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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2] 자유세계 지켜낸 트루먼과 맥아더

好學 2010. 6. 23. 20:17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2] 자유세계 지켜낸 트루먼과 맥아더

 

 

트루먼 "對히틀러 유화책이 2차대전 불렀다"
"한국은 유엔결의로 탄생한 국가" 즉각 파병 결정

맥아더… 美합참이 인천상륙작전 극구 반대하자 "敵도 그렇게 생각… 그래서 성공할 것"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미국의 6·25전쟁 참전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이런 문구를 담은 팻말을 올려놓았다. 집안이 가난했던 그는 대학 교육을 무상으로 받기 위해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시력이 나빠서 떨어졌다. 그 후 그는 국민방위군에 입소하여 1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했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보통사람'이었던 트루먼은 정치에 입문한 후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상원의원이 됐다. 그리고 루스벨트가 네 번째 대통령에 취임한 지 82일 만에 사망함으로써 부통령이었던 그는 1945년 4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대통령이 된 후 트루먼은 "부엌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러 부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는 정치적 결단의 순간에 자신에게 부과된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신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으로 북한이 남침했을 당시 트루먼이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미국의 개입은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남침 소식이 워싱턴에 알려진 것은 토요일 저녁이었다. 그날 아침 트루먼은 볼티모어국제공항 준공식에 참석한 후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도착하여 휴가 중이었다. 그곳에서 트루먼은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북한의 전면남침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이 문제를 일요일 오전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도록 지시한 후 그날 밤 워싱턴에 도착하여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했다.

트루먼을 비롯하여 회의에 참석한 미국 고위정책 결정자들은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믿었다. 트루먼은 과거 히틀러의 침략정책에 대해 영국프랑스가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유화정책을 편 것이 2차 세계대전을 야기했다고 보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 스탈린은 미국 봉쇄선 주변 국가들을 계속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북한의 남침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트루먼의 판단이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 달 뒤인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섬을 방문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무공훈장을 달아주고 있다. 가운데는 무초 당시 주한미국대사. /AP
미국 헌법은 군 통수권은 대통령, 전쟁선포권은 의회에 부여하는 이중구조를 갖고 있다. 트루먼은 대한민국이 유엔 결의안에 의한 자유선거를 통해 탄생한 국가라는 점에 주목했다. 한국의 적화(赤化)는 신생 국제기구인 유엔의 위신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또한 그는 미국 의회에서 참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경우 미국이 손을 써볼 틈도 없이 한국이 공산세력의 수중에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트루먼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따른 미국 참전을 추진했을 때 미국 의회 지도자들도 그의 노선에 전폭적 지지를 보냈다.

도쿄에서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군 태평양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맥아더는 최전선을 시찰한 후 트루먼에게 지상군 투입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전황이 매우 다급하다는 맥아더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2개 사단 투입을 허용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가 구성됐고 맥아더 장군이 사령관에 임명됐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민군의 거센 공세에도 불구하고 7월말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하여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고, 대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맥아더는 한 번에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전략을 구상했다. 적군을 낙동강방어선에 묶어두고, 미국의 공군력 우위를 이용하여 적을 괴멸시키고,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에 대해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극구 반대했다. 인천 앞바다의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서 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5000의 1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맥아더도 작전의 성공 확률이 낮다고 보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다. 미군이 인천 상륙이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면 적도 미군이 인천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상상력과 용기를 갖춘 군사적 천재였음을 보여주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중국의 개입이 시작됐다. 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맥아더는 6·25전쟁이 '새로운 전쟁'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6·25전쟁은 이제 전쟁 범위가 한반도 내에 국한될 수 없다며 만주로의 확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 같은 확전은 중·소 군사동맹조약에 의해 소련의 직접 개입을 불러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차 세계대전이었다. 결국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만주로 확전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반도 내에서 중공군을 격퇴할 것을 지시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지시 사항이 효율적인 군사작전의 수행을 방해한다고 반발했다. 맥아더의 계속되는 확전 주장은 미국 헌법에 명시된 군에 대한 문민(文民) 우위 원칙을 어기고 대통령에게 정면 도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게다가 영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 15개국들도 만주로의 확전에 반대하면서 맥아더를 비판했다. 결국 트루먼은 1951년 4월 맥아더 해임이라는 극약 처방을 쓰게 됐다. 맥아더 해임 이후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내고 서울을 재탈환한 뒤 전선을 38선 근처로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전쟁포로 교환 문제는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트루먼은 자유세계에 살고 싶어하는 포로들은 공산국가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자율송환 원칙'을 내세웠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송환된 소련군 포로들이 스파이 누명을 쓰고 무고하게 살해된 사실을 지적하며 이런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산측은 모든 포로들을 무조건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송환 원칙'을 내세웠다. 포로송환 문제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체제 우위 경쟁으로 비화되었다. 트루먼이 1953년 1월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인 6월 이승만 대통령은 2만7000명의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이는 미국과 사전 조율 없이 이뤄져 트루먼 후임인 아이젠하워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트루먼의 '자율송환 원칙'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남다른 용기와 결단력을 가진 트루먼의 신속한 6·25전쟁 참전 결정에 의해 적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군사작전의 천재였던 맥아더의 눈부신 전략에 의해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발생한 두 사람 사이의 의견 대립에도 불구하고 트루먼과 맥아더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를 지켜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