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부임인사를 하러 왔다. 중공군에 밀려 후퇴만 하는 미군에 불만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을 냉담하게 맞았다. 불안했던 리지웨이는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이승만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1951년 4월 부임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도 반평생을 이국 땅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이 대통령을 존경했다. 밴 플리트는 한 달에 두세 번씩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 동석했던 백선엽 장군은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극진했다고 회고했다. 1965년 이승만이 망명지 하와이에서 서거했을 때 밴 플리트는 유해를 모시고 직접 한국에 왔다.
이승만은 미국 측에서 봤을 때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기에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들을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라고 썼다. 그러나 이승만의 고집은 약소국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미국 쪽 협상 파트너들은 이승만을 높이 평가했다.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직후 미국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온 로버트슨은 이승만을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53년 11월 방한한 미국 부통령 닉슨은 훗날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