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ohn Wesley의 신앙

존 웨슬리의 생애 1

好學 2009. 10. 7. 17:40

1. 존 웨슬리의 생애 1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 사 사무엘 웨슬리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며 교수과목과 교육방침도 결정했다.

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놓고 개별 상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존 웨슬리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일년에 한번 엡워드교구 목사의 집에서는 [알파벳잔치]라는 것이 있 었다.

이는 자녀가 다섯살이 돼 첫 공과를 배우기 시작하는 날로 첫날은 ABC를, 다음날부터는 창세기를 보며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가르치며 산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이 6세 되던해 엡워드 목사관에 불이나 [가정학교]는 잠시 중단된다. 1707년 2월 7일, 집을 삼킬듯한 불길이 목사관을 휩싸자 식구들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들은 형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들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다. 그때 [사람살리라] 라는 소리가 목사관2층에서 들렸다. 웨슬리가 창문에 몸을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해 내려오자 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 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80여년의 생애동안 [화재]와 [구원]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 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존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그는 6년만에 차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마친후 옥스퍼드로 갔다. 웨슬리는 1년에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의 그리스도 교회대학에 입학했다. 웨슬리는 재학중 우수한 성적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논리가 뛰어나 학우들과 논쟁하면 언제나 상대를 꺾고 말았다.

1725년 22세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웨슬리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흡잡을게 없었으나 성직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적경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작은 것이었다.

"나는 아직 내마음의 성결에 대한 관념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의 종교생활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명백한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 죄에 만족하였다."

그가 먼훗날 그 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웨슬리가 사도직을 걷기로 작정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나는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언행뿐 아니라 우리의 사상에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는 이때부터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신앙생활하는데 보냈으며 내적 성결을 위하여 힘썼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 그리스도에게 몸바칠 각오로 살았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갖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성결에 대한 도리를 깨달았다. 웨슬리가 쓴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기본 사상은 아켐피스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 또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란 책은 그가 아켐피스에게서 얻은 신념을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 한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웨슬리의 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로부터 13년뒤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다.

요한 웨슬리가 집사 안수를 받은 것은 그가 22세때인 1725년 9월19일 이었다.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대학 교회당에 옥스퍼드감독 요한 피터에게서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는 그로부터 3년뒤에 받았지만 가끔씩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당시 설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 신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 진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이 없었다."

1726년 3월 11일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 사상을 그들에게 불어 놓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은 제외한 토론회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받은 것은 1727년 이었으나 당시 그는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웨슬리의 부친 사무엘 웨슬리는 65세의 고령인데도 엡원 교구와 우릇 교구 둘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두 교구를 맡기엔 힘이 벅차 아들 존 웨슬리를 부목사로 초빙했다. 웨슬리는 2년 3개월동안 부친 교구에 봉직한후 1729년 옥스퍼드대학 조교수로 피선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한편 요한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옥스포드 그리스도교회 대학에 입학한 것은 1726년 그의 나이 20세가 채 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고 비범한 재사였고 형이 오기 전부터 교내에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종교모임을 가졌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그의 동지들과 함께 매일매일의 학과 일정표를 만들고 종교적 의무를 지키며 침식 시 간을 될 수 있는대로 줄이는 등 신앙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 생활로 동창학우로부터 "규칙장이들" (metho-dists)라는 별명 까지 듣게 되었다.

요한 웨슬리는 옥스포드로 돌아온 후 즉시 동생이 조직한 단체 [신성 구락부] (holy club) 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29년. 타락한 조국을 바로 잡고자 뜻 있는 청년 몇 사람이 조직한 [신성 구락부]는 신임회장 존 웨슬리를 맞았다. 회원 네 명중 세 명은 대학 조교수였고 나머지는 대학 재학생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을 지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였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일반회원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그들은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과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신성구락부]의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를 방문하고 병자 위문을 하는등 여러가지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옥스포드 감독의 허가로 그들은 감옥 뿐 아니라 시내의 가난한 가정도 심방하였으며, 무산 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남루한 옷을 몸에 걸친 소녀 하나가 웨슬리에 구걸했다. [너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옷은 그것밖에 없니?] 웨슬리는 그 소녀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돈이 없어 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의 서재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다.

"나는 가련한 소녀의 배고픔을 면케 해 줄만한 돈으로 내집의 벽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아 - 내 마음엔 공의도 없고 자비도 없다. 이 그림들은 저 가련한 소녀의 피 값이 아닌가?"

이 때부터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그들의 수입 중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잔액 전부를 구제비에 썼다. 웨슬리는 연수입 30파운드를 제외한 2파운드를 내놓았고 이듬해는 60 파운드의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32파운드를 구제비로 썼고, 다음 해 역시 90파운드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리의 부친 엡윗 교구 목사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