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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好學 2009. 6. 20. 23:36

 

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사도교회를 계승했으며,독특한 전례, 지역 교회들의 독자성 등을 특색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요3분파들 가운데 하나.


 

성격과 의의

동방정교회는 처음 7차례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정의된 신조와 관행을 따르는 그리스도교도들의 큰 단체이다. 동방정교회의 전례 문서 혹은 교회법 문서에서 사용되는 공식적인 명칭은 '정통 가톨릭 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이다.


 

문화적 배경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1054)은 AD 1세기에 시작되어 중세기 내내 계속 되었던 점진적인 소원화(疎遠化) 과정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사건이었다. 이 소원화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정치적 사건들에서 비롯되었다. 4~11세기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 이후 동로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에서 교회의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이 동시에 발전했고, 여기서 신학적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사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개념에 입각한 로마 우위론은, 로마·안티오크·콘스탄티노플 등 지역 교회의 중요성이 그 교회들의 수적·정치적 의의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동방 교회의 관념과 양립될 수 없었다. 동방 교회의 경우 교리에 관한 분쟁을 조정하는 최고의 권위 기관은 에큐메니컬 공의회였다.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분열되었을 때,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중동 지역, 발칸 반도, 러시아에 퍼져 있었으며, 그 중심은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동방정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교회의 규범

동방 교회는 '독립' 교회들(Autocephalous churches), 즉 각각의 수장 주교의 치리(治理)를 받는 교회들의 협의체로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의 우위성은 칭호와 명예에 그친다. 현재 동방정교회에 속한 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이집트), 안티오크 교회(이 교회의 본부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있음), 예루살렘 교회, 러시아 교회, 그루지야 교회, 세르비아 교회, 루마니아 교회, 키프로스 교회, 그리스 교회, 알바니아 교회, 폴란드 교회, 체코슬로바키아 교회, 미국 교회 등이다.

또한 크레타, 핀란드, 일본에는 '자율적인' 교회들이 있다. 이 교회들은 모교회 관구에 교회법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독립 교회들을 언급하는 순서가 이 교회들의 실제적인 영향력이나 수적인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 교회법이 인정한 대로 콘스탄티노플이 모든 교회의 으뜸이며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위한 상징과 수단이어야 한다는 합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고대 교회법이 그렇게 인정한 까닭은 콘스탄티노플이 고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정교회 내부에서는 많은 혼란과 행정상의 갈등이 있었다. 특히 서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관할권이 중복 설정되었으며, 정치적인 의욕이 지나쳐 명시된 교회법적 규약이 없는 교회 조직들이 형성되기도 했다.

오늘날 정교회 조직의 항구적인 기준은 〈신약성서〉 이외에 처음 7차례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법령들(법규과 교령), 모든 교회가 그 권위를 인정한 몇몇 지방 공의회의 법령, 이른바 '사도 규준', '교부들의 규준'(교회법상 중요한, 탁월한 교회 지도자들의 발췌선집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교직

정교회에서는 교회를 여러 규준들 및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증언된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본다. 현대의 정교회 신학은 주교직이 성직 중에서 으뜸이며, 따라서 주교 자신이 관할하는 공동체(교구)에서 주교보다 더 높은 권위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바 없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러나 지역 교회나 주교는 따로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각각의 지역 공동체 생활은 현재와 과거에 다른 지역 교회들이 누려왔던 교회 생활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이와 같은 동일성과 연속성은 주교 서품 의식에서 표현된다.

주교는 신앙의 보호자이며, 공동체의 성사를 집행하는 중심이다. 정교회는 사도권 계승 즉, 주교의 사역이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속성은 기능의 연속성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연속성이다.

어떤 주교도 그의 동료들과 일치를 이루지 않고서는 즉, 주교공의회('주교회의')의 일원이 아니고서는 주교로 임명될 수도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도 없다. 니케아 공의회(325, 이 공의회에서 결정된 법령들은 오늘날까지도 정교회에서 유효함) 이후, 로마 제국의 각 지역은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는 완전히 독립된 단위였으며, 교회법상 최고 법정인 그 지방 고유의 주교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현대 정교회에서 이 기능은 각 독립 교회의 주교회 의장이 맡았으며, 일반적으로 '수도대주교'(metropolitan)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 기능은 '총대주교'(patriarch)라고 불리기도 하는 지방 수석대주교(local primate)가 수행한다. 그는 또한 대주교(archbishop:혹은 metropolitan)로 불리기도 하며 이 칭호는 영예로운 것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 독립 교회 주교회의의 관할 지역은 국경선과 일치하며(중동 지역에는 예외가 많음), 서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는 외국 정교회들은(디아스포라) 보통 모교회(母敎會)에 소속되며 그 주교회의의 지배를 받는다. 이 디아스포라들은 모교회의 권위 아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체제로 인해 정교회의 관할권이 교회법과 무관하게 중복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는 모두 인종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중세기에서 유래한 몇 가지 요인들(예를 들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로 인해 오늘날 정교회 안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했다. 그 결과 민족 문화와 종교의 일체화도 나타나게 되었다. 민족 문화와 종교의 일체화는 정치적 조건이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의 생존을 돕는 때도 있었으나, 선교의 확장을 방해하고 교인들의 그리스도교적 일체감을 가로막기도 했다.


 

성직자와 평신도

정교회에서는 교회 생활의 기본 원칙으로서 영성체와 친교를 강조했기 때문에 성직주의(clericalism)가 발달하지 못했다. 평신도를 주교 선출에 참여하게 했던 초기 교회의 관행은 동방 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위직 성직자들, 예컨대 사제들과 보제(補祭)들은 일반적으로 결혼한 남자이다. 정교회의 현대 교회법은 한번만 결혼하고 배우자가 과부나 이혼녀가 아닐 것을 전제로 결혼한 남자에게 보제직 및 사제직 임명을 허용하고 있다. 이 규정은 절대적 일부일처제의 일반 원칙을 반영하는 것이고 정교회는 이 일반원칙을 사제직 지원자들이 엄격하게 준수해야 할 그리스도교적 규범으로 간주하고 있다. 보제와 사제는 서품을 받은 후에는 결혼할 수 없다.

주교들은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들이나 홀아비가 된 사제들 가운데서 선출된다. 결혼하지 않은 주교를 요구하는 규칙은 수사들이 성직 사회의 엘리트를 대표했던 6세기에 제정되었다. 오늘날 정교회에서는 수사의 수효가 줄었기 때문에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새로운 주교 후보자를 찾기 어렵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정교회의 평신도들은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주교 선출에 참여하도록 허용되는 것 이외에도 교회 행정과 신학 교육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에서는 거의 모든 직업 신학자들이 평신도들이고 평신도들이 설교자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전례의 역할

정교회의 예배는 신학적으로 풍부한 내용과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다양하기 때문에 정교회의 연속성과 일체성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중동과 발칸 반도를 지배했던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에 종교적 지식과 경험의 유일한 원천이던 예배 때문이었다.

신자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교회가 진정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은 동방 그리스도교인들 경험의 기본적인 표현이다. 이 개념이 없으면 주교가 전례에서 교사와 대사제로서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정교회 교회 구조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신성한 삶에 참여한다는 개인적인 경험도 공동체의 연속적인 예배 행동이라는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권위있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동방 교회의 전례가 서방 교회의 전례보다 그리스도교 교회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동방 교회의 전례가 항상 인간의 정서적·지적·미학적 능력에 동시에 호소하는 총체적인 경험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에는 매우 다양한 모델과 상징이 포함되어 있으며, 공식적인 신학적 진술과 신체적인 지각 및 몸짓(예컨대, 음악적인 분향, 부복 자세), 시각 예술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교육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전례의 모델에 친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델들 가운데 많은 것은 교회의 역사적·문화적 유산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교한 고대 전례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교리 교육을 통해 신자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교회는 전례 문제에서는 항상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 결과 전례의 개혁은 신앙 그 자체의 개혁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전례의 주기

비잔틴 전례 전통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례상 연도(年度)의 다양한 주기를 특색짓는 찬송가 텍스트가 풍부하고 다채롭다는 점이다. 어떤 특별한 전례서에는 주요주기마다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 부활절 주간의 주기들은 1년 동안의 모든 의식(儀式)들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이것은 동방 교회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부활에 절대적인 중심을 두고 있음을 잘 예시해 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부활절의 날짜는 춘분 이후 첫번째 만월이 든 후 첫째 일요일이다.

6~9세기 비잔틴 교회는 다마스쿠스의 요한네스처럼 뛰어난 시인들의 찬송가 저술로 작곡의 황금 시대를 구가했다. 근대에 들어와 찬송가 저술은 대체로 이전 시대 시인들이 수립한 양식을 따랐으나, 질적으로 이 모델들과 맞먹는 찬송가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성악은 언제나 카펠라(cappella)이며, 서구화한 미국 교구에서만 약간의 예외가 인정되고 있다.


 

성만찬 전례

정교회 예배에서는 2가지 성찬 전례가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와 위대한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가 그것이다. 이 두 전례는 9세기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게 되었으나 위대한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에서 사용되는 성찬 '규준'의 표현은 4세기에 성 바실리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성 바실리우스의 전례는 성찬 규준의 텍스트만 다를뿐 중세기에 확립된 전례의 전반적인 구조는 동일하다.


성사

현대 정교회 교리문답서들과 교본들은 모두 교회가 7성사(mysteria)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례, 견진, 성체, 신품, 고백, 성유(중세기 서방 교회의 '극단적인 도유 성사'), 결혼 성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성사에 관한 텍스트인 전례서(Euchologion:기도서)나 교부 전통은 공식적으로 성사의 수효를 제한하지 않는다. 또한 서방 교회에서는 성사(sacramentalia)로 부르는 예수공현 축일 때의 물의 축복, 장례식, 수사를 위한 체발식(剃髮式) 등 의식들과 '준성사'(sacraments)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동방정교회에서 각 성사 의식은 주교나 그 대리인이 인도하는 교회 공동체 전체의 기도이며, 이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해석한다. 하느님의 응답은 교회에 성령을 보내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한다고 본다. 성사의 이 두 측면은 마술과 율법주의를 모두 배제한다. 여기에는 성령이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그들의 응답을 요청한다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교회의 성사에서 하느님의 일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은 인간의 '협력'(cooperation) 또는 '공동 작업'(synergy)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참여로써 성 육신의 목표가 이루어진다.

 

세례 및 견진성사

세례는 보통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세례 지망자들을 3번 물에 담그는 행위로 실시된다. 따라서 이 의식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음을 표현한다. 세례 다음에 견진성사가 곧바로 이어진다. 견진성사는 사제가 새로 세례받은 그리스도교도에게 주교가 축복한 '성유'를 발라주는 의식이다. 세례와 견진을 받은 어린이들은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다.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은 세례 직후 어린이들에게 견진과 영성체를 허락함으로써, 세례를 성만찬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아야 하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세례의 적극적인 의미를 견지하고 있다.


성체성사

동방 교회에서는 성체성사의 본질에 대한 사변이 발달하지 않았다. 기도의 정점(頂點)은 그리스도의 행위를 회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기원함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신비는 교회의 기도에 의해, 성령의 기원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신품성사

정교회는 보제직·사제직·주교직의 3가지 주요성직과 교사직·보좌보제직의 소직제를 인정한다. 모든 직제의 임명은 주교가 성찬 전례 때 시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교 임명은 교회법이 정한 주교회의에서 선출되어야 하며 최소한 2,3명 의 주교가 참가해야 한다.

 

고백성사

초기 교회의 고백성사는 장엄하고 공개적인 화해 의식이었다. 이 의식을 통해 출교된 죄인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백 성사는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교인으로서의 지위가 정기적으로 갱신되는 개인적인 고백 행위로 발전했다. 정교회의 의식에서 고백은 일반적으로 법률적 신문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치유로 간주되고 있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율법주의적이 아닌 것은 죄를 내적 욕정과 노예 상태로 해석하는 동방정교회의 교부(敎父)식 접근 태도 때문이다. 법률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외적인 범죄 행위뿐인데, 이 행위는 인간의 내적인 질병을 표출한 것이다.

 

성유성사

성유성사는 기도에 의한 치유의 한 형식이다. 그리스 교회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성 수요일 저녁에 온 회중을 위해 이 의식을 거행한다.


결혼성사

결혼은 장엄한 면류관 의식으로 거행되는데, 이는 하느님 나라에 성사로 '투사'(投射)된 영원한 결합을 상징한다. 결혼에 관한 정교회 신학은 법률적인 의미의 이혼불가성보다는 결혼의 성사적 영원성을 주장한다.

 

건축과 성상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이래로 동방정교회는 다양한 교회 건축 양식을 발전시켜 왔다. 주된 모델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6세기에 완성한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다. 이 성당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고전적인 바실리카 꼭대기에 거대한 돔을 세웠는데, 이는 하늘나라가 임재하는 것, 즉 성찬 의식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상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현대 정교회 교회들에서 교회 본당과 성소를 분리하는 성상 칸막이는 상당히 후대에 발전된 것이다. 843년 성상파괴론에 맞서 정교회가 승리를 거둔 이후 성상의 항구적인 계시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었다. 성상칸막이는 전례에서 제단 앞의 커튼을 여닫는 행위와 더불어 성찬 의식의 신비스럽고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신비가 '비밀'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찬 전례를 통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을 때 이미 계시된 신성한 생명과 앞으로 올 '새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동방정교회는 이교적인 우상 숭배를 상기시키는 3차원적인 성상들 이외에도 풍부한 성화 전통을 발전시켰다.

휴대 가능한 성화들은 나무에 채색한 것이 많지만 에나멜 기법과 모자이크를 활용한 것도 있고, 언제나 가정이나 공공장소에 보관한다.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가 분열한 때는 연대적으로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선교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와 일치한다.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는 다같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팽창에 기여했으나 그 방법은 서로 달랐다. 서방 교회는 새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라틴어 전례를 따르도록 하여 라틴어를 그리스도교 문명의 유일한 매체가 되게 했고, 교회의 통일을 위한 주요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동방 교회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처음부터 성서와 전례를 개종한 민족의 모국어로 번역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슬라브 민족들의 토착 문화와 통합되었고, 세계의 정교회는 중앙집중화한 기구라기보다는 민족 교회들의 친목단체로 발전했다.


피렌체 에큐메니컬 공의회(1439)가 실패한 이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공식적인 노력은 없었다. 그러나 영국성공회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는 특히 19세기 이래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교인과 신학자들이 중심이 된 몇몇 비공식 협의체는 동방정교회와 영국성공회의 '앵글로 가톨릭'파 사이의 상호 이해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정교회는 성공회의 신앙 내용에 관한 만족스러운 진술을 얻기 전까지 화해를 위한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는 데 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교회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했고, 그 대표들은 금세기초부터 실천과 관련된 '삶과 노동회의', 신학과 관련된 '신앙과 직제회의'에 참여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 회원 교회의 범위를 넘어 더 넓게 확대되었다. 공의회 정신 준수 원칙과 1960년대에 교황 파울루스(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간의 여러 차례 회의에서 교황이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와 동등한 자격으로 공식석상에 나선 것은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다 깊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한 의미심장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분열시켰던 주요이유인, 교회가 다양한 사회적·정치적 정의 실현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서방 교회의 경향은 두 교회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교회·국가·사회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서방 교회는 다른 어떤 개별적 기구가 수행할 수 없는 사회 통합 기능을 떠맡았다. 그 결과 교황들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를 공식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제국 체제가 1453년까지, 러시아에서는 1917년까지 유지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는 제국의 정치적 틀 안에서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은 약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교회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와 제국이 모두 초자연적이고, 원칙적으로 우주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시기에 이 개념은 민족 국가에 신성한 지위를 부여하는 체제로 점차 발전했다. 오늘날 정교회 교회들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현대의 교회 민족주의는 제국과 교회의 중세기적 동맹관계가 낳은 부산물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교회의 입장은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에 뚜렷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자족적인 지식, 세속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도의 참된 증인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 즉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합리적인 틀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도의 증언 형태는 매우 다양했고, 정교회는 전통적으로 은수자·정치가·수사·황제도 교회 성인에 포함시켜왔다.

정교회는 개인 또는 사회 윤리 분야의 구체적인 내용을 법전화하거나 체계화하는 일을 소홀히 해왔다. 정교회는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의 양심을 신뢰한다. 그리스도교도 개개인은 〈신약성서〉와 성인의 위대한 본보기에 비추어 자신이 행동해야 할 바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