ·이부풍() ·박영호() ·조명암() ·고려성 ·김능인() ·김상화() ·강사랑() ·왕평() 등을 들 수 있다. 창작가사 이외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일본가요의 번안과 일본곡에 한국말 가사를 붙이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에서 일본가요의 중심을 이룬 엔카풍[:독특한 일본음계 ·속요, 음계의 ]의 가요곡을 작곡하면 히트하는 시대가 되었고, 34년에는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연락선은 떠난다》 《망향초 사랑》 《코스모스 탄식》 《고향설》 등이 나왔다. 1933년 《봉자()의 노래》(채규엽 노래) 《어느 여급의 자살》 이후 대중가요의 가사는 사랑 ·이별 ·눈물 ·방랑 ·고향 그리고 현실도피와 같은 통속적인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비록 가락이야 엔카풍이지만 나라 없는 민족의 슬픔을 대변해 주는 노래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1941년(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획일적인 정책하에서 일본군가만을 불러야 했던 한국가요의 암흑기로, 한국 청년의 출정을 미화한 노래 《아들의 혈서》(백년설 노래)를 매일 방송하기도 하였다. 8 ·15광복의 기쁨도 38선의 갈림으로 덮여지고 그 38선의 비보를 노래한 《가거라 38선》이라는 넋두리의 되풀이로 한국가요는 여전히 감상주의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38선을 넘어온 실향민들은 《꿈에 본 내 고향》 《한 많은 대동강》 등을 애창하게 되었다.

왜색의 잔재를 없애고 주체성 있는 건전가요의 제작보급에 나섰던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 1948년 건국 이후 《고향초》 《아내의 노래》 《목장의 노래》 등을 보급, 새로운 한국가요의 맥락을 찾아갔다. 미국의 팝송과 재즈의 기법이 한국가요에 도입되던 시절에는 현인()의 노래 《신라의 달밤》이 공전의 히트곡이 되었다. 이 무렵에는 원시적인 레코드제작법에서도 새로운 가요가 많이 만들어졌다. 《명동야곡》 《고향만리》 《울어라 은방울》 《선죽교》 《백팔염주》 《저무는 충무로》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이 그것이다. 이때는 새 가요가 레코드보다 무대공연에서 더 많이 불리고 대중에게 애창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6 ·25전쟁으로 유명한 가요인들이 희생되었고 납북되기도 하였다. 《전우야 잘 자라》(박시춘 곡, 현인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하여 북진하는 국군과 더불어 전국에 널리 퍼졌고, 1 ·4후퇴 이후 실향민의 쓰라린 생활고의 현실은 《굳세어라 금순아》 《슈샤인 보이》 《이별의 부산정거장》 《단장의 미아리고개》 《추억의 40계단》 《물레방아 도는 내력》 《비내리는 호남선》 등에 표현되어 널리 애창되었다. 1957년 공보처에서 제정한 국민가요 중에서 널리 애창되어 건전가요로서 비교적 성공한 노래는 《소녀의 꿈》(손석우 곡) 《청춘목장》(송민영 곡) 《고향에 찾아와도》(이재호 곡) 《꽃 중의 꽃》(황문평 곡) 등이다. 또 1956년 방송드라마의 주제가 《청실홍실》이 크게 히트하자 주제가는 드라마의 정석처럼 되었고, 1955년 이후 한국영화가 성행하자 수많은 영화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까지 변함이 없으며, 가요가 히트해서 노래 제목대로 멜로드라마가 만들어진 경우도 있다. 60년대 전반까지 주제가로 성공한 노래로는 《오부자()의 노래》 《딸 칠형제》 《나 하나의 사랑》 《꿈은 사라지고》 《노란샤쓰의 사나이》 《빨간 마후라》 《카추샤의 노래》 《꿈이여 다시 한 번》 《호반의 벤치》 《산장의 여인》 《비극은 없다》 《맨발의 청춘》 《사랑이 메아리칠 때》 등이 있다. 주제가의 전성시대를 맞아 영화의 주인공들이 직접 주제가를 부르는 예도 많았다. 1955년경에는 세계적인 맘보리듬의 선풍이 한국에도 상륙하자 《아리랑맘보》 《도라지맘보》 《코리안맘보》 등 강렬한 리듬이 한국가요와 조화되어 갔고, 멜로디는 구태의연해도 계속해서 차차차 ·맘보 ·트위스트 등의 리듬은 날로 새로워져갔다. 이어 1960년대의 특징은 비틀즈음악의 영향과 미국의 팝송, 그리고 로큰롤 등이 젊은 층에 파고든 사실이었다. 즉 주한 미군계통에 종사하던 팝송가수들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학사가수들의 출현은 이를 가속화시켰다.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유주용 ·김상희 ·김수연 등이 이때에 활약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남녀 보컬팀의 등장이다. 블루벨스 ·봉봉4중창단 ·자니브러더스 ·김시스터스 ·이시스터스 ·김치캐츠 등이 그것이다. 1962년 민간방송의 개국으로 전파매체의 혜택을 가요계가 제일 많이 받았다. 신인가수의 등용에서부터 인기가수 순위가 방송출연 빈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시대가 되었다. 한편, 전파를 타기 시작한 복고조의 가요가 많아졌고, 다시 엔카조[調]의 가요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즉 방송에 힘입어 이런 노래들이 레코드의 매출을 증가시켰고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와 더불어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정착이 두드러지면서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와 같은 엔카조의 노래들이 대중에게 폭넓게 접근해갔다. 한편, 이탈리아칸초네에서 미국의 팝송 ·컨트리송 ·하드록 등이 젊은층의 열광적인 애호물이 되어갔다. 1970년대의 특징인 통기타와 청바지는 소위 ‘청년문화’라는 낱말을 낳게 할 만큼 외국가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살롱뮤직의 전성시대에 이르러 신시사이저(synthesizer)음악과 더불어 시대적인 첨단인 듯 대중가요가 활자매체의 후원을 받아 젊은 계층의 노래하는 송라이터들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송창식 ·윤형주 ·박인희 ·이필원 ·양희은 ·김민기 ·조영남 등의 시대가 된 것이다. 베트남전쟁을 전후해서 동남아시아와 멀리 유럽이나 미국 등지로 유능한 가수들의 해외진출이 늘어나 패티 김 ·윤복희 ·이연옥 ·곽순옥 ·김성옥 ·로라 성 등이 활약하였다. 1970년에 도쿄[] 세계가요제 입상《안개》(이봉조 곡, 정훈희 노래) 이후, 계속해서 그리스 ·칠레 등에 한국가요의 진출을 볼 수 있었다. 작곡가로는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 ·김기웅 ·정민섭 등이 활약하였고, 박경희 ·정미조 ·김상희 ·혜은이 등이 입상하였다.

1977년 이후 광복 30여 년 만에 한국가요의 일본 상륙 등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이성애 ·이미자 ·김연자 ·허영란 ·남상규 ·문주란 ·정재은 ·남진 ·나훈아 등의 레코드 출판기록은 괄목할 만하다. 1978년부터 서울에서 개최하는 국제가요제 ·세계가요제 등은 세계 각국에서 16개국 이상이 참가하는 연례행사로까지 발전해갔다. 1980년 일본의 문화방송이 주최하는 아시아 5개국(일본 ·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1명씩 참가하는 아시아뮤직포럼(Asia Music Forum)에 출연하였던 조용필()이 최고의 인기가수로 각광을 받은 뒤 그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가히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 일본의 중견가수 15명이 경쟁하다시피 음반을 출반하여 무려 수백만 장의 음반판매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 이후, MBC-TV 주최로 매년 대학가요제가 열려 통속적 가요계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곧 대학생들의 창작가요가 가요계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한 셈이다.

1980년대에 들어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발전하면서부터 방송전파를 통해 듣는 가요에서 보고 듣는 가요로, 가요의 개념이 크게 변화해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위 엑스(X)세대의 등장은 한국가요 70년사에 큰 변동을 일으켰다. 또한 1990년대의 가요는 LP레코드에서 콤팩트디스크(CD)로 발전했다. 그리고 가요의 영상화()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1930년대부터 발전했던 재래적인 가요는 이제 기성세대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정가요로 뿌리를 내렸으며, 이런 가요를 소위 전통가요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다. 한편 미국의 랩(rap)과 자메이카의 토속적인 음악을 빌려온 레게(reggae)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위성방송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도 이제 케이블 TV시대를 맞이하여 ‘신토불이’의 정신으로 국악가요라는 새로운 장르가 태동하고 있어 대중가요는 내일을 예측하기 어렵게 발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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