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12> 남아共공군 파병

好學 2010. 5. 21. 20:03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12> 남아共공군 파병… 미군 배속돼 맹활약




쌕쌕이 몰고 敵보급로 폭격… ‘창공의 치타’ 평양하늘 누비다

평양에 다시 가본 스위니 씨
전역 후 화물기 조종사 근무
회사 지시로 北화물 수송…“공산국 위해 일 못한다” 사표


공군참모총장 지낸 어프 씨
적에 붙잡혀 포로생활 ‘고난’
“가치있는 전쟁이었나” 물으면 나의 대답은 단호하게 “YES”



《1981년 가을 한 국제화물항공사의 조종사였던 제임스 스위니 씨(87)는 회사로부터 평양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대공포를 비롯한 북한의 중고 무기를 짐바브웨로 실어 나르라는 것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건재하고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가 당시 짐바브웨 총리로 있던 시절이었다. ‘특수화물’을 싣기 위해 평양을 찾았을 때 그는 북한 측 보안요원으로부터 “혹시 여기 왔던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그런 적 없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여기 왔던 건 폭탄 투하하러 왔던 때뿐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임무를 끝으로 “더는 자존심을 구기며 공산국가를 위해 일할 수 없다”며 사표를 냈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조종사였다. 1950년 8월 4일 남아공 정부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다음 달 26일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공군(SAAF)만을 파병했다. 이웃 국가들의 공산주의 확산에 위협을 느끼던 상황에서 남아공은 주력군인 공군,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제2전투비행중대를 보냈다.

부대의 배지가 타조의 날개를 단 치타 문양이어서 ‘창공의 치타들’로 불리는 제2전투비행중대의 조종사와 비행지원병력 등 총 826명이 한국에 왔다. 이들은 미군이 제공한 F-51D 머스탱과 F-86 세이버 전투기로 평양 개성 등 최전선 상공을 누볐다. 교량과 철로 파괴 등을 통해 적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력시설과 탄약고를 파괴하는 한편 아군의 공격을 지원하는 임무였다.

이들은 1952년까지는 경남의 진해비행장(K-10)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머스탱보다 성능이 뛰어난 세이버로 출격한 1953년 1월부터는 경기 평택 오산비행장(K-55)을 근거지로 삼았다. 스위니 씨는 1950년 12월 29일 진해비행장에 도착했다.

“남아공 항구도시 더반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닿았지. 1만6000km가 넘는 거리여서 44일 동안 배를 탔네. 그러고는 도쿄 근처의 미군 존슨공군기지로 이동해 머스탱 비행 훈련을 하고선 한국에 들어왔지. 정말 추웠던 기억이 나.”



6·25전쟁 당시 경남 진해비행장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의 비행지원 병사들이 머스탱 전투기 앞에서 공을 차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남아공 공군은 1952년까지 진해비행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진 제공 남아공 한국전참전용사협회(SAKWVA)
남아공 공군은 적군 2276명을 사살하고 152개의 교량과 철로, 891대의 차량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전쟁 후 총 797개의 메달과 2개의 은성훈장(미군 이외 참전군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까지 받을 만큼 맹활약했다.

이들이 집중 투입된 전선은 적의 주요 보급로였던 서울∼사리원 복선 철로와 원산∼장진호를 잇는 도로였다. 1951년 5월 2일 당시 스위니 중위가 머스탱을 몰고 출격한 곳도 사리원이었다.

“인근 지역에서 북한군 열차를 파괴한 뒤 사리원의 한 계곡 길에서 적군 트럭 5대를 발견했지. 3대를 명중시킨 뒤 나머지 2대를 맞히려고 저공비행을 할 때 조종간과 내 좌석에 순식간에 뭔가가 스쳤어. 매복한 적군이 쏘아댄 총알에 맞았지. 아픈 줄도 모르고 간신히 320km가량을 날아 서울 남쪽의 한 비행장에 착륙한 뒤 정신을 잃었어.”

척추와 엉덩이 부분에 총상을 입은 그는 곧바로 진해의 군병원으로 후송돼 이틀 동안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일본의 영국군병원으로 옮겨져 3개월을 보냈다. 당시의 부상으로 한동안 조종간을 잡을 수 없었던 그는 남아공으로 돌아와 6·25전쟁에 참전할 공군의 조종훈련 교관으로 근무했다.

활약이 컸던 만큼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조종사 34명이 사망(23명)하거나 실종(11명)됐고 2명의 전투지원병이 목숨을 잃었으며 모두 95대의 머스탱 중 74대가 부서졌다.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데니스 어프 예비역 중장(80)은 ‘1951년 9월 17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소위였던 그는 개성 동북쪽에서 머스탱을 타고 적의 후방을 날던 중 지상에서 날아온 적의 총격을 받아 비상착륙한 뒤 몸을 피했다.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였고 곧바로 중공군에 붙잡혔다. “참전한 뒤 불과 4개월 만의 일이었소. 그러곤 23개월을 포로로 지냈지.”

그는 당시 포로로 붙잡힌 조종사들이 ‘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사용했음을 인민들 앞에서 털어놓아라’라는 세뇌 작업과 고문을 당했다고 전했다. “평양 북쪽에 우리를 고문하는 비밀장소가 있었어. 내가 들어갈 때 붙잡혀온 유엔군이 21명이 있었는데 몇 달 뒤 나올 때는 14명만 살아남았지. 몽둥이질은 약과였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이 있었지. 그나마 난 그때 나이가 어린 편이어서 덜 심하게 대했던 것 같아.”



남아공 프리토리아 공군박물관의 한국전쟁 부스 앞에서 공군조종사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조 주베르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영국군에 파견돼 전차부대를 지휘했던 J 더튼 씨(왼쪽에서 두 번째), 공군 조종사였던 고 애티 보시 씨의 부인(오른쪽), 참전용사 지원을 담당하는 데릭 페이지 공군 준장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남아공 공군은 미 공군에 배속돼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과 접촉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한국의 모습은 대부분 창공에서 본 것이었다. 6·25 참전 남아공 공군 중 가장 많은 175차례의 출격 기록을 세운 조 주베르 씨(85)는 한국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묘사했다. “고공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적군을 폭격하며 저공비행할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은 폐허 그 자체였지.”

진해비행장에서 지낼 때엔 이따금 기지 근처의 마을까지 걷기도 했지만 ‘민간인 속에 적군 스파이가 숨어 있다’는 소문이 돌아 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숙소에서 청소와 빨래를 해주는 한국인 여성들이 있었지만 말이 안 통해서 서로 얘기를 나누지 못했지.”

남아공 참전용사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어프 전 총장은 6·25전쟁이 그의 인생에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내게 ‘그것은 가치 있는 전쟁이었느냐’고 물으면 난 이렇게 말하지. ‘지금 북한은 최악의 독재국가가 됐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한 국가이자 세계의 경제리더가 됐다. 대답은 단호하게 예스(absolutely yes)다’라고.”


현정부 “6·25 백인정권 때 일” 참전의미 깎아내려
■ ‘잊혀진 전쟁’ 안타까운 현실


“이제 우리가 참전했던 전쟁은 잊혀진 기억이 돼 버렸다.”



남아공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참전용사들은 한결같이 6·25전쟁이 남아공 역사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 이후 흑인 정권 아래에서 6·25 참전이 ‘백인의 역사’로 폄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참전한 남아공 공군은 100% 백인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시절이었기 때문에 흑인은 군대에 갈 수 없었다. 남아공 한국전참전용사협회 파이엇 피셔 회장(79·사진)은 “현 정부는 남아공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선 백인 정권 때의 일로만 치부하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역사로 인정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데니스 어프 전 공군참모총장은 “공산주의 소련과 쿠바에서 영향을 받은 현재의 집권세력은 한국전쟁 때 우리가 잘못된 진영에서 싸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아공 주재 한국대사관도 답답함을 호소한다. 대사관 측은 “남아공 정부가 참전용사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추모행사나 기념행사에 나서 달라고 협력을 요청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참전용사 모임도 활발하지 않다. 한국대사관 주최로 매년 참전용사들이 출항한 9월에 기념행사를 여는 게 전부다. 이렇다 할 참전 기념비도 없고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에 하나씩 있는 공군박물관 안에 16m²(약 5평) 규모의 한국전쟁 부스가 마련된 게 사실상 전부다. 회원이 대부분 80대 고령이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는 데다 현재 연락이 닿는 회원도 70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

피셔 회장은 “우리끼리라도 좀 더 자주 모임을 갖고 후손들에게 기억을 남기자고 뜻을 모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 60주년 기념행사를 여는 9월까지 공군 측과 함께 케이프타운 공군박물관의 한국전쟁 부스에 경기 평택시의 남아공 6·25참전기념비를 본뜬 조형물을 세울 계획이다.


2002월드컵 열기, 뛰어난 전자제품 그리고, 부지런함
■ 남아공서 한국 이미지는


월드컵, 전자제품, 성실….

프리토리아와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남아공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묘사한 한국의 이미지다. 2002년 월드컵 기간 한국 정부의 참전용사 초청 행사 때 방한했던 제임스 스위니 씨는 “서울의 넓은 도로와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어진 고속철도를 보며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만큼 발전한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남아공은 아직까지 월드컵 기간에 교통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답이 안 나오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3년 전 6·25 참전용사였던 남편 애티 보시 씨와 사별한 보시 부인(61)은 2002년 서울에서 본 월드컵 응원의 열기를 떠올렸다.

6·25전쟁 때 영국군에 파견돼 남아공 공군과의 업무협력을 지원하다가 전차부대를 이끌었던 J 더튼 예비역 육군 중장은 “한국은 전자부문에서 세계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뛰어나다. 기아 현대 대우의 자동차는 남아공에서도 아주 유명하다”고 말했다. 파이엇 피셔 참전용사협회장은 “과거 남아공보다 훨씬 뒤져 있던 한국이 지금은 남아공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부지런함과 성실성이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