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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관하여 20선]<17>휘청거리는 오후

好學 2010. 5. 29. 20:38

 

 

[결혼에 관하여 20선]<17>휘청거리는 오후

 





◇ 휘청거리는 오후/박완서 지음/세계사

《이를 악물면서 그녀가 자기 결혼에 대해 세우고 있는 불변의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확고부동한 원칙, 그것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부자여야만 한다는 거였다. 》



가짜 욕망이 쌓은 ‘모래성 결혼’



1976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휘청거리는 오후’는 보통 결혼을 중심으로 1970년대의 사회상을 그린 세태소설로 분류된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주인공 초희와 그의 주변 인물을 통해 우리가 가진 욕망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초희는 딸 셋인 집의 첫째로 결혼 적령기의 처녀. 그가 좋아하는 남자는 ‘아버지를 닮아 엉성한 틈 사이로 아무에게나 내부의 멍텅구리스러움, 선량함을 비죽비죽 내보이는 남자’다. 그러나 그런 남자와 살면 고생한다는 사실을 부모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초희는 이를 악물고 ‘부자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부자와의 결혼은 초희 스스로 원했다기보단 그의 부모와 주변의 바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 같은 초희와는 달리 동생 우희는 가난한 집의 장남과 결혼한다. 초희는 이런 우희를 부러워하면서도 경멸한다. 초희는 ‘우희를 야코죽일 수만 있다면 악마의 치맛자락에라도 매달리고 싶다’며 뚜쟁이를 찾는다. 특히 뚜쟁이를 만나 상류사회의 생활을 전해 들으며 그 같은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결국 초희는 마담뚜를 통해 건실한 사업가이자 이미 성년이 된 자녀를 둔 50대의 공 회장과 결혼한다. 그녀의 꿈대로 상류사회의 귀부인이 된 것이다.

초희는 귀부인이 된 뒤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상류사회 남자들의 경험과 소망이 만들어낸 판타지 속의 여성에 대해 초희는 귀 기울여 듣고 잠자리에서의 기교를 연출하기에 이른다.

공 회장도 이 같은 초희에게 만족하지만 부부 관계를 마치고 난 뒤에는 돈을 주고 산 여자와 관계를 했을 때보다 더 허전함을 느낀다. 허깨비를 안고 사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초희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엔 완벽하게 상류사회에 적응했지만 ‘내면의 텅 비어 있음’을 채울 길이 없는 것이다. 초희는 남의 눈에 뜨이는 곳을 가꾸어대는 데 병적으로 집착하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엉망진창이라고 여긴다. 이런 허전함은 약물 복용으로 이어지고 그 빈도와 횟수는 점점 늘어가기만 한다. 초희는 결국 옛 애인과 부정을 저지른다.

이윽고 초희는 임신 사실을 알고 기뻐하지만 이것이 공 회장과의 파탄을 앞당긴다. 공 회장은 이미 불임수술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내의 부정을 눈치 챈 것. 결국 초희는 중절수술을 받고 약물중독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처지에 이른다.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초희의 아버지인 허성이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이끌리지만 그것을 이기적으로 실현시키지 못하는 결벽증을 갖고 있다.

그는 딸이 ‘향기롭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정결한 꽃봉오리 같은, 새싹 같은 연애결혼’을 하길 바라면서도 자기 나이 또래의 사위를 맞는 것에 대해 수긍한다. 그의 욕망을 딸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는 부실공사 사실이 탄로 나면서 죽음을 선택한다.

소설은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 내면의 욕망이 진짜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이식된, 타인이 바라는 욕망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정호웅 씨는 “가짜 욕망에 의해 구축된 삶의 허구성을 섬뜩하게 까발렸다”며 “소설에 나오는 인물 모두가 모방된 가짜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뛰어나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