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 기독교 100년사

好學 2009. 3. 19. 12:59

 

한국 기독교 100년사

제1편  한국 민족기독교의 출발
제2편  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제4편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제5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제6편  민족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협력
제7편  맺는 말


*제1편  한국 민족기독교의 출발

(서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국 민족은 인습과 형식 빈곤의 멍에를 메고 언제까지 그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 멍에는 진리만이 풀어 놓을 수 있었다. 기독교 진리인 복음을 우리 민족에게 주려고 목숨을 바친 전도자가 있는가 하면 국외로 나가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받아들인 겨레들도 있었다. 한국 민족이 복음을 접수한 시기는 다른 민족보다 뒤졌으나 그 마음가짐과 행동은 어느 민족보다 강하고 열망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제1장 유럽 기독교인의 전래
1. 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의 표착(漂着)
2. 바실 홀과 맥스웰의 來航

제2장 선교 개탁자(開拓者)들의 한국인 接近
1. 꾸쯔라프목사의 서해안 전도
2. 토마스목사의 대동강 순교
3. 로쓰.매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高麗門) 전도

제3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예배집회
1.백홍준,서상륜의 수세(受洗)와 전도활동
2. 이수정의 개정과 기독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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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유럽 기독교인의 전래

*1.벨트브레와 하멜 일행의 표착(漂着)
한국인이 프레테스탄트와 최초로 접촉하기는 1627년 네덜란드 사람인 벨트브레(Jan Janse Weltevree,朴) 일행 세 사람이 한국 동해안에 상륙한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당시 한국의 사정은 서양인과 교제가 일체 두절되어 있어,그러한 시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경주앞 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 세사람은 벨트브레 외에 디렉 게이스베르즈(Direk Geijsbertz)와 얀 피이터(Jean Pieterz)이었다. 벨트브레1)는 1626년 동양에서의 무역을 위해 배를 타고 본국을 출발하였고 그 이듬해에 일본을 향해 항해하는 도중 난파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착한 것이다. 그들은 선내에 결핍한 음료수를 얻기 위하여 한국 땅에 상륙하였다가,일단 나라 안에 발을 들여 놓으면 좀처럼 돌려 보내주지 않는 당시의 법속으로 인하여 억류되었다.2)

동료 두사람은 1636년 병자호란에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고 벨트브레 혼자만 살아 남았다.그에게는 전공에 의하여 신안이식지하는 생활에 여자를 취하게 하는 행상이 따르게 되었으며, 구인후 대장 휘하에서 한왜군의 통솔자가3) 되는 출세를 하였다.그 자손들에게도 훈련도감에 편속되는 특전이 부여되어 군인일가를 이루었다.

벨트브레가 기독교 신자인지 여부에 관하여는 한국 문헌에도 몇가지의 기사가 있다. 즉 그는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인 동시에 생각이 깊고 교양을 갖춘 인물4)이라 하였고 생사화복과 천보의 이치5)를 설하였으며 또한 가히 그의 말이나 행위가 도를 가진 사람에 유하다6)는 표현으로 그의 신앙심을 표시하였다. 하물며 그의 국적이 당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흥융 도상에 있는 네덜란드인 임을 감안할 때 벨트브레의 기독교인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물론 벨트브레의 신분은 상인이었고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언어와 행동으로 기독교적 감화를 끼쳤음은 존경과 추대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1627년 한국에 상륙한 벨트브레가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였음이 틀림없다고 한다면, 이는 한국교회사 상에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음에 상당한 주목을 기울여야 한다.

벨트브레의 표도 이후 26년이 지난 1653년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이 또 있었다. 그들 하멜(Hendrick Hamel,)일행도 역시 프로테스탄트이었다. 이들도 극동 교역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8월 15일 제주도 화순포 앞 바다에서 파선되어 일행 64명 중 많은 사람이 익사하고 36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한국 땅에서 억류생활 14년이 지나 그 중 15인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멜 일행도 벨트브레와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의 국민이었으므로 프로테스탄트라고 하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신앙에 관하여는 당시의 한국의 문헌과 일본 문헌과 그리고 하멜이 직접 손 그의 표류기8)속에 많이 나타나 있다.한국인 관리가 그들을 향하여 "기독교인(Christian)이냐"고 물으니 모두가"야야(耶耶)하면서 시인하였다는 내용이 있다.9) 일본 문헌에는 대마도주의 글에서 한국에 구류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 온 네덜란드인들이 모두 기독교인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10)

하멜표류기에는 하멜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글의 내용 여러 곳에서 선언하고 있다. 11) 그는 난파에서부터 일본으로 도망하여 귀국할때까지,14년 동안 어려움과 기쁨을 당할 때마다 시종일관 하나님께 간구와 감사를 아울러 드려,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하멜 일행이 소선에 몸을 싣고 한국 해안을 탈출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전부를 의탁하였다"는 귀절에 이르러는 감격어린 바도 없지 않아 있다.12)

실로 그들의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기도로 생활했다고 해서 결코 잘못이 아니다. 1832년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꾸쯔라프가 한국 서해안을 방문하였다. 그의 내한 동기가 하멜표류기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이 하멜표류기는 한국 사회의 제반 사정과 생활의 면모를 최초로 유럽인에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한동안 유럽의 독서계를 풍미하였다. 꾸쯔라프 목사가 한국에 내항하기에 앞서 하멜표류기와 접촉한 일이 있었다고 한단면, 그러한 점에서 그의 교회사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가해져야 할 것으로 안다.
(* 주 =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몇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 았고 제주도에서 14년간 억류되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였음을 알수있다.

라고 기술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술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멜을 포함한 36명은 제주에 표착한 후 그 다음해에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서울에서 잠시 머무른후 다시 전라도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탈출한자는 일행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이며, 이 8명의 탈출후, 일본이 네덜란드인의 조선표착을 알게 되어 잔류 네덜란드인의 송환을 요구한 후, 나머지 생존자 7명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던 것입니다. 하멜의 기사에는 이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하멜일행, 즉 네덜란드와 조선과의 관계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소종문금제의 요구도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만,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인가요?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에는 이와 관련된 논문과 사료, 선행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참고로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 내용은 1998.10.15 신동규님이 알려주신 내용입니다. 좀더 자세한 사항을 알고싶은 분은


*2.바실 홀과 맥스웰의 來航
1816년,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견하는 암헐스트(J.William Amherst)사절을 태운 알세스트(Alcest)호와 리라(Lyra)호의 함장은 맥스웰(Murry Maxwell)과 바실 홀(Basil Hall)의 두 해군대령이었다.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여 사절단을 내리우고 광뚱에 정박하고 있는 기간에,본국 정보로부터 한국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두 함장은 각기 자기의 군함을 통솔하여 1816년 9월에 한국에 내항하여 서해안 일대를 시찰하고 해도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비인만 마량진 앞 갈곳에 들렸을 때에,문정을 위한 임무를 띠고서 접촉한 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전달하였다. 바실 훌은 본국에 귀환하여 1818년 '한국 서해안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he Great Loochoo Island)를 출간하였으며 그 내용에서 첨사에게 전달한 책은 킹 제임스(King James)역본의 대형의 성경(The Holy Bible)이었다고 언급하였다.

" 첨사에 맥스웰 함장이 주는 성경을 정중히 받아가지고 마치 공식 문서를 다루는 모양으로 신중히 해안으로 옮겼다."13) 물론 그것이 성경 인줄은 알지 못하고 받았을 것이다. 이 성경은 외인에게서 받았다는 중대성에 비추어 곧 조정에 상송되었으며 그리고 관부혹은 규장각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이는 실로 한국에 성경이 전달된 최초의 사실로서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나 일반 문화사에 있어서도 특필해야할 중대한 사건이 된다.


*제2장 선교 개탁자(開拓者)들의 한국인 接近

*1. 꾸쯔라프목사의 서해안 전도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칼.꾸쯔라프(Karl F.A.Guzl-aff)목사이었다. 그는 1827년 네덜란드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쟈바(Java)와 스마트라(Smartra)섬을 위한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후에 그는 타일랜드(Thailand)로 갔다가 1831년 마카오로 선교지를 옮겨 자신의 소원인 중국인 상대로의 선교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배를 타고 해안을 순회하는 선교여행을 좋아하였다. 그는 1831년에 중국 동해안 전역을 항행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일이 있었거니와 1832년에는 그 방향을 한국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에 황해도 백령도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남하하여 21일에는 군산만에 도달하였다. 그는 배가 군산만 북편의 창선도에 정박하자 곧 상륙하여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리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선교사인 모방(Piere Philibert Maubant,)신부보다 4년 앞서 꾸쯔라프 목사는 한국에 들어왔다. 배는 25일에는 홍주 고대도 안항으로 항행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고 병을 고쳐줌으로써 전도에 착수하였고,또한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김영수를 통하여 국왕 순조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헌상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홍주목사의 서생으로 있은 양씨(Yang Chich)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한글 성경 번역의 최초의 사실로서 실로 한국 성서 번역사 상 특필할만한 가치가 있다. 꾸쯔라프 목사는 주민들에게 감자 종자를 주고 그 재배됨을 가르쳐 줌으로 호감을 샀거니와, 복음 전달하는 사명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꾸쯔라프 목사는 귀로에 올라 한국 땅이 안계에서 사라질 그때까지,'예수 기독교'라고 쓴 깃발이 휘날리는 로드 암헐스트(Lord Amherst)호의 돛대 아래 갑판 위에 꿇어 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계속하였다.

"나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반드시 열매 맺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이것을 믿었는 고로 영광에 찬 십자가의 도를 한국인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한국 국왕이 성경을 받아보게 될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 주민들은 이미 성경을 받고 있으니 저들을 통하여 복음이 한국 온 땅에 펴짐으로 광명의 아침이 찾아 오도록 하나님이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꾸쯔라프 목사의 한국 방문은 극히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과를 얻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이고,그의 한국 선교를 위한 개척적인 열의에 만강의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어 마땅하다 하겠다.

*2. 토마스목사의 대동강 순교
꾸쯔라프 목사가 최후의 기도를 남기고 한국을 다녀간지 33년이 지나 다른 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한국 땅에 와서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새로운 기초를 설정하였다. 그는 1866년 평양을 방문하였다가 대동강 상에서 자기의 목을 칼로 치는 한국인 병사에게 성경 책을 주면서 목숨을 바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이다.

그는 영국 런던선교의 파송으로 1863년 중국 상하이에 부임하였다가 1865년부터는 산뚱성 치푸로 자리를 옮겨 자급전도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우연히 만난 한국인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과의 대화는 토마스 목사로 하여금 새로운 열의를 일으켜 주었고 한국 선교를 결행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66년 6월,토마스 목사는 미국의 상선'제너럴 셔면'(General Sherman)호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타고 동행하기를 간청하였다. 제너럴 셔면 호의 방한은 목적은 서울에 들어가서 국왕을 만나뵙고 통상의 허락을 얻으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지리에 서투른 선원들은 대동강을 한강으로 오인하여 내륙으로 소상하다가,불행하게도 군사들의 화공을 만나 대동강 위에서 불타기 시작하였다. 선원들은 저마다 목숨을 구하려고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혼자 배 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오,하나님이시여!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못한 저 불쌍한 백성들에게 은헤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 다음,그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큰 상자를 갑판 위로 끌어 올렸다. 그 속에는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성경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성경책을 불에 타지않게 갑판 위로 끌어올려 가지고 한권 한권 언덕을 향하여 힘껏 내던졌다. "복음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애타는 마음에서 그는 던지고 또 던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언덕에까지 닿지 못하고 물속에 떨어졌다. 이제 불길은 배를 완전히 에워쌌다. 토마스 목사의 옷에도 불이 붙고 그의 머리칼도 타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견디다 못한 토마스 목사는 물 속으로 넘어져 떨어졌다. 그는 헤엄쳐 언덕에 기어 올랐으나 군중들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사 박규수앞에 끌려 갔다가 다시 대동강 하류에 있는 양각도로 호송되어 참수 되었다.

이때에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으므로 평양에서의 초대 교인이 되었다. 평양은 그 뒤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고 전국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의 피가 흐른 대동강 수를 마시는 많은 사람들이 그후 오래지 아니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만이 아닌 것이다.


*3. 로쓰.매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高麗門) 전도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 등지는 한국교회 수립을 위한 최초 기지가 되었다. 우장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를 낳은 곳이요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한 곳이며, 봉천은 최초의 한글 성경을 출판한 곳이며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한 곳이다.

이곳에는 스코틀랜드 일치자유교회(United Free Church of Scotland)의 죤 로쓰(John Ross,)목사와 죤 매킨타이어(J.McIntyre)목사가 1872년 이래 주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주 선교를 희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같은 영국인으로서 한국 선교를 하다가 순교한 토마스 목사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함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로쓰 목사가 한국에 가까운 우장과 봉천을 택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데 있었다. 그의 선교 계획은 병인양요 이후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강화되어 한국 입국이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았는 고로 우선 만주 땅에 있는 한국인을 만나 그들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내 전도에 종사케 하여 선교의 성과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1873년 가을에 로쓰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하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장을 출발하여 봉천,흥경을 지나 압록강 상류 임강에까지 이르렀을 때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현의 이양자이었으며 약 3천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주거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반가히 만났으며, 한국 입국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한국 입국을 위한 길 안내를 수락치 않는 것을 보아 기독교를 금하는 국법의 준엄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으로 로쓰 목사에 대하여 국가의 기밀을 살피러 온 정탐군으로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로쓰 목사는 이곳에서 압록강 건너의 한국 강산을 바라다 보는것 뿐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로쓰 목사가 귀로에 고려문(Korean-Gate 에 들렸을 때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게 되자 한없는 기쁨을 느끼면서 꼭 한국 선교는 하고야 말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짐하였다.

고려문은 책문이라고도 하며 국경 도시인 의주로부터 약 120리 지점에 위치하며, 말하자면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다.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 두 절기에 걸쳐서 정기적으로 교역 시장이 열리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곤 하였다.

다음해, 봄에 로쓰 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한국인 전도를 목적하여 고려문에 도달하였다. 그의 느낌은 한국인들은 국법이 금하는 어려운 사정으로 인하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는 서양인을 피한다는 사정이었다. 로쓰 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시켜서 자기들이 유숙하고 있는 주막집으로 한국인들을 데려 오도록 일을 진행시켰다. 중국인 서기는 여러날 동안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데려 오려고 힘써 보았으나 대부분이 사람이 응하지 아니하여 헛 수고를 되풀이 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한국인 청년 몇 사람을 포착할 기회가 도달하였다. 그들은 평안북도 의주 사람으로 상사를 핑계하여 선진 과학을 배우려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이역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인을 만나고 싶은 호기심이 가득차 있으면서도 국금을 어기는 두려움 때문에 쉽게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인 서기의 뒤를 따라 로쓰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로쓰 목사는 열심히 저들을 설득하였다. 한국 말과 한국 역사를 가르쳐 주면 그 대가로 청년들에게 후한 월급을 주고 또 서양 과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는 제의하였다.

마침내, 한국인 네 청년은 로쓰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갔다. 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한국인을 동행한 그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나 두 목사는 서두르지 않고 반드시 생명의 말씀이 뿌리 박힌 날이 이를 것을 기대하면서 꾸준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음 밭을 경작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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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한국 기독교인의 발생과 예배집회

*1.백홍준,서상륜의 수세(受洗)와 전도활동
로쓰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간 한국 청년들은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의 네사람이었다.24)네 청년은 각각 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또 그곳에 있는 세관장과 병원장의 어학 선생이 되었으며 성심껏 일하면서 또 신문화를 배웠다. 그러면서도 이 네 청년은 예수를 믿는 문제에 대하여는 매우 완강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이후에 고국에 돌아가드라도 기독교 신자만 되지 아니하였으면 사형은 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로쓰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열심히 한국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였다. 1874년에는 '한영 회화'(A Korean English Primer)를 발간하였고 1879년에는 '한국지''그 역사.생활.습관'(Korea,It's History,Manners and Customs)를 간행하였으며 1875년에는 '예수성교문답','예수성교요령'의 두 책을 한글로 편찬하였다. 이는 참으로 그들의 한국 선교의 문호를 열기위한 노력이 얼마나 진지하였음을 알게 하고도 남는다.

백홍준을 비롯한 네 청년은 우장으로 들어간지 3년째인 1876년에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을 열고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25) 그들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도니 것이다.26) 신자가 된 네 청년은 곧 그때부터 로쓰 목사를 도와 한글 성서를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들의 번역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79년에 먼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0년에는 4복음과 사도행전을 완역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다른 한 의주 청년 서상륜이 우장으로 찾아와 성경번역 사업에 가담하였으며,그는 출판을 위한 목활자를 파는 일에 힘을 더 기울였다. 서간도에 살고 있은 김청송이가 인쇄 작업에 경험이 있다 하여 그를 식자공으로 채용하였는데 그는 뒤에 로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 복음과 마태복음이,1887년에 가서는 완전한 신약의 전부가 '예수셩교전서'란 이름으로 출판되어 그 기쁨이야말로 하늘에 닿은 듯 하였다.27)

이제는 로쓰 목사가 뜻한 바 간접 선교의 방식으로 처음 믿기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성경 책을 주어 국내에 들어가 선교케 하여야 했다.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 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항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소에 국금의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쓰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은 한국교회를 자락데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하였다.

뒤를 이어 백홍준이 다시 성경 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거넌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반년도 못되어 10여명의 신자가 생겨,이들은 주일마다 백홍준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말하자면 이것이 곧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물론 이는 정식의 교회라기보다 일종의 기도처소이었다.

최초 프로테스탄트의 한 사람인 서상륜은 입국할 때 고려문에서 한국 관리에게 체포되었다. 다행하게도 그곳에는 그의 친척되는 김효순과 김천련의 두 사람이 심부름꾼으로 있었다. 그래서 겨우 그들에게 구출되어 그날 밤으로 국경을 넘어섰다. 서상륜도 고향인 의주를 중심하여 열심으로 전도한 결과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10여명의 친지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의 전도한다는 소문은 점차로 퍼지어 관가에까지 알려졌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상륜과 동생 경조는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솔내로 비밀리에 몸을 피해갔다. 그러나 두 형제는 이곳에서 더욱 쉬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였다. 얼마 안가서 솔내 마을 58세대 가운데 50세대를 믿게 할 정도로 전도는 크게 성공하였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전도에 나섰으며,1885년에는 순전히 자기들의 힘으로 여덜칸되는 한국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이곳이야 말로,한국 프로테스탄의 요람지'(Cradle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Korea)로서 영원히 기념할만한 고장이며 또한 한국교회의 발상지로서 세계교회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켰다.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이곳을 찾아와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미 신자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신앙심을 확인한 것 뿐으로,한국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회에 와서 공식적인 의식을 집행한 데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입국하기에 앞서 그 나라 사람들이 국외에 나아가 먼저 신앙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이 국내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이룩한 사실은 너무나 기특한 내용이다. 또한 성경이 이미 피선교지의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같은 것은 세계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드문 일로서 우리 민족이 그 얼마나 복음을 접수하기에 열중하였는가를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영원히 남길만한 가치있는 내용 중의 뚜렷한 것으로 크게 자랑할만 하다.


*2. 이수정의 개정과 기독교 사업
하나님께서 한국에 복음의 문을 여시기 위하여 북쪽 중국에서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동쪽 일본에서도 역사하신 것은 실로 오묘하기 그지없다.

1882년 한국 정부의 고관인 이수정이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곧 개화 일본을 위한 선각자요 교계의 인물로 유명한 쯔다박사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이수정이가 쯔다 박사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 벽에 걸린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을 기록한 족자를 읽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음은 그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쯔다 박사는 이수정을 야스가와 목사에게 소개하였고 믿음이 자란 그는 1883년 4월 29일 자진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일본 주재 성서공회 총무인 헬리 루미스(Henry Loomis)목사였다. 루미스 목사는 곧 이수정을 찾아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1883년 4복음과 사도행전의 번역이 나왔고 다음 해에는 마가복음을 출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수정은 그때 일본에 와 있는 미국 장로회 선교사 녹스(George W.Knox)목사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Robert S.Maclay)목사와 친숙해져 그들을 통하여 한국에도 조속히 선교가 시작되야 한다고 미국 교회에 호소하였다.

한국 주재 최초의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사람은 한국으로 오는 도상에,일본 도오꾜에 들렸을 때 마침 이수정이가 역간한 한국어 성경을 보고 말할 수 없이 큰 감며에 휩싸이었다. 선교사들이 새로이 개척되는 선교지에 들어가 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또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인데, 한국인에게는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으랴!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쉬었다. 두 사람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희망이 넘치고 기쁨이 가득찬 가슴에 한국말 성경을 부등켜 안고 힘찬 발걸음으로 이 나라를 찾아왔다.


*제2편  한국교회의 형성과 부흥

(서론)
누가 우리 한국 민족에게 소망을 줄 것인가, 그는 오직 우는 자의 위로가 되고 약한 자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1907년 이래 한국교회의 대부흥은 교파와 계급을 초월하고 우리 민족이 죄에서 거듭난 참다운 부흥이었다. 선교사들은 겸손과 희생의 사람이 되었고, 교인들은 성수주일, 성경연구, 헌금과 봉사, 사랑의 생활로 돌진함과 동시에 큰 전도 운동을 일으켰고 교회 연합사업을 시작하였다.

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 의료.교육사업의 전개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제2장 성령강립과 교회의 일대부흥
1. 민족적 자각에 따른 신자의 증가
2. 애국 인사들의 기독교인 속출
3.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1. 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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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개국과 미국선교사들의 내한

*1.의료.교육사업의 전개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을 닫고 오랫동안 서양인의 입국을 금하였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의 기독교 전파의 시기는 자연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호 개방의 시기는 드디어 도래하였다. 1882년 5월 22일 미국과의 수호조약의 체결을 비롯하여 그 이래로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와도 교제의 길을 텄다. 미국의 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 선교의 손을 뻗치게 되었다.

그때에 일본에 체재하고 있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Maclay)목사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으며, 이나라의 개화를 위하여 서양 과학과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고종은 드디어 "한국 내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개시해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내렸다. 기쁘메 넘친 매클레이 목사는 곧 본국 선교본부에 이 소식을 알리면서 한시 바삐 의사나 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한편, 중국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들도, 즉 산뚱성에 와 있은 장로교 선교사 레이드(Gilbon Reid) 목사는 선교 본부에 한국 선교를 위한 계획을 제시하여 선교 개시를 촉구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알렌(Horace Newton Allen,안동)이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는 한국을 찾기에 앞서 중국 상하이에서 의료 선교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국 선교를 위한 인물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였다. 한국의 사정이란 아직까지 선교사라는 신분을 밝힐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미국 영사관의 공의라는 명목으로 입국하였고 동시에 영국과 청국,일본영사관의 공의의 직분까지 맡아 보았다. 그의 입국은 의사가 긴급히 요구되고 있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대호평이었다. 그러나 그의 본래의 사명은 선교사업인데,의사로사만 일해야 하니 답답하고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에 돌발적인 사건이 터져 선교사업 수행을 위한 호기회가 도래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왕족 중의 한 사람인 민영익이가 우체국 낙성식에 참석하였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개화당 자객의 칼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 장안에서 유명하다는 한의들을 14명이나 불러들여 치료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알렌 의사는 그를 정성껏 치료하였으며 생명을 구하는데 성공하였다. 결과에 대한 보상은 과연 놀라왔다. 그는 궁중의 시의가 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서양 의술의 탁월함이 인정되어 병원을 개설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았다.

알렌 의사는 곧 현대식 병원을 세웠으며 광혜원(Wide spread Relief Hous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중신들이나 함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시료하였으므로 환자는 날로 늘어났다. 그가 한국인들로 부터 얻은 신임은 곧 선교사업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전초 기지 구축에 성과를 올렸다. 그야말로 알렌이 개척한 그 길을 밟고 언더우드나 아펜셀라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일하게 되는데 어려움을 덜어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여 시행하였다. 서양의술에 대한 신망은 날로 깊어갔고 동시에 서양교육에 대한 원망도 점점 높아갔다. 한국 정부의 노력도 현대식 교육을 도입하려고 애쓴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특히 고종의 관심은 지대하였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과 미국 등 지에 몇 차례의 시찰단을 파송하여 또는 유학생을 보내어 세계의 정세를 연구 시찰케 하는데 열심을 기울였다.

1883년 6월,미국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민영익은 곧 고종에게 현대식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주달하였다. 그러했기에 그 해 7월에 서울을 방문한 매클레이 목사에게 그렇게 쉽게 교육사업의 윤허를 내리셨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은 몰렌돌프(P.G.Von Mollendorf)에 의하여 시작된 영어 강습소인 것 같다. 외교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영국인 해리팩스(T.E. Hallifax)와 중국인 교사가 교수하였다. 그후, 한국정부로부터 현대식 교육의 지도자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미국정부의 문교부장관 이튼(John Eaten)은 헐버트(H.B.Hulbert)와 벙커(D.A.Bunker)와 길모아(Gearge W.Gilmore)의 세 사람을 보냈다. 이들을 중심하여 1884년 7월 4일에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학교로서 여기에서는 정부에서 일할 관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필요한 학교가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해어날 길이 없어 10년을 더 계속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직접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교육사업에 착수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건실하고 대중적인 현대 교육을 소개하였으므로 한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열렬한 환영을 받게된 것이다. 정부가 다하지 못한 교육사업의 효과를 선교사가 수행하여 올리게 되었음은 한국 민족의 개화 계몽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유익하였다.


*2. 선교의 활동과 조직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아침에 미국 장로회의 파송을 받은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선교사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의 강사로 일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배워서 말을 좀 할 수 있게 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서 전도를 시작했던 서상륜이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와 솔내교회를 한번 방문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얼마후 그곳을 방문한 언더우드 목사는 벅차게 소용돌이치는 감격을 누를 길이 없어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 국법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자기네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세웠고 또 그들 자신이 교히를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언더우드 목사는 한국인을 향하는 뜨거운 애정이 저절로 솟아오름을 금하지 못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가을에 솔내에서 7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서울에도 교회를 세워야 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었다. 1887년 9월 27일에 언더우드 목사는 새문안의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린 후 정식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창립이다.

이 역사적인 한국교회 최초의 교회가 조직되던 날,새문안교회 창설예배에 한국교회 최초의 전도자인 백홍준과 서상륜,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알렌과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로쓰 목사등, 이렇게 거대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이는 장차 한국 장로교회가 그 거보를 내딛고 됨을 축복하고 있는 듯 빛나는 영광의 모습이었다.

감리교인 아펜셀라 선교사는 교인들을 위한 예배 처소로 정동에 있는 집 한채를 구입하였으며 1887년 10월 9일에 정식으로 예배를 올렸다. 이 날에 교히 관리책임자의 아내 김씨(Pauline Kim)의 조모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오늘의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목사는 한국에 처음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하는가 하면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한느데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기독교 진리에 입각한 새 과학 문명을 한국인들에게 교육하며 또 새로운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언더우드는 경신학교를 세웠고 아펜셀라는 배재학교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또 아펜셀라 목사와 협력하여 대학을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연세대학교는 바로 그들이 설립한 것이다. 한편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톤(Scranton)부인은 여성 교육을 위하여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로 아시아 굴지의 대학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두 분 최초 선교사인 뒤를 이어 내한한 선교사는 호주 장로회 소속인 헨리 데이비스(J.Henry Davis) 목사였다. 그는 남한 지방을 여행하면서 전도하였는데 1890년 4월 15일 아깝게도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염에 걸려 부산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호주 선교사들이 여럿이 도래하였다.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송한 레이놀즈(W.D.Reinold,)를 비롯한 6명의 선교사가 함께 입국하여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

1895년에는 미국 남감리교에서 보낸 레이드(C.E.Reid)목사가 들어와 경기도 송도를 중심하여 선교사였다.

카나다 장로회에서는 1893년에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를 한국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착수케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솔내 지방에서 전도하다가 열병으로 별세하였다. 이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교회는 뒤를 이어 5명의 선교사를 더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였다. 캐나다 장로회는 주로 함경도 지방을 중심하여 전도하였다.

1907년에는 성결교회 계통인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에 카우만(C.E.Cowman)과 길보른(E.A.Gilborne)이 한국을 찾아왔고 그 이듬해에는 영국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의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이처럼 한국교회 초창기에 각 교파의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모두 함께 고생하면서 각자가 맡은 선교구역에서 최선을 다해 전도한 결과, 오늘의 이 땅에 수많은 교회를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립
한국이라는 토양에 기독교 복음을 부식하는데 있어서 그 선교정책을 바로 설정하는 일이란 매우 중대한 과업임에 틀리없었다.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 중의 대부분은 보수적 신학 사상과 독실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희생 봉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면서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기이 때문에, 수천년래 한국민의 마음 속에 뿌리박혀 잇던 샤마니즘(Sharmanism)의 무지와 또는 유교의 형식주의,불교의 미망을 타파하는데 상당한 성과를 올렷음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

한국 주재 선교사 일동은 1890년 6월 말,중국에서 다년간 선교에 종사한 네비우스(John L.Nevius)목사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었다. 그 결과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끝까지 떠나지 말고 붙들어 그가 개인전도하는 일군이 될 때까지, 자기의 직업에 종사하면서,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끈질기게 지도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키도록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사업을 감당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생기면 그들을 선임하여 교회의 지도 일군으로 세운다.

넷째로, 교회당 건축은 그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의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모습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한다. 교회사가인 마삼락(Samuel H.Moffett)은 여기에 두가지를 보충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보급시키도록 할 것과 외국 선교사들에게는 개체교회의 담임을 삼가도록 한 내용이었다.

위가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 전도,자치 제도,자급 운영의 셋으로 요약하게 된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로서의 토착화하는 기초를 닦게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회는 이 방안을 채택하므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으며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다.

1893년에 조직을 본 장로회에선교사공회는 이 네비우스 방안을 참고로 하여 보다 더 획심적인 몇가지 내용을 첨가 확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류 계층보다 서민층 전도를 우선한다.
(2) 부녀자 전도와 여성을 위한 교육에 주력한다.
(3) 지방에 초등 교육기관을 널리 설립한다.
(4) 교역자 양성에 특별 유의한다.
(5) 성경 번역의 진행과 보급에 노력한다.
(6) 모든 기독교 문서에 한글을 사용한다.
(7) 선교사가 돕는 교역자 수를 줄이고 자급하는 교회로 육성한다.
(8) 한국인 스스로 동족에게 전도하는 자립 전도의 훈련을 강화한다.
(9) 의료 선교사는 시료와 복음 전도를 병행한다.
(10) 퇴원 환자의 집을 방문 전도한다.

이 선교 정책은 당시 한국교회 발전을 위하여 매우 창조적이었고 고무적인 전도 방안으로서 교회,학교,병원의 세 면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 형태를 갖추어 한국 교회사상 기여를 크게 남겼다.

*제2장 성령강립과 교회의 일대부흥

*1.민족적 자각에 따른 신자의 증가
우리 땅에서 치른 청일전쟁과 일본의 입김에 의하여 진행된 갑오경장은 모두가 다 한국 민족을 향한 심각한 반성과 커다란 각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민들은 정부의 부패와 무능력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타국 군대들이 우리 국토에서 싸우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한심한 정세에 통탄하여 마지 않았다. 갑오경장은 청과의 일체의 관계를 단절하고 내정개혁을 선포하고 독립을 외쳤으나, 이것도 일본 제국주의가 적극적으로 한국에 침입하는 계기가 되었음에 불과하였다. 그런고로 이를 깨달은 뜻있는 인사들은 치를 떨며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1895년 서울의 어느 선교사의 보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실정은 변해가고 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 각성의 기미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라고 하였고, 그래함(Graham Lee) 선교사는 자신의 1896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전쟁은 한국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저들은 삶의 참길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라고 말하여 한국민의 애타는 심정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기독교 복음은 새로운 희망을 한국 민족에게 던져 주었다.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어 신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895년에 530명이던 신자가 1896년에 3,276명으로, 1900년에는 7,690명으로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는 100명에서 150명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때는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오고 있으면서도 탐색적인 경향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생명이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2. 애국 인사들의 기독교인 속출
개화 인사들 중에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근심하면서 혁신운동을 진행한 인물들이 여럿이 일어났다. 1894년 배재학당의 교사인 이승만이나 1892년 언더우드 신학반 수료한 홍정후나 미국에서 최고 학부를 마치고 1895년 귀국한 윤치호등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1896년 협성회를 조직하였고 다수의 신진인물들을 규합하였다.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에 성공한 서재필은 독립혐회를 구성하였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으로 만들었고 서재필,윤치호,홍정후 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백성들 사이에 자유 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하였다. 또한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워 국가 자주권의 회복을 역사 의식적으로 표방하며 나섰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행한 부정 부패의 공격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심한 불쾌감을 일으켜 정부는 드디어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였으며 이승만 등 17명을 체포하였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하여 애국 인사들에게 기독교 서적을 전달하면서 전도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설교를 듣고 새로운 책을 읽으면서 진리를 알게되어 드디어 1901년 3월에 12인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고관 인사 층에서 대량으로 기독교인이 된 시초이다.

옥중에서 신자가 된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은 출옥한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한국의 사회와 종교 정치 등 각 방면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특히 사회와 교회를 접근시키는데 세운 공은 뚜렷하였다.

*3. 한국 최초의 대부흥운동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자 열강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저마다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호시탐탐하였다. 1905년 노일전쟁이 끝나자 승리한 일본은 모든 열강의 힘을 물리치고 정치,군사,경제 모든 면에서 이 나라에 대한 우선권을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의 민족은 이러한 정세에 안타까이 가슴을 쳤지만 약소 국가의 설움만이 닥쳐올 뿐,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궁지에서 더욱 더 몰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1907년 한국교회 최초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부흥운동의 불길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아디(R.A.Hardie)목사가 기도하는 중의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그는 이 체험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간증한 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되었다. 소문이 퍼지자 평양에 있는 선교사들도 같은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는 감리교나 장로회가 자리를 함께 하였으며 외국 선교사와 우리 나라 교인들도 한결같이 은혜를 사모하였다. 때마침 미국 뉴요크로부터 죤슨(Howard A. Johnson)목사가 달려와 인도와 영국에서 일어난 세계적 대부흥운동에 관하여 힘있게 전파하였다. 은혜를 갈망하여 간구하는 소리는 하늘에 닿아,1907년 정월에 접어들면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이 집회는 낮에는 성경 공부, 밤에는 전도강연 집회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도는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찬송은 폭포소리 같았고, 한날 밤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드디어 폭발하여 크나 큰 위세를 떨치고야 말았다.

그날밤에 일어난 과정은,사람들은 다투어 일어나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소리내어 울면서 마루에 엎드려 주먹으로 마룻강을 치면서 지은 죄를 통회하였다. 한 사람이 일어나 죄를 고백하면 온 회중이 소리를 내어 아멘을 연발하며 기도를 외치는데, 이처름 뜨거움이 또 있을 수가 없었다. 집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이 지나고 새벽 먼동이 틀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 인하여 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는지 모른다.

이후로 교인들은 성수 주일, 기독교 윤리의 엄수,성경공부,전도활동 등 그리고 주께 바치는 생활에 스스로 힘쓰게 되었으며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에서 얻은 힘으로 그후 거듭 일어나는 일제 하에서 수난에 박해를 능히 견디며 참아 나가게 하였다. 특히 부흥사경회는 이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국교회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영속적인 연례적 행사처럼 되어지고 말았다.

*제3장 교회 행정기관 설정
(서론)
1919년 3.1독립 운동에 있어서 기독교가 그 중심 세력이 되었음은 세인 공지의 사실이다. 해외에서의 운동이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거사와 행동이 모두 교회를 중심하여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박해와 탄압은 한국교회와 신도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일어나 민족을 위한 길잡이가 되었고 또 봉사자가 되었다. 이는 오히려 한국 민족을 교회로 접근시키는데 주효하였으며 민족 기독교로 발전하는데 전화위복이 되었다.

*1.한미 장로회공의회의 발족
선교사의 증가와 선교 지구의 확장으로 선교사 공의회는 분화되어 공의회 위원회(Committee of Council)란 것을 설정하였다. 1895년에 서울 위원회와 평안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는 전라 위원회(남장로회 선교회),경상 위원회(호주장로회 선교회) 가 그리고 1902년에는 함경 위원회(카나다장로회 선교회)가 또 조직되었다.

위의 선교사 공의회에는 1901년부터 한국인 대표가 동참하였다. 즉 그 해 9월 20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의 제1회 장로회 공의회에 한국인 9명과 선교사 25명이 참석하였다. 장로회 공의회의 발족은 한국인 신자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최고 처리기관에 참가한 획기적 사실로서 한국 민족교회 발전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는 아직 노회가 없어서 우리는 임시로 장로회 공의회라는 전국적인 회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앞으로 노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라고 한 것과 같이 장로회 공의회는 분명히 앞으로 한국인 스스로가 움직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의 전신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2. 대한독노회 설치와 해외선교의 착수
1907년 대부흥회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진 그 해에 한국교회는 또 다른 큰 수확으로 노회를 갖게 되었다. 1906년 선교사공의회는 다음 해에 7인의 목사 후보생이 안수 받게 될 것을 예견하여 목사 임직을 위한 절차를 결정해 놓았다. 즉 순서위원,신조 작성위원 및 교회정치 기구위원 등을 임명한 것이었다.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노회 창립의 역사적인 막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한국인 장로 36인과 선교사 33인과 찬성회원 9인등 모두 78인의 회원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립시켰다. 이 회합이야말로 한국민족 역사 상에 최초의 민주적 대의 회합이었다고 하는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웟으며 그주의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종사케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면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등장하였다. 블레어(W.N.Blair,)선교사는 "새로운 한국교회의 첫 모임은 사실상 선교사를 보내는 모임이었다"라고까지 언급하였다. 그때에 선교 정신은 온 교회에 넘쳐 있었고 곧 뒤를 이어 1909년에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로,한석진 목사를 일본 도오꾜에 파송하였으며, 1910년에는 백만구령운동에 호응하여 김영제와 김진근의 두 목사를 만주 간도 지방으로 보냈다. 감리교에서는 1907년에 국내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3년 후에는 이를 "내외지 선교회"로 확장하여 손정도 목사를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하여 시베리아 선교에 종사케 하였고, 또 장로회에서는 방화중 목사를 멀리 美州로 보내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있는 이민 동포를 위하여 선교케 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교회는 일본과 중국,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미국 대륙과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거창하게 선교사업을 일으켜 세계 교회로부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 장로회총회 창설과 조선강리회의 결성
1907년 독노회가 창설된 이레 교세는 승승장구하여 불과 6년밖에 지나지 아니하여 총회의 결성을 보기에 이르렀다. 1911년에 모인 제5회 독노회는 다음 해에 총회를 조직할 것을 구상하여 그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다. 결국, 독노회 산하의 일곱 대리회가 승격되어 노회의 조직을 보았고 목사 52명,장로 125명과 선교사 44명 등 221명의 회원이 모여 총회가 조직되었다.

총회는 그 최초의 안건으로 독노회의 창립이 선교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 교회로서의 영광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으며 그리고 중국 산뚱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총회를 위하여 만국장로회 연합총회와 미국 남장로회 총회로부터 문안과 축사가 답지하였으며,그리고 창립총회는 미국 남.북장로회와 카나다장로회,호주장로회의 각 총회를 향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성립되었음을 통고하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도모한 현명한 처사로서, 총회 출발부터 세계 교회와의 연결을 우의깊게 모색하였는 고로 예의 바른 행동으로 칭찬을 받을만 하였다.

한국에 있어서의 감리교는 미국의 남.북 감리교에서 파송된 별개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가각 독자적 노선을 걸었던 것이나 마침내 이 들이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6월 남.북 감리교는 '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가결하므로', 이 결의가 곧 합동의 실마리가 되었고, 학교 이름은 남감리교와 북감리교가 합동하여 설립했다고 하여 협성신학교라 하였다.

1925년 미국 남.북 감리교의 대표들은 모두가 양 교파의 합동을 찬성하였고 수차의 애로를 극복하면서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를 결성하는데 도달하였다. 이 남.북감리교의 합동은 한국에 있어서 교파 합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미국의 남.북 감리교의 합동보다 앞서 이루어져 세계 기독교 역사상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하였다.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 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 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2. 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제1장 3.1운동과 교회의 주동역할

*1.십자가를 진 기독교인들
한국의 민족 운동이나 독립운동은 교회의 움직임과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 사상을 기본으로 한 것이므로 기독교인드른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다른 민족의 부당한 구속과 압박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 자주정신이 크게 일어났으며 그것이 다시 독립 운동에로 약진되었다.

1910년 8월 22일,일본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한국을 병참하였다. 나라 잃은 설음과 통분을 가장 뼈저리게 느끼고 깊이 체험하기는 그 누구보다 기독교인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기독교인들은 일본 관헌이 잡아다가 취조하면서 주모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하나님이 시켜서 독립운동 하였다고 대답하였다.이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향유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행동했다는 말이 되며, 이리하여 교회야말로 일본의 침략 정치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채린 일제 침략자들은 민족 활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어있는 기독교 신앙을 없이하려고 온갖 흉게를 꾸미면서 한 걸음 두 걸음 목조르듯 박해의 손길을 뻗쳐 들였다.

일제의 흉계가 대규모적으로 조작된 것으로서 소위 '105인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일본인 조선총독 대라우찌가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선천역에 정거하였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를 암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날조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모순 당착이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완전히 허위가 드러났다.

결국,이 조작된 사건은 형식적으로나 윤치호등 6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사태를 미봉하였다. 형고를 받은 인사들은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감형으로 1915년까지는 모두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어느 한 날,감옥에서 석방된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였을 때 역 앞에 운집한 8천명 군중들은 민족을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난과 수욕을 겪은 교회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열렬한 환영을 퍼부었으나 그들의 모습은 슬픔과 울분이 뒤섞여 너무나 처절하였다.

*2. 3.1운동을 통한 교회의 애국활동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을 때 미국의 윌슨(Thomas W.Wilson)대통령은 민족 자결론(Self Determination of Nations)을 내세워 이때야말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살길이 트였다고 생각하고 일제의 기반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호기회가 온 것으로 자각하였다.

근 10년이나 일제의 압박을 받아 온 우리 민족은 이에 자극되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온 겨레는 민족자결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자주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르고 또 불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은 단연히 앞장섰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임을 보아 벌써 이러한 애국심을 뚜렷히 알 수 있다. 운동의 진행은 시종일관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헌병과 경찰은 교인을 보는대로 짓밟았고 감옥에 가두고 매질했으며 교회당을 때려 부수고 불질렀다.

3.1운동이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던 4월 15일 낮 12시경,수원 부근의 제암리로 일본 헌병의 일대가 달려들었다. 그들은 총을 휘두르며 약 30명의 기독교인을 모두 교회당 안으로 모아 들였다. 교인들이 다 들어간 다음,헌병들은 문을 잠그고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견디다 못하여 창문을 부수고 나오는 교인들에게 총을 겨누어 쏘아 죽였다. 이러한 학살과 만행은 다른 여러 고장에서도 감행되었다. 강서 사천교회,정주교회,강계교회,위원교회의 학살 사건 그리고 서울의 시자가 사형 사건,북간도 노루바위교회의 학살 사건 등이 그것이며,이러한 모습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여 감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일본 경찰이 그렇게도 심하게 경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전국적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점,그리고 기독교인의 주장에 의하여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그토록 우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교인들은 땅에 엎어지고 교회당은 불타 버렷으나 살아남은 교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굳데 뭉치어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3.1운동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애국적인 참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교회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민족 교회로서의 걸음을 또 한번 힘차게 내딛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 기치를 높이 든 3.1독립운동은 한국 민족의 기개를 널리 만방에 떨쳤을 뿐 아니라 한국 민족이 독립된 민족임을 뚜렷히 세게에 알려 주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어떤 사람은 독립 운동이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에 한국 민족의 독립성을 세계에 알려주지 아니하였더라면 1945년 8월 15일의 연합군에 의한 무조건 해방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아니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3. 3.1운동에서의 기독교정신의 결정
지금까지 3.1운동의 원인 및 동기,그 경과 그리고 그 결과등에 관하여 보았다. 다음은 3.1운동의 성격이라 할까, 3.1정신에 관하여 살피므로 귀중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로, 3.1정신에 있어서는 신앙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철통같은 구속과 탄압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한국 민족이 독립할 것과 국권을 회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틀림없이 이를 신앙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신석구목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 불신한 일본 사람게 우리 민족을 오래 맡기시지 아니할 것으로 굳게 빋는다."
이러한 강한 신앙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붉은 피를 아낌없이 쏟으면서 이 강토는 내 것이라고 소리치며 행동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협동과 단결심이 강하게 있었다. 3.1운동은 종파와 계급,남녀,노소의 장벽을 뚫고 온 교회와 겨레가 일치 단합한 거룩한 운동이었다. 이는 한국 민족사에서 일찌기 찾아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실은 독립선언서가 2월 28일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살폈으나 3월 1일에 거사가 있을줄은 전혀 탐지하지 못하였다. 한국인 밀정도 이 사실만은 일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는 민족이 하나로 뭉쳐 입을 꽉 다물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의와 진실이 그 가운데 있었다. 독립은 한국 민족의 정의에 입각한 참된 소원이었고 3.1운동은 독립을 위한 진실한 행동이었다. 이 거룩한 운동에 누구도 명예나 욕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토록 강포한 일본 침략자들은 이 정의와 진실의 발로를 그 무엇으로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민족 대표 33인이 2월 28일 저녁에 손병희 댁에 최후로 모여서 거사를 의론하면서 "체포된 후의 모든 진술은 각자가 사실대로 말하기로 하자"고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3.1운동이 진실과 정의로 일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넷째로는 평화와 무저항으로 일관하였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3.1운동이 실패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요한 원인은 비폭력화 평화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천도교 측에서는 필요시에는 무력 행사도 불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측은 완강히 이를 거부하면서 끝가지 비폭력과 무저항으로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때에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제2의 동학란같은 것이 발생하여 죽도 밥도 안되었을런지 모른다. 3.1운동의 특출한 정신은 맨주먹으로 또 붉은 피로 물들이면서도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간데 있다. 한 자루의 총검도 없이 재정의 후원도 없이 원조하는 우방도 없이 세계 최강국과 항쟁한 그 저력은 끝까지 평화의 정신으로 밀고 나갔다는 데 있었다. 그런고로 세계는 이 불상한 민족을 동정하였고 이 평화 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다섯째로는 3.1정신 속에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었다. 손에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 제1진이 쓰러지면서 제2진이 뒤를 따랐다. 제2진이 쓰러지면 그 시체를 밟고 또 다시 제3진이 전진하여 끄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불퇴전의 전진은 민족 자격 아니면 민족자멸의 양단간의 결단을 앞에 놓고 전국의 골짜기마다 어디에서나 일어나 계속된 것이었다. 일본, 만주, 시베리아,상하이,하와이,미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지면서 전개되고 그리고 또 계속 되었다.

3.1운동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은 더욱 더 확고히 다듬어졌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이래 한국 민족이 신뢰할만한 봉사자로 보다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는 한국교회가 민족 교회로서 성장하는 속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였으므로 크나 큰 수확이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거족적인 3.1운동의 여파는 무단 일변도로 일관한 일본의 정책을 변경시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몰고 갔다. 따라서 일제는 외형적으로나마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서 기만과 가식의 방법으로 한국인에 대한 식민 통치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바꿔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에 국한하였던 조선 총독의 자격을 문관 출신으로 바꾸었고 새로이 부임한 사이또 총독이 곧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다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고 한국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교육의 균등화를 기한다는 뜻을 언명하였고 언론의 통제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 방법의 변형일 뿐으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무단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고로 얼마 안가서 그 술책이 속속 탄로나게 되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의 교권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서 일부 한국교회의 불평 분자들을 포섭하여 이간책을 사용하여 교회 분열을 획책하여 약체화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한 적극책으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꾀한 방법이 있었다. 일제는 정부의 어용 기구가 되어 있는 일본 조합교회를 시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하여 한국교회를 조합교회에 합병케 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고 필경은 교회를 총독 문화 정책의 선전 기관으로 만들려고 기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조합교회의 와다세 목사는 한국인 목사 20여명을 재빨리 4월 18일에 조선호텔에 소집하여 성대한 만찬으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동 회의에서는 특별한 시국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하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서 선전 팜프렛의 발간 반포와 순회 강연 등을 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1운동을 일종의 소요 사건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만행과 박해를 규탄하는 선교사들의 언동을 크게 반박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장,감 양 기성교회의 교인들을 유인하여 자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호응하려는 기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조합교ㅗ히는 날로 교세가 쇠퇴하였고 마침내 유명 무실한 교회로 전락하여 일제의 기만적인 교회 정책은 일단 실페하고 말았다.

일제가 아무리 수단 방법을 강구하려 한국 교회를 교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법적으로 교회 탄압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이 소위 1920년에 발표된 '개정포 규칙'이란 것이다. 이러한 온갖 악조거 하에서 한국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낙심하여 침체상태에 빠졌음은 유감이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결코 완전히 후퇴하거나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는 모진 시련의 골짜기를 넘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다시 일어나 교회진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약세를 회복하였다.

*2.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한국 백성의 반응이 새로와진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회에 있어서는 모두 교세 확장을 위한 대규모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하기에 인식하지 않았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 전진'(The Centul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회에서는 '전진 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고 이름 붙였다.


장로회교세(1917-1930)
1917년 - 149,526명
1918  - 160,919
1919  - 144,062
1920  - 153,915
1921  - 153,915
1922  - 179,158
1923  - 193,850
1924  - 191,887
1925  - 194,408
1926  - 519,060
1927  - 194,678

1919년 장로회 총회에서 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된 방위량(William N.Blair)목사는 10개 종류의 소 책자를 만들어 전국 도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각 교회에서는 진흥 비교표를 배부하였고 성적을 노회에 보고케 하였다. 그 내용에는 전도,성경 공부,새벽 기도회 등 9개 종목의 진흥 방법이 포함되어 있었고 우수한 교회에 대하여는 총회에서 성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흥 운동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등이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얻게되었다. 그들은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광명을 던져 주었고 한국 사회를 향해 새로운 시대 정신을 불러 일으켜 다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 교인들이여 일어나라""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절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한국 민족은 모진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찾아볼 수 있게 격려하였다.

1919년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있은 중요한 해이기도 했지만 감리교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해외 선교부가 발족한지 100주년에 해당하는 뜻있는 해였는고로 한국의 감리교는 '백년 전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편성된 전도대는 전도지와 쪽복음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각처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달하였다. 교직자들은 청지기대회를 열어 사명자의 태도를 재확인하였으며 새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반을 조직하였다.

1923년은 동양 선교 7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전도운동을 폈으며 그 다음해에는 남북 감리교가 합동하여 연합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전도,교육,문서 출판 등의 11개조의 진흥 방안을 구체화하여 추진하였다. 이때의 감리교의 유명한 부흥사로는 유한의 목사가 있었으며 그는 노방 전도와 함께 야시 전도의 특이성을 살려 전도의 성과를 크게 올렸다.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은 한국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로서 전도단들이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1923년에는 미국의 비더울프 목사를 단장으로 한 부흥단이 내한하였으며 서울을 비록하여 평양,선천,대구,광주 등 12개 도시를 두루 누비면서 순회 전도를 하여 어디에서나 대성황을 이루면서 수많은 결신자를 획득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출감한 기독교 인사들의 영향으로 조직된 대.소 전도단의 활동은 주목할만 하였다.이들이 하는 강연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권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 중에 강조하였다. 그런고로 일제 경찰들은 이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뒤를 쫓아다니면서 여러모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연사들은 열띤 어조로 언제나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한국 민족은 절망적인 시련의 골짜기를 능히 교회의 진흥을 통하여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선교사업 진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성경 및 찬송가의 역간이라 하겠다. 하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야말로 성경을 중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 어디에나 선교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케 하는 과업을 먼저 수행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유독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에 국외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것이 국내에 반입 전포되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나 만주에서 출간된 로쓰 번역(Ross Version) 성경이나 일본에서의 이수정 역 성경은 단시일에 너무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역이 많았다. 또 지방 사투리의 표현이 섞여 있었다. 그런고로 표준어로 되는 정확한 성경의 번역은 필수적 요청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아펜셀라,스크랜톤,헤론의 네 사람으로 조직된 성서위원회는,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않는 외국인들이면서 참고 서적이나 한글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고생을 다하면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20년이 지난 1906년에 신약성경의 결정본을 출간하였다.

1908년에 김정식,김명준,김창식의 한국인 세 사람이 번역 위원으로 가담되었음은 한국민족 교회사 상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사실로서 기뻐할만 하다. 1911년에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끝나면서 출간되었고 또 그해에 신구약의 합본 성경도 간행되는 거사를 만났다.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찬 해이었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 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글을 퍼쳐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은 두말 할 것 없다.

찬송가의 편간도 한국교회의 문서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교사들은 성경 번역과 거의 동시에 찬송가의 편간 사업에 착수하였다. 1896년에는 감리교 찬송가로 '찬미가'가 나왔고 1898년에는 장로회에서'찬셩시'를 출간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정확한 곡조로 유창하게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하였으나 나라 잃은 설음 속에서 그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모른다.

1.우리 황상폐하 천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높고 물고운 우리 대한국에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2.이천만 동포난 한맘 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 앞세워
임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위는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른 애국가의 몇 절을 뽑은 것이다. 초대 교한국교회는 태극기와 십자가를 항상 걸엇으며 말하자면 태극기와 십자기는 애국하는 한국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찬송의 연창은 우리 민족이 도탄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새 희망을 찾으려고 애쓴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로 이는 한국 민족교회관 수립에 있어서 크게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장로회교세(1884-1900)
1884-85 - 6 
1885-86 - 9 
1886-87 - 25 
1887-88 - 65 
1888-89 - 104   
1889-90 - 110 
1891-92 - 127     
1892-93 - 141 
1893-94 - 236 
1894-95 - 286 
1895-96 - 530 
1896-97 - 932 
1897-98 - 2079
1898-99 - 2804
1899-1900 -3690



*제4편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서론)
왜정 36년간 일제의 교회 박해는 강압과 회유 매수 등 가진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 전체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이 피를 흘려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2백여처의 교회가 페문되었고 2천여명의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한국기독교는 민족을 위해 순교한 피 제사로 튼튼하고 흔들림 없는 민족교회로서의 대발전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보장 받았다.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 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2. 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1. 주기철 목사 시무한 산정현교회의 투쟁
2. 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제3장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 전시하 기독교인들의 일대고난
2.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제1장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1930년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제일보를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부의를 황제로 세워 괴뢰 만주국을 건설하였다. 1936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어떤 정신적인 통일이 필요했던 모양으로,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신사란 일본 역대의 천황들의 영과 국가를 위한 유공자 특히 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영을 모신 곳이라 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도 여기에 머리숙여 절하라고 강요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크나 큰 범죄가 되며,더우기 한국 민족의 긍지와 애국심을 상실 당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단하여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끌어 넣어 신에게 머리 숙이게 하여 굴복케 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를 거듭하였다.

1935년 가을, 평안남도 일본인 야스다께 지사는 도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교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교장 일동은 평양신사에 참배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때에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G.s.McCune)을 비롯하여 숭의여학교와 안식교 계통의 의명학교 교장 등은 종교의 교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야스다께 지사는 정식으로 공문을 방송하기를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임으로 불응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답변을 요구하였다.

사태 추이의 중대성을 느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 23일 윤산온 교장 댁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회의는 심야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야스다께 지사는 이 사건의 보고를 총독에게 올리면서 총독부 학무국에서 처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곧 전국의 도지사와 경찰부장,경찰서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로 결정하고 불응 시에는 교장을 교체할 것과 학교 폐쇄의 두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험악한 사태 하에서 윤산은 교장은 학교를 살린다는 명분하에 학교 대표자 개인의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내용의 답서를 발송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그는 답서 제출에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만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개인의 참배라고 학교 대표자이니만큼 불가하다고 의결을 표시하였다. 이에 윤산온 교장은 단호한 결심을 갖게 되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회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숭실,숭의의 두 학교는 교장직 인가가 취소되었고 뒤이어 학교가 폐쇄되고 말았다. 윤산온 교장은 파면된지 2개월이 지나 1936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그는 미국에서도 계속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한국 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가운데는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야심에 맡기고 학교는 교육사업이니만큼 계속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없은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시종 강경한 태도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미국 남장로회 외지 선교국의 태도가 강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외지선교국의 총무로 있은 훌튼(C.Darly Fulton)박사는 신사참배는 종교 해우이라고 엄격히 규정하여 남장로회 경영의 학교는 폐교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1938년 2월까지 미국 북장로회 경영의 8개 학교와 남장로회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문을 닫어야 하는 수난을 만났다.


*2.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학교를 폐교케 한 총독 당국은 이제는 제2차 단계로서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조선 총독은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교회의 목을 졸라 질식케 하는 살인마적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때에 문제가 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차차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려는 기운이 일어나 의견의 불통일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는 교히의 큰 비극이오 유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식교 계통의 의명중학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6년 1월 교장 이희명은 신사참배 하기로 굴복함으로서 안식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을 고하였다. 천주교에서는 1918년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정을 작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세정서 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로마 교황청 포교성의 '신사참배하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라는 1936년 5월 25일의 성명으로 말미암아 신사에 참배하게 되었다. 감리교에서 있어서도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라고 하는 일본 당국의 언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므로 감리교 계통의 학교는 폐쇄를 면하여 존속할 수 있었다. 감리교에서는 1936년 6월에 신사참배 요구에 순응하기로 대략 방침을 세웠고,1938년 9월 3일에는 총독 당국에 그렇게 하겠다고 통고문을 올렸다.

천주교나 감리교회 등의 큰 교파들이 자진 형식으로 신사참배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장로교회가 지극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음은 사실이었다. 일제에게는 이것이 신사참배 요구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다른 교파에서는 국가 의식이라고 하는데 왜 당신들은 아니라고 하느냐 이었다. 이리하여 한국 개신교 여러 교파 중에서도 신도 수가 가장 많은 최대 교파요,가장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장로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방파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굴욕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회집되었다. 총독 당국은 신사참배 결의안을 총회 석상에서 통과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손을 뻗쳐 공작하였다. 총회 개회 전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이기선,채정민,김선두 등 여러 목사와 박관준 장로 같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금하였다. 각 지방 경찰서는 전국 23개 노회의 총회 총대가 결정되는대로 호별 방문을 하여 신사참배 찬동을 다짐하는 확답을 받았다.

총회 당일에는 교회당 안팎에 수백명의 경찰관이 동원되어 교회당을 완전 포위한 상태이었다. 교회당 안에 정면에는 평안남도 경찰부장과 고위 경찰관들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앉아 있었다. 총대들의 좌우에는 경찰관이 끼어 앉았고 당내의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백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지켜 서 있었다. 이는 너무나 살벌한 광경이었다. 조작된 각본대로 신사참배 안은 가결되었다.총회장 홍택기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신사참배가 가하면 '예'하시오"라고 묻고 '부'는 묻지도 않은채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로 선포하고 말았다. 봉천노회 소속인 한부선 목사는 불법이라고 외쳤으나 무술경관에 의하여 밖으로 축출 당하였다. 이러한 모양으로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장로교회 마저 일본 태양신앞에 머리 숙이고 말았다.

1905년 11월 일본의 이또오란 자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이래,국가의 주권을 하나하나 빼앗은 일제는 이제는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교회마저 유린하고 말았다. 일본 귀신에게 신앙의 지조를 빼앗긴 한국교회는 아직껏 그때의 상처로 인한 진통이 가시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삼분오열의 파상을 이를 악물로 참고 견디는 중에 있다.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1. 주기철 목사 시무한 산정현교회의 투쟁
한국교회가 교단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복하게 되자 개별적으로 반대하여 일어난 교회들이 있었다. 그중에 끝까지 신사참배를 항거한 교회로 평양의 산정현교회가 있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라고 할만한 수다한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당회원으로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장로를 비롯하여 유계준,김동원,방계성,오윤선,김찬두,박정익 등의 장로들이 기라성 같은 존재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버티고 있었다. 제직원들로는 한원준,김정익,양재연,김경진,황병철,임이걸,김정식 등 비범한 인물들이 있었으며 백인숙 전도사와 오정모여사와 같은 훌륭한 여성들이 역시 신살암배에 거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주기철목사는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산 초량교회를 첫 목회지로 하여 시무하였으며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것이다. 조만식 장로가 직접 마산으로 내려가 주목사를 모셔왔다. 때는 바야흐로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께가 기독교학교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 이듬해이어서 그는 일제와의 투쟁을 각오하고 평야성에 들어선 감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평양 교회에 나타나므로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 총본산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고 신앙 진리의 사수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크게 단합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그가 부임한 다음 해인 1937년 9월5일에 250평 새 교회당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릴 때 그는 설교하면서 이 교회는 일본우상을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절대로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당시의 시국은 교회당 안에 일본 국기를 달게 하였고 일본 귀신이 들어 있는 가미다나(神棚)를 벽에 걸라고 강요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주기철 목사는 이 강단에 어떠한 간판도 달지 못하며 못자국 하나도 낼 수 없다고 교회당의 절대 신성을 강조하였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교회 헌당식이 거행된지 얼마 후에 주목사는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때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일이 있어 이에 흥분한 평양신학교 학생 만명이 평북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린 사건이 발행하였는데 여기에 관련시켜 주기철 목사를 검거한 것이었다.

주목사는 얼마 후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해 9월에 일제는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키고야 말았다. 제27회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로 하여금 본격적인 신앙 투쟁으로 돌입케 하였다 주목사는 그해 가을에 제2차로 검속되었고 1939년 8월에는 농우회 사건과 연관시켜 경북 의성 경찰서에 9개월간 구금되었다.

석방된 주목사는 1940년 2월 첫 주일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마중나온 교인들의 환영은 열광적이었고 그는 곧장 산정현교회로 들어가 입은 옷 그대로 강대에 엎드려 기도 올렸다. 예배 시간이 되자 오랫만에 목사님을 만나고저 교인들은 운집하여 교회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워졌다. 일본 경찰들은 교회당을 두겹 세겹으로 포위하고 그 일대는 교회당 안에까지 들어박혀 있었다.

주기철목사는 기도를 마치고 강대에 섰다. 흰 두루마기에 까만 머리 모습에 꼿꼿한 몸가짐으로 똑바로 정립한 그는 강대의 탁종을 두세번 누르고 "예배 드립시다"라고 선포하였다. '내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의 찬송을 부르므로 예배를 시작하고 나서,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절-12절("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과, 로마서 8장 31절-39절("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절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37절 그러나 이는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39절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을 읽고 '다섯가지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첫째...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사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들의 손에 몇번째 체포되었다가 나와서 이 강단에 다시 섰으나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 있는 만물은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도 죽음을 두려워 예수를 부인하기를 계집 종 앞에서 세번씩이나 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후에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사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약자도 불쌍하지만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모두가 다 비참한 죽음입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인줄 압니다. 주님을 위하여라면 열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한들 그 무슨 삶이 되겠습니까.오! 주님이시여! 이 목숨을 아꼈다가 주님을 욕되게 아니하도록 성신이어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 두손과 두 발에는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나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일사각오 있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 예수여,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시여, 나도 부활을 믿사오니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 짖밟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습니다. 나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리로다.할렐루야 아멘!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읍시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꼈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그러나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외에 다른 신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고 또 죽어서라도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오! 주님을 따라서,나의 주님 뒤를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둘째...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견딜 수 있으나 오래 오래 끄는 장기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달 두달씩 1년 2년 10년이나 계속되는 고난은 도저히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로 변하지 못한다고 하면 모르거니와 한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고통도 면하고 오히려 후한 상을 준다고 하였는데,그런고로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 어떻게 오랜 고난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다만 주님께만 의지합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직면하시면서 그 받으실 고난으로 게세마네에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참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십자가,십자가만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께서 나의 십자가를 지어줍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로다'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야 70년 80년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천년 만년 영원 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 뿐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원 무궁 영화의 몸이 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의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물으시면 나는 그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그런고로 나에게는 일사각오 있을 따름입니다.

셋째... 어머니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이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어머님께서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를 맞아 몸이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어머님 생각하여 불효자식이 눈물 뿌리며 기도를 여러번 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랑하는 어머님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오!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예수님께 지금 내 어머님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뒤를 따르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모함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몸으로 일생을 내게 맡겼지마는 나는 남편된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버려두고 잡혀다니는 이 내 마음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병약한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합니다.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도 네명의 아들 어린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죽으면 그 자시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감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 것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내 사랑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뒤에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상 이리 떼 쭝에 내 양들을 두고 갑니다.맡깁니다. 이 양들을 대목자장이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산정재 이 강단을 떠나서 주님 뒤를 따라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을 이기지마는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다가 철석 같은 마음이 변절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배교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얽힌 인정이 나를 얽어매어서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백이(伯夷) 숙제 (叔齊)두 형제는 은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에서 살 수가 없어서 수양산에 숨어 서산의 고사리를 뜯어 먹었지마는 그로 인해 백세청풍이 불고 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를 위하여 선죽교에서 피를 뿌리고 죽었습니다. 이는 우리 선인들이 나라를 사랑한 충절 대의의 훌륭한 모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 되어서 그 어떻게 주님 향한 일편 단심을 변할 수 있아오리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불에 뛰어 들었습니다. 다니엘도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 서슴없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풀무불이나 사자굴이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예수를 사랑하여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도 두려움없이 십자가에 꺼꾸로 달려 죽지 아니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정절을 그 어떻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트리지 못합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 한국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났도다. 우뚝 솟은 모란봉아 통곡하여라,대동강아!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울자,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미천한 목숨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다른 아무것도 주님 향한 일편 단심을 변하게 못하리로다. 나는 죽고 또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앞에 이 몸을 드립니다. 인생은 초로와 같이 짧고 의는 영원 무궁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만도 못합니다. 예수로 같이 죽고 예수로 같이 삽니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주님,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 혹은 사형장에서 그 어디에서든지 내 목숨 끊어질 때 꼭 내 영혼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집은 나의 집,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영원한 고향집이 됩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겨서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죄로 물든 내 영혼을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 존전에 부끄럼 없이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오! 주님이시어,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 영혼, 내 영혼 주님 받아 주시옵소서, 아멘.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구구 절절에 불을 뿜는 설교를 힘차게 하면서 마지막에는 그 자신이 감격에 넘쳐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마루바닥을 발로 퉁퉁 구르면서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이 세상 험하고 내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만당의 예배자들은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찬송을 불렀다. 주목사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신앙의 불길은 산정현교회 온 교인들의 가슴속에 퍼져 더욱 불타게 만들었다.

대구에서 평양에 돌아와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는 주목사의 태도를 본 일본 경찰은 3개월 내에 목사를 사면하라고 엄명하였다. 목사를 사명하면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타협 조건도 내놓았다. 주목사는 이때부터 목사를 사면하고 평안히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싸우다가 죽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그러나 이 때의 이러한 결정은 이미 한국교회의 중심 인물이 된 그에게 있어서 한국교회사 상 중요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주기철 목사는 평안히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로 결심하였다. 그런고로 그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 5월 일본 경찰은 주목사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주목사는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경찰서에서 하지 말란다고 해서 아니할 수 없다고 이것도 거절하였다. 경찰관은 노발 대발하여 위협을 가했으나 그는 등단을 만류하는 손을 물리치고 강단에 올라섰다. 며칠 후 그는 다시 검속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산정현교회를 떠난 마지막이 되었다.

악독한 일제 당국은 주목사를 투옥하고 나서도 무엇이 부족하였던지 목사 사면서를 쓰라고 장작 패듯이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주목사는 불응하였다. 이에 궁한 저들은 평양노회장 최지화 목사를 불러 주목사를 파면하라고 요구하였다. 최목사는 하는 수 없이 옥중의 주목사를 면회하고 "주목사가 사면하면 주목사도 살게되고 산정현교회도 평안하게 되고 평양노회도 말썽이 없어지니 제발 사면해 주시오"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주목사는 "내 목사 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하시기 전에는 사면 못하겠오"라고 대답하여 거절하였다.

평양노회가 남문밖 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주기철 목사의 파면 결의가 단행되었다. 이때에 우성옥 목사가 "아니오"라고 소리쳤으나 그는 형사에게 끌려나가 검속당하였고 편하설 선교사가 불법 노회라고 몇번이고 항의하였으나 묵살되었으며 산정현교회의 총대인 방적익 장로는 "이것은 노회가 아니오"라고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였다.

1940년 4월 16일부터 한 주간은 고난주간이었는데 방계성장로는 옥중에 계신 주목사를 생각하여 남녀 제직 전원에게 일주간의 금식기도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주목사를 파면 결의한 평양노회의 전권위원 7인이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교회에 올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제직원 일동은 곧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결사 투쟁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3일 부활주일에 장운경 이인식 박응률 목사 등 전권위원이 산정현교회에 도착하여 강대에 올라서려 했다. 양재연집사 외 여러 사람은 장운경 목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들 30여명은 경찰에 의하여 연행되어 갔다. 사태가 이쯤 되자 주목사의 부인 오정모 집사가 강대 상 앞에 엎드려 소리높여 기도하더니 이어서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의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교인 일동은 모두가 다 목이 터져라고 박장을 치고 몸부림하면서 따라서 불렀다. 찬송은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와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를 연속적으로 불러대어 끄칠줄을 몰랐다. 전권위원들도 할 수 없었고 경찰들도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평양경찰서의 고등계 주임 시미즈는 광분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해산...'을 명령했으나 교인들은 더욱 더 굳게 뭉쳐 찬송을 끄치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달려온 정사복 경찰 40여명이 힘으로 교인들을 밖으로 내밀었으며, 이 때 편하설 선교사 부인은 형사에게 밀쳐져 넘어지면서 다리가 상하고 손목에 피가 흐르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장운경 목사는 출입문에 지켜서서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에 못들어 오게 막고 서 있었다. 평양경찰서 형사들은 산정현교회 출입문에 횡 십자가로 나무를 대고 못을 박아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후 교인들은 지하교회를 형성하였고 낮에는 채정민 목사 댁에 모여 예배드렸고 밤에는 이인재 전도사 방에 모여들어 예배 드렸다. 유년부 어린이들은 정낙선 집사의 집이 집회 장소가 되었으며 백인숙 여전도사는 부지런히 교인 가정을 심방하여 격려하였다. 목사를 잃고 교회당을 빼앗긴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에 빠지기 쉬웠으나 미소 띠운 백 전도사의 안정된 모습을 볼 때 마다 위로와 힘을 얻었다. 백 전도사는 교인 가정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한 구역씩 찾아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교회당을 폐쇄한 일본 경찰은 그 다음에는 주목사의 사택을 폐쇄하였다. 주목사의 어머니인 80노인이 사택에서 나가지 않는다고 사흘간이나 창고에 가두었고 오정모 부인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되어 갔다. 오 부인은 물 한모금 밥 한술을 먹지 않고 소리높여 기도만 하니 경찰서에서는 놀래어 며칠이 지나 밖으로 내 보냈다.

이러는 동안에도 산정현 교회 당회원들은 목사 주택을 따로 마련해 드렸으며 주목사의 생활비를 매달 꼭꼭 지불하였다. 악착스러운 일본 경찰은 유계준 장로를 호출하여 주목사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주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유장로는 반문하였다. "일본의 예의 도덕은 어떻게 되어 있오? 자기 선생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지 않고 굶어 죽게 버려두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 한국인의 도덕은 어려울 때 도와주게 되어 있오." 과연 산정현교회 당회는 훌륭하였다. 비록 교호당은 폐쇄 당했으나 앞 날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백 전도사에게도 생활비를 틀림없이 지불하였다.

영오의 몸이 된 주목사는 안질이 악화되어 고통이 심하였고 폐와 심장이 아주 약해졌다. 모진 고문에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상할대로 상하였다. 그래도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힘써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대하였으며 특별히 성경 암송에 힘썼다. 옥중에서 7년이나 고난을 계속하는 주목사에게 그 마음은 더욱 거룩하여졌으나 몸은 날로 쇠약해 갔다. 마침내 1944년 4월 13일에는 병감으로 옮겼다. 생명이 끊어질 날이 가까와 오고 있음을 예감한 그는 한층 주님 향한 일편단심으로 사랑의 정이 뜨거워졌고 일본 우상을 대하는 반항 기세는 아주 강렬해졌다. 주목사는 말하기를 "일본은 반드시 망하고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하면서 "4,5년 내에 일본은 틀림없이 패전한다"라고 예언하였다.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이는 주기철 목사의 최후 운명을 고하는 시간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외치는 소리에 방안이 진동하므로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얼굴은 천사와 같이 미소를 띠우고 숨을 거두고 있었다.

이와같이 하여 주기철 목사는 나이 49세에,태양신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주님계신 영원한 나라로 개선한 것이다. 그 다음날, 오정모 집사는 평양형무소에 나타나 대뜸 간수를 보고 "주목사의 시체를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십니까""예!벌써 다 압니다"라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밤에 오집사의 꿈에 낙화생(落花生)을 뿌리채 뽑아서 보니 낙화생이 주렁주렁 결실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이 낙화생 꿈으로 오정모 집사는 남편이 순교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제 당국은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주목사의 장례식을 경계하였다. 모자가 유체를 받아서 손수레에 모시고 돌아와 보니 주목사의 얼굴은 희고 빛나며 평화로왔다. 주목사의 어머님은 그 얼굴을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교인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불신자들도 사방에서 운집하여 장례식은 성대하였다. 그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평양 돌박산 기독교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 경찰서에서 오부인을 호출하여 돈이 어디서 나서 장례식을 하였는가고 힐문하였다. "나도 모릅니다. 아침에 나가 보니 누가 보낸 돈인지 마당에 있어 그 돈으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경찰은 다시 다구쳐 물었다. "배급쌀 밖에 없는 시기에 쌀은 어디서 몰래 사다가 음식을 차렸는가"그의 대답은 "아침에 나가보니 누가 보낸 쌀인지 마당에 있어서 그 쌀로 밥을 지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돈과 쌀은 유게준 장로가 갔다 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장례식은 전혀 부족없이 잘 치러졌다.

주기철 목사! 그 목사에 그 장로, 그 목사에 그 교인, 참으로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산정현 교회의 신사참배를 항거하고 그 모습은 확실히 한국교회의 영광이 되었으며 그 찬란한 순교적 신앙의 빛은 영원히 한국교인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살아질 날이 없을 것이다.


*2.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한국교회 평신도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 인물이 박관준장로이다. 그는 의사이면서 전도에 열중한 신앙인이었다.

1937년 어느 날, 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중에 생명을 바쳐 일하겠다고 서약을 올렸는데, 아침에 신문 보도를 보는대로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이로부터 신사참배 저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깨닫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조선 총독에게 신사참배를 포기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그동안 박장로는 두 차례나 투옥되었다.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 깃빨을 만들어 들고 또 경고문을 배포하기 위하여 총회에 임석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 경찰에 의하여 사전에 감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후에 신사 참배 하는 것이 옳치 않다는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니시모도 평안남도 지사를 위시하여 우가끼 총독과 아라기 문교부장관에게 발송하여 한국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함은 불가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1939년 박관준 장로는 일본 국회에서 종교단체법이 상정 통과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는 일본 국내의 모든 종교를 정부의 승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이 통과되면 기독교인 신앙 생활에 타격을 줄 것임은 명약 관하하였다. 그런고로 그는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원본 도오꾜로 향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그때 신사참배 문제로 선천 보성여학교의 교사를 사임한 여안이숙여사를 대동하였다. 도오꾜에 도착한 박장로는 일본신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 박영창을 만나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1939년 3월 22일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박관준 장로는 2층 방청석에 자리를 잡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종교법안이 상정되자."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라고 크게 외치면서 진정서가 들어 있는 큰 봉투를 단상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의사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화하였으며 의원들은 이 무서움을 모르는 한국인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박장로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치되었다.그는 계속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그는 1941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 및 황실 불경죄의 죄목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에 걸친 옥고를 격으면서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고 마침내 순교의 영관을 썼다.

교직자 중에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이 많이 있었찌만 그중에서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여수에 있는 나병환자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를 극도로 미워하여 강대에서 그 부당성을 통열히 공격하였다. 그는 각처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절규하였다.

1940년 9월 25일 손양원 목사는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었다. 고등계형사주임이 하는 그 말이 신사참배는 국민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며 노회장과 총회장도 국민의례로 다 시인하고 신학교 교수 신학박사도 모두 신사참배 하는데 왜 당신은 반대하느냐고 신랄하게 심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신사에 절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고 체험적 종교이기 때문에 박사가 못믿는 그 진리를 무식한 노인이나 부인들이 잘 믿으며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니만큼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였다.

이리하여 손목사는 1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그의 옥중 생활의 대부분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시종하엿으며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하였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그에게 어느 사이에 '옥중성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혹독한 고난과 온갖 유혹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우상숭배 거절의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광주형무소,서울형무소,청주형무소를 전전하면서 만 5년이란 긴 세월을 모진 옥고를 치루면서 지냈다.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938년 2월에서 9월 사이에 한국교회의 공적 기관의 대부분이 신사에 참배할 것을 언명하였으나 개교회나 교직자 또는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39년 초에 이르러 평북,평남,경남,만주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이 점차 조직화되어 확대되는 기운이 팽배히 일어났다.

신사 불참배 운동의 본거지는 물론 평양의 산정현교회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옥중고와 산정현교회의 강력한 불참배 태도는 확실히 전 한국교회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상징이었고 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활동한 주도 인물로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와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 그리고 평안남도의 이주원 전도사등을 말할 수 있다. 이기선 목사는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신사 불참배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채정민 목사를 만나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는 동지를 전국적으로 규합하여 신사참배를 아니하기로 태도를 취하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는 김의창 목사와 함께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김형락 박의흠 게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심일철 등의 신앙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로부터 만주와 평남,경남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신도들이 현 교회를 이탈하여 그룹예배를 드리는 일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경남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개시는 1938년 10월 24일 한상동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항거 설교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1939년 12월 평양의 이주원 전도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는 거창의 최남고 목사와 남해의 최상림목사,마산의 최덕지 전도사,함안 진주의 이현속 전도사,부산의 손명복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 등의 신사참배 결사 반대동지들을 흡수하여 이 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선교사들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평양 주재의 하밀톤(F.E. Hamilton,)과 말스버러(D.R.Malsbury,馬斗元)

선교사 등은 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만주 흥경 주재의 한부선(B.F.Hunt 韓富善)선교사는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 반포하여 만주 방면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지도하였다.

1940년 4월 3일에는 평양에서 신사 불참배운동자 연합회가 모였다. 이 회는 후일에 총회로 발전시킬 예정으로 있었다. 이렇게 신사 불참배 운동이 표면화 확대되자,경찰은 신경을 곤두세워 불참배 운동의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1940년 5월에 주기철 목사를 재검거하고 전국의 불참배 운동자를 일제히 체포하였다. 1945년 5월 18일부터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또는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형으로 처벌하였다.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로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되었고 2백여의 교회가 해체되었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실로 한국교회가 일본의 태양신 앞에 허리 굽혔음은 엄연한 사실로서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절대적 수는 아니었지만 이에 항거하여 진리를 사수한 교역자가 있고 순교자의 정화가 있어 한국교회를 향해 오늘도 빛나는 생명력을 던져주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이 순교정신의 발로야말로 금자탑적 존재로서 한국 민족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기약하면서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다.

*제3장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 전시하 기독교인들의 일대고난
아시아 전토를 장악하려는 야망을 품은 일제는 1931년에 만주에서의 전쟁을 일으킨 것에 두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1941년에는 미국을 대결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제가 느낀 것은 한국교회야말로 이러한 침략 정책 수행에 일대 암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교회의 굴복을 받기 위해 온갖 박해의 수단 방법을 다하였다. 1938년에 전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뒤에는 교회의 특별 집회가 있을 때마다 신사참배를 강행시켰다. 물론 불응시에는 가차없이 투옥하였다. 1942년 3월에는 한국교회를 하여금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조직케 하였다. 모세 5경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 또는 내세 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삭제하였으며, 찬송가도 여러 장을 삭젝하였다. 이것도 일보날 성경을 읽고 일본말 설교를 하고 찬송가도 모두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성직자는 강대에 올라설 때마다 까운이 아닌 일본식 전투복을 입도록 했으며 일본 국기에 대한 배례,궁성 요배,출정 장병을 위한 무운 장구의 기원과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등이 반드시 시행되어야 했다.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저녁예배와 삼일기도회가 폐지되었다.

교파의 해체 명령을 받기도 했다. 침례교는 재림 사상 때문에 1942년 6월과 10월 사이에 전치규,김용해목사를 비롯하여 32인의 교역자가 체포되었고 1944년 5월 10일 교회의 해산 명령을 받았다. 성결교는 그 이전인 1943년 5월에 재림 사상 강조와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이 있었다. 하여 2백여명의 교역자가 구금되었고 12월 29일에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 속에서 일제의 패망이 올 것을 굳게 믿고 지하에 숨어서 끈질기게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을 수행한 개별적인 신앙 투쟁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알아차린 일제 당국자는 1945년 8월 17일을 기하여 전국의 교회 지도자들을 무조건 대량으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죽음의 날에서 며칠을 앞당겨 8.15의 해방을 한국 민족에게 허락하시므로 한국 교회는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살아나게 되었다.

*2.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신사참배를 가결한 다음 해인 1939년 9월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회집한 장로회 제28회 총회는, 그 자리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소위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제는 총회 안에도 일제의 앞잡이들이 들어앉아 그 추태상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1941년 제30회 총회시에는 헌법과 교리를 아주 바꾸어 일제의 어용기구화 되었다.

1942년 3월에는 서울의 친일 기독교 목사들이 '조선혁신교단'이란 것을 조직하여 일제의 장단에 놀아났다. 여기에서는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성경에서 빼라고 지시하는등 찬송가의 여러 부분을 먹칠하게 하여 교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섭섭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1943년 5월 5일에 장로회에서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감리교에서는 이미 1938년 10월 10일에 일본 감리교와 합동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다.

1945년 7월 19일 장로회,감리교,구세군 그리고 소교파 다섯군데의 대표들이 서울 정동교회에서 회집하여 각 교파가 합동하여 '조선교단'을 설립하였다. 1945년 8월 1일에는 어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의 초대 통리로는 조선총독이 김관식 목사를 임명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란 명칭은 완전히 살아졌고 이제부터는 친일 분자들이 행동마저도 일제의 철저한 감시가 뒤따르게 되었다. 교회는 완전히 유명 무실화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구루터기는 타도 타도 아주 타버리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의 일제 탄압으로 인한 수난의 흑암은 바야흐로 새아침의 동틀 녘이 다가오는 조짐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되고 있었다.


*제5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서론)
물거품 같이 사라진 일본의 세력, 아침 해빛처럼 찾아온 해방의 선물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기에 해방 뒤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신앙의 위신만은 지켜야 한다고 급급한 나머지에 대립과 충돌을 조성하였고, 교회 분열의 혼란상은 극에 달하였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보다 더 높아졌다. 6.25동란의 시련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한국민족교회는 한국 민족을 위하여 책임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

제1장 8.15해방과 교회의 재건
1. 북한의 정치정세 교회비극의 잉태
2. 남한에서의 교회 수습과 안정

제2장 공산당에 의한 교회의 수난
1. 북한지역의 교회의 참변
2. 남한에서의 적도(赤徒)들의 도량(跳梁)

제3장 신앙로선 상충에 따른 장로교회 분열
1. 출성옥도들의 독선신앙 고조(高調)
2.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대두(擡頭)
3. MAE 대 에큐메니칼 논쟁

제4장 영도권 장악을 위한 감리교회 분규
1. 재건총회와 부흥총회의 대립
2. 호헌(護憲) 주장으로 인한 불협화 발음


*제1장 8.15해방과 교회의 재건

*1.북한의 정치정세 교회비극의 잉태
해방의 종소리가 울리던 날, 1945년 8월 15일은 삼천만 온 겨레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의 애국가를 목메어 부른 바로 그날이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꺾이었고 조국은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신음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압박이 변하여 영광이 되고 보니 그 누구인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을 수 있었으랴!

더우기 70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이 날은 바로 민족의 해방과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날이어서 그 기쁨은 한층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강한 의욕을 돋우어 교회 재건과 조국 건설에 서슴치 않고 총매진하였다.

교회 재건의 선두를 달린 곳이 종래 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관서지방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일제 탄압에 의하여 투옥된 교역자 중 약 50명이 순교하였고 20여명이 출옥한 곳이 평양 감옥이었고 또한 지하에 숨어 있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하여 분기한 곳도 관서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한 이른바 출옥 성도들은 출옥하자마자 집에 돌아갈 생각을 뒤로 한채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져건에 대한 열의와 집념을 가지고 2개월간 합심 기도하였다. 9월 20일 저들은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다섯가지 원칙을 발표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하여 죄를 범하였으니 통회 자복한 후에 교역에 나설 것과 권징을 자책 혹은 자율의 방법으로 2개월간 휴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주요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대한 교회의 방향은 적지않게 컸다. 흔한 노회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이를 실시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건의 열의는 11월 14일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모인 평북 여섯 노회의 연합 교역자 수양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총회시에 총회장이었떤 홍택기 목사등의 강력한 반대데 부딪쳐 볼 모양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출옥 성도들과 현역 교역자들과 사이에는 냉전의 위기가 싹트게 되었다.

재건되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안으로부터 일어난 시험도 큰 것이었으나 밖으로부터 밀어닥치는 환난도 점차 고조되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뜻하지 않게 그어진 3.8선으로 소련 군정의 감시와 공산당의 탄압이 심하여져 교회에 대한 적대는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시국하에서 교회의 단결과 일치는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필수 과제였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초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 오도연합노회를 조직하였다. 연합노회는 남한 교회와의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이인식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견하였으며 이러한 경위로 북한 교회는 먹구름이 짙게 덮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비장한 각오로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2. 남한에서의 교회 수습과 안정
남한에 있어서 교회 재건에 힘쓴 곳은 부산을 중심한 경상남도 지역이었다. 그것은 순교자 주기철,최상림 그리고 손양원,주남선,한상동 목사 등이 이 지역에서 출생 또는 목회한 영향이 적지않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에 모인 교역자들은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제47회 경남노회를 개최하여 주남선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추종하여 남한 각 지역에서의 모든 교회가 복구 재건에 노력하여, 노회 형성의 실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12일에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남한의 교회만이 모인 회합이라 해서 남부 총회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1947년 4월 대구에서 모인 남부 총회는 제33회 총회로서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것은 남북 통일의 희망이 희박해재고 또 불원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 독립 국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남한에서만이라도 총회를 재건하는 것이 교회 발전을 위해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총회는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교역자들에게는 친지 목사의 3인의 보증과 추천으로 신분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개척 전도에 주력하여 남한 지역 도처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직후 감리교에서는 일제 당시에 교권을 장악하였던 목사와 초야에 묻혀 교회를 물러났던 교직자들과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교회 재건의 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8일 남부 대회란 이름으로 교단 대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한 이규갑 변홍규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등은 감리교 중앙재건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시대에 교권을 남용한 인물들의 후퇴를 요구하면서 신도대회를 열어 맹렬히 통박하였다. 이는 재건 감리교회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남부 대회를 열어 교단 고수를 지지하는 교계 인사들은 1946년 6월 수표교회에 회집하여 부흥 감리교회를 형성하여 교회의 재건은 숙청이 아니라 신앙의 부흥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서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감리교는 감독 정치인 고로 감독에게 교회의 영도권이 대폭적으로 부여되어 있다. 그런고로 자연히 감독 직의 획득을 위한 쟁탈의 분규는 우심할 수 밖에 없다. 재건과 부흥 양파의 세력은 백중하여 모두 자신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이 이상 더 분규가 계속되면 감리교의 자멸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때, 재건파의 주장하는 합동안이 부흥파에서 받아 들여진 바 되어 1947년 1월 연합 총회가 회집되었다. 그러나 간부 선정에 있어 부흥파 인물들이 절대 다수가 되자 화해는 회의를 재개하였으나 또 다시 시행의 불철저로 깨어져 재건파는 단독 총회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분열을 통탄히 여긴 평신도들은 분연히 일어나 양파의 합동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1949년 4월 20일 통일 총회의 소집이 무르익어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함으로 양 파는 모두 납득한 바가 되어 감리교의 합동 통일은 성취되었다. 이 합동의 공은 평신도에게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교히 문제에 대한 평신도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일제 말 시대에 한국의 성결교는 해산 명령을 받아 전국 교회는 완전히 폐쇄되었고 교회당 건물은 군수 공장으로 징용되었다. 약 5만의 성결교 신도들은 해방될 때까지 장로교나 혹은 감리교로 가서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방도를 취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3년간 폐쇠되었던 교회의 문은 열었으며 1945년 11월 9일 총회를 개최하여 사멸되었던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일어섰다.

*제2장 공산당에 의한 교회의 수난

*1.북한지역의 교회의 참변
1945년 11월 16일,기독교인들은 조국 해방의 감격을 살리어 보다 나은 국가의 건설을 의도하여 윤하영 한경직목사 등이 주동하여 평안북도 용암포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공산당은 이를 파괴하기 위하여 연단을 뒤엎고 그 자리에 앉은 장로 한 사람을 타살하였으며 부근의 교회당에 방화하였다.이에 충격을 받은 신의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시위를 벌이자 소련군이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하여 기총 소사를 가하여 수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것이 소위 신의주 학생사건이다.

1947년 11월에는 평양에서 김화식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당식을 거행하려는 전 날,11월 18일에 북괴 경찰에 의하여 탐지되어 40여명이나 되는 교회 주동인물이 모두 체포되고 투옥 또는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비운을 만났다. 북괴 공산당은 온갖 구실을 내세워 교회 탄압에 광분하였으며 지목되는 주동 인물의 제거를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공산당은 1946년 11월 3일,주일을 기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 선거일로 정하고 기독교인이 여기에 찬동하는지의 여부를 주시하였다. 북한 오도연합노회는 그에 대하여 결사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에 여하한 행사에도 불참한다는 것,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것,교회당은 예배 이외의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성명하였다. 연합노회의 지시를 받은 대부분의 교회는 총선거를 거부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얼마 후에 교회의 주요 인물들을 즉 회장인 김진수목사를 비롯하여 김인준,김철훈,이유택,허천기,김길수 목사 등을 체포하였다.

1950년 6월 25일을 기하여 남침 계획을 세운 북괴 공산정권은 기독교인의 철저한 소탕을 단행하였다. 그때까지 잔존하고 있던 이성휘,최지화,이학봉,강문구,김태복,장윤성 목사 등의 지도 인물들을 총 검거하였으며 교회는 모두 폐쇄하였다.

9.28 수복과 함께 국군과 유엔군이 북항하게 되자 북괴군은 후퇴하는 도처에서 기독교인을 학살하였다. 북한 지역에서의 기독교인 수난은 세계 교회사상 유래를 볼 수 없으리만큼 극한 상황이었다.

현재 북한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는 하나의 교회 한사람의 교인도 표면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하지만 기독교인의 움직임은 아직도 지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평안북도 박천에는 원래 기독교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공산당 정치가 통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압제로 인하여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다.

박천 국민학교에 여선생 한 분이 있었다. 이 여선생은 어렸을 때 어머님을 따라 교회학교에 잘 다녀서 그 마음에는 일찍부터 신앙이 깃들고 있었다. 그녀는 찬송을 부르고 싶었었으나 마음놓고 소리내어 부를 수 없음이 안타까왔다. 이 여선생은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찬송가 곡조로 동요를 만들어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 동요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이들은 집에 돌아가 이 동요를 노래불렀다. 속마음으로는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교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은 동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에 찬송가의 곡조가 곧 연상되었다. 어른들은 은근히 마음에 기뻐하면서 너도 나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 삽시간에 이 노래는 온 동네에 퍼졌다. 이상히 여긴 공산당 정보원들은 그 원인을 조사하고 또 조사한 결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동요를 지어 가르친 여선생은 당장 체포되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엄명이 내렸다. 이마만큼 북한 공산치하에서의 기독교인의 수난은 극도에 달하고 있다.


*2.남한에서의 적도(赤徒)들의 도량(跳梁)
남한 지역에는 조국이 광복되면서 미군이 진주하였기 때문에 미 군정 기간 3년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기독교인들은 마음놓고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전국 도처에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에도 공산당은 갖은 음모와 술책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발전을 애써 방해하였다. 때로는 게릴라대를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켜 내란을 음모하는 일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이다. 1948년 10월 20일,전라남도의 이 지역에서 공산 도배들은 무력으로 일어나 특히 기독교인들을 많이 살해하였다. 이 때에 손양원 목사의 두아들,동인과 동신 형제가 총살되었음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6.25의 전란을 전후하여 남한 각 곳에서 당한 교회의 참상은 북한교회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치명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괴군에 의하여 수 많은 교역자가 사살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괴권에 의하여 수 많은 교역자가 사살되었으며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적도를 용서해 준 손양원 목사도 마침내 공산군에게 총살되어 순교하였다. 유능한 신학자 남궁혁,송창근,김영주 목사 등을 비롯한 1백여명의 목사가 북으로 납치되어 갔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수백의 교회당이 파괴되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 문화재의 집적소인 한국기독교 박물관과 기독교 사료의 보고인 언더우드 도서관이 파괴 되었음은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하여 큰 손실이었다.

1951년 1.4후퇴를 계기하여 한국교회는 수십만의 북한 피난 교인을 포함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의 걸음을 재촉하여 마지막 지점인 부산에 집결하였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인의 구호 대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기독교연합 전시 비상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한경직 목사, 총무로서 김양선 목사가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위원회에서는 미국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각각 메시지를 발송하여 한반도에서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한국 국민을 구원해야 한다고 호소하였고, 이러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한경직 류형기의 두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편 부산 초량교회에 피난 교역자들은 뭉치어 밤을 새워가면서 죄를 뉘우치고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얼마 후 미국의 트르먼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교회는 자유와 독립 수호의 생명력이 된다"라는 회답이 내도하였고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구민은 한국민과 함께 창조의 기쁨에 끝까지 참여할 것이다"라는 희망에 넘친 서신을 보내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백성을 버리시지 않고 지켜주신 것이다.

*제3장 신앙로선 상충에 따른 장로교회 분열

*1.출성옥도들의 독선신앙 고조(高調)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로 야기된 한국교회의 파문은 장로회나 감리교 할 것 없이 조국 해방과 함께 교회 기상도에 세찬 바람을 불러 일으켜 급격한 분열의 불씨가 되었음은 불행사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후유증을 아물게 할 능력이 없었고 배후에 있은 선교사들의 보조가 불일치하였음도 교회 분열의 일단의 책임이 되었음을 면할 길이 없다. 주의 몸된 교회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과감한 개혁의 수술이 수행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어물 어물 넘어간 것이 두고 두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해방 후 잠시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한 한상동 목사는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의 지난을 느껴 남하하였다.

그는 박윤선 목사와의 합의로 경상남도에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에 합의하였다. 1947년 박형룡 목사가 신학교 교장을 수락하므로 이는 확정되었다. 박형룡 목사는 신학교는 반드시 전국의 교회를 배경으로 해야만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승락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후 메첸파에 속한 선교사들이 귀국하므로 박형룡 목사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박목사는 메첸파의 신학사상이 건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처음부터 한국 주재 선교회인 미국 북장로회,남장로회,카나다 장로회,호주 장로회의 선교사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고로 이러한 전국 교회 판도에 이상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그들과의 합작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소위 출옥 성도들은 박목사의 의견에 찬동은 하면서도 메첸파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드디어 박형룡 목사와 사이에는 신앙노선의 상위로 피차 결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박형룡 목사가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자 경남노회 안에서는 심각한 분열의 위기가 감돌았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파와 이에 맞선 상대파와의 대립은 불가피한 사실이었다.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인 제36회 계속 총회는 일선에서는 동족 상살의 6.25동란의 전쟁이 한창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었고,피난 수도 부산에서 모인 눈물겨운 성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옥 성도들을 여지없이 정죄하였다. 그러자 고신 계열의 출옥 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선 신앙을 과시하면서 경남 법통노회를 조직하였다.

이와같은 분열의 여파는 양편이 다 막심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출옥 성도들이 주장하는 통회 자복, 진리 후소, 신앙 순화와 고조는 바람직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에게 아량과 관용이 너무나 부족하였다. 주의 몸된 교회가 언제나 거룩해야 함은 두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면서 죄인과 약한 자들이 모인 집단이 교회 임을 인식해야 한다.


*2.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대두(擡頭)
한국 교회사의 흐름은 신학교가 걸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선교 초창기 이래 40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보수 신학의 전통을 지켜온 장로회 평양신학교는 1938년 9월 3일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무기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경영자인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당국에 의하여 모두 강제 추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말하자면 한국 교회에서 교역자 양성은 중단 상태에 빠졌다.

그런고로 1940년 서울에서 조선 신학교가 개교되었음은 있음직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신학교는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 참배에 찬동하였기 때문에 경기도 지사로부터 설립이 인가되었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로서 선교사의 주도권에서 벗어나 세워졌기 때문에 보수주의 신학 노선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가 일제 말엽에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있는 사정 하에서는 그러한 것의 실현이라든지 또한 그러한 문제의 거론조차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고 신앙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자 이러한 문제는 활기를 띄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조선신학교는 남부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의 직영을 허락 받았고 이때부터 교수로 있은 김재준은 보수 신학을 난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에 주재하고 있은 각 선교회와 유대 체졀과 후원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카나다 장로회를 제외한 다른 선교회에서는 모두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더우기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태도는 극히 강경하여 교수진의 총사퇴를 요구하면서 정통적인 성경 해석과 신학을 가르칠 것을 요청하여 사태의 추이는 대결 상태로 인도되었다.

때마침 죤 맥카이와 에밀 부룬너의 한국 내방이 있었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를 중심한 신학자들과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교회 지도자들과 사이를 격리시켜 놓는데 주효하였다. 김재준 측이 이들의 이름을 번번히 사용한 것과 박형룡 측이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것이 모두 좋지 않았다. 이 두 신학자의 대립 경향은 한국교회 전체를 양분하는 기세에 박차를 가하였다. 거기에다가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가 자유주의라고 하여 그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한 바 있었기 때문에 긴장은 더하였다. 이러한 과정으로 전국의 교회는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여 소위 진보계와 보수계의 두갈래가 급속도로 격화되었다.

1949년 6월,51명 학생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가 서울 남산에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되었다.이 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후신임을 자처하면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교회로부터 많은 동정이 집중되었다. 믹구 남장로회나 북장로회 선교부의 후원도 뒤따르게 되었다. 한 총회 안에 입장을 달리하는 두신학교의 존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50년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 측을 다수의 힘으로 몰아치우려 하였다. 그러자심한 격론이 일어났고 그 도가 지나침으로 한국교회사 상 미증유의 경찰 동원이란 치욕적 사건마저 유발하기에 이르렀음은 일대 유감사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1951년 9월, 총회에서는 직영 신학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구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계속되었다. 1952년의 제37회 총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하였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한다고 재확인 결의하였다.

1954년 6월,새로운 신학 사상의 수립을 지향한다는 조선신학교측은 그 명칭을 '한국 기독교장로회'라고 하면서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여 출범하였다. 이는 분열의 명분을 내세운 떳떳한 행동이기는 하였으나 새로운 신학의 선언으로 인하여 두 진영의 화해의 성립은 불가능사로 아주 굳어지고 말았다.

*3. MAE 대 에큐메니칼 논쟁
한국의 최대 교파를 자랑하는 장로회는 또 세번째로 크게 갈라지는 불행을 만났다. 복음동지협회 (NAE=National Assembly of Evangelists)란 단체에 의하여 주도권 중상 모략이 의외로 주효하여 1959년 제44회 총회 시에 교회가 분열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 분열 원인에 관하여 총회신학교의 기지 확보를 위한 3천만환의 행방을 추궁한데서 박형룡 교장의 진퇴를 지지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과 사이에 충돌로부터 발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나 결정적인 요소는 보수 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한다고 하는 NAE 계통의 목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신학으요 용공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여론을 악화시키는데 크게 기인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와의 단결을 주장하다가 총회원 다수의 찬동을 얻지 못하게 되자 총회를 정회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따로[합동총회]를 열어 분리하였다.

한편,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원들은 [통합총회]를 열었으며, 그러나 형제 사이의 분열의 비극은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하겠다는 노력의 표시로 세계교회협의회의 잠정적 탈퇴마저 감행하면서 하나가 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거절 당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표면상의 양보보다 근본적인 동기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으며 신학이 아닌 노선의 차이로 분열한 교회의 양상을 여기에서 뚜렷히 볼 수가 있다.

*제4장 영도권 장악을 위한 감리교회 분규

*1.재건총회와 부흥총회의 대립
선학 방법론의 차이 또는 신앙 노선의 상위보다는 교회 정체나 교권의 쟁탈 문제로 분열한 것이 한국의 감리교회라고 하는데 흥미가 있다. 감리교에서는 6.25 동란으로 김유순감독 이하 40여명의 중진 교역자들이 공산군에 의하여 남북 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감리교에서는 이로 인하여 교회 운영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므로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모인 임시 총회에서 당시 신학교 교장인 류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류형기 목사는 감독의 자격으로 연회 회원으로 계속 6년간 지냈어야 한다는 법규에 걸려 불가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눈치빠른 그는 재빨리 사퇴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한국 감리교의 재건을 위하여 내한한 모어(Moore)감독은 "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이 비상 시기에 있으니만큼 이번 총회에 한하여 6년 계속 시무의 조항을 보류하자"라고 피력하여 총회원 일동이 총 기립하여 찬동하는 의사를 표시하므로 극적인 타개를 이루었음은 가관이었다.

그후 2년이 지나 감독의 임기가 만료되는 1953년에 소집된 총회에서 류형기 감독의 재선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 교회의 재정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한국 감리교가 류형기 감독의 존재를 계속 필요로 하고 있었을런지 모르지마는 임시 편법을 자주 사용함은 부당하는 의견이 우세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청리원 측의 태도에 견제를 가하게 되었다. 이들이 주로 부흥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해방 직후에 크게 노출된 부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의 양상을 이해하기가 쉽다. 분규의 주인은 계속하여 교계의 영도권 장악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2. 호헌(護憲) 주장으로 인한 불협화 발음
1954년 3월의 정기 총회는 마침내 부흥파와 재건파의 대립의 각축장으로 화하게 되었고 종교불 흑막의 폭로등으로 공격의 화살은 맹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원 측의 위세는 다수의 힘을 빌어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혁안의 통과와 함께 류형기 감독의 재선을 강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다수결에 밀려난 회원들은 개헌의 목적이 일부 인사들의 교권 장악에 있는 것이라고 단정하여 1955년 3월에 천안에서 전국 신도대회를 열어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여 분리를 선언하였다. 이를 소위 호헌총회라고 부른다.

류형기 감독은 1958년 10월 총회시에 자신의 부족을 말하면서 분리된 양 교회의 합동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주효하여 양측의 대표 위원들은 수차에 걸친 회합 후에 무조건 합동하기로 합의하여 1959년 연합 총회에서 하나가 되었고 김종필 감독이 이를 사회하였다. 이리하여 4년만에 분리되었던 감리교 총회는 4년이 지나면서 또 다시 합동하여 일종 순환식 현상과 같은 묘한 특이성을 노증시켰다.

한국의 감리교는 교회의 바탕을 신학적인 것 보다는 도덕적 신령적 차원에 두고 있기 때문에 행정의 기략과 높은 경건의 결의만 있으면 장로회에서처럼 심각한 분열을 지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통합의 여지가 있음이 다행이라 하겠다.


*제6편 민족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협력

(서론)
주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하나가 되어리'고 말씀하고 계신다. 온 민족이 염원하고 있는 조국의 통일과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도 한국교회의 하나는 필수적 과제이다. 한국교회 자체 안에서의 불화와 분열의 상태도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 어떻게 민족의 하나되는 작업에 성과를 올릴수가 있을 것인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뭉치게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국토의 통일과 우리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약속해 주실 것이다.

제1장 하나의 교회를 찾는 문서운동 전개
1. 성경국역 출판사업
2. 찬송가 출간과 보급

제2장 공산당에 의한 교회의 수난
1. 산업선교
2. 군종업무
3. 경목 제도
4. 의료선교
5. 학원선교

제3장 신앙로선 상충에 따른 장로교회 분열
1. 초교파 부흥집회의 성행
2. '오천만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제1장 하나의 교회를 찾는 문서운동 전개

*1.성경국역 출판사업
1906년에 출간된 신약이나 1911년에 나온 구약의 구역성경은 1937년에 개역신약이 나올 때까지 한국교회의 유일의 공인 성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현대인에게 적합한 번역이 나와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고,그리고 1947년의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발견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성경 번역의 붐의 영향도 있고 해서 1960년에는 우리 전 세계적인 성경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1967년 12월 드디어 새번역 신약성경이 출판되는 장거가 있었다.

한편, 새로운 세계사의 동향은 1962년 10월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진 교회와의 재일치를 기본 방침으로 정하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여기에 적응하여 모든 교회에서의 일치의 소망을 추세화 하기에 이르렀다. 그 행동적 실천의 하나가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와 로마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사이에 성경 공동 간행위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1968년 2월에 공동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고 9년간의 애씀 끝에 1977년 부활절을 기하여 공동번역 성경의 완역 간행을 보았다.

이는 로마 카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연합하여 최초로 우리말로 성경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자체뿐 아니라 한국 민족 전체를 위하여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발과 거부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 공동번역 성경이 오리지날 텍스트로부터 조심성 있게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적 신앙의 학자들은 교리사적 해설학적 관점에서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괜찮다는 긍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구약과 신약사이에 편삽한 제2경전이 정경으로 취급되지 않고 외경으로 되어 잇음이 싫다는 논난을 펴고 있다.

현실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성경 번역 사업의 완수는 한국 성경번역 사상 하나의 새로운 기원을 획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얼마든지 높은 평가를 가할 수 있으며 한국민족 기독교 역사 상에 있어서 영원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칭찬을 받을만 하다.


*2. 찬송가 출간과 보급
해방을 맞이하면서 하나의 찬송을 부르면서 한 마음 한뜻으로 전도하자는 좋은 생각으로 장로회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합동하여 1949년에 합동찬송가를 출간하여 약 20년간 사용하여 왔다. 그동안에 한국교회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올바르게 새 시대에 맞는 찬송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에서 1967년에는 개편찬송가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찬송가는 개편위원회의 구성원으로 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등에서만 호응을 얻었고 나머지 여러 교단에서는 따로 '새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또는 여전히 합동찬송가를 계속하여 사용하는 사정이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면서 한 입으로 하나의 찬송을 부름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인은 세가지의 찬송을 불러 혼잡을 일으키고 있으니 그 불편이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고 교회 분열의 아픔을 씻기 위한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통일된 찬송가의 출현은 바람직하기만 하였다.

이러한 교계 여론이 크게 일어나자 국내 20개 교단으로 총망라된 한국찬송가통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상당한 노심 끝에 1978년 가을에는 하나의 통일찬송가가 나온다고 하니 이는 한국기독교의 또 하나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 쾌거로서 다 같이 기뻐하고 싶으며, 이 찬송가 통일작업은 먼 훗날에 그 누구를 통해서도 소중히 기림을 받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제2장 특수분야에서의 일치한 교회활동

*1.산업선교
과거 시대에 있어서는 기독교 복음이라 하면 교회 안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있었으나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도시화한 현재 시대에 있어서는 사회구조나 특히 산업구조의 변천으로 공장이나 그 주변 사회에서 특수하게 형성된 산업 사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달하여 기독교화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 선교가 우리나라에서 본격화 한 것은 1960년도 부터라 하겠다. 즉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부에 미국 연합장로회 해외선교부 아시아지역 산업선교 담당자가 내방한 것을 계기로 출발을 보게된 것이다.

영등포에서 조지송 목사에 의하여 산업전도회가 발족함으로 그 효시가 되었다. 1962년에는 인천에서도 오명걸 목사에 의하여 시작이 되었다.

산업선교를 위한 초교파적 기구로는 로마 카톨릭교회까지 포함된 "한국 산업선교 도시협회"가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기구가 있다. 이들은 처음에 산업인을 위한 예배,성경 연구, 신앙 훈련 등의 개인적 관심에서 출발을 보았지마는 현재에 있어서는 임금 문제, 작업 조건,노동조합 운동, 산업평화와 인권 침해, 부당해고 등의 갖가지 문제에까지 관심을 확대하여 그 해결에 노력하고 있다.

1974년 한국 노동총연맹 산하에서 2만 여명으로는 근로자 조합을 조직할 당시에 산업선교 활동의 영향을 받은 조합원의 수는 약 1만 6천명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힘의 상당한 분포라고 보아 당연하다. 그때 산업선고에 종사한 실무자 수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8개 도시에 프로테스탄트 측이 32명, 카톨릭 측이 14명으로 모두 46명이 일치한 보조로 활약하고 있었다.


*2.군종업무
대한민국 국군의 군종 제도는 1950년 12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이보다 앞서 해군에서는 1948년 11월 이래 해군 참모총장으로 있은 손원일 제독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그후 1950년 11월에 해군 본부에 군목실이 설치되었고 육군은 1950년 12월에, 해병대는 1951년 5월 5일에 공군은 1952년 2월 10일에 각각 설치를 보게 되었다. 1952년 5월 29일에는 국방부 군종실이 설치되므로써 그해 12월에는 육.해.공군.해병대가 합동으로 창립식을 갖었다.

군목은 군 내에서의 종교 도덕에 관하여 지도하고 있으며 예배 인도는 물론이고 성찬 세례식의 거행과 결혼, 장례식 등도 관장하고 있다. 특히 개인적인 상담을 통하여 사상 무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이 군목의 중요한 임무이다.

처음에는 군목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하여 군 내에서의 반대하는 기세가 상당히 높았으나 6.25 동란과 같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불붙는 전투 속에서 보수나 신분의 보장도 없이 장병들의 몸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생을 결단하여 희생함으로 군의 정신무장에 크게 기여하여 드디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현재 굼고의 총 수는 11개 교파를 망라하여 3백명 정도가 되며 군인 교회의 수는 약 320개소가 된다.

1970년대에 들어와 '전국 신자화운동'이 강력하게 벌어지게 되었고 일시에 세계를 베푸는 세계교회사상 최대의 합동세례식이 전방의 한 부대에서 거행되었음은 실로 장관이었다. 매년 군인 신자의 증가는 4만 내지 5만명을 헤아리고 있다. 이러한 군인 전도의 후원을 위하여 1972년 4월 11일 교파가 한데 뭉쳐 '전군 신자화 후원회'가 발족되었음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이러한 일에 뜻을 같이하여 그해 재향군인회 군종회가 또한 창설되었다.

*3. 경목 제도
1966년 경찰 선교를 위한 경목 제도가 발족되었다. 이 경목 제도는 감리교의 조선일 목사가 1960년부터 부평 경찰전문학교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일방, 각 경찰서의 유치원들을 찾아 다니면서 전도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후 1965년 5월에 감리교에서 2명,성결교에서 1명, 합하여 3명의 목사가 서울시경에 파송되어 경찰 선교에 적극적인 참여를 감행한 것이 좋은 성과를 올리게 되어 1966년에는 서울시경과 경상북도 충청남도의 경찰국등에서 각각 정식으로 경목을 위촉하게 되어 경목 제도의 확립을 보게 된 것이다.

1966년 5월 26일에는 서울시 경목위원회가 발족됐고 1968년 1월 4일에는 서울특별시경찰국에 비로소 경목실이 설치됐다. 그리고 1969년 1월 22일 서울 중부경찰서 관내에 경찰교회가 설립되었음은 한국교회 역사의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서 기록을 보았다.

경찰 선교사업은 1974년 2월 22일이래 '전경 신자화운동'의 일대 표어를 내걸고 힘쓴 끝에 1975년에 248명,1976년에는 435명의 경찰관을 신자화하는 뚜렷한 성과를 올렸다. 오늘도 약 1천명에 가까운 겨목이 경찰관 정신교양과 개인 상담의 시행등으로 경찰관 선교에 주력하고 있으며 또 한편 유치원들을 위한 위문과 교화 전도를 위하여 보람있는 성과를 올리고 있음은 참으로 바람직한 모습이라 하겠다.

*4. 의료선교
한국기독교인에 의한 의료 선교단체는 1948년 5월에 발족한 대한 기독교여의사회가 그 시초가 된다. 그후 1963년 3월 9일에 한국 농촌 의료봉사회가 조직되었으며 10월 5일는 한국원목협회가 창립되었고 또 11월 20일에는 한미의료선교회의 조직이 되었다. 그리고 1967년 1월 25일에는 대한 기독간호원회가 1969년 1월 10일에는 한국기독교 의료선교회가 그리고 그후 이들 모든 기독교인 단체들은 1973년 3월 23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로 일치 연합하여 의료선교위원회로 발족하였다. 그후에 조직을 본 한국약사회와 기독교 한의사회 등도 모두 이 원회 안에 들어 있다.

여기에 가입한 기독교 의료인들은 모두 의료 봉사를 통하여 복음전도에 힘쓰고 있으며 특히 농촌 순회전도를 통한 성과는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 의료선교위원회에서는 1977년 1월 20일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시에 기독교 의료인 다수를 파견하여 도시와 변두리 주민들을 위해 질병 치료와 전염병 예방 등에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므로 한국교회 선교역사상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하였으며 한국 민족의 국위 선양을 위해서도 막대하게 기여하였다.

*5. 학원선교
한국의 기독교 학교는 중학교가 95개소,고등학교는 94개소가 있으며 대학교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숭전대학교,게명대학교 등 4개소가 잇으며 그빡에 10개소의 단과대학과 3개의 전문학교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이들 학교에는 모두 교목 제도가 있어 교목들은 종교교육 행정과 학생들에게 성경을 교수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학원 선교단체로는 각 교단마다 산하 조직체가 있는가 하면 기독학생총연맹과 그리고 한국대학생선교회(CCC),대학생성서읽기회(UBF),한국기독교학생연맹(IVF) 등의 외원 선교단체에 의한 기구의 세가지 유형이 있다. 이들은 직접 간접적으로 학생들의 기독교화를 위해 다양한 계획을 수립하여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6. 방송선교
옛날의 선교 방법은 노방 전도나 부흥전도회 등 대중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여 왔지만 현대에 있어서는 보다 더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라디오나 T.V를 통한 설교와 찬송의 전달로 얻어지는 효과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 목적에 부응하여 우리나라에서는 1954년 12월 15일 기독교방송국(HLKY)의 개국을 보았다. 이 기독교 방송국은 감의도(E.Otto DeCamp),목사에 의하여 설립되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음영위원회 방송 선교사업의 일부로 발족하였으며 한국에 있어서의 민간 방송의 효시가 되었다.

또 하나의 기독교 방송으로는 1956년 12월 23일 화도선(Tom Watson)선교사에 의하여 인천에서 시작된 팀 밋숀(Team Mission)의 극동방송국(HLKX)이 있다. 이는 주로 특수하게 소련을 비롯한 중공과 북괴 지역 등 공산권에 복음을 전달할 목적을 갖고 있다. 1973년 6월30일에는 미국의 F.B.B.C.(Far East Broadcasting Company)에 의하여 제주도에 아시아방송국(HLDA)이 개국되었는데 이 두 방송은 현재 운영체제를 단일화하여 강력한 대공 방송 선교활동으로 열을 뿜고 있음이 특색이라 하겠다.

*제3장 전국 복음화운동의 박차 추진

*1.초교파 부흥집회의 성행
한국 기독교인들의 전도 활동이 이 8.15해방의 기회를 새 기점으로 하여 활성화하였음은 당연하였다. 감오게 갇혔던 교회 지도자들의 출옥과 동시에 강제로 출국 당했던 선교사들도 속속 돌아오게 되어 교회 부흥의 열은 크게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으며 교회마다 새 신자를 채우는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조국은 곧 전면적으로 기독교와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38선이 그처져 국토가 분단되었고 6.25동란으로 한국교회는 민족적인 대 수난과 함께 처참하리만큼 피해를 입었다. 교회당의 파괴 손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수한 성직자들이 북괴에 의하여 납치 억류되는 슬픔을 만났다.

휴전이 성립되자 한국교회는 폐허를 딛고 잿더미 위에 일어서 움직거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에서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협력해 주었음은 고마운 일이었다. 더우기 6.25 동란의 체험은 한국 민족으로 하여금 환난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호를 절실히 깨닫게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길이 없다고 하는 신념을 굳히게 하였다.

한국교회가 6.25동란 이후 총망라하여 재건 운동을 벌이고 있을 그때에, 세계적 대 부흥사들이 속속 내한하여 복음화 전도 운동에 일대 박차를 가해 주었음은 고마운 일이었다.

피얼스(Bob Pierce)목사가 6.25동란 전년에 내한한 것을 필두로 하여 계속 5.6차에 걸쳐 내한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함으로 약 2만명의 결신자를 내었음은 상당한 성과였다. 미국이 낳은 세계 최대의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는 1952년 12월동란 중에 찾아와 부산에서 집회하였으며 1956년 2월에는 서울에서 대전도집회를 가짐으로서 수 많은 결신자를 내는데 성공하였다.

한국교회 스스로의 전국적 복음화운동이 1964년 대두하였음은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이는 김활란 박사의 주동하에 6.25동란이후의 교회분열을 저지하고 민족 복음화운동의 정초를 놓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으나 뜻밖에 호응도가 높아 1965년 한해 동안에 2,239회에 달하는 집회에 230만명이 참석하엿으며 무려 4만여명에 결신자를 내게 되었음은 놀랄만한 성과로서 경이의 적이 되었다. 이러한 전도운동이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더욱 조직화되고 대규모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은 한국교회사상 뚜렷한 양상의 변화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빌리 그레함 목사는 1973년 5월에 그의 전도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인파를 기록한 집회를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하였다. 초교파적으로 열린 이 전도 대회에 첫날에 40만명이 참석하였고 차차로 참석 수가 늘어나 마지막 날에는 120만명이 모여 들었다. 이 대회의 진행에 대하여는 빌리 그래함 목사 자신도 놀라리만큼 대규모 집회가 되엇으며 세계 교회는 한국교회의 잠재력 있는 너무나 뚜렷한 성장에 감탄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국의 부흥사들이 주축이 되어 개최한 77년 민족복음화성회가 1977년 8월 15일에 역시 여의도 광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 대회는 1907년 평양에서 한국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부흥이 있은지 70년을 기념하여 1977년에 열렸다는데 의의를 드러내었다. 특히 외국인의 도움이 전혀 없이 한국사람들 자력에 의하여 대규모 집회를 연 것은 괄목 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지막 날에 운집한 참석자는 150만명이 넘는 사상최대의 인파를 기록하였으며,특히 이 대회에서 2만 4천여명의 새로운 결신자를 내었음은 이것도 큰 성과이었다.

이러한 대 전도집회의 성행은 일종의 전시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비난의 소리가 높았으나,우선 수적으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였음은 한국교회 성장의 척도를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인식한다면 이해할 만 하다. 집회의 양상은 모두가 다 초교파적 거교회적으로 진행되었음이 바람직하였으며, 한결같이 민족을 복음화하고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대 전제를 과시하였다. 확실히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의 가슴마다의 심령 속에 영글을 씨앗으로 심겨진 모양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고 있음에 흐뭇한 기쁨마저 금할 길이 없다.


*2. '오천만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한국교회 전도 집회를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의 사업 활동의 목표가 대소를 막론하고 전 민족을 하루속히 복음으로 구원해야 한다는데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5천만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인도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음을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치고 절감하고 있지 않다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가.

다음에 각 교단에서의 장래 지향의 목표가 역시 이러한데 강력히 부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각종의 활동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1970년에 5천교회 150만 신도 획득을 목표로 하여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1차 5개년,1970-1975년 자립 성숙한 교회로
2차 5개년,1975-1980년 한국사회를 위한 교회로
3차 5개년,1980-1985년 세계를 위한 한국교회로


그러면서 매년 3백교회의 증가 운동을 벌여 총회 산하의 전도부 교육을 사회부 농촌부 등의 모든 분야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총매진하기로 결의한 바 있다. 과연 그 결과는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났다. 1976년에 170여교회가 증가됐고 개척교회는 223개소로 늘어났다. 1978년 현재 전국에 3천 3백여 교회를 갖고 있으며 교인 수는 81만명에 도달하고 있다.

또한 동 교단에서는 전도운동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분열된 교파의 합동운동을 과감히 전개하여 교회의 하나를 이룩하게 함과 동시에 한국교회의 신학과 선교론을 수립하는 문제를 예의 추진하고 있음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총회에서는 1975년에 교세 확장을 위하여 10개년 계획으로 1만교회 증설운동을 설정하였다. 그 결과로 1차년도인 1976년까지에 351개 교회와 25,708명이 늘어났고 2차년도인 1977년에는 408개 교회와 53,965명이 증가하는 좋은 성적을 들어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1974년에 10개년 계획으로 교세확장을 위해 '2천교회운동'을 벌이기로 하였으며 교회마다 복지관을 신설하여 교회와 사회를 위해 공헌하도록 계획하였다. 특히 동 교단에서는 사회선언서 및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하여 교회 부흥과 발전에 따른 사명의 방향을 제시하였음이 특출하다 하겠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에서는 현 교세의 확장을 목표하여 5천교회 1백만 신도운동을 위해 3단계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1차년도인 1976년부터 1977년까지의 교회 개척의 목표는 1,700교회의 10퍼센트인 170개 교회인데 이미 171개 교회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으며 1977년에는 210개 교회의 증가가 목표로 되어 있었다. 2차년 계획은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이고 3차년 계획은 1982년부터 1984년까지로 되어 있다.
물량적으로 증가되는 교인들을 위한 선교 훈련의 실시, 교역자의 자질 향상을 위한 특별 수련회 그리고 거 교단적인 심령대부흥회의 개최 등을 위한 계획 수립은 적절한 대책이라 하겠다. 즉 1차년도에는 교단 주최로 전국선교대회를 2차년도에는 연회별 선교대회를 갖게되며 3차년도에는 지방 및 개개체 교회들의 선교대회를 모두 갖도록 계획되어 있다.

기독교에 대한성결교회
성결교회는 1977년도의 856교회를 기준으로부터 1982년에는 1,866교회로 그리고 1987년이 되면서는 3,351개 교회로 늘릴 계획으로 있다. 교인 수는 256,415명으로부터 1987년도에는 454,254명에 이르게 할 용의주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에 실천방안으로는 전교인 배가운동의 추진과 함께 십자군 전도대의 활발한 운영으로 기대하고 있다.



*맺는 말 - 한국민족기독교의 과제와 전망

바야흐로 한국민족 기독교의 역사도 100주년을 넘어섰다. 이 마당에서 지난 날을 돌이켜보고 거기에서 분석된 에너지를 발굴함으로 장래를 향한 한국교회 건설의 비죤으로 삼는다면, 새로운 한국 기독교의 역사 창조를 위하여 이에서 더 큰 보람이 없을 것으로 알아 몇 마디를 제언하고자 한다

1. 하나되는 한국교회로의 희구
2. 토착화작업을 서둘러야
3. 애국 애족의 기독교로
4. 순교교회로서의 사명 수행
.

*1. '하나되는 한국교회'로의 희구
한국교회의 교파의 시작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라의 두 목사가 내한하여 선교를 시작함으로 비롯되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미국 북장로회 파송으로, 아펜셀라 목사는 미국 북감리교 파송으로 왔지만 그 뒤를 이어 카나다 장로회와 호주 장로회,미국 남장로회 등의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도래하였다. 그들은 먼저 온 두 선교사에게 우호적으로 협조하였으므로 아무 마찰없이 선교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오직 한국의 기독교화 만을 목표로 하여 일하였다. 하나가 되어서 하는 선교의 성과는 세계선교 역사 상 유례가 없는 놀라움을 낳았다고 찬탄케 할 정도의 교회의 성장과 대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향한 일본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선교사들 사이에 의견의 구별이 생겼는가 하면 한국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도 분열이 드러났다. 조국의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 기상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으니 일제하에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한 교회와 거기에 순응한 교회 사이에 치열한 교권 쟁탈전이 야기되면서 드디어 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고,또한 갖가지의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삼분오열하여 오늘 날 장로회 교파만도 대소 열넷을 헤아릴 정도로 지리멸렬한 양상을 노정하게되었다.

하나의 교파가 타파를 중상 모략하므로 교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은 교사하고 한국교회는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는데도 일데 장애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또 다시 분열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도의 자각과 최대의 경각을 배려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냉정한 자아 비판과 폭 넓은 재조정의 태도를 취하면서 교회의 하나되는 길을 꾸준히 모색해야 한다.

주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하나가 되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교회 존재의 기본적 요건이 된다.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러 한국교회의 하나됨에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와의 우호적 유대를 위하여도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2. 토착화작업을 서둘러야
민족기독교 100년을 지난 한국교회라면 토착화 작업에 그 어떤 성과를 거두었어야 함은 다언을 요치 않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세인의 인식은 기독교를 서양인의 종교로만 규정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하다. 1세기의 역사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념을 불식하지 못하고 있음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책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간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선교되었는 고로 한국의 기독교가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에 서양화된 모습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었음을 부인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성숙될 한국기독교로서 하루 속히 튼튼한 기반을 확립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기독교 진리 자체의 변경 내지 왜곡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종래의 수입 종교로서의 베일을 벗어버리고 한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은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약에 이러한 시도에 성과가 없다면 한국 기독교는 언제까지라도 기름과 물이 따로 도는 모습이 지속될 뿐으로 민족 복음화에도 성과가 어렵다.

기독교의 토착화한 세월이 해결하는 것이니 좀더 기다려 보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안일한 생각은 금물이다. 타 종교와의 경합이 날로 심해가고 사이비 종파의 도량이 극에 달하고 있는 현 상태 하에서 어물어물하다가는 한국 기독교는 아주 뒤로 밀려나게 될런지 모른다.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 작업은 교회적으로 행동화하는 구체적 방안을 작성하여 진첩에 박차를 기해야 한다.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전위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신학자들 사이에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고, 이에 따라 책임있는 방향 제시를 해야만 할 것이다.

*3. 애국 애족의 기독교로
한국 기독교는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위하는 종교로 그 성격을 보다 더 뚜렷히 드러내야한다. 사도 바울이 동족을 사랑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한 고백이나 3.1운동의 주동인물인 이승훈장로가 "나라없이 천당에 가면 무얼 해"라고 한 말이나 주기철 목사가 일본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바쳐 순국 순교한 사건 등을 통한 겨레 사랑한 충정의 마음을 한국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터득해야 한다.

기독교는 절대로 타계적 종교가 아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주일이 되면 집집마다 국기를 달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한결같이 표명하였다. 협성회나 독립협회의 정치적 활약이 기독교 세력하에 있었고 신민회나 국민회 등이 모두 기독교인 수중에 있었고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의 서명자 33인 중의 16인이 기독교 지도자이었고 또 그중의 11인이 기독교 성직자 즉 목사였다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한국 기독교인들은 겨레의 확실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나라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도 기독교적 이념으로 관철되도록 튼튼하게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면에 강력한 발언을 함으로서 상당한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는 하나, 실제적인 성과면에 있어서는 뚜렷한 공헌이 없이 공전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당을 통하여 사명을 다하는 길이 트여져 있다. 이제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 각 방면에서의 대거 활약과 함께 정계로의 진출을 위해 기독교정당의 구현을 권하고 싶다. 어서 속히 유럽 선진 국가에 있어서의 기독교정당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이의 실현을 서둘러주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4. 순교교회로서의 사명 수행
'순교의 피는 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라고 하는 격언이 있거니와 복음의 씨앗이 순교의 피로 거름을 삼아 뿌려지고 개척되고 성장한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해서 잘못이 아니다.

우리 나라 개신교 도입에 앞선 천주교에 있어서 신유 (1801년),기해(1839년),병인(1866년)등의 대 박해에 즈음하여 약 1만명 가까운 순교자를 냄으로서 전 한국교회를 위한 희생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고귀한 '순교자의 얼'은 비록 한국 천주교인에게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온 한국교인을 위한 흠모의 的이 되었고 존경의 획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개신교에 있어서는 토마스(Robert J.Thomas)목사가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참수 됨으로서 순교자의 효시가 되었고, 1893년에는 한국 민족 최초의 신자인 백홍준 장로가 사교를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옥사함으로 한국인 신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한국교회 요람기의 박해는 일본 침략자가 아닌 한국인에 의한 양이 배타정책으로 빚어진 결과라 하겠으나 결국 이 희생 순교의 댓가는 한국의 개국과 개교 활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1년 105인사건과 3.1운동 당시의 수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의 흘린 피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억압과 탄압에 항거한,일종 민주운동의 소산으로서의 각성과 자유의 쟁취를 위한 희생이었다. 교회는 독립운동의 발상이 되었고 방방곡곡의 운동 추진의 중심이 되었으며 한민족이 끝가지 싸워 유종의 역할은 기독교가 반일 구국의 민족 족교임을 과시했다고 하는데 성과가 있었다. 교회가 3.1운동을 통하여 체질적으로 타고난 결속력과 통일력을 십분 발휘하였음은 통쾌한 일이었고 이토록 참혹한 식민정책 속에서도 절망을 모르는 신념으로 민족 운동을 영도하였음은 한국교회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데 상당한 플러스가 되었다.

일본 정치 말기의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영광과 수치를 동시에 드러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은 순교함으로 일본의 신사를 우상 종교로 규정하여 교회의 참된 증언자로서의 민족을 대표한 희생 제물이 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교역자들은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범과를 저질러 그 결과와 영향은 너무나 비참하게 나타났다. 기독교가 박해 받는 국가에서 생활하는 신도들은 언제나 기독교 초기의 박해사를 명심해야 하고 참고해야 하고 구감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하나님께 수치를 돌리느냐의 양자 택일로서 하나님 교회의 사활은 결정적으로 좌위되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 무신론이 뚜렷한 공산치하에서 북한의 교회가 숨가쁘게나마 공산주의자의 탄압과 박해를 극복하였음은 다행한 일이었다.

"교회는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그 누구에게나 터 놓고 말할줄 알아야 한다."교회가 진정으로 교회의 구실을 다하고 사명 완수의 실을 거두기 원한다면 교회는 언제자 옳고 그릇됨을 분명히 선언할줄 알아야 하고 또 몸으로 행동할줄 알아야 한다. 반대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대하고 찬성해야 할 일이 있으면 찬성하는 태도가 민족기독교 100년의 현 시점에 처한 한국교회에 너무나 아쉽다. 전환점에 서 있다고 보아야 할 한국교회는 역사의 방향 제시를 위하여 현실의 시비를 깨우쳐 주어야 하고,또는 역사 속에서의 교회의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서는 순교의 각오와 희생까지 다짐되어야 한다. 교회가 평은 무사주의로 나갈 때 우선 지금은 평안할런지 모르나 후세 역사에 부끄러운 기록이 남는다고 한다면 이에서 더 큰 수치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반면에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사명을 완수하다가 핍박을 받는다면 이에서 더 큰 영광이 또 다시 없을 것이다.

앞을 향하여 전진하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의 사명과 책임은 서로 막중하다. 한국의 정치적 운명은 앞으로 얼마동안도 계속하여 민족주의 역사의 흐름을 따라 움직일 도리 밖에 없을 것으로 안다. 정말로 한국 기독교가 민족사 속에서의 중요한 포지션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한국교회는 민족으로부터 주어진 과제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고 순교할 각오로 임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만이 '죽어도 사는 자'의 하나님의 축복을 이 민족이 넘치게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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