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참[ 驛站 ]
전통시대 공공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 및 외국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그리고 공공 물자의 운송 등을 위하여 설치된 교통 통신기관이다.
흔히 우역(郵驛)·역관(驛館)이라고도 하였다.
원(元) 참적(站赤)제도의 영향을 받아 참이 설치됨으로써 역참(驛站)으로 통용되었다.
역참은 군사·외교면에서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중앙집권적인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육상에는 육참(陸站)을 설치하여 주로 역참이라 하였고,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였으며, 때로는 통행인을 검문하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1) 삼국 및 고려시대 우리 나라 역참은 문헌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중국의 역전(驛傳)제도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의 역전제도는 주왕조부터 제도화되었다. 왕실과 제후간의 봉건적 유대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긴밀한 군사통신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서주(西周)시대에는 수레를 이용한 용거(用車)와 도보에 의한 전거(傳遽)제도가 있었다. 또한 사신 접대를 위한 관사(館舍)를 두어 일상의 평시 통신과 변방의 긴급한 정보를 전달하는 군사통신체제로 이원화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동주(東周)시대, 즉 춘추전국시대에는 관사(館舍)·우(郵)·거(遽), 그리고 진·한 시대에는 정(亭)·우(郵)·역(驛)·전(傳) 등 다양한 교통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정이란 우정(郵亭)으로 10리마다 1정을 설치하여 여객의 숙박을 돕고 도적을 잡는 등의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우는 각 지방 군현간의 공문서를 전송하고 왕래인의 숙박을 돕기 위하여 5리마다 1우를 설치, 경거(輕車)와 쾌마(快馬)로써 긴급한 명령을 전달하였다. 한편, 역은 일종의 소식을 전달하는 기관으로서 문헌상 한의 무제(武帝)시대를 전후하여 최초로 그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진·한 시대의 교통조직은 수·당의 통일시대에 이르러 점차 통합되면서 우와 역, 그리고 관사를 포괄하는 역전(驛傳)제도로 발전하였으며, 송대의 보체(步遞)와 마체(馬遞)를 근간으로 한 체포제(遞鋪制), 원의 참적제도를 거쳐, 명대의 역참(驛站)과 체운소(遞運所)·급체포(急遞鋪)를 바탕으로 한 역체(驛遞)제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역전제도에서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에도 역참제도가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9년(487) 3월조에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유사들에게 명하여 도로를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록상 이때부터 우역이 확립된 것 같다.
그리고 668년(문무왕 8) 10월에 “왕이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하니 국원경 사신(仕臣)인 대아찬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고 왕과 모든 시종을 대접하며 음악을 연주하였다.”고 한 기록이 보인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서 “압록 이북은 이미 항복한 성(城)이 11개인데, 그 하나는 국내성으로서 평양에서 17개의 역을 지나 여기에 이른다.”고 한 사실에서도 역참제도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국원경 부근의 욕돌역이나, 평양성에서 국내성까지 설치된 17개의 역, 그리고 신라의 5통 5문역이 갖는 기능은 왕의 지방 순행시나 행정 명령의 전달, 혹은 사신들의 왕래에 따른 숙박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참제도는 영토 확장이 진행되고 지방 행정구역이 확립됨에 따라 점차 조직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516년(진흥왕 3)에 병부(兵部)를 설치하였고, 또 584년(진평왕 6)에는 승부(乘府)를 두어 교통과 마정(馬政)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경덕왕(742∼765) 때는 이전의 경도역(京都驛)을 도정역(都亭驛)으로 고쳤다가 다시 경도역으로 고치고 승부의 감독 아래 경(卿) 2인, 대사(大舍) 2인, 사지(舍知) 1인, 그리고 사(史) 2인의 관리를 두어 역을 운영한 기록에서 잘 알 수 있다. 그 뒤 역참이 전국적으로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운영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정은 지방 행정구역을 확립하고 지방호족 세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후삼국 이후 흐트러진 역로(驛路)에 대한 시급한 복구와 역참제도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왕권 강화와 함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외관(外官)을 파견함으로써 역의 조직도 구체화되고 체계적인 조직망도 확립하게 되었다.
특히 성종 때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즉, 983년(성종 2)의 12목(牧) 설치, 995년(성종 14)의 10도제(十道制) 시행과 더불어 992년(성종 11)에는 주(州)·부(府)·군(郡)·현(縣)과 관(館)·역(驛)·강(江)·포(浦)의 체제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려의 역제는 무신난 이후 몽고의 간섭 아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차자색(箚子色)·탈탈화손(脫脫禾孫) 및 수참(水站)을 설치한 것과 압록강 주변에 설치된 이리간(伊里干)이라는 참호(站戶) 등은 몽고의 참적제도에 의한 몽고식 역참조직이다. 참이라는 용어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역은 참 또는 관(館)과 동일한 의미로써 참역(站驛)·관역(館驛) 등의 명칭으로 함께 쓰이게 되었다.
그 뒤 고려의 역참제도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쓸데없이 역마를 남용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역호(驛戶)가 도망감에 따라 조직의 붕괴가 진행되었다. 역전(驛田)이 토호(土豪)·권문세가(權門勢家)에 의해 장악되어 본연의 가치를 상실해 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고려의 역제를 계승하면서도 새롭게 재편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역참은 고려의 제도를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재정비하였는데, 몽고의 지배 아래 있던 북방 지역〔東西兩界〕이 새로 개척됨에 따라 그 규모와 조직이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야인식(野人式) 명칭을 고치거나 역참의 인적 구성도 새롭게 편성하였다.
즉, 1398년(태조 7) 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로 있던 정도전(鄭道傳)이 안변 이북에서 청주 이남을 영흥도(永興道), 단주 이북에서 공주 이남을 길주도(吉州道)라고 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이때 함길도 경성(鏡城)지방의 역참조직도 〔표 1〕과 같이 야인의 역명을 개칭하고, 각 역참의 관리도 사리(司吏) 2명, 일수양반(日守兩班) 5명, 관부(館夫) 5명, 급주인(急走人) 5명, 마부(馬夫) 15명 등을 두게 하였다. 이것이 참의 조직에 관한 최초의 모습으로서 그 뒤 역참조직의 근간이 되었다.
한편, 동서 양계지방은 날이 갈수록 그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여진(女眞:野人)과의 외교관계로 인하여 역참을 신설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평안도나 함길도 방면의 압록강변에는 합배(合排:큰 산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 우역의 업무 등을 맡아보던 일반 백성들의 집단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 합배에 대해서는 1443년(세종 25) 4월에 도체찰사인 황보인(皇甫仁)이 평안도에서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이산군(理山郡)의 북동(北洞) 및 박씨리(朴氏里), 벽동군의 벽단(碧團), 창성군의 창주(昌州), 삭주군의 옛 군영(軍營)에 합배를 더 설치하되 합배마다 15호(戶)를 배정하며, 수구합배(水口合排)는 없애고 종포합배(從浦合排)는 강계(江界)로 옮긴 후 15호를 더 소속시켜야 할 것이다. 그 합배의 찰방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사람을 임명하여 각 합배를 순행, 고찰하게 하고, 유사시에는 도절제사를 따라 부방(赴防:군인이 변방이나 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임하는 일)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합배는 압록강 연변에 설치하여 찰방의 관할 아래 유사시에는 부방의 임무까지 겸한 역촌(驛村)의 성격을 띤 역참조직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방 지역에서의 역참 운영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역리(驛吏) 등을 포함한 역민(驛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원래 북방 지역은 역리가 없거나 드물었고, 근무 조건 또한 어려워 역호(驛戶)의 피폐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역리가 도망가는 것을 막고 역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삼도(下三道)에서 역리 등의 역민을 입거(入居:들어와 거주함)시키는 방안이 그 하나였다. 이것은 4군 6진 등 북방 개척에 따른 이주〔徙居〕정책과 병행하여 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민의 입거정책이나 경기·강원도 등의 역리를 윤번입역(輪番立役:순서를 정하여 역을 지게 함)케 하는 방안도 항구적인 시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세종·성종 때는 이주정책에 따라 점차 북방지역의 호구가 증가하게 되자 역참 부근의 민호(民戶)에서 역호를 차정(差定:선택하여 뽑음)하는 조역(助役)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한편, 경기 및 하삼도에서도 사신 왕래 등에 의한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참의 신설과 이설(移設), 그리고 역로의 원근과 사신왕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역로의 분도화(分道化)가 실시되어 세종·세조 때의 부분적인 개편 결과 결국은 ≪경국대전≫의 전국 역로망체제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제주도에도 역참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역참은 역마의 남발과 말 값의 앙등으로 역마 확보가 어렵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호의 도망·유리 현상이 증가되어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찰방·군관 등의 비리와 사회 기강의 문란으로 역전(驛田)의 사유화가 진전됨으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해서는 사실상 그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극복책이 논의되어 역리소복책(驛吏蘇復策:대를 이어 그 업에 종사하게 하던 정책), 도망한 역호에 대한 추쇄(推刷:역을 피해 도망한 자들을 자기 고장으로 복귀시킴), 역전 타량(打量:측량) 후의 충급, 복호결(復戶結:면역자들의 부족분인 세원을 더 거두어들이는 전결)의 지급, 역마의 고립제(雇立制:돈으로 역을 대신하여 세우던 제도) 시행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명(明)의 파발제(擺撥制)를 정착시켜 봉수(烽燧)와 더불어 군사 통신수단의 역할을 맡게 됨으로써 역의 통신기능이 일부 파발제에 의해 보완되어 운영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의 역참은 1896년(건양 1) 근대적인 통신제도와 철도교통이 점차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됨으로써 결국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1) 역참의 조직 역참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로의 조직과 역민 및 역마의 확보였다. 삼국시대의 역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설치된 역참조직은 아마도 삼국시대의 역참조직을 바탕으로 확대, 개편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은 918년(태조 1) 7월에 내린 조서(詔書)에서 “태봉주(泰封主)가 백성을 침노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느라 오직 거두기만을 일삼고 예전 제도는 따르지 아니하여 1경(頃)의 토지에서 조세를 6석(石)이나 받으며 역에 소속된 호(戶)에 실〔絲〕을 3속(束)이나 부과하여 드디어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길쌈을 폐지한 후 도망하는 사태가 잇따라 생기게 되었다.”고 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 초기에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몽응역(夢熊驛)의 역리인 한씨(韓氏)에게 대광(大匡)이라는 벼슬을 준 사실에서도 고려 초기에 이미 삼국시대 이후의 역조직을 근간으로 하여 역참을 운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참의 조직이 보다 구체적으로 전국적인 역로망을 형성하게 된 것은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착실히 구축하고 지방 행정구역의 재편성과 함께 12목 10도제를 실시한 성종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성종은 983년에 12목을 설치하고 외관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와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을 중심으로 교통로를 확립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경제적 기반인 역전(驛田)을 지급하였으며, 992년(성종 11)에는 주·부·군·현의 개편과 더불어 관(關)·역(驛)·포(浦)·강(江)의 명칭도 바꾸어 지방제도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병부(兵部)의 주관하에 〔표 2〕와 같이 6과(六科) 속역(屬驛) 체제에 의한 역로망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은 개경과 서경 및 의주를 중심으로 한 역참조직이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의 대폭적인 군현제 개편과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이 제도화된 때를 전후하여 역참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고려사≫에 의하면 〔표 3〕과 같이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계로 역참조직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의 역참조직은 실로 6과 체계에서 22역도 체계로 발전되고, 중앙에 공역서(供驛署)와 지방에 관역사(館驛使) 또는 역승(驛丞)을 설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역참조직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정호(驛丁戶)를 배정하고 공문서 전달방식과 급마(給馬) 규정을 법제화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의 역참조직은 대체로 조선에 그대로 계승되면서 재편성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역참조직을 계승하면서 동서 양계 지방의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새로운 역참을 설치하였으며, 압록강변에는 합배라는 우역촌(郵驛村)을 설치하여 참역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경기도나 하삼도지역의 역로는 고려의 역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서울을 개경에서 한성으로 천도함으로써 일부 지역에 역참을 신설하는 등 한성을 중심으로 한 역도조직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에 설치된 역승에 대신하여 점차 찰방이 역참을 운영하고 지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령협판(懸鈴俠板)에 의한 공문서 전달 방식과 역노비(驛奴婢)의 배치, 포마기발법과 마패에 의한 역마 이용, 그리고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전(驛田)을 분급(分給)함으로써 역정(驛政)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였다.
한편, 육상교통의 편의를 위하여 서울 주변과 경기도의 중요한 강가에 진도(津度)를 설치하고 도승(渡丞)을 두어 왕래인을 규찰하고, 사신 등의 지방 순행에 편리하도록 도선(渡船)을 준비해 두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 수록된 전국의 역참조직은 〔표 4〕와 같이 41역도-524속역으로 편성되었다.
(2) 역참의 역민 역민(驛民)이라 함은 ‘역역(驛役)을 맡은 호구(戶口)’로서 역정호(驛丁戶)에서 유래하였는데, 역에 소속되어 역 임무를 수행하는 모든 역인(驛人) 또는 역속(驛屬)을 말한다.
대개 이들은 일반 민호(民戶)와는 달리 별개의 호적을 ‘3정(丁) 1호(戶)’의 편호(編戶) 방식에 의하여 역호구안(驛戶口案)을 작성, 관리되었으며 이른바 역호로서 역에 본적을 두고 자손 대대로 역역을 세습하였다.
대개 역참에는 찰방(또는 역승)·역장(驛長)·역리(驛吏)·역노비(驛奴婢) 등이, 각 참에는 참리(站吏)·일수양반·급주인·마부가, 그리고 각 관(館)에는 관군(館軍)과 일수(日守)·조역백성(助役百姓) 등이 배치되었다. 물론 시대에 따라서 역민의 명칭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중앙에 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 등의 관리가 배치된 것으로 보아 지방의 역에도 역민이 배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역리와 역정호가 배치되었으며, 역리 중에서 역장(驛長)이 차정되었다.
역장은 역의 크기에 따라 2, 3명씩 배정되었고, 역정호는 1과(科)에서 6과의 구분에 따라 1과역에는 75명, 2과역 60명, 3과역 45명, 4과역 30명, 5과역 12명, 6과역은 7명씩 분급되었다.
그리고 만약에 정호(丁戶)가 부족하면 본역의 백정(白丁) 자식과 친척 가운데 자원하는 자로 충당하였다. 이들 역리나 역정호는 사신 접대나 공문서 발송, 그리고 역마의 사육관리, 역전의 경작 등 잡다한 업무를 수행하였으므로 무척 힘들었다. 이것은 역리 등 역호의 쇠잔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역·참·관의 구별에 따라 역민의 명칭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의 역역은 비슷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에는 최고책임자로서 종6품인 찰방(또는 역승)이 여러 개의 역을 총괄하였고, 역리는 조선 초기에 지배 신분층의 분화와 관련하여 향리에서 많이 정속(定屬:역리로 소속시킴)하게 되었으며, 관군(館軍)과 더불어 양인(良人) 신분에 속하였다. 대개 역 운영을 전담한 이속(吏屬)으로서 사신 영송, 역마 보급, 공문서 발송 등 잡무에 시달려 천인과 다름없을 정도로 인식되었다.
조선 초기에 역리가 몇 명씩 각 역에 배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명문(明文) 규정이 없다. 대체적으로 ‘3정 1호’의 호구 파악 방식에 의거, 역의 크기에 따라 2∼3명 내지 15∼20여 명 정도의 역리가 배정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리의 신분과 신역 형태는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역리의 통혼(通婚)에 의한 역리 인구의 증가, 둘째 양역을 기피하고 역속(驛屬:역관에 소속됨)으로 투탁(投托:남의 권세에 자신을 의탁함)하는 현상, 셋째 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관노비가 역리로 신분 상승을 하는 법), 넷째 군공(軍功) 및 부거(赴擧:과거를 봄)를 통한 관료로의 진출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역리 인구의 증가는 역리의 신역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는데, 육방(六房) 체제에 따라 역에 사역하는 입역(立役) 역리와 일정한 신공(身貢)을 납부하는 납공(納貢) 역리로 분화된 것이 그것이다. 흔히 입역 역리는 이방·호방·예방 등 6방(房)의 분임에 따라 각각 역에서의 잡다한 행정 업무를 나누어 맡았다.
그리고 역노비는 관노비(官奴婢), 즉 공천(公賤)의 일종으로서 급주노비(急走奴婢:급한 전달을 요구하는 군사용 전달사항이나 공문 등을 나르던 노비)와 전운노비(轉運奴婢:공용의 공문이나 물건을 나르던 노비)로 구분 편성되었다.
이들 역노비는 여말선초에 신왕조에 복종하지 않은 무신들이 소유한 노비를 정속하거나 사재감수군(司宰監水軍) 또는 혁거사사노비(革去寺社奴婢)를 지급함으로써 확보되었으며, 입역(立役)의 대가로 이들에게 구분전(口分田)과 소경전(所耕田)을 나누어 주었다.
역노비는 주로 공문서 전달, 사신 왕래에 따른 역마 입대와 짐 운반, 역토지 경작 및 기타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그들의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역의 크기에 따라 상등역(上等驛)은 50명, 중등역은 40명, 하등역은 30명을 각 역에 배치하였다. 또한 참이나 관에 있는 참리나 관군도 거의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와 같은 역민 이외에 급사(給事)를 맡은 일수(日守), 기록 사무를 담당한 서원(書員), 그리고 사령(使令)·통인(通引)·지인(知印)·마종(馬從)·보종(步從) 등 다양한 역민이 편성되어 역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역리·역노비 등의 입역은 이로 인하여 역호가 도망하게 되고 그 결과 역민이 부족하게 되자 역민의 확보책으로서 다른 역에서 입거시키거나 역 부근의 마을에서 보충군(補充軍)·정군(正軍)·향호(鄕戶) 등을 차정하는 조역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역리나 관군에게는 조호(助戶)의 성격을 띤 봉족(奉足), 즉 역보(驛保)가 2명씩 배정되었으며, 관서지방의 경우는 고공(雇工)을 배정하여 역리·관군의 입역을 돕도록 하였다.
(1) 역참의 관할 역참의 관할은 통일신라 시기에는 경도역(京都驛)이 맡았으나 고려시대에는 실제로 병조 아래 있던 공역서(供驛署)가 맡았다. 고려시대의 공역서는 8도의 역과 외국 사신 및 순문(巡問)·안렴(按廉) 등의 사명을 받은 자, 지방에 출장 나가는 자의 포마(鋪馬:역참에서 관용으로 쓰는 말)를 기발(起發)하는 것을 관장하였다. 관리로는 영(令) 2명(종7품), 승(丞) 2명(종8품)이 있으며, 하급 이속(吏屬)으로는 사(史) 4명, 기관(記官) 2명, 막사(幕士) 40명을 두었다.
고려시대의 공역서 설치 시기는 대략 전시과(田柴科)제도가 확립된 998년(목종 원년) 이후 1019년(현종 10) 사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역제가 문란해지자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역에 대한 지휘 감독을 보다 철저히 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 또는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설치하였고, 몽고 지배하에서는 한때 탈탈화손(脫脫禾孫)이 참적을 관할하였다. 말기에는 역호의 도주와 역마의 남용으로 인한 역마 감소 등의 역폐를 시정하고 보다 엄정하게 역을 관할하기 위하여 역승(驛丞)을 두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병조에 승여사(乘輿司)를 설치하여 지방의 역승과 찰방을 지휘, 감독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승은 종9품의 외관직으로서 주로 서리(書吏) 가운데 취재(取才)에 의거하여 임명되었으나, 품계가 낮은 관계로 역의 지휘, 감독에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품계가 어느 정도 높은 조사(朝士)·문신(文臣)이 종6품의 찰방을 임명하게 되었다.
원래 찰방은 고려시대의 찰방사(察訪使)에서 유래된 것으로, 감찰(監察)과 행대(行臺)의 성격을 띠면서 안찰사(按察使)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시로 지방에 파견된 관직이었다.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도 행궁(行宮)·해도(海道)·전민(田民)·군수(軍須)·정역(程驛) 찰방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찰방이 파견되었는데,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점차 소멸되었다.
찰방은 역참의 신설과 역도의 개편과정에서 참로(站路) 찰방, 관로(館路) 찰방, 합배(合排) 찰방 및 정역(程驛) 찰방의 형태로 발전되다가 1457년(세조 3) 이후부터 역로 행정을 전담하는 찰방으로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에는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승과 찰방이 병존하였다.
그러나 역승과 찰방의 병존문제는 1457년부터 역승 혁파론과 찰방 대치론이 등장하면서 역승을 없애자는 의견이 점차 우세하게 되었고, 드디어 1535년(중종 30)에 역승을 폐지하고 그 대신 찰방을 전국적으로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일반지역에도 겸찰방(兼察訪) 제도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역의 관할은 초기의 역승체계→역승·찰방 병존체계→찰방체계→겸찰방(兼察訪)체계로 발전되었다.
(2) 역참의 기능과 역마 확보 및 이용 역참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는 것이다. 역참은 중앙과 지방, 지방 각 군현간의 정령(政令)을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와 같은 국가의 행정 명령을 전달하는 방법에는 고려시대의 경우 가죽 부대에 문첩(文貼)을 넣어서 현령(懸鈴), 즉 방울을 달아 전달하는 현령전송(懸鈴傳送)과 뿔통에 넣어서 전달하는 피각전송(皮角傳送)이 있었다.
현령 전송은 일의 완급에 따라 아주 시급한 3급(急)에 해당할 때는 3현령, 2급은 2현령, 1급은 1현령으로 전송하였으며, 또한 계절에 따라 하루의 운행 거리도 조정되어 2월에서 7월 사이는 3급은 6역, 2급은 5역, 1급은 4역을 통과하였고, 8월에서 정월까지는 3급은 5역, 2급은 4역, 1급은 3역을 통과하였다. 이와 같이 역마의 일정은 일의 완급과 계절의 일차(日差)에 따라 속도를 달리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서는 현령협판에 의해 전달되었다. 그리고 공문서를 전송할 때는 반드시 병조의 마문(馬文:發馬公文의 준말로 지방으로 출장하는 관원에게 주던 말 이용 문서)에 의거, 상서원(尙瑞院)에서 발급하는 마패를 지급받아 역마를 이용하였다.
두 번째 기능은 공부(貢賦)·진상(進上) 등의 관수물자(官需物資)를 운송하는 것이다. 삼남(三南)지방의 세곡과 지조(地租), 그리고 공물 운송은 대부분 조운(漕運)에 의존했지만, 조선 초기에는 왜구의 창궐과 조운선의 침몰사고로 육로를 통한 운송이 불가피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공부나 진상, 그리고 사신들의 짐은 대체적으로 역마를 이용하여 실어 날랐다. 경상도 지역의 경우 역마를 이용하여 충주 가흥창(可興倉)까지 직접 납부한 뒤에 배를 이용, 한강의 수운(水運)에 의거하여 경창(京倉)까지 운반하였다.
세 번째 기능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이다. 중국·일본의 사행(使行)은 물론 왕명을 받들어 각 지방에 파견된 봉명사객(奉命使客)을 영송하고 접대하는 것은 외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였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에는 영송군 편성과 마필 지급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법조문화되었고, 또 사객을 영송하는 데 따른 구체적인 사항도 법제화되었다.
영송군은 평안도의 정병(正兵)으로 편성하여 사신 일행이 탈 말은 평안도 각 고을의 향호마(鄕戶馬)를 윤번 입마하게 하였으며, 중국이나 일본 및 여진의 사신이 오면 원접사(遠接使)·선위사(宣慰使)·향통사(鄕通事)를 의주 등의 각 고을로 파견하여 영송케 하였다.
네 번째 기능은 역호(驛戶) 또는 마호(馬戶)를 편성하여 역마를 입대(立待:준비하여 대비시킴)시키는 일이다.
역참은 이와 같은 기능 이외에도 죄인을 체포, 압송하거나 통행인을 규찰하고, 유사시에는 국방의 일익까지 담당하였다. 특히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나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일은 완급에 따라 국가 이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역마를 확보하는 일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역마를 확보하는 방법은 역호의 입역에 의해서였다. 즉, 역리나 역노비, 그리고 관군에게 신역으로 입마역(立馬役:관의 일을 위하여 말을 준비하여 대비시키는 역)을 부과함으로써 역마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역호에 의한 입마는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쉴 틈 없이 영송과 접대업무에 종사해야 함으로써 말의 수요가 늘어나고, 심지어는 말 값이 뛰어올라 재산을 다 팔아서 입마해야 했기 때문에 역호의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도망과 유리(流離:이리저리 흩어져 떠돌아다님)로 역호가 쇠퇴하게 되자 역마 확보는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역호를 확보하는 방안과 목장마 등을 보급해 주는 방안 등이 제시되었다. 역 부근의 민호를 초정(抄定:뽑아서 정함)하여 조역호(助役戶)로 삼아 입마케 한 것은 전자의 한 예이며, 각 지방의 목장마나 관마(官馬)를 분급해 준 것은 후자의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역호의 초정이나 목장마의 분급만으로는 역마 확보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역호의 입역 부담이 과중하여 유리·도망하는 사태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역마 확보 방법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역역을 세습하지 않던 평민들도 자원하여 마위전을 경작, 입마를 허락함으로써 이른바 마호(馬戶)에 의한 입마역이 대두된 것이다.
마호는 전지(田地)가 없는 평민 가운데 자원하는 자는 호역(戶役)과 신역을 면제하는 대신 마위전 및 복호결(復戶結)을 경작하여 그 비용으로써 입마를 하였던 것이다. 다음 〔표 6〕은 충청도 성환도(成歡道)에 소속된 각 역의 마호와 역마, 그리고 마위전 지급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성환도의 총 역마는 155필로서 155명의 마호가 사육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마호 1명당 대체적으로 1필의 역마를 사육, 입마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마호에 의한 입마역 역시 많은 사회적 폐단 때문에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마호들에게 지급된 마위전이나 복호결을 사사로이 팔거나, 서로 짜고서 몰래 파는 등의 폐단이 생겼다. 또한 토호의 점탈(占奪), 심지어는 찰방이나 역속(驛屬)들에 의한 복호가(復戶價)의 침탈, 역마 값의 등귀 등으로 마호가 생업을 잃어 유리·도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이에 따라 역마를 매입하여 각 역에 분급하는 역마고립제(驛馬雇立制)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부역(賦役)의 고립화(雇立化) 추세에 짝하여 역에서도 역마 입역의 형태는 역호의 신공전(身貢錢)으로 역마를 외지에서 사들여 확보하는 대안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마고립제는 초기의 잉파(仍把)·보파(補把) 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역마가 부족할 경우 전자처럼 다른 지역의 역마를 차출하여 입마시키거나, 또는 후자와 같이 민간인의 말을 사서 입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많은 문제점을 초래하여 1668년(현종 9)에 결국은 가까운 곳에서 역마를 빌려서 사용하는 고마법(雇馬法)으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고마 비용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였다.
조선 후기에 주로 나타난 역마고립제에서의 고마값은 역마졸이나 마호에게 징수한 신공전에서 충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대동법의 시행으로 일반 민호에게서 그 비용을 징수하여 확보하거나 병조나 감영 등의 재정 지원을 받아 충당하기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둔전답(屯田沓)을 경영하여 세금을 거두어들이거나 복호결을 지급하여 대동세의 형태로 세금을 받음으로써 역마 값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특히 민호에게서 고마값을 징수함으로써 역호 고유의 입마역은 민호에게로 전가되어 과외잡세(科外雜稅) 등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반 민호들은 그들의 부담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대동고(大同庫)·고마고(雇馬庫) 또는 고마청(雇馬廳) 등 다양한 형태의 이른바 민고(民庫)를 설치, 운영함으로써 고마 값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이와 같이 역호 또는 마호나 고립제에 의해 확보된 역마는 철저한 관리 및 이용 규정에 의거하여 관리되었다. 역마는 역의 크기에 따라 상·중·하의 등급으로 분류하여 지급되었는데, 흔히 교룡기봉지마(蛟龍旗奉持馬)를 상등마(上等馬), 기마(騎馬)를 중등마(中等馬), 복마(卜馬)를 하등마(下等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배치된 역마는 일반적으로 매년마다 마적(馬籍)을 만들어 순영·병영·병조와 본역에 각각 비치해 두고 매월 보름에 살이 쪘는가 말랐는가 혹은 훈련 상태가 어떤가를 점검하였다. 역마의 점고(點考:말의 내용을 기록한 장부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수효를 셈)는 대체로 봄철에는 정월에, 가을철에는 7월에 실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각 역에 지급된 역마의 규모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조선 초기에는 역로의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상·중·하의 3등급으로 나누어 지급되었다. 조선 후기의 조사기록에 의하면 1640년(인조 18)에 전국적으로 파악된 역마의 총 숫자는 3,274필이었으며, 1808년(순조 2)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나타난 전국의 역마는 다음 〔표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기도 444필, 충청도 752필, 전라도 546필, 경상도 1,687필, 강원도 503필, 황해도 222필, 평안도 301필, 함경도 925필 등 합계 5,380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확보된 역마는 포마법(鋪馬法:역참에 둔 말을 공공 관리하는 법)과 마패(馬牌) 발급에 의거하여 철저하게 관리되고 이용되었다. 마패는 역마 사용하는 것을 규정한 부험(符驗:공증을 담고 있는 표)의 하나로서 흔히 발마패(發馬牌)라고 하는데,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은 상서원(尙瑞院)에서 발행하는 이 마패를 증표로 삼아 역마를 이용할 수 있었다.
포마법은 고려 원종(元宗) 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실시된 것인데, 관원의 지위 고하에 따라 역마 이용에 차등을 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재추(宰樞)는 10필, 3품 관원과 안렴사(按廉使)는 7필, 참상별감(參上別監)은 5필, 참외별감(參外別監) 및 외관참(外官參) 이상은 3필, 참외(參外)는 2필, 참상(參上)·도령(都領)·지유(指諭) 등의 차사원(差使員)은 3필, 장교는 1필로 규정하고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 1410년(태종 10)에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이 실시되고, 1414년(태종 14)에는 이제까지의 공역서인(供驛署印) 대신에 병조의 관할 아래 있는 상서원에서 발급하는 마패를 사용함으로써 마패법이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의 마패는 원료에 따라 목조 마패·철제 마패·동제 마패로 구분되며, 그 형태는 대부분 원형이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어 썼으나 1434년(세종 16) 이후에는 철로 제조되었으며, ≪경국대전≫ 반포 시기에는 동으로 만들어 상용되었다.
통상 마패의 한 면에는 대소 관원의 등급에 따라 마필의 수효를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자호(字號)와 연월(年月) 및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왕족의 경우는 산유자(山柚子)로 만든 원패(圓牌)의 한면에 말의 수, 다른 한면에는 사용할 말의 숫자를 새겨 사용하였다.
이러한 마패는 병조가 마문(馬文)을 발급하여 상서원에 주면, 그에 따라 발급하였다. 지방에서는 감사·병사·수사가 발매패를 받아 계문(啓聞)이나 진상(進上) 등으로 필요한 때에 발마하였다.
군사적으로 긴급한 사항이 발생했을 때는 쌍마(雙馬)를 사용하여 ‘긴급사(緊急事)’라는 글자를 새겨 주야로 달리게 하였다. 이러한 기준과 절차에 의해 역마는 상·중·하를 구분하였고, 관원의 품위(品位)에 따라 다음 〔표 8〕과 같이 지급되었다.
역전은 사신 왕래 및 역사의 수리, 사무용품 등을 구입하는 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지급되었는데, 그 지급형태에 따라 공수전(公須田)·마위전(馬位田)·유역인전(有役人田:長田·副長田·急走田)·아록전(衙綠田)·복호결 등으로 구분되었다.
고려시대에는 983년 6월에 역의 크기에 따라 지급되었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대로역에는 공수전 60결, 지전(紙田) 5결, 장전(長田) 2결, 중로역에는 공수전 40결, 지·장전 각 2결, 소로역에는 공수전 20결, 지전 2결을 지급하였고, 대로관(大路館)에는 관전(館田) 5결, 중로관에는 4결, 소로관에는 3결씩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993년 8월에는 동서도(東西道)의 대로역에는 50결, 중로역에는 30결, 양계(兩界)의 대로역에는 40결, 중로역에는 20결, 기타 소로역에는 15결의 시지(柴地)를 배정함으로써 역의 경제기반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무신난 이후 권문세가와 토호에 의한 역전 침탈이 자행되고 역리의 도주가 심하게 되자 역정(驛丁: 역참의 업무를 수행하는 役을 맡은 성인 남자)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신흥 사대부들은 과전법과 노비변정사업 등을 실시하여 역전을 확보하고 역리졸의 생활 안정대책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다음 〔표 9〕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의 역전이 분급되었다.
유역인(有役人)의 하나인 역리에게는 역역의 반대 급부로서 인위전(人位田), 즉 장전(長田)의 형태로 2결씩을 지급하였다. 그것은 과전법에 입각한 토지분급제에 의하여 절급된 분급수조지(分給收祖地)로서, 수조권을 바탕으로 민전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토지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역리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로서 사전(私田)의 성격을 띤 소경전(所耕田), 즉 소유권에 입각한 사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리전의 경영은 원칙적으로 직접 경작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전주(田主)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조권적 토지 경영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역리 소경전의 경우는 역리와 동거하는 자의 가족 노동이나 경작에 의해서 경영되었다.
그리고 역노비에게도 역역의 대가로서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전운·급주 노비에게 지급된 구분전(口分田)이 그것이다. 이 구분전은 1425년(세종 7)에 전운노비에게 50부, 급주노비에게 1결씩 지급되었으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國用田) 설치와 함께 구분전이 폐지되자 ≪경국대전≫ 반포 시기에는 급주전 50부(긴요한 길에는 1결)를 지급하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 구분전은 대체로 한전(閑田)과 진황전(陳荒田) 및 목장전이나 군자전(軍資田)으로써 나누어 주었다. 이 구분전 경영 역시 직접 경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경작전을 지급하였으나 직접 경작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거나 맡겨서 세금을 받기도 하였다. ≪경국대전≫ 시기에는 전답을 타인에게 맡겨 경영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토지 경영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공수전은 비옥한 토지가 지급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측량이 오래된 하천 부지나 홍수로 무너지기 쉬운 척박한 토지를 지급하는 형편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상 대대로 경작해 온 평민전의 일부를 지급함으로써 평민과 역리간의 토지경작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하천으로 변해 버린 토지가 대량 발생하였으며 좋은 땅은 토호들의 점탈대상이 되어 역의 재정 확보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공수전의 경영은 초기에는 역리나 관군 등이 직접 경작하는 자경(自耕)이 원칙이었으나, 역노비나 일반 농민의 소작제(小作制)에 의해서 경작되어 세금을 받는 민전수세지(民田收稅地)의 성격을 띠었다.
마위전은 역마를 사육하여 각 역에 세우고자 하는 입마 대상자(초기에는 역호, 후기에는 마호)에게 지급된 토지로서 대마는 7결, 중마는 5결 50부, 소마는 4결씩 지급하였다. 마위전 역시 평민전이나 군자전 또는 공전(公田)을 지급하였다. 또 역 근처의 양전(良田), 즉 비옥한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마위전 역시 본역과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를 지급받거나 돌이 많고 메마른 땅을 지급하여 하천이 터져 물이 논밭으로 흘러 모래땅이 된 토지가 된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민전에 혼입(混入)되거나 토호 및 양반에 의해 탈취되는 실정이었다.
마위전의 경영은 자경무세지(自耕無稅地)로서 입마자의 자경에 의해서 경작되었다. 그러나 본역에서 먼 곳에 있거나 역역이 무거워 직접 경작할 수 없을 때는 타인에게 차경(借耕)하게 하여 세금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역전의 경영에서 차경화(借耕化), 즉 소작제적 경영은 관군(館軍)에게 주어진 마위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마위전의 경영형태가 소작제적 경영방식에 의거 도조(賭租)를 수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마위전의 사사로운 전매, 그리고 토호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역제의 붕괴를 자초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역리·역졸이나 관군에게는 복호결이 지급되었다. 이 복호결은 전결급복(田結給復) 또는 급복전(給復田)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동법의 시행을 전후하여 지급된 면부출세(免賦出稅:조세만 내고 호역은 면제함)의 토지를 말한다. 원래 복호결은 호역(戶役)의 하나인 잡역을 면제하는 복호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역호가 쇠망하게 되자 역리·역졸의 입역을 도와 주기 위해서 그들의 잡역 또한 면제해 주게 되었다.
이러한 복호제도는 원래 호역만을 면제해 주는 것인데, 수령들이 법의 취지를 잘못 알고 종종 공부(貢賦)까지 면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1609년(광해군 1)에 복호문제에 대한 논란을 거쳤으나 해결되지 않고 결국 전결(田結)의 공부까지도 면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역리·역졸이나 관군에게 복호결이 지급되었다.
이 복호결의 성격은 역민이 보유하고 있는 자기결복(自己結卜)에 한해서 대동미는 면제해 주고 전세만 납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보유 토지를 갖지 못한 역민의 경우 불공평한 문제가 제기되어 1670년(현종 11)에 이르러 무전(無田) 역졸에 대해서도 복호결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듭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1704년(숙종 30)에는 결국 역민들에게 자기 결복뿐만 아니라 민결(民結)에서 대동미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 민결급복(民結給復)을 확대하여 지급하게 되었다. 그 결과 경기 각 역의 역리·역졸은 1인당 1결, 충청·전라·경상도의 각 역은 5결, 해서의 각 역은 12결씩, 그리고 관군에게는 3결씩 지급되었다.
따라서 각 역에 지급된 복호결은 역리·역졸 각 개인에게 지급된 것이 아니라, 자기 결복을 가진 경우는 그 토지에 대한 소정의 대동세를 면제해 주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민결에서 징수한 대동미를 지급하였다. 다시 말해서, 역리·역졸에게 지급된 복호결에서 대동미, 즉 복호가(復戶價)를 징수하여 그 경비로써 역마 값을 마련하거나 역의 공공경비에 충당하였다.
이 복호결은 조선 후기 마위전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역리·역졸 및 마호에게 지급된 토지였다. 다음 〔표 10〕은 경상도 성현도(省峴道) 속역의 역리·역졸에게 지급된 복호 결과 복호가를 징수한 것이다.
위의 〔표 10〕에 따르면 복호가는 결당 4량씩 모두 832결 22부 5속의 복호결에서 3,328량 9전을 징수하여 역마(대마 10필, 중마 4필) 구입 비용과 경주인역가(京主人役價), 각종 잡물 구입비 등의 공공경비에 지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역에는 공수전·마위전·복호결 이외에 역호 또는 마호에게 유역인전(有役人田) 또는 인위전(人位田)을 지급, 세금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역의 재정을 확보하였다.
(1) 파발제의 성립 조선 전기의 역참제도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원인은 말 값이 뛰어올라 역마 확보가 어려워졌으며, 역리의 도망과 그에 따른 역호의 쇠망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마의 남발과 역전의 사유화, 그리고 국가 기강의 해이로 찰방 등의 작폐가 심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거치는 동안 역참제의 복구 논의가 계속 전개되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봉수제가 순수한 군사 통신수단으로서 운영이 어렵게 되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명나라의 파발을 참고하여 전명(傳命)을 주로 담당한 파발제 설치를 의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597년(선조 30) 5월 집의(執義) 한준겸(韓浚謙)이 명나라의 예에 의거, 파발을 설치하여 변방의 문서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 기준은 기발(騎撥)은 매 20리마다 1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도록 건의함으로써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도가 성립되었다.
(2) 파발의 조직과 기능 파발의 조직은 전송수단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구분되며, 지역에 따라 서발·북발·남발로 조직되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기발은 말을 타고 전하며, 25리마다 1참을 두었으나 곳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소속 관원으로는 발장(撥將) 1명, 색리(色吏) 1명, 기발군(騎撥軍) 5명과 말 5필을 배치하였다. 보발은 속보로써 전달하였는데, 30리마다 1참을 두고, 발장 1명과 군정(軍丁) 2명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파발조직은 기존의 역참과 병행하여 설치되었으며, 의주에서 한성까지의 서발은 모두 41참이 있었고, 경흥에서 한성까지의 북발은 64참, 동래에서 한성에 이르는 남발은 31참으로 조직되었다. 파발조직의 구체적인 모습은 ≪만기요람≫·≪대동지지 大東地志≫·≪증보문헌비고≫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발장은 글을 해독할 줄 아는 자로 임명된 권설직(權設職)으로서, 종9품에서 정6품의 체아록(遞兒祿)을 받고 900일 근무하면 정6품의 사과(司果)에 승진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 아래 속하는 발군(撥軍)은 한잡인(閑雜人)이나 궤군(潰軍)·방군(防軍)·정군(正軍)·정초군(精抄軍) 및 장무대(壯武隊)에서 충원되었다. 따라서 이들 발군은 말을 지급받아 사육하면서 파발에 역마를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또한 공문서를 전달하는 직접적인 역할까지도 맡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발의 폐단 또한 적지 않아 신속히 전달해야 할 전문(傳文)이 지체되거나 파손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발제도는 1896년 근대적인 전화 통신시설이 설치되기까지 군사 통신수단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3) 역참의 성격과 의의 조선시대의 역참은 군사 통신상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신 영접 등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공공 물자 운송을 통하여 중앙과 지방 또는 지방 상호간 상품경제의 진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역촌을 중심으로 지방 촌락을 형성, 교통의 요지로 지방 상업도시가 발달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참의 전통 아래 1896년 이후 현대적인 도로·교통 체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好學의 교육 3 > (국어사전)國語辭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극기복례[ 克己復禮 ] (0) | 2012.09.07 |
---|---|
격물치지[ 格物致知 ] (0) | 2012.09.07 |
녹봉[ 祿俸 ] (0) | 2012.09.06 |
국연[ 國烟 ] (0) | 2012.09.06 |
광무[ 光武 ] (0) | 2012.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