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Barcelona]
에스파냐 카탈루냐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 바르셀로나주(州)의 주도(州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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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며, 항만규모와 상공업 활동에 있어서는 에스파냐 (스페인) 제1의 도시이다. 교외지역을 포함한 바르셀로나는 비옥한 해안평야에 펼쳐져 있으며, 천연의 양항(良港)과 더불어 에스파냐 최대의 산업도시를 이룬다.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의 도시를 기원으로 하며, BC 3세기에 이 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시노(Barcino), 즉 바르카가(家)의 도시라고 명명하였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아직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가(Gothic街: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이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수공업·금융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으며, 14세기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무렵에 지어진 고딕식 대성당(13세기 말)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들이 구시가 중앙에 많이 남아 있으며, 당시의 바르셀로나의 해양법(海洋法)인 콘술라도 데 마르는 오랫동안 그 권위를 유지하였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틸랴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으나, 고유의 카탈루냐어(語)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15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냐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7∼19세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에스파냐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에스파냐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상사(商社)·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은 19세기까지 건물이 들어찼으며,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의 직교상(直交狀)의 시가는 1860년의 도시계획으로 건설된 신시가이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방적업)인데,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마드리드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강(江)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水力)으로 자동차·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틸랴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시가는 료브레가트강(江)과, 베소스강(江)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의 티비다보, 남부의 몬트후익등의 구릉지는 시민들의 행락지이다.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 종합순위 제7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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