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천국.지옥]증언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好學 2009. 8. 18. 17:32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 아름다운 세상과의 이별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세상과의 이별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한 개인의 삶의 끝이자 한 개인의 종말이다.

개인적인 종말과는 달리 우주적인 종말도 있다.

생명체가 살아 숨을 쉬는 지구라는 녹색별이 다른 행성과의 충돌에 의해서 갑작스런 종말이 올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만든 핵폭탄에 의해 지구가 불바다가 되어 자멸의 길로 들어선다면 그 또한 지구의 종말이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바로 지구의 종말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된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말한다.

죽음은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다시 말해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과의 이별은 충격 그 자체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보편성과 불가피성을 이성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종종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하게 된다.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형식적인 조의를 표한 뒤 가능한 한 그 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당한 죽음의 현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엄청난 충격과 고통이 뒤따른다.
 
■ 죽음, 그것은 결국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 
인간은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막상 살아있는 현실을 행복하게
여기지도 못한다. 사실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인생고에 시달리게 된다. 
 
때론 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론 경제적인 문제로 시달리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삶은 우리로 하여금 생의 의미에 대해 묻게 한다.
 
“이 힘든 세상에 나는 왜 태어났을까?”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2:22-23)
 
정말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어떤 철학자는 이 문제의 답을 우연이라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장소에, 원하지 않는 나라에, 원하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인간을 이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고 말한다.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난 인간들은 다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죽는다. 우리를 이 세상으로 던져놓은 우연은 다시 그 우연성에 의해 우리를 이 세상 밖으로 밀어낸다.

참으로 허무하지 아니한가!
 
아무튼 죽음은 이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이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떠나야만 한다. 그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이제 와서 왜 다시 세상 밖으로

쫒아내는가? 내 마음대로 나의 삶을 조정하지 못하는 가슴 아픈 인간의 현실이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죽음의 그림자는 항상 우리 앞에 드리워져 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3-4)
   
1. 죽음이란 무엇인가?
 
■ 생물학적 기능의 정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이다.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우리의 육체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더 쉽게 말하면 호흡을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이 갈수록 호흡이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산소공급이 점차로 힘들어지면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육체의 생명이 숨, 호흡에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 2:22)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29)
 
숨을 쉬지 못하면 모든 생명체는 죽게 된다. 포유류인 인간은 코를 통해 숨을
쉬어야만 한다. 그래서 물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누군가 당신의 목을 조이면 당신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된다.
 
■ 육체와 영혼의 분리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 12:7) 영혼이 떠나면 육체는 죽는다. 어떤 사람은 잠자다가 그 영혼이 조용히 떠나가서 죽게 된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건강하다고 해도 영혼이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다.
 
죽은 몸을 우리는 시신 혹은 시체라고 부른다. 시신은 영혼이 떠난 몸이다.
영혼이 떠나 생기가 없는 시신은 차가워진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죽은 시체를 만지면 흙처럼 차갑고 서늘하다. 시체의 냉기는 섬찟 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필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염을 한 후에 그 시신을 만져보았다. 영혼이 떠난 어머니의 시신은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 무엇인가 섬짓한 기운을 느끼면서 어머니에 대한 애끓는 정이 식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 충격으로 그 때 나는 급체하게 되었다. 정말 이럴 수가!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의 온정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영혼이 떠난 몸은 이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썩어질 몸인 것이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2. 죽음에 대한 철학적 분석
 
죽음은 인간이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에 의해 제한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에 제한을 받기에 결국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네 가지의 이유를 철학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 시간과 죽음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첫 번째 이유는 시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시간은 아주 신비한 속성을 지닌다.

1) 시간은 긍정적인 속성과 부정적인 속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시간은 창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시간을 잘 사용하여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 자동차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고 우주 왕복선도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시간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아주 신비한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시간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속성 또한 갖고 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연속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인간은 결단코 시간을 붙잡거나 멈추게 할 수 없다.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삼켜버린다. 시간은 새로운 것을 낡아지게 만들어 아주 옛 것, 즉 골동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말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경계선이다. 현재는 “더 이상은 아닌” 과거로부터
“아직 아닌” 미래로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현재에 살아있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를 붙잡을 수 없다. 붙잡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시간에 속해 있는 인간의 삶은 현재가 없다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2) 이러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이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에겐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이 모든 순간이 현재이시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입니다.” (시 90:4)고 말한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고 말한다.
 
시간은 모든 생명체들로 하여금 결국은 자신들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한다. 흐르는 시간, 즉 현재를 붙잡을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에 인간이 느끼는 것이 바로 시간의 일시성과 인생의 무상함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야곱은 자신의 130년이라는 긴 생애를 나그네 길에 비유한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나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8-9) 
 
만약 우리가 시간을 초월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선 혹은 줄의 세계는 1차원의 세계이다. 그 선이 직사각형으로 그어지면 그것은 2차원의 세계가 된다. 그 직사각형이 입체적인 모양으로 변하면 그것은 3차원의 세계로 변한다. 그 입체적 공간에 시간이라는 축이 생기면 4차원의 세계가 된다.
 
우리의 현실세계는 4차원의 세계이다. 만약 당신이 죽음이 없는 세계를 원한다면 4차원의 세계를 벗어나 4차원 그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4차원 이상의 세계는 시간을 제거하거나 시간을 초월한 세계인 것이다.
 
■ 공간과 죽음
 
시간이 공간과 만날 때에 현재가 된다. 현재는 시간이 공간 안에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공간을 제한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가 이렇게 말한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 1:4)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공간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생명체들의 삶에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

 

3)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로 바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생존본능이 오용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우리가 누리는 사회적 영향력, 즉 명예, 신분 그리고 지위도 역시 공간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한 도시의 시장이나 시의원 그리고 대형그룹의 회장이나 동네 슈퍼의 주인은 그들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들만의 사회적인 공간을 오랫동안 소유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공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이 지구상의 순례자에 불과하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소유했고 또한 소유할 모든 장소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4) 더 나아가 자신이 소유했던 사회적인 영향력과 그 모든 재물도 다 잃어버리게 된다.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16-20)
 
현재는 시간과 공간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지는 순간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현재를 창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움직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은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미래 또는 다른 공간으로 지속적으로 밀어낸다. 결국 인간 존재는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공간들을 끊임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인간이 자신이 소유한 최후의 공간을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우리가 소유했던 공간을 떠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공간이 없는 시간의 세계로 피신하면 된다. 하지만 공간이 없는 현재는 없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는 단지 천사나 마귀 혹은 귀신들뿐이다.
 
■ 인과관계와 죽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그 누군가가 불을 피우지 않았다면 연기가 날 리가 없다는 논리적 진술이다. 이는 인과관계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인과관계는 어떠한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말이다. 인과관계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넘어선 다른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또다시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과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에 무한정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5)
 
인간은 피조물이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결과물이 생기게 된 원인을 물어야만 한다. 결국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결과물에 불과한 모든 피조물들은
우연적인 존재다. 그 어떤 피조물도 자신이 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필연적인 존재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 태어난 인간들은 또다시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한다. 인간과 같은 피조물들은 탄생과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다. 인간은 원하지 않는 탄생을 겪은 것처럼 또다시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이 거쳐야만 하는 운명적인 것이다.
 
■ 실체와 죽음
 
모든 피조물은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실체를 갖고 있다. 실체란 지속적인 외형적인 변화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6) 우리는 이 땅에 조그마한 핏덩어리로 태어난다. 그리고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면서 점차 몸이 성장한다. 사춘기를 거쳐 청년시기를 지나면서 성숙한 남녀가 된다. 그리고 이제 부모가 되어 자녀를 낳으면서 점차 늙어간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형적으로 변한다. 몸무게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머리카락이 빠지기도 하고 희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면서 점차 늙어간다. 나를 어렸을 때 보았던 어른들은 20년이 지난 후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신체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이다. “나”라는 실체는 세월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그 실체조차도 죽음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실체의
최종적인 손실, 즉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은 실체의 총체적인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영원불멸을 소망하게 된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꾸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불안해진다.

 

7) 그 불안 때문에 인간은 그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것을 찾게 된다.

결국 인간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종교를 찾는 것으로 승화된다. 죽음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은 결국 영혼에 대한 관심과 또한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플라톤의 말대로 과연 영혼은 불멸한 것일까?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실까? 결국 우리는 영혼과 그 영혼의 주인인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이다.
 
언젠가는 죽음에 의해 소멸되어 버리는 실체를 갖고 있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영원불멸한 실체이면서 만물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종내 찾아 올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로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는 영원에 대한 동경심이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인 것이다.8) 
 
3. 죽음이 무서운 이유
 
■ 죽고 나면 어떻게 되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인간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인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정말 사후의 세계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세계일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후의 세계가 보장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이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길이 죽음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을 모두 남겨둔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혼자 떠나는 심정이 어찌 답답하고 괴롭지 않겠는가?
 
만약 사후의 세계가 보장되고, 그 사후의 세계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삶을 접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죽음을 선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죽음 자체를 꺼려한다. 생각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욕 중의 하나가 바로 “너 죽인다!”인 것이다.
 
■ 죽음의 순간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다.

성도들 중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평안하고 안전한 임종을 원한다.
 
칼이나 총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에 예수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가득 찬 목회자나 선교사들조차도 순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무리 천국에 가고 싶어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준비된 죽음을 원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동물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는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아무리 용맹한 사냥개라고 해도 개장사에게 팔렸을 때 본능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감지한다. 그래서 개장사가 집에 와서 그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 한번 짖어보지도 못하고 다리가 풀려 그냥 풀썩 주저앉는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에게 엄습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죽음 그 자체보다도 더 무서운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병원에 종합 진찰을 하러 갔다가 암 진단을 받고
그 자리에서 그냥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운전하고 열심히 일을 하던 사람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병원에서 걸어서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신앙인들조차도 암과 같은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병원의사의 선고를 부정한다.

“그럴 리가 없다”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인 수용이 불가피해진다. 이제 현실적 상황에 대한 내적인 승복을 하게 된다. 물론 정신적인 고통이나 방황은 여전하다.
 
그 다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실제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작업에 들어서게 된다. 이와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남겨질 가족에 대한 염려를 신앙으로 극복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죽음은 슬픈 것이다.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죽음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놓고 나홀로 떠나는 것이기에 외롭고 쓸쓸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그냥 잠시 동안 헤어져야하는 이별이 아닌 영원한 이별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 장례식에서는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는 장송곡을 구슬프게 부르면서 무덤까지 상여를 메고 간다. 더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사별은 우리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갑작스런 비행기나 교통사고, 재난(홍수, 지진, 화재, 전쟁 등)에 의한 죽음이 이 바로 그러하다. 그 슬픔과 충격이란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충격으로 후에 망자의 뒤를 따라 죽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죽음은 그토록 슬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보낸다는 확신이 있다고 해도 이별의 슬픔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록 죽음의 순간은 두려워할지
몰라도 죽음 자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의 유익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0-21)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모해야한다.

죽음은 우리의 고향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나는 10여년의 해외 유학생활 중 한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걸리게 되었다. 자장면을 실컷 먹고 싶어지기도 하고, 한국과 다른 나라와의 축구경기가 시작될 때 애국가 소리가 울려 퍼지면 괜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랜 타향살이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애국자가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국을 방문할 때 고향의 흙을 파가지고 와서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그 흙냄새를 맡으며 마음을 달랜다고도 한다. 외국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다 한국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아주 반갑게 인사하면서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으로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향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겐 하늘에 진짜 고향이 있다. 우리는 영원한 고향,
천국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그리워하고, 이 땅에서의 삶이 나그네와 같은 삶임을 항상 깨달아야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천국에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여겨야 한다.
 
“응애! 응애!” 소리를 지르면서 모태에서 나왔듯이 우리는 다시 죽음이라는 출입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생이 학사과정을 마치게 되면 졸업식이라는 예식을 한다. 공부를 끝낸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졸업식(graduation)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에 새롭게 시작하는 한다고 하여 그들은 졸업식을 시작식(commencement)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천국에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잠자리나 나비가 애벌레로 있다가 어느 날 허물을 벗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삶을 살듯이 우리 인간도 이 세상에서 꿈틀거리며 괴로운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도 천국에 들어가면

기쁨과 환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계 21: 3-4)
 
천국은 다시는 죽음이 없고, 헤어짐과 이별의 슬픔도 없고, 눈물이나 고통, 아픔과 질병이 없는 곳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맛보지 못했던 안식을 누릴 것이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계 14:13) 또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사망의 세력에 휩싸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 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루라도 더 살아보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만큼 죽음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말한다. (히 2:15)
 
성경은 사람들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마귀가 사망의 세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히 2:14)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 멀어진 이후 마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께는 대항하고 인간에게는 온갖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마귀는 죽음을 자신의 도구로 삼아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죽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출입문인데 말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마귀는 매우 실제적인 권세를 갖고 죽음에
대한 온갖 공포심을 조장한다.
 
■ 마귀의 발악
 
나는 4년째 개척교회를 하는 동안에 두 명의 암환자를 천국으로 인도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이 없다가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일 때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래서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면서 천국을 의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환자들은 그러한 의심이 들 때면 어김없이 먼저 돌아가셨던 형님이 꿈이나 환영 중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면 그 날은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엄습하는 날이 된다.
 
어떨 때는 눈앞에 꺼먼 무엇인가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면 그날도 영락없이 아파서 눕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환자들은 어렵게 얻은 신앙심을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하고 의심하였다. 역시 마귀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훼방하는 방해자였다. 그 때마다 목회자인 나는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으면서 환자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러면 그 다음날에 다시 상쾌한 몸과 회복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환자들이 매 주일 아침마다 교회가기가 싫다며 가족들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잘 설득해서 주일날 교회에 오고 나면 또다시 기분이 좋아지고 믿음이 생겨난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이 토요일까지 지속되다가 또다시 주일 아침이면 믿음이 떨어지고 교회에 가기가 싫어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영적인 세계는 특이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떨어뜨리려는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야 한다.
 
■ 축복된 죽음
 
아프기 전에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했던 말기 폐렴 환자인 김순호 성도님은
투병생활 중에 예수를 영접하였고,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잠이 오지 않는 긴긴 밤 시간에 성경을 통독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때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거의 느끼질 못했다.
 
2003년 5월 19일, 우리 부부는 충주 수안보 파크 호텔에서 열리는 개척교회
목회자 초청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6시, 성도님과 직접 통화를 했다. 그는 그 날 저녁 자장면을 먹었고, 나에게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9시쯤, 그가 호흡곤란으로 구급차에 실려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았다. 긴급한 사태를 전해들은 우리는 즉각적으로 서울로 향했다.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아내가 마귀의 역사가 심하게 느껴진다면서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운전하면서 아내와 함께 간절히 그리고 뜨겁게 기도했다. 드디어 여의도 성모병원에 도착했다. 사태는 정말 심각했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성도님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역시나 마귀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얼마나 시달렸으면 몸에서 진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 무언가에 눌려서 시달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상황 속에서 가족들은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고, 단지 목회자가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당황스러웠다. 그날 밤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에는 다른 환자들도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었기에 나는 정말 조심스러웠다. 이 분을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천국에 평안히 가도록 기도해야

하는가도 내가 결정해야 할 당면과제였다. 나는 그 가족들의 분위기와 환자의 상황을 고려한 끝에 천국을 향한 소망으로 기도의 방향을 잡았다. 그 때의 시간은 새벽 12:30분이었다. 그로부터 2시간 동안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가끔씩 그 분의 귀에 대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새벽 3시쯤 기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분의 얼굴이 환히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 무엇인가에 쫒기는 것 같던 얼굴이 변하여 평안한 얼굴로 변화되었다.
식은땀도 멈추었다. 그리고 땀과 함께 흐르던 진액도 멈추었다. 땀과 진액으로 온통 젖어 있던 그의 몸이 점차 마르면서 윤기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천사들이 우리와 함께 찬송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 안에 있는 모든 환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도 우리의 찬송소리를 반기고 있었다. 우리가 찬송 부르는 것을 모두들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새벽 5시까지 계속해서 찬송을 불렀다. 성도님은 임종 직전 자신의 가족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의 얼굴은 이제 광채가 나고 있었고, 그 마음의 평안함이 얼굴로 비쳐지고 있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필자와 그 곳에 있는 10여명의 유가족들은 성도님이 천국으로 가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몇 시간동안 그 분의 임종을 목격한 불신자인 그의 조카들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가 좋긴 좋구나!”
 
“우리도 종교를 가지긴 가져야 하는데...” 
 
2004년 10월에도 나는 말기 암 환자 한 분의 6개월 동안의 투병에 함께 하였다. 이때에도 마귀의 역사는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우리는 승리하였다.
그 분도 천국에 가셨음을 우리는 확신하였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목회자인 나에게 천국가시는 분은 그냥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가족도 함께 느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임하는 마귀의 세력을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4-15)
 
■ 사망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
 
마귀는 사망권세를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고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의 저주를 끊으셨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가진 마귀를 물리치려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 3:8)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고전 15:54-57)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오히려 축복이다.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 행복한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죽음 자체가 엄청난 축복의 순간이다.
죽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요,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행복한 순간인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5-26)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 실제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이 준비되어 있기에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예수는 천국에 가는 길이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요, 우리의 죽은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이다. 예수를 믿으면 사나 죽으나 두려울 것이 없다. 살아있으면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죽으면 천국으로 가면 된다. 할렐루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