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사람)인생 이야기

[초대석]박근 한미우호협회 명예회장

好學 2010. 7. 2. 21:48
 
[초대석]박근 한미우호협회 명예회장
 
 

 



박근 한미우호협회 명예회장이 21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만큼 국운이 외교에 달려 있는 나라는 없다”며 후배 외교관들의 투철한 사명감과 국제무대에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정은 기자

“진정한 보수주의는 중도 아닌 중심에 서야”
영어 자서전 펴낸 ‘외교 원로’ 박근 한미우호협회 명예회장


《‘대한항공(KAL)기 폭파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던 날, 나는 회의장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북한의 소행임을 차분히 입증하면서 독일 철학자 니체를 인용해 “대한민국은 괴물과 싸우는 자가 그 과정에서 스스로 괴물이 돼서는 안 된다는 니체의 말을 명심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박길연 유엔 주재 북한대사를 향해 “환상에서 깨어나 세상을 보라”고 일침을 놨다….’ 박근 한미우호협회 명예회장(82)이 자신의 영어 자서전 ‘HIBISCUS’(사진)에서 1987년 유엔 주재 한국대사로 근무하던 시절을 회고한 부분이다.》

대북정책, 10년 이상 흐름 속에서 판단을
베트남 패망의 충격-위기감 아직도 생생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북한의 외교적 전술뿐 아니라 내 삶의 목적과 의미도 함께 깨달았다”고 적고 있다. 박 명예회장은 유엔 대사와 제네바대표부 대사 등을 역임하며 30년 가까이 외교관으로 활동한 한국 외교사의 산증인이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한미우호협회의 최장수 회장을 지냈다. 최근 발간한 자서전에는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해외 인사들과의 인연 등이 담겨 있다.

21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 한미우호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나이를 잊은 듯 정정했다.

그는 “최근 6개월간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영어로 직접 자서전을 썼다”고 말했다. 자서전 제목도 자신의 이름(槿)을 뜻하는 영어 ‘무궁화(hibiscus)’로 지었다. ―자서전을 영어로 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해마다 수백 권의 자서전이 쏟아져 나오니까 나는 좀 다르게 쓰고 싶었다.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과 외교관들에게 경험을 알리고 싶기도 했다. 한국통인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도 (책을 읽고) 많이 배웠다며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후진들이 내 책으로 영어공부를 하게 만들려는 이유도 있었다.(웃음) 후배들 읽으라고 외교통상부에 60권을 보내줬다.”

―후배 외교관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

“한국만큼 외교가 운명을 좌우하는 나라는 없다. 국운이 외교에 달려 있는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우리만큼 외로운 존재가 세계에 또 있는가. 자원도 없이 생존투쟁을 계속해온 우리 민족이 과거 냉전의 도전에서 살아남았다면 지금은 핵의 도전, 분단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를 풀어내는 것이 우리 외교의 과제이자 후배 외교관들의 임무다.”

―30년 가까운 외교관 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다) 그때가 1975년이다. 주스위스 대사를 할 때였는데 베트남이 공산주의 세력에 점령당한 뒤 미국 외교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는 모습을 TV에서 방영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피란민 신세가 된 주스위스 베트남대사가 여기저기 망명 신청조차 거부당하고 있다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한국도 당시 공산주의 물결에 휩쓸리면 베트남처럼 망할 수 있다는 공포와 위기감을 느꼈다.”

박 명예회장의 투철한 반공정신과 보수적 가치관은 이런 그의 외교적 경험을 통해 다져진 듯 보였다. 그는 ‘한국의 보수여 일어나라’ 등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세 권이나 낸 한국의 대표적 보수파 논객으로 꼽힌다. 보수주의 기치를 내건 비정부기구(NGO) ‘밝고 힘찬 나라 운동본부’를 세운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보수주의, 반공주의에 대한 투철한 확신에는 외교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이 영향을 미친 것인가.

“선진국은 모두 보수주의가 정치의 주류다. 보수주의가 별건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무엇보다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보장하는 제도다. 이를 강화해 나가면 인류는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난 믿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너진 1945년부터 사회주의가 붕괴된 1990년대까지 외교현장의 실례들이 잘 보여준다.”

―북한에 맞서기 위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수없이 강조해 온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양국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미국과 한국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미국의 경우 냉전시대에는 북한 공산주의에 맞설 우군이 필요했고, 이제는 급부상하는 중국의 견제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한국이 필요하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뤄낸 표본 국가로서 손잡기 좋은 상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한미동맹의 토대는 든든하다. 이 동맹관계가 끊어지면 한국이 독자적으로 오래 생존하기 어렵다고 본다. 대북정책이 한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다. 그렇다 보니 노무현 정권 말기에는 한미관계가 우려할 만한 수준까지 악화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다시 개선되고는 있지만 현 정부의 대북 인식도 때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이 역시 진정한 보수는 아니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중도’가 아닌 ‘중심’에 서야 한다.”

―최근의 북한 움직임과 남북 관계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대북정책은 단기간의 변화가 아니라 10년 이상의 방향과 흐름을 갖고 판단해야 한다. 작은 뉴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김정일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현대와 금강산 관광사업을 재개하는 것은 예상보다 강경한 미 버락 오바마 정부로 인해 북한이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남한에라도 다시 손을 벌리는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햇볕을 쪼이면서도 북한에 외투를 벗으라는 최소한의 요청조차 하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내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나라를 위해 애썼던 김 전 대통령의 문상을 다녀왔다”며 애도를 표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박근 명예회장

―1927년 경남 고성 출생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 정치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1959∼83년 주미 대사관 공사, 주벨기에 및 EC 대표부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1986년 GATT 이사회 의장, 주유엔 대사

―2001∼2008년 한미우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