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自由/[時時 Call Call]

십자군 (Crusader)

好學 2012. 10. 19. 21:45

 

 

 

십자군 (Crusader)

 

 

 

 수세기 동안 유럽의 기독교도 사이에서는 성지

순례가 인기를 끌었다. 유럽에도 종교 중심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성지는 팔레스티나의 성지

 

였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족의 성장으로 예루살렘과 다른 중동 지역 여행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투르크족은 비이슬람교도를 무척 싫어했으므로, 그 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아랍인과 기독교도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투르크족이 소아시아의 주요 지역을 차지하면서 비잔틴 제국에 많은 압력을 가하자 교황 우르반은 기독교 군사로 구성된 십자군에게 이슬람교도들이 점령한 팔레스티나를 되찾아 줄 것을 요청했다.

 

 십자군 원정은 유럽의 기사들을 흥분시켰다. 이들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였고 교황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기사에게 신의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기사들을 들뜨게 만든 것은 이 대의보다는 고향에서 세력을 다투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해외로 나가 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회였다.

 

 

 1097년 순례자와 종군 민간인을 포함하여 30,000여명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지도자 간에 반목이 일어나고 비잔틴에 있는 후원자들이 약속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투르크족의 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프랑크족 중형 기사와 보병은 아랍 경기병이나 궁사와 싸워 본 경험이 없었고 이런 상황은 아랍 쪽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군 기사의 인내력과 용기는 일련의 접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결국 원정은 성공했다. 안티오크는 1098년에, 약한 수비대만 남아있었던 예루살렘은 1099년에 십자군에게 함락되었다. 하지만 기독교도들은 이 두 번의 전투에서 나이, 종교, 성별에 상관없이 원주민을 학살함으로써 스스로 명예를 떨어뜨렸다. 대부분의 십자군은 귀향했으나 일부는 그곳에 남아 유럽에 있는 봉건 왕국과 비슷한 왕국을 세웠다.

 

 팔레스티나의 십자군 수는 이슬람교도 수에 비해 턱없이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 통치자들은 성을 쌓고 이를 방어할 용병 부대를 고용했다. 그러나 프랑크족의 문화와 종교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지역 주민들을 동화시키지 못했다. 결국 십자군들은 건설한 성을 기반으로 아랍인들의 습격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거의 1세기 동안 양측은 전형적인 게릴라전을 거듭했다. 프랑크족 기사들은 강했지만 느렸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정면으로 대적하지 않고 주위를 말을 타고 돌면서 부대 전투력을 약화시킨 다음 매복하여 공격하곤 했다. 십자군 왕국은 보급품과 지원군을 받을 수 있는 해안에 주로 위치해 있었으나 계속된 기습 공격과 주민들의 불만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성지를 지키기 위한 기독교 전사 집단이 다시 결성되었다. 신전 수도 기사단과 호스피털 기사단은 주로 프랑크족이었으며 튜턴족 기사는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십자군 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웠지만 이 지역을 안전하게 지키기에는 부족한 수였다.

 십자군 왕국은 아랍 집단과 타협하거나 서로를 이간질하는 방법으로 한 동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아랍 지도자가 나타나 다양한 이슬람 집단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1174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 된 살라딘은 1187년 사막에서 십자군을 대파하고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또 한 세기 동안 유럽인은 여러 차례 성지와 예루살렘을 재탈환하려 했으나 몇 차례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여덟 차례의 십자군이 결성되었지만 대부분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가 보지도 못하곤 했다. 베니스의 도지가 지휘한 4차 십자군은 팔레스티나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약탈당하는 바람에 비잔틴 제국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가장 최악의 십자군은 1212년에 시작된 소년 십자군으로 수천명의 유럽 소년들로 구성된 이 군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갔으나 거기서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말았다.

 

 십자군의 영향으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새로운 적대감이 생겨났고 봉건 제도가 붕괴되었으며 기독교도들은 새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영주가 파산하여 영지를 왕에게 넘겼고 십자군으로 참전한 많은 농노들이 전사함으로서 봉건 제도가 쇠퇴하게 되었다.

 

 카튼(면화), 무슬림(이슬람), 디반(긴 의자), 바자(시장)와 같은 새로운 단어들이 유럽 언어에 유입되었다. 새로운 옷감, 음식 및 향신료가 수입되었고 이런 물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교역이 늘어났고, 특히 제노바와 베니스 같은 이탈리아의 무역 도시 국가들은 크게 성장했다. 또한 이러한 수요는 14세기 위대한 발견의 시대가 시작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향으로 가져온 전리품들은 지역 재정에 보탬이 되어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