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개신교 교파분열(요약)

好學 2009. 4. 12. 20:17

 

 

1. 머리말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천주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뒤를 이어, 개신교 각 종파들이 앞을 다투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개신교는 1884년 매클래이 선교사에 의해서 전해진 감리교이다. 그를 필두로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대부분 1900년대 초에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교육과 병원 사업에 주력하여 우리나라 근대화를 이끌게 해주었다.
 1909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져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많은 개신교들도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순교도 하고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개신교에서 신사참배를 요구하고, 일본의 종교인 신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는 이제부터 분열의 아픔을 겪기 시작한다. 개신교는 다양한 이유로 많은 분열을 겪는데, 특히 장로교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현재 49개의 교단이 있다.
 지금부터 개신교가 왜 분열을 겪고 어떻게 분열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용어 문제이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들을 ‘개신교’라고 칭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라고 칭하여 각 교단의 명칭들이 ‘OO기독교’로 되어있다. 이 명칭들은 각 교단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 보고, 그냥 기독교라고 쓰겠다. 그러나 그 외에는 기독교 대신 개신교라고 칭하겠다. 둘째, 개신교가 분열을 하여 여러 교단으로 생겨나는데, 각각의 교단마다의 신학은 다루지 않겠다.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신학들은 설명하되, 자세히는 하지 않겠다. 이 글에서는 개신교들이 각 종파로 분열된 원인과 그 흐름에 대해서만 알아보겠다.
 
 2. 여러 개신교 교회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생겨났는데, 그 당시 시대 분위기가 가톨릭을 반대하던 분위기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학을 들고 자신의 교회를 세웠다. 독일에서는 루터,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칼빈,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등이 각자 자신의 교리를 내세우고, 가톨릭을 비판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가톨릭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어서, 가톨릭 국가에서는 박해를 심하게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박해를 피해 여러 나라로 피신하게 되었다. 유럽 안에서 돌고 돈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가 신대륙 즉, 아메리카로 피신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독자적인 교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을 가리켜 우리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한다. 이 미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교리와 신앙을 가지고 건너와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우리나라로의 개신교 전파는 대부분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다.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면서 천주교가 한국에 전파된 지 100년 늦은 19C말에 한국에도 개신교가 생겨났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는 60여개의 종파로 나누어진 개신교회가 있으며, 여호와의 증인, 안식일교, 모르몬교 등 미국산 교회들도 한국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부터는 이 개신교회들이 어떻게 생겨났고, 언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1) 장로교

 장로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감독(bishop) · 장로(elder) 등과 같은 의미로, 장로교는 이러한 장로들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를 말한다. 창시자는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빈으로, 그는 16세기 중엽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회제도를 확립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1559년에는 프랑스에서만 2,000여 교회가 장로 제도를 채택하였고, 이어 네덜란드 · 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장로교회가 생겨났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1560년 이후 장로교회를 국교회로 지정해 이후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데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660년 청교도혁명이 끝나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 잉글랜드에서는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세계 장로교의 규범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헌법·예배지침 등을 청교도혁명 기간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장로교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노회가 조직되고, 1789년에는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예문제·신학·전도방법 등의 이견으로 여러 교단이 출현하였는데, 신학·교리 등에는 차이가 없었다. 18세기 이후 미국 장로교회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해외선교에 앞장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장로교의 세계화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해, 1882년 《누가복음》《요한복음》이 번역 출간되고, 190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1912년에 총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던 한국 장로교회는 광복 이후 신앙과 신학노선 등 여러 갈등 요인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해 2002년 현재 40개가 넘는 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세계적인 장로교 연합단체로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이 있고, 세계 장로교 총 교인수는 약 500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2) 침례교

 청교도 혁명 전에 네덜란드로 간 분리주의 청교도 중 일부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해 살았는데, 지도자 존 스미스는 옆에 살던 재세례파 메노나이트교인들의 영향을 받고 성서에는 영아 세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여, 스스로 성서대로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고 교인 전원에게 모두 그런 침례를 주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1612년경 영국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영국 가지로 퍼지고 1639년에 미국 로드아일랜드 침례교회를 설립하면서 미국 각처로, 특히 남부로 많이 퍼졌다. 현재 미국 남침례 교회는 미국 개신교파 중 가장 크다.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교파에 속했으나 몇 년 전 교회가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채택한 데 반대하여 교회를 떠났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 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3) 감리교

 영국 교회 신부의 열 다섯째 아들이었던 요한 웨슬리(1703-1791)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와 함께 ‘신성 클럽Holy Club’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고 일정한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임하심을 직접 체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회심(回心)’을 통해 사물을 보는 안목과 삶 자체가 바뀌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옥스퍼드의 동료들은 그들을 ‘절도주의자(節度主義者)’라 부르며 놀렸다.
 1735년 요한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가는 도중 배 위에서 모라비아 형제단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회심’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웨슬리는 전도 여행을 마치고 런던에 돌아가서 스스로 이런 회심을 경험하고, 자기의 경험을 주위 사람에게 전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영국 교회를 떠날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열성적인 전도로 그를 따르는 사람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자연히 하나의 교파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가 죽을 때 그를 따르는 이가 영국에서만 7만이나 되었고 더욱이 미국에서의 성장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더 엄청났다. 감리교는 미국에서 침례교단 다음으로 큰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4) 퀘이커

 이들의 공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로서 영국인 조지 폭스(1624-1681)에 의해 시작된 종교 단체이다. 그는 1646년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입각해, 교회의 형식이나 십일조 제도 등에 반대했다. 종교란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뾰족당’에 가서 직업적인 신부가 읽어 주는 설교나 기도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빛’으로 밝아지는 체험을 하는 거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은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등한 ‘친구’라 하였다. 이런 가르침과 그에 따르는 행동 때문에 퀘이커 교인은 투옥 등 박해를 받다가 윌리엄 펜(1644-1718)이 지도자가 되면서 1681년 찰스 2세로부터 미국의 땅 일부를 하사 받고 그리로 대거 이주했다. ‘펜실베니아’는 ‘펜의 숲’이란 뜻이고 주의 별명이 퀘이커주Quaker State이며 필라델피아(‘형제 우애’ 라는 뜻)라는 도시가 생긴 것도 퀘이커교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이들의 모임에서는 목사나 신부가 따로 없이 침묵 중에 앉아 ‘내면의 빛’을 기다리는 예배를 드리다가 영감이 오면 조용히 발언하여 다른 이를 위해 ‘섬기는 자’가 된다. 이들은 노예 제도 반대, 평화 운동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한국에서도 초기 함석헌 선생을 중심으로 모이다가 최근에는 박성준 교수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5) 기독교한국루터회

 루터교회는 신약·구약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절대규범으로 믿으며, 사도신경·니케아신경·아타나시우스신경·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루터 소교리문답서》를 교리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를 말한다.
 한국에 루터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32년(순조 32)으로, 독일인 선교사가 원산도에 상륙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루터교 미주리의회에서 선교사 3명을 파견한 1958년 1월의 일이다. 이듬해 2월 서울 YMCA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갖고, 같은 해 5월 처음으로 세례 및 입교식을 가졌으며, 역시 같은 해 11월 기독교방송 전파를 이용해 '루터란아워' 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에 들어갔다.
 이후 한국의 루터교회는 1969년까지 한국루터교선교부로 있다가, 1971년 한국루터교선교회로, 1973년 한국루터교회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0년부터 기독교한국루터회로 부르게 되었다. 1960년 5월 기독교 통신강좌 보급 및 컨콜디아출판사를 통한 문서선교를 시작하였고, 1961년 3월부터는 월간 《새생명》을 발간하였다. 1972년 루터교세계연맹(LWF)에 가입해 국제 교류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국제루터교협의회(ILC)에도 가입하였다. 1981년 6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루터신학대학교를 설립해 전도사업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였다.
 총회는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산하에 컨콜디아사 · 기독교통신강좌부 · 사회사업부 · 루터란아워방송(국제복음방송) · 베델성서연구원 · 루터신학대학교 · 북방선교위원회 등이 있다.
 
 (6) 기독교대한성결교회

 4중복음, 즉 중생·성결·신유·재림을 주요 명제로 삼고,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영혼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일본 도쿄에 있던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정빈 두 사람이 1907년 동양선교회 선교사 C.E.카우만 부부와 E.A.킬보른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 염곡(현재: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911년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을 설립하고, 1921년에는 '기독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이듬해부터 기관지 《활천(活泉)》을 발간하였다. 그 후 유지재단 설립, 총회 조직 등 교세확장에 힘써 오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구세군과 더불어 다른 교단보다도 심하게 탄압받아 강제 해산되었으며, 많은 교역자와 신도가 순교하거나 추방당하고 또는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후에 재건되어 1949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나 다시 6·25전쟁으로 많은 목사가 납북되는 등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1951년 미국에 본부를 둔 동양선교회 주한선교부가 활동을 개시하였고, 1957년에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많은 기념사업을 펼쳤다. 1961년 연합기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의 탈퇴문제로 일시 교단이 분열되었으나 1965년에 다시 합동을 이룩하고 교세확장에 힘썼다.
 2001년 현재 교회 3,101개, 목사수 5,010명, 교인수 62만 3,813명이다. 교육기관으로 서울신학대학교가 있으며, 기타 사회사업기관이 있다. 한편, 인도·타이 등 해외선교활동도 활발하다. 기구편성은 총회·총회장 밑에 각 위원회와 학교법인·유지재단 등 많은 부서가 있고, 교단 산하에 해외·국내·특수전도·농어촌부를 비롯한 각종 부처가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890-56번지이다

 

 (7) 제7일안식일재림교회

 1830년대 말에서 40년 초에 걸쳐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윌리엄 밀러 주도하에 일어난 예수재림의 대망을 강조하는 운동이 그 효시가 된다. 당시 200여 교회의 목사와 5만여 명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후 그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창세기》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 중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넷째 계명, 즉 제7일 안식일의 준수를 회복하고 실천하는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와 ‘믿음만으로(Sola fide)’의 두 원리 위에 입각,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십계명을 준수할 것을 역설하고, 십계명의 넷째 계명인 안식일이 제7일에 해당되므로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지키는 한편, 그리스도가 개체를 가지고 재림할 것을 고대하며 그 사건을 가장 큰 소망으로 바라고 있다. 이 교단은 현재 190개국에서 567개 방언으로 전도사업·교육사업·의료사업·출판사업·구호사업 등을 전개하며, 대총회라는 이름으로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세계를 13개 지회로 나누어 연합회·대회·교회의 순서로 조직체를 이루고 있다.
 이 교단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04년 손흥조가 일본에서 교리를 전해 듣고 이를 임기반에게 전하여, 여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일본의 구니야히데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회를 연 데서 비롯되었다. 1905년 스미스 목사가 첫 선교사로 내한하여 같은 해 순안에서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이 시작되었다. 1908년 한국 미션, 1919년 한국연합회가 조직되었고 특히 1915년에는 이근억·정문국이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한국연합회는 산하에 5개 지방 대회를 두고 600여 교회가 있으며 기관으로 삼육대학을 비롯한 27개의 각급 학교, 서울·부산의 위생병원,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교잡지 《시조(時兆)》 및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는 시조사, 삼육식품공장 등이 있다.

 

 (8) 구세군

 구세군의 해외선교는 1880년부터 시작되어 유럽 여러 나라와 캐나다, 미국 등에 전파되었고, 동양에는 1895년 처음으로 일본에 전파되었다.
 한국에 구세군이 전파된 것은 1907년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뿌드 대장의 일본 순회 집회 때 참석했던 조선 유학생의 요청에 따라, 1908년 10월에 정령 허가두 사관에 의해 한국선교가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나라를 잃은 민중들에게 제복 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어, 1908년 11월 22일에  한국 구세군의 첫 번째 교회인 서울 제일영(현 서대문 영문)이 당주동에 개영하게 되었다.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초대 한국사령관인 허가두 정령의  8년간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교회) 78개소를 개척하였다.
 1909년부터 문서선교로 구세공보가 발행되었으며, 절제호라는 특집호를 발행하여 금주, 금연의 절제운동의 시작하였다. 한편 이로써 무르익은 절제운동이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두캠페인과 문서 선교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사회사업은 1918년 한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아동구제시설인 혜천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윤락여성을 위한 여자관과 교육사업인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24년부터 천재지변에 구호를 실시하는 긴급구호를 시작하는 등 선교에 못지않게 사회사업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 1928년부터는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에 자선냄비운동이 시작되어 전국민적으로 사랑 심기운동을 펼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 하에서의 선교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탄압이 시작되었고, 1941년 일본에 의해 [구세단]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해외 사관들은 모두 귀국조치 시키는 등 일본 구세군에 의해 운영되었다.
 1943년 전쟁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구세군은 강제 폐쇄 조치되어 지하교회로 그 명맥을 이어오던 중, 해방 이후 1947년 새로운 사령관의 부임과 더불어 사업이 재개되었다.
 이때 시작한 의료사업(영동 구세병원)은 미국인 리차드 박사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회사업에 새로운 장을 여는 듯 했으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당시 구세군 사령관이던 로오드 부장은 피납되었고,  진주영문 담임 사관이던 노영수 참령이 순교당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많은 피해를 당하는 수난이 계속되었다.
 올해로 95주년을 맞는 한국구세군은 그동안 20명의 사령관이  바뀌어 오는 동안  현재 220여개의 영문(교회)과 100,000여명의 교인, 지역사회복지 시설 220여개, 전문 사회사업시설 47개 등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등 선교와 사회사업에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3. 종파 분열의 원인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전부 해방 이후에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억압과 박해로 분열 할 틈이 없었지만, 해방 이후에 일제 시대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를 정리하면서 교회 분열의 문제가 하나둘씩 대두 되었다. 물론 일제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만으로 교회가 분열하지는 않았다. 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복합적인 이유로 분리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원인 세 가지를 알아보겠다. 어떤 교회의 분열은 첫 번째로만, 또 다른 교회의 분열은 이 세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분열되었다.
 첫째로, 일제에 협력하였던 자들과의 대립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천주교와 개신교에 신사참배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모든 이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좀 더 강경한 방법으로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1938년 장로교측에서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가결안을 따르지 않은 이들은 순교하거나 투옥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 풀려나면서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교회는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의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신사참배를 하거나, 복음서이외의 성서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개신교와 신도(神道)를 결합시키려고 했다. 해방 후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과의 대립으로 여러 교회가 분열되었다.
 이는 우리 가톨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때 로마 제국의 대박해에 순교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배교하거나 박해를 피해 달아났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해가 끝난 후 배교자 문제로 가톨릭교회도 진통을 겪었다. 카르타고에서 노바투스나 펠리치스모 같은 인물들이 배교자들에 대한 즉각적인 사면을 주장했으나, 로마에서 노바시아노와 그 추종자들의 배교자들에 대한 완고한 사면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일제 시대에 일본을 협력한 자들의 문제로 개신교 교회는 분열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장로교측에서 고려파장로교가 분열하였고, 감리교회도 이 문제 때문에 분열하게 되었다.
 둘째, 교회 안에서 신학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분열이다. 한국개신교회는 신학적 배경과 유산으로 미국의 보수주의적 근본주의를 가진다. 근본주의 신학이 이식되었고, 독단주의적이며 배타주의적 정신, 절대적 권위주의적인 교회제도들이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적 사고양식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좀 더 자유스러운 신학을 하는 분위기가 한국개신교회에 유입되었다. 즉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신학 노선을 따를 것인가에 대하여 대립하면서 교회가 분열했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분열, 예수교장로회의 합동, 통합의 분열, 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진보, 보수 분열 그리고 성결교 분열을 들 수 있다.
 셋째,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교권 싸움이다. 개신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 모든 권력과 권위를 쥐고 있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정기적으로 열리는 총회를 통해서 해결한다. 이 총회의 위원들은 모두 투표로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총회 밑에 노회라는 것이 있어, 이는 우리 가톨릭의 교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매우 민주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신학적 노선 문제, 일제 협력자들 문제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어느 누가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대립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감리교회의 분열, 침례회의 분열 등이 있다.

 

4. 한국 개신교의 분열

 (1) 장로교의 분열
 
 로마가톨릭 → 칼빈파 → 장로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교       (1953)            합동예수교장로교
         →             (1951)             총회파(예장)      (1959)
                        고려파장로교                         통합예수교장로교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 1953년 고려파와 기장파, 총회파라는 세 분파로 분열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총회파는 1950년대 말에 통합과 합동 두 교단으로 다시 분열하였다.

 

 ①고려파 장로교의 분열
 1938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가결함으로써,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 요구에 공식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이 때 신사 참배에 굴복하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여럿이 투옥 당했으며 그 중 50여명이 순교하였다. 해방 후 투옥 당했던 신사 참배 거부 운동 지도자들은 석방되어 ‘출옥성도’라고 불리면서 교회 재건 운동을 벌였다. 출옥성도들이 제시한 교회 재건 원칙 가운데 중요한 것은 신사 참배를 행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권징의 문제이다. 즉 신사 참배 목사의 경우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신사 참배에 참여했던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립은 경남 노회에서 가장 심각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남의 출옥성도 한상동과 주남선은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으로 교육하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박윤선을 주 강사로 초빙하고, 고려신학교가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학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만주 봉천에 체류 중인 박형룡을 교장으로 청빙하였다. 이에 대해서 경남노회는 1946년 7월 9일 임시노회를 열어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신학교 설립 기성회는 경남노회의 후원에 힘입어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경남노회원 가운데 교회 재건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46년 12월 3일 경남노회는 이들의 영향으로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노회를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1947년 3월 10일 경남노회는 재건운동 반대자들을 퇴출시키고, 교회재건원칙을 재삼확인하여 경남노회와 고려신학교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고려신학교의 교장인 박형룡이 한상동 목사와의 신학교 운영 방침에서 견해가 맞지 않아 1948년 4월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전국적인 지지를 받는 총회신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한상동은 미국 정통장로교 선교회와 독립장로교선교회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잠정적으로 총회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5월 제34회 총회에서 전남노회가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질문에 전 조선교단의 통리였던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법적인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는 다시 고려신학교의 승인을 취소하였고, 1951년 5월 21일 장로교 총회는 고려파 대표를 총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고려파는 따로 노회를 조직하여 ‘경남법통노회’라고 하고, 1952년 9월 고신측 제1총회를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하고 독립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전국에서 고신파를 지지하는 교회들이 나타나 1956년 6개 노회로 구성도니 총회를 구성하였다.
 
 ②기독교장로회 교단의 분열
 장로교는 고려파가 분열한지 일 년 만에 또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일제하에서 탄생시킨 조선신학교는 해방 이후 유일한 신학교였기 때문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중을 얻었다. 보수주의 목사들이 많고 그 세력이 커서 어려움을 겪었다. 1947년 4월 대구 총회에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 이 학교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의 주된 내용은 김재준, 송창근 교수등 의 자유주의 신학사상들에 대한 불만이다. 이들은 신, 구약 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의 오류를 주장하고, 정통교리를 비난했다.
 총회는 보수 신학의 교수를 목적으로 1948년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같은 총회 아래 두 개의 서로 다른 신학교의 통합 문제는 양파 사이에 큰 갈등을 일으켰다.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에서 양 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하나의 총회 직영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조선신학교에서는 다수자의 횡포이며 의결 절차가 불법이었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1952년 4월 29일에 열린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제명 처분하고, 조선신학교 학생은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조선측 회원의 영향력이 강한 경기 노회가 1952년 5월에 열려 총회의 불법 결의를 부인한다는 성명을 냈으며, 같은 해 9월 대구에서 조신측을 지지하는 신도들이 호헌대회를 열었다.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제36, 37회 총회의 결의의 정당성을 재확인 하고, 김재준 목사 파면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하서 조신측은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에서 법통 38회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1954년 6월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명명하였다.
 우리나라는 서양 여러 나라들에 비하여 개신교 내부 영역에서 세속화과정이 늦었다. 세속화된 성격의 개신교과 미국 등 서양 나라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한국에서는 보수적인 교회가 훨씬 우세하였다. 이 기장파의 분열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세속화의 방향으로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로 생겨난 사건이다.

 

 ③통합파와 합동파의 분열
 고신파와 기장이 분열되어 나가고 남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1959년 또다시 분열하게 되었다. 예수교 장로회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격의 지도자와 세계복음주의친교회(NAE)에 참여하는 보숙적 성격의지도자로 나뉘어져 있었다. NAE측에서는 WCC가 자유주의적이고 용공적인 성격을 띤다는 이유를 들어 거기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했다.
 보수적 집단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ICCC의 회장 맥킨타이어 목사가 방한했을 때 고신파 지도자들과 NAE측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두 파사이의 긴장이 높아졌다. 왜냐하면 WCC측 사람들은 ICCC와 맥킨타이어 목사를 극단적으로 독선적인 보수파로서 분란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는 인물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WCC측과 NAE측의 대립을 심화시킨 또 하나의 사건은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학교부지구입을 부정 지출하여 사기당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에 WCC는 박형룡 교장의 인책 면직을 주장하였고, NAE측은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학교를 위하여 일하다 생긴 실수하고 주장했다. 1958년 제43회 총회에서 박형룡의 교장사림을 결정함으로써 마무리되었으나 두 파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 파송할 총회 대표 선출 문제로 경기 노회가 갈라짐으로써 교단분열로 나아가게 되었다. 1959년 5월에 열린 경기노회에서 뽑은 총대 선거에 부정이 있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같은 해 6월에 임시 노회를 열어 새로 총대를 선출하였다. 5월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NAE측이 많았고, 임시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는 WCC측이 많았다. 그리하여 두 개의 총대 명단이 1959년 9월 대전 총회에 동시에 제출되었는데 어느 쪽 총대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총회장 선출 등 교권의 방향이 결정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날의 회의에서 경기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나뉘어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총회는 11월 2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하자는 증경총회장들의 제안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은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그 후 결합을 위하여 노력했지만 끝내 양측의 의견을 좁히지 못하여 1960년 총회부터는 완전히 서로 다른 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WCC측은 통합예수교장로회, NAE측은 합동예수교장로회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분열하게 되었다.

 

 ④예장 합동측 분열
 신념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약간 진보적인 성격을 띠는 신복음주의 운동, 성서해석의 방법에 있어서 엄격한 전통방식을 벗어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합동진보측은 이러한 시도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었고, 합동보수측은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한 교단 운영과 신학교 운영을 둘러싼 의견 불일치와 대립이 심화되었다. 1979년 9월 대구총회에서 합동진보측이 합동보수측을 총회장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합동보수측은 대구 은일 교회당에서 자기들만의 또 다른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예수교 장로회 합동 진보와 예수교 장로회 합동 보수로 또 다시 분열 되었다. 합동보수측은 분열 이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하나의 교단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시 몇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였다.

 

 ⑤기타장로교단의 분열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
 대한신학교의 교장 김치선의 주도로 합동 측에서 1960년 9월 창립하였다. 1961년 총회를 개최하여 완전 분열하게 되었다. 미국의 성경장로회 선교회의 원조를 받으며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성서대로만 믿고 그대로 실행한다.

 대한예수교호헌장로회
 1962년 9월 제47회 합동 총회에서 분립하여 11월 19일 호헌총회를 창립하였다. 이들도 대한예수교성경장로교와 마찬가지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가입하였다.

 

(2) 성결교의 분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성공회(1534) → 감리교(1740) → 성결교(1901) →한국, 성결교(1907)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성결교회의 첫 번째 분열은 대구신학교 사건으로 발생했는데, 분리해 나간 그룹이 장로교로 흡수됨으로 말미암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61년의 두 번째 분열은 더 심각하였다. 장로교의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과 마찬가지로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와 한국복음주의자협의회(NAE)의 가입과 탈퇴문제로 교회가 분열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합동하려고 서로 노력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KNCC측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하고 ICCC에 가입한 측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한다.   
 1972년에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다시 내부의 신학 노선의 문제로 분열되어, 1973년에 예수교대한성결교회(혁신) 총회가 조직되었다.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교회는 존 웨슬리의 성결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결교단이다. 한국에 있어서 나사렛교회가 공식적으로 창립된 것은 1948년 이었다. 1954년 5월에 초대 선교사로 오은수 목사 부부가 내한, 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 양성과 함께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 하였다. 외국 선교 국장이었던 리펠트 박사가 1955년 5월 14일 내한 한 결과 11개 교회 대표들이 서울 영천교회에 모여 제1회 지방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3) 침례교의 분열

                                                    
 성공회(1534) → 침례교(1608) →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대전파)
          → 한국, 침례교 (1889)                                          기독교한국침례회(1976)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 (포항파)


 침례교는 1959년 총회의 기존 지도자들과 선교부간의 마찰로 총회가 양분되었다. 1959년 3월 17일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개최된 실행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 문제로 총회 지도부와 선교부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두 곳에서 총회가 개최되었다.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1959년 4월 28일 대전 대흥침례교회에서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이란 이름으로 대전총회가 열렸으며, 기존의 교단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1959년 5월 25일 경북 포항 침례교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포항총회가 열렸다. 대전총회측은 선교부의 지원으로 원활히 교산산업을 수행하였지만, 포항총회측은 선교부의 지원이 없어 교단 발전과 침례교 정체성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에 성령과 은사 운동으로 교회가 영적, 재정적으로 윤택해지자 두 교회의 갈등과 반복이 점차 해소되었다. 결국 1968년 4월 16일 대전과 포항의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화해하고 단결하여 한국침례회연맹이라고 칭하였다. 1976년 11월 4일 한국침례회연맹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였다.

 

 (4) 감리교의 분열
                                                      
 성공회(1534) → 감리교(1740) → 한국, 감리교(1884)                      


 신학 방법론의 차이 또는 신앙 노선의 상위보다는 교회 정체나 교권의 쟁탈 문제로 분열한 것이 한국의 감리교회라고 하는데 흥미가 있다. 감리교는 해방과 함께 9월 8일 남부 교단 대회가 소집되었다. 이 대회에서 변홍규, 이규갑,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 목사들이 불법성을 지적하며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이 조직을 한 사람들이 일제 시대 때 굴복하고 그들에게 동조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동대문교회에서 모임을 하고 감리교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여 감리교는 재건 감리교회와 부흥 감리교회로 나뉘어졌다. 이 두 파는 서로가 자기측 사람이 감독이 되길 원해서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로 나온 합동안은 일제 때 신사참배한 사람은 간부나 중요한 요직에서 제외시키고 두 회에서 동수로 선출하여 간부를 뽑는 것이다. 투표가 끝난 후 결과는 부흥 감리교회에서 절대적인 숫자가 나와서 이에 불만을 재건 감리교회는 문제를 제기하고 또 다시 갈라졌다. 그러나 양측 교회는 1949년 4월 20일 평신도 등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하나의 감리교회로 연합하고 5월에 통합총회를 열어 김유순을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감리교회는 그 후 1954년 류형기 감독이 재선되었을 때 이를 불법이라 단정하는 호헌파가 분립했으며, 1974년에 또 감독 선출 문제로 분열했다가 류형기 감독은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 하면서 양 교회의 합동을 호소하여 1978년 5월에 다시 하나가 되었다.

 

 5. 맺음말
 
 한국의 개신교의 종파 분열은 앞에서 설명한 것 이외에도 많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였다. 현재 60여개의 종파로 분리되어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수많은 분열을 하였을까? 신학적인 노선의 차이, 교권 싸움 등의 원인으로 분열하였지만, 나는 이들의 분열을 이렇게 생각한다.
 개신교의 조직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은 교황이라는 정신적, 영성적 지도자가 있으며 교황이 모든 가톨릭의 전반사항을 책임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톨릭은 중앙집권적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총회라는 것을 통해서 모든 교회의 전반사항을 관리하며, 이 총회의 의장은 투표로 선출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주의적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중앙집권적인 방법보다는 민주주의적인 방법이 더 옳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은 개신교와 같이 심한 분열은 생기지 않았다. 가톨릭은 단 하나인 교회로 존재하고 있다. 왜 그럴까라는 생각을 해보니, 중앙집권적인 방법으로 교회 내에 갈등이 생길 경우 그것을 권위를 가지고 중재해 줄 사람이 있지만, 민주주의적인 방법은 그것을 다수의 토론과 의견 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 권위를 가지고 중재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 즉, 신학적인 노선, 교권 다툼에서 합의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서로의 주장과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니, 자꾸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이 정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같은 신앙을 가지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고, 서로를 미워하는 이런 것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침인가?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말이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부분 검증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조금 고쳐 보고 싶다. 즉, 너를 알고 나를 알면 싸우지 않는다.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은 구태여 이길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 번 싸워 백 번 질 사람은 역시 구태여 싸우지 않는다. 사람들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과 싸움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때, 비로소 갈등과 대립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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