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5>필리핀-소위로 참전 라모스 前대통령

好學 2010. 6. 2. 17:38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5>필리핀-소위로 참전 라모스 前대통령

 


“철원서 중공군 진지 덮쳐 70명 사살… 아군 사상자는 제로”

옆집에 난 불 보고만 못있어
자유 지키려 죽을 각오 참전

이리고지 탈환 큰 전과 올려
이승만 대통령에 표창 받아

여러나라 젊은이 피흘린 것
한국 젊은이들 꼭 기억해야



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마카티 시의 라모스평화발전재단(RPDEV) 사무실에서 필리핀의 6·25전쟁 파병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아래 사진의 점선 안은 6·25전쟁 당시 제20대대 전투단 소속 소대장(소위)으로 활약했던 라모스 전 대통령의 모습.
《1952년 5월 21일 오전 4시. 강원도 철원의 한 능선에 필리핀군 제20대대 전투단 수색중대 소속 장병 40여 명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공격할 고지의 이름은 ‘이리(Eerie) 고지’. ‘으스스하다’는 뜻의 이 고지에는 중공군이 진지를 구축해 버티고 있었고 이미 사흘간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오전 7시. 날이 밝자 폭격기와 대포가 고지에 포탄을 퍼부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겼던 필리핀군은 정상으로 돌격했다. 저격조와 소총조, 정찰조로 나뉜 이들은 이 작전을 총괄한 2소대장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20분간 중공군을 향해 총을 쏘고 참호와 진지 안에 수류탄을 던지며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중공군은 70여 명이 죽었으나 기습 후 철수한 필리핀군은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 작전의 성공을 발판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필리핀군은 한 달 후 이 고지를 점령했다.

필리핀 전투단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리 고지 전투의 전과를 인정받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가장 큰 전공(戰功)을 세운 이는 수색중대 2소대장 피델 라모스 소위였다. 이후 그는 4성 장군으로 필리핀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거쳐 1992∼1998년 대통령을 지냈다.

○ ‘자유 수호’ 위해 찾은 공포의 전장

“자원했지. 참전 전까지 전쟁은 두렵지 않았소.”

  지난달 14일 필리핀 마카티 시의 라모스평화발전재단(RPDEV) 사무실에서 만난 라모스 전 대통령(82)은 “이웃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주기 위해 죽을 각오로 참전했다”며 “국내에서도 공산 반군과 싸워 본 경험이 있어 파병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필리핀이 한국 파병을 결정한 데 대해 “옆집에 난 불이 우리 집에 옮아붙을 수도 있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비유했다.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필리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서울 게 없었던 그도 전장에서 중공군과 맞서면서부터는 “항상 두려움 속에 지냈다”고 말했다. 그는 “적을 맞을 준비를 완벽히 해 놔야 두려움이 줄어들었다”며 “전투에 나서기 이틀 전부터 소대원의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다. 필요 없는 물건은 빼고 탄약을 더 챙기도록 했다”고 회상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전장에서의 긴장감을 설명하면서 ‘중공군’을 지칭할 때는 한국말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당시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과의 지리멸렬한 싸움을 이어가며 수없이 들었을 그 단어를 그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 “한국의 자유, 필리핀과 함께 싸워 얻은 것”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을 얘기하며 6·25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를 따라다니던 한국인 피란민 20여 명의 궁핍함과 생활력을 떠올렸다. 그 피란민들은 등짐 하나만 짊어지고 군부대를 쫓아다니며 음식이나 옷가지 등을 얻어 생활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그들은 부대가 한곳에서 머무르면 수레를 이용해 인분을 모아 비료로 만들고 밭을 일궜다”며 “한국인의 근면함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무실 벽에 ‘화합(Unity) 단결(Solidarity) 협력(Teamwork)’이라고 써 있는 표어를 가리켰다. 자신이 설립한 재단 RPDEV의 모토라고 했다. RPDEV는 그가 대통령 퇴임 후 필리핀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설립한 비영리 재단이다. 그는 “6·25전쟁을 경험하고 전후 한국의 발전을 보면서 결속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저 모토는 필리핀이 6·25전쟁을 통해 배운 가치이며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가치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한국인들은 공익 앞에서 희생적이고 과감한 모습을 보이며 힘을 모아 왔다”며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과 전직 대통령을 재판대에 올린 사실 등을 예로 들었다. 반면 필리핀은 7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져 하나로 뭉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현재의 한국을 보며 한국의 민주화와 성장에 일조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싸워서 쟁취한 것이죠. 필리핀 사람들은 필리핀이 한국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가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여러 나라의 젊은이가 피를 흘려 자유를 지켰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길 빕니다.”

::라모스 전 대통령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나온 군인 출신으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대장으로까지 진급해 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1986년 군 수뇌부로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한 대규모 민중봉기 ‘피플 파워’에 동참해 자신의 6촌인 마르코스를 내쫓는 데 일조했다. 이후 코라손 아키노 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됐으며 1992년 새 헌법에 따라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6년간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현재 아시아지역 경제와 사회발전을 논의하는 연례 회의인 보아오포럼의 의장을 맡고 있다.



▼500페소 속의 ‘6·25’
종군기자 활약 아키노 前의원
한국전쟁 기사와 함께 새겨져▼
■ 참전의미 되살리는 필리핀



필리핀 500페소 지폐 뒷면에 새겨진 6·25전쟁 종군기자 시절의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모습.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당시 기사를 배경으로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카메라와 펜을 들고 있다.
필리핀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아시아 국가 중에선 가장 먼저 6·25전쟁 파병을 결정했다. 모두 5개 전투대대 7500여 명이 1950년부터 5년간 필리핀한국원정군(PEFTOK)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싸우다 112명이 죽고 299명이 다쳤다. 57명은 실종됐다.

하지만 네빌 마나오이스 아테네오대 교수는 “필리핀인 대다수는 필리핀이 한국에 파병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말했다. 6·25전쟁에 대해 안다면 500페소(약 1만2600원)짜리 필리핀 지폐 뒷면에 국민적 영웅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한국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 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은 필리핀의 6·25 참전 역사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되살리는 일에 나서고 있다.

주필리핀 한국대사관과 PEFTOK협회는 지난달 23일 타기그 시의 국립묘지에서 ‘율동전투의 날’ 기념식을 가졌다. 이 행사는 1951년 4월 22, 23일 경기 연천 지역에서 필리핀군이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율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열린다. 이날은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델핀 반깃 필리핀군 참모총장과 참전용사 자녀들까지 300여 명이 참석했다. 유덕호 주필리핀 무관은 “6·25 참전용사뿐 아니라 자녀 세대도 한국과의 인연을 유지할 수 있도록 ‘PEFTOK자녀회’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루이스 크루즈 주한 필리핀대사의 아들 카를로 크루즈 씨는 지난해 필리핀의 6·25 파병에 관한 영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가 섞인 형태로 한국전에 참전한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전장에서의 전우애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루즈 씨는 “필리핀인에게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종군기자로, 라모스 전 대통령이 소위로 활약한 6·25전쟁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필리핀 젊은이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인기 한류 드라마밖에 없다”며 “그들이 한국과 필리핀은 6·25 참전 등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도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6·25참전기념 동상도 만들어져 제막식만 남겨두고 있다. 두 필리핀 용사가 한국군을 부축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동상은 필리핀 마닐라의 명소인 리잘 공원에 세워졌다. 한국대사관 측은 “6월 초에 참전용사들과 함께 공식 제막식을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마닐라 근처 필리핀군 총사령부 근처에 6·25참전기념관을 건립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北장군의 호위병이 된 ‘운 좋은 포로’▼
■ 파뮬레라스씨의 기이한 사연


“이념? 그런 건 몰랐고 그저 운 좋은 포로였던 거야.”



필리핀의 6·25전쟁 첫 파병 부대인 제10전투대대에 소속됐던 마리아노 파뮬레라스 씨(85·당시 병장·사진)는 1951년 봄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하지만 그의 포로 생활 2년은 함께 잡힌 다른 필리핀 포로들과는 달랐다. 포로 신분임에도 한 북한군 장군의 비서 역할을 하며 포로수용소가 아닌 적장의 집에 머물렀다.

그 북한군 장군의 부인은 필리핀인이었다. 파뮬레라스 씨는 “그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으로 필리핀에 싸우러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 부인과 내 고향이 같았어. 내가 ‘이로카노어(語)’로 말하니까 그 장군이 나를 데려갔던 것 같아.”

북한 장군은 이로카노인 부인이 고향 말을 편하게 쓰도록 하려고 파뮬레라스 씨를 곁에 뒀다는 것이다.

파뮬레라스 씨는 장군의 집에 있을 땐 빨래와 심부름 등 허드렛일을 했고 밖에서는 장군을 따라 다니며 호위병 역할을 했다. 장군은 총까지 줄 정도로 그를 신임했다고 한다. 파뮬레라스 씨가 그 장군의 집을 떠난 건 1953년 8월 남북 간 포로교환 때였다. 그가 남쪽으로 돌아갈 때 필리핀인 부인은 그에게 가족에게 전할 편지와 선물을 건네줬다. 그 속엔 권총도 한 자루 있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한마디씩 말을 이어 나간 파뮬레라스 씨는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는 걸 매우 힘들어했다. 포로로 잡혔던 시기나 북한 장군의 정확한 직책, 필리핀 부인의 이름 등을 기억해 내려 애썼으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포로 생활 중 인상적이었던 일들은 어렴풋이 그려지는 듯했다.

“장군 부부와 함께 셋이서 밥을 먹곤 했는데 그때가 제일 즐거웠어. 중간에 다른 포로들과 같이 도로 만드는 작업에 동원됐을 땐 너무 힘들었지만….”


글·사진·마닐라·마카티·칼루칸(필리핀)=류원식 기자 rew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