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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Paris]

好學 2012. 10. 20. 09:23

파리[Paris]

프랑스의 수도.

     

    위치 프랑스 일드프랑스주
    경위도 동경 2˚ 21' 07", 북위 48˚ 51' 24"
    면적(㎢) 105
    시간대 CET (UTC +1)
    행정구분 20구(arrondissement)
    행정관청 소재지 Place de l'Hotel de Ville 75004 PARIS, La france
    홈페이지 www.paris.fr
    인구(명) 2,167,994 (2006년 )
    • 파리의 전경

     

     

    교외를 포함한 ‘파리 데파르트망(Department)’은 면적 2,723㎢, 인구 약 993만 명(2006)이다. 오랫동안 센 데파르트망의 수도였으나 1964년부터 파리만으로 독립 데파르트망이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경제·교통·학술·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세계의 다른 나라 수도와 비교하여 몹시 좁은 편에 속하지만 둘레 36km의 환상도로(옛 성벽 자취)에 둘러싸인 부분이 1860년 이래의 파리 시가지이다. 그러나 프랑스 전체의 0.25%에 이르는 면적에 전인구의 약 6분의 1이 집중해 있는 ‘대파리’는 해마다 10만∼15만 명씩 인구가 불어나고 있다. 재정지출이나 상업거래량도 전국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수도에의 집중현상’은 프랑스의 특징이며, 파리는 세계 제4위의 인구밀집 지역이다.

    센강()이 남동쪽에서 시가지로 들어와 생루이섬과 시테섬을 감싸안으면서 북쪽으로 크게 만곡을 이룬 다음 남서쪽을 거쳐 시외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뱅센 숲, 서쪽으로는 불로뉴 삼림공원이 이어진다. 센강의 남쪽을 ‘좌안(:리브고슈)’, 북쪽의 보다 넓은 지역을 ‘우안(:리브드루아트)’이라고 부르며, 시 주변에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연상시키는 언덕이 줄지어 솟아 있다. 연평균기온은 10℃, 1월 평균기온 3℃, 7월 평균기온 19℃로 생활하기에 적당하다. 강우일수는 연평균 189일, 강수량은 600mm이다.

     

    1. 역사

    파리시청

    파리라는 명칭은 기원전부터 이곳에 살던 갈리아족()의 한 부족인 파리시이(Parisii) 부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마인들은 지금의 시테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부락을 루테티아(Lutetia)라고 불렀으며 파리라는 이름은 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갈리아 지방을 원정하였던 카이사르에게 점령된 다음부터 로마화()가 진행되어 목욕탕·투기장()·주피터신전 등이 축조되었다. 4세기에 게르만족의 침입, 5세기에는 훈족의 침입으로 대부분 어민·선원인 마을 사람들이 섬에 유폐되기도 하였으나 6세기 초 메로빙거왕조의 수도가 된 이후(10∼11세기경 랭스로 옮겼던 때를 제외하고)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그 당시에 훈족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지켰던 성녀 준비에브는 파리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뒤 9세기에 북방의 해적이었던 노르만인()들이 침입해왔을 때 그들을 무찔렀던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카페왕조를 세운 곳도 파리였다.

    로마의 지배 밑에서는 선원조합이 생기고 상업이 활발하였으나 6∼10세기의 파리는 사제()의 도시로 바뀌었다. 1000년경부터 두번째 성벽이 축조되고 시정()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중세 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은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때이다. 이때 축조된 성벽의 이름이 지금도 두 군데에 남아 있다. 십자군이 활발하였던 시대에 파리에서는 노트르담대성당의 건설이 진행되고 신학 중심의 소르본대학이 창설되었다. 교황과 국왕이 세력다툼을 벌였던 14세기 초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삼부회()를 소집, 시민들의 재력()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백년전쟁(1337∼1453)이 한창이었을 때 상인조합(길드)이 선출한 시장 에티엔 마르셀은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시정의 독립을 꾀하였다. 이 당시 파리는 3개의 도시가 결합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시테섬은 왕과 사제의 도시(궁전과 노트르담대성당), 우안은 좁은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상인의 도시(항구와 조합), 좌안은 문교도시(소르본대학)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파리 시내는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살인과 숙청이 잇따르고 시내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잔 다르크의 노력 등이 주효하여 샤를 7세는 파리로 돌아왔으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루이 11세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 어용금() 징수 때나 봉건 영주에게 파리를 점령당할 위험이 있을 때에만 나타났다.

    16세기부터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을 계기로 르네상스 문화가 유입되는 등 궁중문화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시민들도 이것을 지지하였다. 고딕 양식 대신에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생퇴스타슈·생테티인뒤몽 등의 성당도 세워졌다. 이와 함께 인구도 늘어나고 상업이 번창하는 한편 좁고 불결한 저지대에는 프랑수아 비용이 그림으로 묘사한 파리가 출현한다. 종교전쟁(1559∼1598) 때에는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으며, 루이 13세와 재상() 리슐리외는 파리를 절대왕정()의 본거지로 삼았다. 생루이섬을 정비하여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저택을 세우고 마레·생제르맹·포부르 지구는 귀족들의 주택지로 만들었다. 리슐리외가 나중에 팔레 루아얄이 된 팔레 카르디날을 세운 것도 이때이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살지 않았으나, 콜베르가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국력은 강화되고 고전문화가 번창하였으며 파리의 인구도 50만으로 팽창하였다. 이와 함께 생 뱅상 드 폴 등의 노력으로 복지사업이 발전하였다.

    18세기는 경제적 발전기로, 파리는 계몽주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카페에는 필로조프()들이 모여 새로운 사상·학문·예술의 발전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혁명중에는 건설보다 파괴가 더 많았고, 특히 교회는 폐허로 변하였다. 나폴레옹전쟁 중에도 틈틈이 지역 확장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가로망이 구축되었으며 수도설비를 개선하는 등 위생과 안전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왕정이 복고되었을 때에는 지사() 샤브롤의 노력으로 시청사를 개축하고, 새로운 다리가 가설되었으며 화랑이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7월왕정() 시대에도 120km에 이르는 새로운 하수도가 축조되고 많은 도로가 포장되었으며, 콩코르드광장에는 오벨리스크()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최후의 성벽(티에르 성벽)은 1845년에 완성되었으며, 그 자취는 지금의 외곽도로(불바르 에크스테리외르)이다.

    그러나 지금의 파리 모습은 제2제정() 시대에 오스망의 개조로 이루어졌다. 그는 파리에서 실직을 없애고 살기 좋고 청결하며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싸움과 혼란이 없는 파리를 만드는 데 뜻을 두었다. 생미셸·세바스토폴·리볼리·도메닐·라스파유 등의 큰 거리가 개통되고, 주변 건물이 헐리면서 개선문·노트르담대성당·오페라극장 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중앙시장이 정비되고 주위에 철도가 부설되면서 가스등에 불이 들어왔으며, 이에 따라 파리는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시가지가 확장되어 몽수리·뷔트쇼몽 등의 공원도 조성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파리코뮌(1870∼1871)으로 파리는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그 와중에도 오페라극장이 완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체펠린비행선의 폭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피해는 작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점령되었으나 비무장 도시이어서 큰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드골 정권이 들어선 뒤 파리의 건물들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하얀 파리’가 되었다. 지금도 도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파리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배하여 연합군에게 포위되었을 때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밀어닥쳤을 때, 파리는 붕괴되거나 잿더미가 될 위기에 직면했으나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역사상 이 도시에서 개최된 중요한 회의도 무수히 많다.

     

     

    2. 시가

    파리 전경

    행정상 20개의 구(아롱디스망)로 나누어지고 각 구는 번호로 불리는데 각각 4개의 소구(카르티에)로 구성된다. 구마다 현()의 지사가 임명한 구장()이 있다. 제1구는 시테섬의 서반부(西)와 루브르 등을 포함하며 시의 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제1구의 북쪽에 오페라코미크·국립도서관 등이 있는 제2구가 있고, 여기서 오른쪽으로 회전하면서 각 구가 소용돌이꼴로 배열되어 있다. 6구까지가 시의 중심부를 이루는데 이곳에 낡은 건물과 좁은 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시가지의 중앙에서 남북 방향으로 생미셸대로()·세바스토폴대로가 뻗어 있고, 이 대로와 직각을 이루면서 우안()에는 리볼리거리·포부르생탕투안거리가 있고, 좌안에는 생제르맹거리가 있다. 시가지는 좌안의 카르티에라탱이 문교지구, 우안은 상가·오락가(샹젤리제·그랑불바르·몽마르트르), 서쪽은 고급주택·관청가, 동쪽은 근로자 주택지이다.

    시테섬은 파리의 발상지이며 이곳에 있는 노트르담대성당 앞 광장의 중앙이 파리의 원점()이다. 여러 지방과의 거리는 이곳을 기점으로 계산된다. 센강을 건너는 32개의 다리는 돌로 만들어진 아치형이 많다. 유명 인사의 묘가 늘어선 묘지, 조상()·기하학적 식목·분수 등으로 꾸며진 공원, 동·식물원 등 녹지대가 많으며, 모든 가로에 보도가 딸리고 대로변에는 가로수가 줄을 잇는다. 한편 세계 최대의 콩코르드광장을 비롯한 많은 광장·로터리가 있기 때문에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은 대부분 1860∼1914년에 건설되어 대개 7∼8층이지만 최근에는 20층에 이르는 고층 주택도 들어서고 있다. 센강 우안을 따라 고속도로가 완성되고 남북을 종단하는 2개의 고속도로도 건설되었다. 경치 좋은 장소가 수없이 많고 도시미관은 세계 제일이다.

     

     

    3. 교통

    파리의 지하철역

    해마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맞아들이는 파리에는 남쪽에 오를리 공항, 북쪽에 르부르제 공항, 북동쪽에 샤를 드골 공항이 있다. 철도는 종합역이 없고 6개의 종착역과 4개의 교외선 종점이 있다. 각 역의 주변은 1968년부터 실시된 새 도시계획에 따라 부도심이 되었다(은 통합). 르아브르에서 오는 화물을 하역하는 하항()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일·벨기에·지중해를 잇는 운하도 발달되어 있다.

    1939년 이후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없어지고 1900년에 건설된 지하철(메트로)은 16개 주요 노선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으며, 요금이 싸고 빨라 평일에는 매일 500만 명이 이용한다. 또 고속특급 지하철망이 교외까지 뻗어 있다. 버스는 300여 개의 노선이 있으며 장거리 운행도 하고 있다. 시 외곽을 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으며, 간선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국영철도망을 고속열차가 파리∼리옹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로 운행된다. 가로에 대응하여 지하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하수도가 완전히 정비되어 있고, 전선·가스관·지급배송관()도 함께 매설되어 있다. 상수도는 음료수용과 청소·공장용수가 따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쓰레기 소각열을 이용한 도시난방도 발달하였으며 하수의 정화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4. 산업

    파리의 디올 매장

    큰 공장은 북·북서·남동쪽 교외에 많고 시내에서는 수공업적 생산만 이루어진다. 생산품은 가구·의류 등의 사치품이 많고 ‘아르티클 드 파리’로 불리는 장신용품이 예로부터 유명하다. 일류 의류상은 포부르생트노레거리·방돔광장·샹젤리제에 늘어서 있고, 뤼드라페()는 유행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백화점의 발상지이기도 한 파리에는 백화점도 많다.
    출판업·미술품상은 센강 좌안에, 저널리즘 관계 기업은 우안에 집중해 있고, 호텔·레스토랑·카페 등은 수없이 많다. 우안에 있던 파리의 명물 대중앙시장은 남쪽 교외로 옮겨졌다. 또 식물원 부근에 있었던 포도주 시장은 파리대학교 이학부의 건설부지가 되었다. 남동쪽 구석의 센강 연안에는 창고들이 줄을 이으며, 북쪽 구석에는 도살장이 있고 벼룩시장이 열린다.

     

    5. 교육 ·문화

    오페라 가르니에

    소르본으로 불리는 파리대학교의 학부와 문학부는 카르티에라탱의 중심에 있다. 그 주변에 법학부·의학부·약학부가 있고 이들 학부(파퀼테)와 나란히 콜레주 드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이공과대학(에콜 폴리테크니크) 등이 있다.

    그밖에 파스퇴르연구소·퀴리연구소·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음악학교(콩세르 바투아르) 및 유명한 5개의 고등학교(리세) 등 많은 교육·연구기관이 있다. 미술관은 루브르미술관·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로댕·부르델 등 개인별 미술관이나 사설 미술관을 포함하면 40개가 넘는다. 국립도서관·국립고문서관 등은 귀중한 자료를 모은 인류의 보고이다.

     

     

    6. 오락

    파리 오페라극장 무대와 객석

    국립극장으로 오페라극장·사르파발, 2개의 프랑스 극장인 리슐리외극장·오데옹극장, 샤요궁()의 시민극장이 있고, 그밖에도 50여 개의 크고 작은 극장이 산재해 있다. 음악회는 오페라극장이나 방송국 전속 연주회 이외에 파리 관현악단 등 4개의 관현악단이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샹송이나 오락 중심의 극장도 10여 개나 되고 상설 서커스 극장 2곳, 카바레·영화관 등은 무수히 많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은 모두 국영이다. 그밖에 롱샹에는 유명한 경마장이 있고 뱅센에는 동물원·경기장이 있다. 해마다 10월에 열리는 자동차 전시회, 살롱 도톰 등의 대규모 미술 전시회, 각종 살롱·전시회가 끊임없이 열리고 중요한 화랑도 80개 정도 있다.

     

    7. 종교

    생제르맹데프레 교회

    파리는 1622년 이래 대주교구청의 소재지이며, 노트르담대성당은 신앙의 중심지이자 고딕 양식 건축의 최고 걸작이기도 하다. 이 성당은 1163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330년에 완성되었다.

    성당구()는 94개가 있고, 주요 성당은 140개가 있는데, 그들 성당건축상의 양식은 물론 소장품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8세기 초에는 지금의 반 정도의 면적에 300개의 성당이 있었다. 사크레쾨르대성당과 같은 순례지도 4곳이 있다. 그밖에 외국 종교기관도 많아, 그리스정교·러시아정교·프로테스탄트계 교파의 여러 교회가 있으며, 유대교의 시나고그 8곳, 이슬람교 사원 1곳이 있다.

     

    8. 관광

    사크레쾨르 대성당

    파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다. 괴테의 말대로 ‘거리의 모퉁이 하나를 돌고,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바로 그곳에 역사가 전개’된다. 또한 파리는 역사유적의 무한한 보고일 뿐만 아니라 현대에 살고 현대에서 활동하는 도시이다.

    짧은 시간으로 파리를 모두 돌아보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몽마르트르 언덕 위나 에펠탑·개선문 등에 올라가 지형·건물의 배열 상황을 살펴보고 나서, 여러 코스로 나누어진 관광 버스를 이용하고 센강의 관광선을 타보면 전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자기가 목표한 대로 거닐어 보고, 베르사유·생드니·퐁텐블로 등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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