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ohn Wesley의 신앙

존 웨슬리의 생애 2.

好學 2009. 10. 7. 17:42

 

1. 존 웨슬리의 생애 2.

 

한편 웨슬리가 몇몇 신성구락부 회원들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나고 남은 신성 구락부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갖다 졸업 후 목사직을 받고 각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단체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향기는 얼마간 옥스포드 학원에 머물렀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 아메리카 대륙과 전세계에 신앙의 불꽃을 일게 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신성구락부였다.

웨슬리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일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직을 사직하고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 전도단은 1735년 10월 18일 시몬주호를 탔는데 이 배에는 모라비 아인들과 80명의 영국이민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진 8주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웨슬리에 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 중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제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 도중 여러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독일 모라비안 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했다.

폭풍이 지난후 웨슬리는 한 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 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그의 일기장에 [나의 일생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영광은 웨슬리가 구원의 빛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736년 2월 6일. 웨슬리 일행이 탄 배는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했다.

웨슬리는 조지아에 도착한 후 모리비아 교단의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웨슬리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리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 겐베르크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리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웨슬리는 대답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리는 [나는 ...알죠]라며 입속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 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 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 찼다. 그후 웨슬리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 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리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 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에는 스페인 출생의 유대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 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 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리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리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리를 고소하였다. 그러나 고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리를 실각케 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고 그 때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리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리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리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영국 행 범선 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 후 그는 조지아 선교 때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미국인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 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

웨슬리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 그들 중 페터 볼러와의 대화는 웨슬리의 신앙에 큰 교훈을 주었다. 그는 볼러로 말미암아 그의 불신앙을 깨닫게 되었다. 중생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묻자 볼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웨슬리는 볼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튿날 아침 옥스포드 감옥에 있는 한 사형수에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전도했다.

다음주일 웨슬리는 퀘이커교 예배에 참석했다. 이것은 웨슬리의 부 흥운동 뿐 아니라 감리회 예배의식 발전상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폭스(퀘이커교 창설자)회에 참석하였는데 내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이 넘처 흘러 그동안 해왔던 기도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운 기도를 했다.] 영국교회의 의식과 기도문에 따라서만 기도했던 그는 자유기도가 더 은혜로움을 깨달았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한 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웨슬리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상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리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리가 중생한지 18일 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의 중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만큼 그의 중생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영국국교는 웨슬리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간주,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벌써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네 교회만 그에게 설교를 허락했다. 또 뉴케이트 감옥에 수용된 죄수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전에 해오던 방법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돼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1739년 4월 2일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예의범절만 찾던 영국교회의 목사들은 제복차림으로 노천에서 전도 하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른 목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그날 오후4시 나는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약 3천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웨슬리는 야외설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새로운 선교방법에 대해 성도들이 걱정을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나에게 내 능력에 따라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덕이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교구에서 일하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웨슬리 일행에게 일대 수난이 다가왔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감리교도들에게 박해가 심했다. 그들이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 운동이나 왕권 회복운동으로 오인, 교구 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 다. 이러한 폭도들의 행패는 1757년까지 계속됐다. 1742년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가졌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팀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감리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웨슬리는 찬송에도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1776년 처음 발표된 총회통계를 보면 감리교엔 목사 97명, 성도 1만 9천7백61명, 순회지구 40개로 나타나 있다. 그 일년후에는 성도가 2만5천9 백11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이 커지고 양적으로 발전한 감리교는 1984년 웨슬리는 기독교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첫 사랑의 상처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려고 했으나 나이 48세때 미망인인 파질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의 변태 행각과 질투로 별거하게 됐으며 얼마후 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리가 받은 복은 컸다.

건강한 몸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4천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 여행한 총거리가 40 만km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 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리는 수섹스주 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위에 누운 웨슬리 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

영국사회를 믿음으로 구원한 믿음의 선구자 웨슬리는 다른 여타의 유럽국가들이 유혈혁명으로 타락된 산업혁명 이후 사회에서 벗어난 것과 달리 영국에 명예혁명이라는 영광스런 사회변혁의 중심적인 사상을 제공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구원을 이뤄야 한다는 사회구원론의 효시였다. 그의 후계자인 우리도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선언한 그의 선언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우리의 선교 대상으로 삼고 그들에게 구제, 교육 등 갖가지 방법으로 선교를 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