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5] 미국을 움직인 '고집불통' 이승만

好學 2010. 6. 25. 20:38

 

 

[2010, 인물로 다시 보는 6·25] [5] 미국을 움직인 '고집불통' 이승만


강경한 '벼랑끝 전술'로 韓美상호방위조약 체결 대한민국 안보 보장받아
開戰 직후 맥아더에 전화 무스탕전투기·곡사포 등 무기 긴급지원 약속받아내
글 싣는 순서 ① 스탈린 ② 트루먼·맥아더 ③ 모택동 ④ 김일성·박헌영 ⑤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스탈린의 전쟁 승인과 모택동의 군사지원 약속을 받은 김일성은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측근으로 주일대표부 공사를 역임한 정한경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오전 6시 30분 남침을 보고받고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는 이와 다르다. 그날 프란체스카는 오전 9시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를 찾았다. 이승만은 아침식사를 끝내고 오전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갔다.

국방장관 신성모의 보고는 오전 10시였다. 개성이 오전 9시 함락됐고, 공산군의 탱크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는 보고였다. 하지만 신성모는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전면 남침이 아닌 국지적 충돌 정도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보통으로부터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26일 새벽 도쿄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은 맥아더는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히키 장군에게 무스탕전투기 10대, 곡사포 72문, 바주카포 등을 긴급지원하도록 명령하겠다고 약속했다.

6·25 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7월 3일 제주도 제1훈련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뒷줄 오른쪽),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왼쪽 두번째)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시찰하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
이승만은 다시 워싱턴의 장면 주미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전하시오. 적이 우리 문앞에 와 있다고! 준다던 1000만달러 무기 지원은 어떻게 된 거냐고!" 이튿날 새벽 신성모와 서울시장 이기붕 등은 이승만에게 서울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이승만은 완강히 거부했지만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편하겠다"는 신성모의 말에 남행(南行) 열차를 탔다. 그러나 기차는 수원에 머물지 않고 오전 11시 40분 대구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이승만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승만은 전쟁 초기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이 자신의 지론인 북진통일(北進統一)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7월 1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의 남침으로 38선의 의미는 사라졌다. 유엔군이 현상회복만을 시도한다면 적의 반격을 도와주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1년 5월 미국이 교착 상태에 빠진 전선(戰線)을 따라 휴전을 제안하는 정책을 확정하자, 이승만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한국과 만주의 국경선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물론 이승만도 휴전협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결연한 의지 표명은 휴전을 앞두고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얻어내려는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정부 수립 때부터 "미국은 한국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며, 한국민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달려있다"며 미국에 조약 체결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협박과 최후통첩 등으로 미국을 압박했다. 이승만은 1952년 12월 3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한 아이젠하워와 두 차례 회담을 갖고 북진통일의 당위성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아이젠하워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경우 유엔군 참전 국가들의 군사적 참여가 줄어들 것이고, 미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은 "유엔군 철수가 불가피하고 한국에 경제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면 내일이라도 그렇게 하라. 한국은 독자적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보았다. 미국은 1953년 5월 4일 만약의 돌발사태시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에 '군정(軍政)'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감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승만은 1953년 6월 17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필리핀·일본·호주·뉴질랜드와 체결한 조약 수준의 한·미 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이 이뤄진다면 이는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남한이 공산화될 경우 극동, 아시아 전체, 나아가 세계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6월 18일 이승만은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반공포로 2만5000명을 직권으로 전격 석방한 것이다. 이는 송환을 거부하는 모든 포로를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긴다는 유엔군 휴전안(案)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자칫 휴전협정을 무효로 돌릴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이승만은 브릭스 미국대사에게 "한국과 미국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떠나야만 하는 갈림길에 들어섰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나의 행동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후일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한국민의 특권"이라고 역설했다.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은 미국에 조약 체결을 위한 한국과의 협상 개시를 강요했다. 결국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假)조인됐고, 10월 1일 워싱턴에서 공식 조인됐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의지를 단념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면 이승만은 위협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보를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국가안보의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과 뛰어난 대미 협상 전략의 값진 열매였다. 이승만은 이 조약이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을 유지하게 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이승만이 1960년 4·19혁명 후 하야하면서 남긴 마지막 말도 '동맹국 미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간곡한 당부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휴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억제하고 한국의 생존과 안보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한 탄탄한 토대가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들이 6·25전쟁 시기 국가안보를 책임졌던 대통령 이승만의 역할과 공헌을 평가하는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오던 1950년 8월,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왔다. 무초는 전시(戰時) 내각이 있던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갔으니,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들었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하얗게 질린 무초는 혼비백산해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다.

북한의 남침으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했던 순간에도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나 미8군 사령관, 유엔군 사령관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30여년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노정치가 이승만은 한국의 존망을 좌우할 수 있는 미국측 인사들로부터 존경과 복종을 이끌어냈다. 이 대통령은 무초를 사석에선 '무초 펠로'(Muccio Fellow·무초 녀석)라고 불렀을 만큼 자신감이 있었다.

1950년 12월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부임인사를 하러 왔다. 중공군에 밀려 후퇴만 하는 미군에 불만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을 냉담하게 맞았다. 불안했던 리지웨이는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야 이승만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1951년 4월 부임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도 반평생을 이국 땅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이 대통령을 존경했다. 밴 플리트는 한 달에 두세 번씩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 동석했던 백선엽 장군은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는 것처럼 극진했다고 회고했다. 1965년 이승만이 망명지 하와이에서 서거했을 때 밴 플리트는 유해를 모시고 직접 한국에 왔다.

이승만은 미국 측에서 봤을 때 까다로운 상대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기에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들을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자"라고 썼다. 그러나 이승만의 고집은 약소국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고, 미국 쪽 협상 파트너들은 이승만을 높이 평가했다.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직후 미국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온 로버트슨은 이승만을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53년 11월 방한한 미국 부통령 닉슨은 훗날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