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고종 19)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지를 강화로 옮긴 사건. 당시 최고집권자 최우(崔瑀)에 의해 단행되었다. 이로써 강화는 1270년(원종 11)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피난임시수도가 되었다.
그 뒤 몽고는 점령한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72인을 두어 고려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과중한 공물과 함께 왕공(王公)·대관(大官)의 어린 자식들까지도 요구하는 등 고려를 괴롭혔다. 이에 고려에서는 몽고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그들이 수전(水戰)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강화천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232년 2월부터이나, 당시 재추(宰樞)가 전목사(典牧司)에 모여 천도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5월, 4품 이상의 문무관이 회합해 몽고에 대한 방어책을 다시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도 또한 정무(鄭畝)·대집성(大集成) 등만이 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대부분의 관료들은 개성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최우가 천도를 결정한 다음 날 군대를 강화에 보내 궁궐을 짓게 하였다. 강화천도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과 관아 등의 시설은 천도 후 백성들의 고된 공역을 통해 갖추어 졌다.
즉, 천도 2년 뒤인 1234년(고종 21) 여러 지방에서 징발된 민정(民丁)들의 노력으로 궁궐과 여러 관청이 세워졌다. 1251년(고종 38)에는 국자감이, 1255년(고종 42)에는 태묘(太廟)가 세워져, 그 규모에 있어서는 개경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점차 수도다운 시설이 갖춰지게 되었다.
한편 강화의 방비시설로는 내성·외성·중성 및 연안의 제방(堤防)이 있었다. 현재의 강화읍 일대에 축성되어 있는 내성은 1232년 당시 강화천도와 함께 쌓은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남산과 대문현(大門峴)을 걸쳐 동남쪽일대를 둘러싼 외성은 천도 이듬해 착공되어 1237년에 증축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강화읍에 있는 중성은 1250년에 쌓아 주위가 2,960여 칸에 대소의 문이 17개가 되었다. 그리고 연안의 제방은 1235년 주군(州郡)의 일품군(一品軍 : 工役軍)을 징발해 구축한 것으로, 당시 광주(廣州)와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 등지의 백성을 옮겨 도성의 충실을 꾀하였다.
그런데 당시 최씨일가는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려 신음했던 것과는 달리, 강화에서의 생활은 자못 호화로웠다. 최우는 사제(私第)를 지을 때 도방(都房)과 군대를 사역해 개성으로부터 목재를 실어나르게 했으며, 또 백성을 징발해 서산(西山)에 얼음 창고를 만들어 여름철에 쓸 어류를 저장할 정도였다.
강화천도는 몽고와의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청산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그들과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외면한 최씨를 비롯한 지배귀족들의 호화스런 강도생활(江都生活)은 비난받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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