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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시대(暗黑時代)

好學 2012. 10. 19. 21:44

 

 

암흑시대(暗黑時代)

 

로마가 몰락하면서 서유럽은 암흑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를 암흑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미개한 문명에 의해 대부분의 로마 문명이 파괴되고 잠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을 알 수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410년 마지막 브리튼족 군대가 갈리아에서 철수하면서 제국은 이 지역을 영원히 포기하였다. 그 때부터 색슨족의 습격이 늘어났고 곧 대규모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주트족, 프리지아인, 앵글족 및 독일 북부 해안의 기타 독일 부족들이 색슨족에 합류했고 그들은 힘을 모아 로마식 영국 문화를 전복시키고 현재의 영국 지역(앵글 지역)을 손에 넣었다.

 

 동로마 제국은 대부분의 발칸 반도를 잃었지만 이민족들을 매수하거나 설득하는 방법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지역을 침략한 것은 고트족이었으며 이들은 동쪽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라인강 주위의 독일 부족들보다 훨씬 더 문명화 되어 그들은 정복자가 아닌 이주자로서 온 것이었다.

 

5세기 동안 로마는 여러번 침략을 받았으며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잦은 침략으로 이탈리아는 파괴되었으며 478년 마지막 로마 황제가 살해당했다. 이탈리아와 고대 로마 제국이 독일 부족들에게 함락된 것이었다. 과거 로마 문명의 안정성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이민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침략에 따른 혼란과 폐허 속에서 로마 문명은 흔적만 남게 되었고, 대부분의 유럽은 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시대로 퇴보했다.

 

새로운 정치 상황

 

 로마 정부와 법원은 로마 문화와 함께 사라졌으며 부족 전투 집단이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강력한 지도자는 충성스러운 전사들을 거느렸으며 지도자는 이들에게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로마법은 전쟁 재판이나 충성 서약에 기반을 둔 부족법으로 대체되었다. 부족에 대한 충성을 기반으로 작은 왕국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교육을 받은 관료가 드물었고,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으며, 교역이 거의 제자리 걸음 상태였으며, 화폐도 거의 유통되지 않아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농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이 시기의 생활은 한 마디로 불결하고, 야만적이었으며,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30세 정도 밖에 되지않을 정도로 짧았다. 그 이유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고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암흑 시대 초기 유럽의 세력

    1. 프랑크족: 현재 프랑스의 대부분, 라인강 주변의 독일 일부
    2. 동고트족: 북부 이탈리아, 스위스, 발칸 반도 (롬바르드족(이탈리아)과 비잔틴족(발칸)의 공격을 받아 흡수됨)
    3. 서고트족: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에서는 프랑크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의 공격으로 멸망 )
    4. 반달족: 북아프리카 서부, 시칠리아, 남부 이탈리아 (비잔틴족의 공격으로 멸망)
    5. 게르만족(색슨족 및 롬바르드족 포함): 독일
    6. 앵글로색슨족: 영국
    7. 켈트족: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브리타니
    8. 마자르족: 헝가리
    9. 슬라브족: 폴란드와 서부 러시아
    10. 비잔틴족: 터키, 팔레스티나, 이집트, 시리아 및 그리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발칸 반도

 (암흑 시대는 500년에서 1000년까지의 시기로 본다. 이 시대의 특징을 형성한 동시에 암흑기의 종식을 야기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은 새 종교의 보급, 프랑크 왕국의 부상 그리고 바이킹족의 침략이었다.)

 

1. 암흑 시대의 종교

 

 기독교는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로마가 멸망하기 전부터 게르만 부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자 기독교에도 분열이 일어났다. 로마를 수도로 삼은 서로마의 교회는 카톨릭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의 교회는 그리스 정교가 되었다. 7세기 아라비아에서는 세계 최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가 생겨났다.

    1) 기독교

     이방인에게 전파된 기독교는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법의 이념을 지키고 라틴어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로 전파되는데 기여했다. 로마 기독교가 이교 취급을 받은 곳은 영국 뿐이었다. 클로비스가 통치하던 시기에 프랑크족은 카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그 후 기독교는 라인강 너머 게르만족에게도 전파되었다. 반면 비잔틴족은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족에게 그리스 정교를 전파했다.

     5세기 초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거기서 기독교는 스코틀랜드로 흘러 들어갔으며 북쪽에서 다시 영국으로 전파되었다.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영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했다. 그 후 영국은 10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2) 수도원

     암흑 시대의 혼란 중에 신앙이 깊은 일부 기독교도들은 속세를 떠나 거칠고 힘든 은둔 생활을 했다. 이러한 은둔자의 영향으로 속세의 성직자들은 청빈과 봉사의 서약을 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많은 성직자들이 뜻을 같이 하는 신자들과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고,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유럽 전역에 수도원 설립을 장려했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수도원은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자국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또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학문을 전파하고 부흥시켰다. 수도원은 국가 통치에 필요한 지식인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국왕을 보필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로마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수도원도 토지를 기부받아 부를 축척했다. 다양한 목적을 추구하는 여러 종류의 수도원도 설립되었습니다. 수도사만을 위한 수도원도 있었고, 선교사를 교육시켜 미개척 지역으로 파견하는 수도원도 있었으며, 교회 교리에 대하여 교황에게 조언을 해 주는 수도원도 있었다. 또한 노인 보호, 보건, 긴급 구제와 같이 지역 사회에 필요한 봉사 활동을 펼친 수도원도 있었다.

     

    3)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7세기 경 예언자 모하메드에 의해 아라비아에서 생겨났다. 이 종교는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대규모 정복 활동을 야기시켰다.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 아시아의 정치 판도가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일도 많았다. 북아프리카 전역, 이베리아 반도, 중동, 소아시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인도의 일부 지역, 파키스탄 및 러시아의 일부 지역이 이슬람의 손에 들어갔다. 이슬람 제국이 통일을 이루었던 짧은 기간 동안은 온 세계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킨다는 이들의 목적이 달성될 것 같았다. 새로운 이슬람권 내에서 이룬 안정과 경제 성장은 당시 서유럽이 누린 것보다 훨씬 더 풍족한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슬람 문화는 예술, 과학, 의학, 지리학, 상업, 철학 등의 분야에서 비잔틴 문화보다 앞서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갈등으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팔레스타인의 성지를 되찾기 위하여 서방 기독교 국가들이 벌인 일련의 시도였다.

2. 프랑크 왕국의 부상

 

 8세기 초 서고트족의 스페인은 경기병을 다수 보유한 이슬람 전사들에 의해 무너졌다. 동 시대에 헝가리 평원의 기마 유목민인 마자르족이 서유럽을 자주 침략했다. 732년 프랑크족의 보병 군대는 푸아티에 근처에서 이슬람 기병을 격파하여 이슬람족의 북진을 종식시켰다. 프랑크 왕국의 대제였던 찰스 마텔은 이슬람 기병의 영향을 받아 프랑크족 군대의 일부를 기병으로 양성했다. 기병 양성은 프랑크 왕국의 위대한 왕, 칼 대제의 통치 하에서 이 세기의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중형 기병은 중세 전쟁의 전형이 된 기사의 기원이 되었다.

 칼 대제는 30년 동안 매년 정복 전쟁을 일으켜 프랑크 왕국을 확장했다. 프랑크 왕국의 군대는 보병과 무장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나, 이 중 기병이 가장 강력한 부대이자 타 부족이 가장 경계하는 부대였다. 기병은 빠르게 이동하며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적을 무자비하게 공격할 수 있었다. 칼 대제의 정복 전략은 적 영토를 습격, 방화, 약탈, 유린하여 경제적 피해를 줌으로써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조직력을 갖춘 적과는 거의 싸우지 않았다.

 

3. 바이킹족의 침략

 

 바이킹족은 상륙한 후 내륙 깊숙이 침략하기 위해 말을 타고 가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보병으로만 싸웠다. 바이킹족의 침략은 8세기 말에 시작하여 11세기에 끝났다. 북서 프랑스의 노르만인이 된 바이킹족의 후예들은 금방 말을 이용하는 데 익숙해졌으며 중세 후반의 가장 유능한 전사 대열에 속했다.

 10세기 초, 게르만족은 오토 1세의 통치 하에 바이킹족의 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아시아계 기마 민족의 습격을 물리치기 위해 기병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0세기 말에는 앵글로색슨족의 영국, 켈트족 영토(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 중형 기병이 군대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암흑 시대 군대

 

 초기 로마 제국을 침략한 게르만족은 주로 갑옷은 거의 입지 않은 채 투구와 방패만 착용하고 도끼와 칼을 휘두르는 보병이었다. 이들은 우두머리의 지휘 아래 무리를 이루어 싸웠다. 이들은 비록 용감했지만 정식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해 단지 무리를 지어 싸울 뿐이었다. 정식 군사 훈련을 받은 로마 군대는 수세기 동안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사기 하나만으로 싸우는 군대는 정식 군사 훈련을 받은 군대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말기에 로마 군대의 질이 떨어지자 게르만족은 국경을 넘어 들어올 수 있었다.

 

 한편, 고트족은 그 이전에 흑해 북부에 정착했을 당시 말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은 다뉴브강 남쪽의 동로마 제국 및 아시아의 기마 민족과 접촉하면서 기병을 알게 되었고, 그후 동로마 군대는 기마 민족, 파르티아인, 페르시아인과 충돌해 왔기 때문에 기병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

 

 로마가 멸망한 후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는 보병 간의 충돌이었다. 그에 비해 색슨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영국의 아서왕이 벌인 전투는 예외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서왕의 승리가 기병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다. 아서왕은 50년 동안 영국으로 쳐들어오는 색슨족을 저지했는데, 이는 기병을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군대의 전투력이 높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예외는 6세기에 반달족으로부터 북아프리카를 탈환하고 이탈리아를 거의 동로마의 치하로 만든 비잔틴 군대였다. 이 시기에 활약한 비잔틴 군대의 힘은 바로 기병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민족에게 없었던 월등한 지휘력과 뛰어난 전략적 이해가 비잔틴족을 승리로 이끌었다.

 

 암흑 시대 초기의 수세기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는 군대라고 할 만한 무리가 거의 없었다. 이들은 예전과 같은 전투 집단으로서, 비잔틴이나 아시아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작은 군대일 뿐더러 구사하는 전략 전술도 거의 제한되어 있었다. 주된 군사 활동은 식량, 가축, 무기, 노예 등의 전리품을 얻기 위해 침략하는 것이었고, 호전적인 부족은 적의 식량 생산지를 초토화하여 아사시켰으며 생존자들을 노예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전투는 주로 도끼와 칼을 휘두르며 백병전을 벌이는 전투 집단간의 충돌이었다. 이들은 로마 군대처럼 정식 군사 훈련을 받은 군대가 아니라 단지 무리 지어 싸울 뿐이었다. 이들은 투구와 방패를 착용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갑옷을 입었다. 가죽 갑옷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대장과 정예 요원들만 체인 갑옷을 입었다.

 

암흑시대 후기

 

 암흑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럽 전역은 많이 붕괴되었으며, 이전에 득세했던 로마 문화는 게르만족의 문화로 대체되었다. 유럽은 500년 동안 침략과 전쟁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일반 농민들의 생활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새로운 형태이긴 하지만 사회와 문화도 점차 복구되었다. 대략 1000년 경에 유럽인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고대를 능가하는 새로운 중세 문명을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