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 솔뫼, 성거산 성지

好學 2010. 5. 25. 21:44

 

[[한국교회사]] 솔뫼, 성거산 성지

 

 


솔뫼 성지

 


솔뫼 성지

 



솔뫼 성지

 

이 곳에서 1821년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탄생하셨으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한덕동으로 이사할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다. 뿐만 아니라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 안드레아(1816년 순교)부친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1846년 순교)에 이르기 까지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시작되어 충청도 전지역으로, 더 나아가 전라도 북부나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갈 때까지 소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 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의 15년간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다. 셋째 아들 한현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둘째 아들 태현은 1827년에 그의 아들 김제준과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문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솔뫼는 김 신부의 신앙과 삶의 지표가 싹튼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김대건은 이곳(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에는 면천 고을 솔뫼)에서 1821년 8월 21일 태어났다. 그러나 이미 증조부와 종조부가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대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 김택현은 대건이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이사했다. 김대건은 그곳에서 16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뽑혀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했고 상해에서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았다. 1845년 입국한 김 신부는 선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힘쓰다 1846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의 일이었다. 1859년 9월 24일 가경자, 1925년 7월 5일 복자품, 1984년 성인품에 올려졌다. 김 신부는 조선 최초의 방인 사제이며 현실을 직시하고 진리를 외치던 선각자였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양학 유학자이며 조선의 최장거리 여행자이고 연평도에서 상해까지 항해한 최초의 서해 항로 개척자이기도 하다. 1845년 초 우리 나라 최초로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저서로는 22편의 서한이 있고, 한국 교회사에 관한 비망록 등이 있어 79위 시복자료가 되었다.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김 신부 생가 복원과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의 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솔뫼 피정이 집은 130여 명이 숙박할 수 있고, 개인 단체 피정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짜여져 있어 전국의 신자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베틀레헴이 그리스도의 이 세상 삶의 첫 출발지였다는 점에서 모든 순례자들의 가슴에 깊은 신심과 감명을 심고 있다면,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내포신앙의 중심지인 솔뫼 성지는 "신앙의 못자리"로써 이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박해시대 신앙공동체의 숨결과 이 시대의 순교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천안 성거산 성지

 



성거산 성지

 

성거산 순교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성거산 상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군데의 순교자 묘소와 소학동 교우촌 유적지가 있다. 성거산(聖居山)이란 말뜻 그대로 교우들이 거룩하게 살던 산이다. 순교자 묘소에는 제1묘역 38기, 제2묘역 36기의 순교자 및 교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소에서 1km 정도 거리에 있는 소학동은 병인박해 전부터 있었던 교우촌이다. 천안 일대 여러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선교사들이 은거하면서 사목했던 곳이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이다. 소학동 출신 유명 순교자는 1866년 음력 11월 8일 교수형으로 공주 감영에서 순교당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형제와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그리고 최천여의 며느리이다. 목천의 '소학골'(일명 씨아골 도는 쇠약골)은 현재의 행정 구역은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독립 기념관 뒤편의 흑성산 가까이 있는 성거산(579m)의 동쪽 계곡이다. 지금 이곳을 가려면 북면 도촌리를 거쳐 도보로 가거나 천안에서 성거읍을 거쳐 입장으로 가다가 오른족으로 나 있는 성거산 통신 도로(입장면 시장리)를 타고 가면 된다. 차량을 이용하려면 두 번째 노정을 택해야 한다. 이제 소학골은 폐동이 되었고 그 아래 '사리목'에 세 집이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농한기에는 두 집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무렵만 해도 소학골과 사리목에서 모두 공소가 치러졌으며, 성거산 남쪽에 있는 옛 교우촌인 목천의 서덜골(일명 서덕골)과 매일골, 먹방이(현 충남 천안시 목천면 송전리)에도 많은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30년대까지 신자들이 계속해서 이주하면서 공소는 그 아래쪽의 마을로 이전되었고, 지금은 목천의 송전 공소만이 유지되고 있다. 성거산 자락의 깊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교회사에서 전이형(轉移形) 공동체가 사라지고 정주형(定住形) 공동체가 형성되는 1830년대였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백부인 최영렬도 이 무렵에 '서덜골' 교우촌으로 이주하였으며, 기해 박해 이후에는 최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안드레아)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박해가 계속되면서 서덜골 이웃의 소학골에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오죽잖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덜골과 소학골 교우촌은 산자락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진천 백곡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864년 칼래(Calais, 姜) 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현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에서 소학골로 옮겼다.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경기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래 신부에게 위임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칼래 신부는 때때로 백곡의 삼박골로 가서도 휴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소학골·삼박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칼래 신부는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도중에 1866년의 병인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신부는 그때부터 포졸들에게 쫓기면서 문경 인근의 교우촌과 동굴을 오가며 은신하였으나, 발각될 위험이 커지자 여름 휴식처가 있는 소학골 교우촌에 가서 머물기로 작정하였다. 1866년 5월 10일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을 출발한 칼래 신부는 이틀에 200리를 걸어서 연풍, 괴산, 진천을 거쳐 배티의 삼박골에 도착하였다. 신부는 삼박골의 거처에서 신자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5월 말까지 보름 남짓 머물면서 상황을 살피다가 목천 소학골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한편 그의 동료 페롱(Feron, 權) 신부도 7월에는 소학골로 와서 칼래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10월 초에는 둘이 함께 소학골을 떠나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소학골에 박해의 풍파가 몰아친 것은 이로부터 얼마 안 되어서였다. 이때 포졸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이 풍비박산하여 도망하였으나, 최천여(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형제, 칼래 신부의 복사를 한 배문호(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등은 교우촌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즉시 이들을 공주로 압송하였고, 4명 모두 공주 영문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한 신자에게 거두어져 소학골에 안장되었다. 그 후에도 소학골에서는 다시 몇몇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배문호의 무덤은 현재 사리목에서 소학골로 가는 길목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나머지 순교자들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후손들 대부분이 오랫동안 타지로 떠돌다가 신앙의 자유 이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탓에 선조들의 무덤에 대해 전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해가 끝난 뒤 선교사들은 다시 성거산 골짜기에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을 찾았다. 특히 두세(Doucet, 丁) 신부는 서덜골에 여름 휴식처를 두었으며,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다. 1900년 1월 8일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 지역을 순방하고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이곳 순교자의 무덤과 교우촌 신자들의 줄무덤이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