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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곡들이 허리를 꺽을때 (광야학교)

好學 2010. 6. 24. 20:28

 

삶의 질곡들이 허리를 꺽을때 (광야학교)

 

 

사노라면, 삶의 모든 가능성이 비껴만 가고
하루의 삶의 질곡들이 허리를 꺽을 때를 만나게 됩니다.
모든 희망의 파랑새는 물건너가고 나와 마추치는 불청객은
지독하리 만큼 힘겨운 시련뿐입니다.

더 나아질거라면 얼마든지 기다릴수 있고, 감사할수 있습니다.
시련의 끝을 대충이라도 알수만 있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이 고난 속에는 또 다른 선함이 있다고 하시면, 백년도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큰 것을 바람도 아니며, 그렇게 화려한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소박함을 바라는 것인데..그 소박함 마져도 나에게는 휘귀함입니다.

평생의 모든 꿈은 사라진지 오래고, 절친한 친구들도 곁에 없습니다.
나는 제자리인데 다른이들은 벌써 저만치 달리고 있음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이제는 잃을 것도, 내어 놓을것도, 버릴것도, 숨길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빗소리에도 놀라고, 바람소리에도 서럽습니다.
저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주님이신가 설레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나 오셔야 해결되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으로는 끝났습니다.
돈으로도 어렵습니다.
방백을 의지함도 부질없고 명예를 붙잡아도 소용없습니다.
남에게는 쉬운일도 나에게 오면 어려워지고,
남에게는 편안함도 나에게는 고난됩니다.
간신히 기도의 끈과 말씀의 끈을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요셉이 우물에 빠질때의 심정입니다.
애굽에 팔릴때의 억울함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사자를 피하여 도망가다 곰을 만났고,
곰을 피해 집으로 돌아와 쉬려하는 순간에 뱀에게 물립니다.
이런 삶을 우리는 광야학교라 부릅니다.

광야학교는 처절합니다.
고독합니다.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의지할 곳도, 숨을 곳도, 공격할 무기도, 먹을 것도, 마실 물도, 변변치 못합니다.
작렬하는 태양과 살을 에이는 추위뿐입니다.
게다가 홀연히 나타나는 아말렉은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한 사람중에
귀히 사용하실 사람들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내가 선택하여 들어가는 훈련코스가 아닙니다.
내 의지로 돈을 내고 배우는 세미나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강권적인 선발입니다.
거절할수 없는 특권입니다.
저항할수 없는 부르심입니다.

광야학교의 교관은 성령님이십니다.
교과 과목은 기다리는 훈련입니다.
포기하는 훈련입니다.
깨어지라는 훈련입니다.
내려놓는 훈련입니다.
하나님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으로만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성령님이 가라하시면 가야하고, 서라 하시면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학교에서 참 성숙과 참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훈련이 힘들고 무서울수록, 우리는 몰라보게 달라지게 됩니다.
누구든지 광야학교 시절에는, 몰골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 초췌한 몰골속에 또 다른 성숙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또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학교로
몰아 넣으시기도 하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진흙탕에 넣기도 하십니다.

광야학교는 이론을 배우는 곳이 아닙니다.
실전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광야학교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닙니다.
믿는 것이 힘입니다.
기도하면 응답된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해서 응답을 얻어내야 합니다.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온다가 아니라, 반석을 쳐서 물을 먹어야만 합니다.

정금은 연구실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용광로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듯 하나님의 강한 용사는 교실에서, 예배당에서,
세미나실에서, 기도실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사람은 광야학교에서 배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것이 있습니다.
광야학교에 입학하였다고,무조건 졸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하면, 고난중이라고 성화되거나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고난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광야학교에 들어 갔다고
우등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는 것은 성령의 강력한 터치와  깊은 은혜뿐입니다.

그러므로,광야학교 자체가 축복이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난자체를, 자랑하지 마십시요.
광야학교에 있다는 사실만을, 자랑 삼지 마십시요.
광야학교에 성령이 강림하실때, 광야는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이며
고난중에서도 은혜를 체험할때, 고난은 영광이 되는 것이며,
유익함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없는 고난은 맷집만 더할 뿐입니다.
성령의 강림이 없는 광야는 사망의 골짜기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았습니다.
돌에 맞는것 자체가 축복이 아니라
돌에 맞으면서도 하늘이 열려 주님을 보았다는 것이,
축복이며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이 열려있는 고난
하늘이 열려있는 실패
하늘이 열려있는 가난
하늘이 열려있는 질병은 오히려 축복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니며, 금욕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고난은 축복이지만,그리스도 없는 고난은 그저 고생입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허리가 꺽이는 고난 중에도 기막힌 은혜와 만난다면 그것은 충분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임재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감당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살아도 하나님의 임재안에 거하면 그곳이 천국이지만
궁궐에 거해도 하나님의 임재와 무관하다면 그곳은 감옥만도 못한 것입니다.

가난하냐, 부자냐
성공했냐, 실패했냐
결혼했냐, 안했냐
직장이 있느냐, 없느냐
남편이 속을 썩이느냐, 안 썩이느냐
건강하냐, 병들었냐
큰 교회냐, 적은 교회냐
이 문제는 믿음의 세계 안에서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 안에 있느냐?'
'고난중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찰스 콜슨은 "승리는 실패를 통해, 치유는 부서짐을 통해,
자아 발견은 자아를 버림을 통해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에 있는 당사자는 죽을 지경입니다.
무슨 말로도 위로가 안됩니다.
그러나, 광야가 축복의 장소인 것은
우리는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우리의 종착역이 아님이 다행입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가나안이라는 사실이 더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가 없었으면 하고, 빨리 지나갔으면 할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있었던 것이 감사하고,
더디게 통과함이 은총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광야학교에서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
그리고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광야에서 우리는 죽을것 같고, 망할것 같고, 실패할것 같지만,
죽지 않습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기 때문이며
여화와의 영광이 충만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광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수 있으신가요?
광야를 주신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분을 사랑할수 있으신가요?
그분을 공평하시다고 찬양할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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