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주일예배]

왠 말인가 날 위하여

好學 2009. 6. 20. 20:37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찬송 ;141장 ♬ 말씀 :눅23:44-46,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더없이 싱금을 울리는 141장 '왠 말인가 날 위하여'의 찬송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 전까지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찬송으로 우리에게 구절 구절마다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특별히 1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2절은 ' 주님은 나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토록 험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셨으니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엄청나다는 것이다.

3절은 '주님의 죽음이 얼마나 가엽고 한이 없으면 낮의 해도 빛을 잃고 캄캄해졌을까? 자연도 예수님의 죽음에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는 것이다.'

4절은 '주님께서 날 위하여 피흘려 죽으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눈물 없이는 그 십자가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절 '주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여 늘 울어도 갚을 길이 없어 이 몸 받친다는 것이다.' 이같이 귀한 가사를 쓴 사람은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아이작 왓츠(Isac Watts;1674-1748) 목사가 1707년에 작시하여

그의 「찬송가와 성가」에 실었다. 그가 지은 찬송가는 우리 찬송가에도 많이 수록되었는데,

8장, 41장, 52장, 58장, 115장, 138장, 141장, 227장, 237장, 249장, 387장, 391장, 401장, 438장 등이 있다. 찬송 곡은 1800년 경에 '휴즈 윌슨'(Hugh Wilson;1766-1824)이 만들었다.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30년 사생활과 3년 간의 공생애가 전부 고난의 생애이다. 더구나 만찬회 석상에서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은 고난의 일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고난이 벌레와 같은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 같은 사실을 들으면서 어떠한 느낌을 받게됩니까?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할 일도 대게 없다 어떻게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뿐인 생명을 십자가에 버리셨다 말인가? 하며 이상한 사람으로 또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지어낸 일이라고 여기십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1:4)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자 채찍에 맞으시고 옷 벗김과 침 뱉음과 못 박힘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쓰셔야 마땅하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거스르는 '불순종'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불순종! 우리들의 어리석음! 그리고, 양처럼 제 고집만 부리는 우리들의 '자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아집과 고집, 어리석음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 이러한 옛 모습들을 완전히

털어 버려야만 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들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2절) 내 지은 죄 다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13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요한일서 4:9절에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 이사야 53: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우뚝 서있는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해보십시오. 먼저 예수님의 얼굴을 보십시오. 종이처럼 창백해져가는

얼굴과 머리에 얹혀진 가시 면류관으로 인해 붉은 피가 주룩 주룩 흘러 내렸습니다. 손을 보십시오.

손바닥을 꿰뚫은 큰못이 예수님의 부드러운 살을 찢고 뼈를 뚫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육중한 몸이 늘어질수록 살이 점점 찢어지고 선지빛깔 같은 붉은 피가 연속해서 쏟아집니다.

두 발을 보십시오. 역시 큰못으로 나무에까지 깊이 박히고 선혈이 줄줄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옆구리를 보시렵니까.

무지한 로마 군병들이 날선 창으로 찌르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가슴도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통을 한 시간 동안 겪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자그마치 여섯 시간동안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던지 예수님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시고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절규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496장)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 한 성당에 하루를 빼지 아니하고 찾아오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강대상 쪽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냥 갑니다.

어느 날 예배당 사찰이 물었습니다. "왜 형제는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갑니까?" "십자가만 바라만 보아도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141장)

 

정말 저와 여러분 속에 예수 십자가만 보아도 은혜가 넘치는 기쁨이 넘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144장)가 나의 간증이 되어지고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무엇을 보려고 예배당에 나왔습니까? 화려한 옷 입은 자입니까?

솔로몬의 궁정으로 가십시오. 해박한 지식인입니까? 애굽이나 바벨론으로 가십시오.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를 씻으실 분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184장) 오늘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의 첫날입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 지신 십자가로 가까이 가까이 가보십시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496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죄가 깨끗해 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3절)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서 캄캄케 되었네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읽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만 그것이 제 고시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마27:45,눅23:44)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한 가운데가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눅23:45)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시며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셨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백부장과 그 외 많은 사람들이 "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49)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다. 십자가는 실로 큰사랑의 능력이 터져 나오는 자리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매어 달리신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와 기도와 소망의 약속으로 넘치고 있다.

어찌 우리 벌레 같은 인생들이 상상할 수 있는 단어들인가? 그러기에 십자가는 사랑의 능력이 폭발한 곳이다. 하나님 사랑의 위대한 빛이 비쳐진 곳이다.

그러기에 햇빛도 이 사랑의 빛 앞에 빛을 잃었다. 44절 말씀대로 하늘의 해가 빛을 잃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해가 빛을 잃으니 피조물의 세계는 어두워졌다. 땅은 어두움으로 들어찼다. 우주공간에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어 달리는 시간이었기에 피조물도 빛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십자가에 매어 달린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순간이었기에 햇빛도 빛을 잃었다.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었으면 천지가 요동을 하는가?

이는 십자가가 우주의 원리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27:51절에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하였으니 십자가는 실로 우주적인 사건이다.

십자가는 성도의 몸을 무덤에서 일으키는 능력이고 멸망 받는 영혼을 건져낸 사랑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보여주는 사랑, 이 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실로 십자가는 우주적 사건의 중심으로서 능력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적과 장면을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다고 여기십니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능력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길이요.

제자가 되는 길이요 참 능력을 나타내는 길이다.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길에 조금이라도 참여하며 묵상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4절)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멸시를 하는 것일까요?

더욱이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왜 이 모양입니까? 우선 불신앙 때문입니다. 사53:1절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증거 했고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1절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했는데 여기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이적 적인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도 아말렉과의 전쟁 때, 5.18, IMF때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편견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십시오.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에서 나신 것 아닙니다.

유대 땅 작은 고을 게다가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때 왕궁에서 모세처럼 성장하신 것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자란 솔로몬처럼 성장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가난을 먹고 노동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로도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서 준수하였고 다윗은 얼굴빛이 붉고 눈이 빼어났다 했는데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대로 풍채가 없고 매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대학은커녕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도 없었습니다. 본문에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당시에 있었던

문둥병 자들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자가 나타나면 저마다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병자 취급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까? 우리의 불신앙 때문이요, 우리의 잘못된 편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물론 연한 순 같은 종교입니다. 그러나 순 없이 거목(巨木)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난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그러나 그랬던 유대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싫어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들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으신 것과 같고

사울에게서 배척을 당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교회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좇으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외형을 봅니다. 옷, 풍채, 재물, 학력, 권세, 출세를 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 자랑할 것이 없다" 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에 고난 당하신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그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주님의 죽으심의 자리요. 영혼이 참 하늘에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은혜의 보좌가 있는 참 하늘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능력이다. 십자가는 능력중의 능력이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다.

부활의 시작이다. 십자가는 죽으심이 아니다. 생명이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다. 성공이다. 참 하늘로 들어가는 길이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거기에 나타난 영광을 본 자가 누가23:47∼49의 백부장이다.

무리들과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온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의 능력, 속죄의 능력, 소망의 능력을 보았는가? 고통의 십자가에 담겨진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다.

그 십자가 위의 ①그리스도만 알려고 하며 ②십자가를 자랑하자. ③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성도가 되자. 히13: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하였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신앙생활,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교인들만 결단할 수 있는 길이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이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죄인처럼 취급된 예수, 그 십자가의 능력을 보며 우리도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고 마침내 자기를 죽음에 내어놓는 신앙으로

나아가자. 그것이 신앙의 마지막 목표다.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아멘 5절은 141장 "왠 말인가 날 위하여"의 클라이막스이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우리들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받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 하였듯이

" 사도 바울이 "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를 좇으며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하며 복음 증거자로 나섰듯이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딤후4:2)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0-21)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 종점이 자기 희생의 길이다. 사도가 그러하였고, 오늘까지의 수많은 순교자가 그러하였고 구속의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온 많은 성도가 그러하였다. 예수 믿으면 성공과 축복만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과 고달픔이 먼저 올 때가 많으며 괴로움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 언덕너머에 영원한 안식과 영생이 있습니다. 십자가 지고 따르는 전도인이 마지막 주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딤후4:8절에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의인으로 인정된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이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면류관입니다.

의의 면류관은 열심과 충성에 대한 상급으로 받는 인격적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