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0>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대의 참전

好學 2010. 5. 17. 20:51

 

[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 <10> 에티오피아 황실 근위대의 참전


“전사는 있어도 포로는 없다… ‘트라이앵글 힐’서 중공군과 사투”



《중공군이 아편을 맞고 술에 취한 채 미친 듯이 싸운다는 소문은 사실 같았다. 고지 위의 중공군을 향해 총을 아무리 쏘고 또 쏴도 그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총을 맞고 쓰러진 중공군이 다음 날 살아나 다시 싸우러 나오는 것 같았다. 전투가 끝나고 전우들의 시체를 메고 내려오며 ‘내일 나는 누구 어깨에 실려 내려오게 될까’라는 상상을 수십 번이나 했다. 에티오피아의 6·25전쟁 참전부대인 칵뉴부대 소속이었던 일마 벨라추 씨(79)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악령을 붙들고 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고 1952년 10월 강원도 김화 부근의 ‘트라이앵글 힐’ 전투를 회상했다.》

6037명 참전 121명 사망
피로 물든 고지 끝내 탈환
처음 겪는 혹한에 동상 속출

“4월 서울방문 설렌다”
정부초청 20명 방한 예정
“발전상에 기절할지 몰라”



○ 트라이앵글 힐에서의 사투



“이곳이 ‘트라이앵글 힐’입니다. 참전한 전우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죽었어요.”

지난달 23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6·25참전용사회관에서 만난 벨라추 씨는 지도 한구석에 그려진 삼각형을 짚었다. 색 바랜 지도에는 당시 주요 전투지역과 지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삼각형 아래쪽에는 ‘김화(金化)’라는 한자가 또렷했다. 철원, 평강과 함께 ‘철의 삼각지대’의 한 축을 이루는 곳이었다. 당시 미군 제7사단에 배속돼 있던 칵뉴부대에 주어진 임무는 중공군이 점령한 이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매일같이 하늘에서는 폭격기의 포탄이, 그리고 고지 위에서는 중공군의 총알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중공군의 꽹과리 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가 뒤섞여 귀가 먹먹해지는 바람에 옆에서 쓰러지는 전우들의 비명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다. 테세마 멜레세 씨(80)는 “이때 들은 꽹과리 소리와 비행기 폭격 소리가 귀에 박혀 한 번은 귀국한 뒤 거리를 걷는데 공사장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는 ‘엎드려’라고 소리치며 물웅덩이로 몸을 던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독한 전투 끝에 칵뉴부대는 1952년 겨울이 가기 전에 트라이앵글 힐을 중공군으로부터 빼앗았다. 하지만 희생은 컸다. 6·25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21명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멜레세 씨는 “이후에도 콩고 등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전투를 했지만 흙이 (피 때문에) 검붉게 변한 것을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 황실근위대였던 칵뉴부대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은 하일레 셀라시에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는 황실근위대를 주축으로 참전부대를 창설했다. 칵뉴는 현지 암하라어로 ‘격파하다’ ‘혼란에 질서를 잡다’는 의미로 황제가 부여한 명칭이다. 에티오피아는 5차례에 걸쳐 모두 6037명을 한국에 보냈다.

1951년 5월 부산항에 도착한 칵뉴부대는 화천 김화 철원 등 격전지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이들의 기억 속에는 인해전술로 덤벼드는 중공군 못지않게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혹독한 강원도의 겨울이 크나큰 적으로 남아 있다. 두꺼운 군용 잠바가 지급됐지만 4계절 내내 평균 온도가 20도를 넘는 중부아프리카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생전 처음 겪는 혹한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 내의를 몇 겹이나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병사는 끝내 동상으로 전선을 떠났다.

카사 그저우 씨(80)는 “처음 보는 눈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정말 끔찍한 추위였다. 가장 친한 전우가 동상으로 귀를 잘라내야 했다”고 말했다. 방아쇠가 얼어붙어 총을 제대로 쏠 수도 없었다. “중공군이 밀려오는데 방아쇠가 안 당겨지는 거야. 언 손가락도 아프고 해서 끈을 방아쇠에 묶고 발에 연결해 페달을 밟듯이 총을 쏘도록 장치를 만들었지. 한결 낫더군.”

근위대답게 절도와 명예를 강조했던 칵뉴부대의 철칙은 절대 포로가 생기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나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인원을 점검했다. “한 번은 인원점검을 해보니 한 명이 없는 거야. 전원이 그 지역으로 다시 가보니 중공군 5, 6명에게 끌려가고 있더군. 결국 달려들어 구출해 왔지. 전우의 시체도 적에게 넘기면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전투 중 전사하면 어깨에 멘 채로 이동을 했지.”(멜레세 씨)



지난달 23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참전용사 회관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참전용사들이 근처에 마련된 전사한 전우들의 묘비를 매만지며 당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6037명을 파병했으며 이 중 121명이 전사했다. 왼쪽부터 일마 벨라추, 테세마 멜레세, 칼릴리루 데스타, 카사 그저우 씨.


○ “4월 서울 방문…가슴이 설렌다”


요즘 6·25참전용사회의 화제는 4월 한국 방문이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카사 그저우 씨를 비롯해 참전용사 20명이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미 춘천시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벨라추 씨는 그저우 씨에게 짐짓 아는 체 했다. “당신 이번에 한국에 간다고? 아마 놀라서 기절할지도 몰라. 거기는 완전히 별세계라고.”

그저우 씨는 갑자기 생각난 듯 “‘슨타요’는 잘 지내고 있을까”라고 물었다. 슨타요는 암하라어로 ‘얼마나 많은 비참한 것을 봤겠느냐’는 뜻으로 에티오피아군이 돌봐주던 당시 여섯 살짜리 한국 소년이다. 하지만 테세마 씨는 고개를 가로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 친구는 아마 우리를 잊었을 걸. 하지만 다른 한국인처럼 큰 부자가 되어 잘살고 있을 거야.”

멜레세 씨는 “1951년 한국에 들어온 순간 앞으로 한국이 잘살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며 강원도 전선에 배치됐을 때의 첫인상을 회상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담한 채 동냥을 다닐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사람들이 바지를 걷은 채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더군. 무척 놀라운 광경이었어.”

“옛 사회주의 정권이 내 모든 것 앗아가”▼

■ 참전용사 베다다 씨
재산 몰수되고 가족 흩어져…참전용사 거의 궁핍한 생활




6·25전쟁 참전용사 마이클 베다다 씨(79·사진)의 집은 움막에 가까웠다. 가로세로 4m가 채 안 되는 방에서 딸과 며느리 손자 등 여섯 식구가 모여 살았다. 양철 지붕은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화장실은 이웃집과 함께 쓰는 공용화장실이고 수도시설이라곤 집 밖에 설치된 수도꼭지 하나가 전부였다. 베다다 씨 가족의 고정 수입은 월 160비르(약 1만6000원)의 연금. 이 중 집세 30비르, 수도료 15비르, 전기료 40비르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며느리가 일용노동자로 돈을 벌고 싶어 하지만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1974년까지만 해도 베다다 씨는 황실근위대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6·25전쟁 참전 후에도 정부가 아디스아바바 북쪽의 거대한 임야를 참전용사들 몫으로 마련해줬다. 그러나 멩기스투 소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참전용사촌(코리안빌리지)의 집과 땅을 몰수당하고 군에서도 쫓겨난 뒤 아디스아바바 외곽의 판자촌으로 이주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더군. 누구도 나를 써주려고 하지 않았어.” 결국 이웃에 도움을 청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부를 잘했던 자식들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며 모두 학업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고등학생이던 큰아들은 농사를 짓겠다며 시골로 내려갔고 둘째, 셋째아들은 지방으로 이주해 일용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소식을 가끔 들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그동안 가족들은 베다다 씨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손자인 립사 군(15)도 할아버지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베다다 씨는 그동안 고이 보관해왔던 6·25전쟁 참전 당시의 빛바랜 흑백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며 “멩기스투 정권은 6·25전쟁에 대한 기록 대부분을 없애버려 이후 에티오피아에서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됐고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 때문에 집안이 가난해지고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6·25전쟁 참전용사 대부분이 베다다 씨와 비슷한 형편이었다. 이제 참전용사들도 몇 명 남지 않은 코리안빌리지는 아디스아바바의 대표적인 슬럼가다. 베다다 씨는 “생활이 어려워진 참전용사들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팔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의 최대 시장인 마르카토 시장에서는 6·25전쟁 참전 훈장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기자가 지난달 24일 마르키토 시장을 찾았을 때도 훈장 한 개가 150비르 정도의 가격에 팔리고 있다.

매년 각종 단체에서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지만 참전용사 가족들이 체감하기에는 부족한 형편이다. 이곳에서 16년 동안 선교활동을 해온 박국도 목사에 따르면 “이제 참전용사 대부분은 4, 5년밖에 더 살기 어렵기 때문에 가족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다”며 “매년 돈을 얼마씩 주고 할 일은 끝냈다는 식으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사업시설 등 이들이 자립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생큐, 코리아▼
한국민관단체 참전용사촌 학교-병원 운영
수업료-점심 무료… 진료비도 절반만 받아


취재 기간 중 만난 참전용사들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항상 “한국인들에게 매우 감사하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비록 충분치는 않지만 그래도 한국이 자신들을 돕는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시민단체인 ‘월드투게더’가 참전용사촌인 ‘코리안 빌리지’에서 각각 운영하는 학교 두 곳의 수업료는 모두 무료다.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점심 식사도 공짜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부분 참전용사들의 자녀들이지만 일부 저소득층 학생들도 다니고 있다. 할아버지가 6·25전쟁 참전용사로 ‘월드투게더’가 운영하는 ‘아디스 비르하루 스쿨’에 다니는 아베르니제르 바유 군(12)은 “한국이 그런 것처럼 나 역시 이곳에서 공부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코리안 호스피털’로 더 유명한 병원 MCM(Myungsung Christian Medical Center)도 대표적인 사례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신경정신과, 정형외과, 치과 등 7개 과가 있는 이 병원은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병원으로 꼽힌다. 특히 아디스아바바 시에서 최초로 응급실을 갖춘 곳이어서 매일 많은 환자로 북적인다. 병원은 6·25 참전용사들에게는 진료비의 절반만 받고 있다.

지난달 22일 MCM 부설 간호학교의 기공식에 참석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6년 전 이곳을 방문했는데 6·25 당시 우리를 도와준 나라가 의료시설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돕기로 했다”며 “이곳의 빈부격차가 워낙 심해 부자 환자들에게는 진료비를 조금 더 받고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진료비를 덜 받는 식으로 운영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아디스아바바=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