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한국文化)

조선 500년의 토대를 다진 革命兒 鄭道傳

好學 2012. 8. 19. 06:02

조선 500년의 토대를 다진 革命兒  鄭道傳
 
鄭道傳은 君王의 나라가 아닌 신하들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당시 中國은 臣權이 유독 강했던 南宋이 멸망한 이래, 이를 거울삼아 줄곧 황제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도 조선은 반대방향으로 진행해 갔다. 臣權국가의 이상은 文弱을 초래했다.


申東埈 고려大 강사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 박사(管仲 연구). 일본 東京大 객원연구원,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역임. 現 고려大 강사.

鄭道傳의 체취 물씬한 경복궁

도담상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린 뒤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광화문 쪽 출구를 빠져나왔다. 철릭(무관이 입던 공복의 한 가지)을 입은 수문장이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조선시대의 正宮(정궁)인 경복궁을 찾았다.
 
  鄭道傳(정도전)의 체취를 느껴 보기 위해서였다. 11월 초의 날씨는 쌀쌀했다.
 
  경복궁은 중국 北京의 紫禁城(자금성)처럼 웅장하지 않고, 일본 도쿄의 皇宮(황궁)처럼 날렵하지 않다. 북악산을 主山(주산)으로 하여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어 볼 때마다 조선조의 의젓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홍례문을 지나 御溝(어구)를 건너자 정전인 勤政殿(근정전)이 단아하면서도 장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근정전은 「君臣(군신) 모두 국태민안과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삼가 정사를 돌봐야 한다」는 뜻이다. 鄭道傳이 얼마나 고심해서 작명했는지를 생각하니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朝鮮」이라는 국호도 제정
 
  경복궁 내에는 근정전 이외에도 편전인 思政殿(사정전)과 왕비가 머무는 交泰殿(교태전) 등 수많은 전각이 있다. 이들 모두 「詩經」과 「書經」 등의 古典에서 따온 것이다. 崇禮門(숭례문)과 興仁之門(흥인지문), 敦義門(돈의문), 炤智門(소지문: 후에 肅靖門으로 개칭) 등은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 5德(덕)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서울 중구와 종로구, 동대문구 등에 있는 수많은 동네 이름 역시 鄭道傳이 작명한 한성부의 5部(부) 52坊(방)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朝鮮」이라는 국호도 그가 제정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사자를 明나라로 보내 「조선」과 「和寧(화녕)」의 복수안을 올렸다. 화녕은 지금의 함흥으로 李成桂(이성계)의 고향이다. 그러나 화녕은 예우 차원에서 선택권을 주기 위해 일부러 끼워 넣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선」을 새 왕조의 국명으로 삼고자 하는 鄭道傳의 치밀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도성의 造營(조영)이 끝났을 때 太祖 李成桂는 鄭道傳을 위한 연회를 베풀면서 「儒宗功宗(유종공종)」이라는 휘호를 하사해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는 유학도 으뜸이고, 나라를 세운 功도 으뜸이라는 뜻이다.
 
  경복궁은 鄭道傳의 정신이 숨쉬는 곳이다. 19세기 중엽 대원군이 경복궁을 重建(중건)하면서 수백 년 동안 역신으로 간주된 그를 복권시키면서 文憲公(문헌공)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鄭道傳은 일찍이 경복궁의 의연한 모습을 이같이 읊은 바 있다.
 
  <城高鐵甕千尋
  雲繞蓬萊五色
  年年上苑鶯花
  歲歲都人遊樂
 
  철옹성 같은 도성은 높이가 천길
  구름에 쌓인 무악은 오색이 가득
  철마다 꽃과 새들 궁원을 찾으니
  날마다 도성 사람 즐거이 노니네>
 
  이는 鄭道傳이 李芳遠(이방원)의 자객에게 刺殺(척살)당하기 넉 달 전에 읊은 「新都八景詩(신도팔경시)」의 한 대목이다.
 
복원된 景福宮 전경. 景福宮 및 宮內 殿閣들의 이름은 鄭道傳이 지었다.

 
  아버지는 청백리, 외조모는 노비 출신
 
  鄭道傳은 고려 말 忠惠王(충혜왕) 복위 3년(1342)에 홍복도감의 판관으로 있던 鄭云敬(정운경)의 3男1女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부친이 봉직하던 개경과 외가가 있는 충청도 단양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개경 동남방에 있는 지금의 북한산(삼각산) 부근에서 살았다. 그의 호 三峰(삼봉)은 삼각산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본관은 경상도 奉化(봉화)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조 내내 봉화지역의 토착 鄕吏(향리)였다. 봉화 鄭氏 집안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부친 鄭云敬 때부터였다.
 
  鄭云敬은 젊었을 때 같은 鄕吏 출신으로 福州(복주: 경북 안동)에서 司錄(사록)의 벼슬을 지내던 7세 연상의 李穀(이곡)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鄭道傳이 李穀의 아들 牧隱(목은) 李穡(이색)과 가까운 사이가 된 것도 부친 때부터의 世交(세교)에 기인한 것이었다.
 
  鄭云敬은 26세 때인 1330년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상주목사에 제수된 뒤 지방관을 지내다가 成均司藝(성균사예)와 양광도 안렴사 등을 거쳐 1353년에 전주목사로 나갔다가 공민왕 5년(1356)에 병부시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 8년(1359)에는 형부상서에 제수되었으나 몇 년 뒤 병으로 사퇴하고 榮州(영주)로 돌아와 요양하다가 1366년에 62세를 일기로 죽었다.
 
  「고려사」 良吏傳(양리전)에 따르면 鄭云敬은 청백리였다.
 
  그는 수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청렴하고 강직한 자세로 善政(선정)을 베풀면서 집안에는 일체의 재물을 들여 놓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의 처자식은 늘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鄭道傳은 토착 향리 집안 출신이기는 했으나 뛰어난 부친을 둔 만큼 당대의 세족들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母系는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고려사」에는 그의 政敵(정적)들이 그를 두고 「家風(가풍)이 부정하고 派系(파계)가 밝지 못하다」고 탄핵한 대목이 곳곳에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원년 8월 조는 그의 母系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世族 禹賢寶(우현보)의 族人 중에 金?(김전)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어 자신의 종인 樹伊(수이)의 아내와 몰래 통정해 딸 하나를 낳았다. 뒤에 김전이 환속해 수이를 내쫓고 그의 처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김전은 딸을 士人(사인) 禹延(우연)에게 시집 보냈다. 이후 우연은 딸을 하나 낳은 뒤 貢生(공생) 鄭云敬에게 보냈다. 훗날 鄭云敬은 벼슬이 형부상서에 올랐다. 鄭云敬은 아들 3명을 두었다. 鄭道傳이 그 맏아들이다>
 
  노비의 아내가 환속한 주인과 私通(사통)해 낳은 딸이 바로 鄭道傳의 외조모였던 것이다. 嫡庶(적서)의 차별이 없었던 당시에도 이는 「派系가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鄭道傳의 외조부인 우연은 왜 김전의 딸과 결혼한 것일까. 두문동 72현의 하나인 車原?(차원부)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車文節公遺事(차문절공유사)」에 그 해답이 있다.
 
  이에 따르면 우연은 원래 중랑장 車公胤(차공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연은 차공윤의 딸을 정처로 맞이한 뒤 鄭道傳의 외조모를 첩으로 거느렸던 것이다.
 
  조선개국을 반대했던 차원부는 鄭道傳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까닭에 鄭道傳의 외가에 관한 추문을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易姓革命을 꿈꾸다
 
조선 太祖 李成桂.

  鄭道傳은 부친 鄭云敬이 나이 38세에 얻은 자식으로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난 데다 好學(호학)했다. 당시는 고려조가 안팎의 시련으로 패망의 기운이 짙게 감도는 난세였다. 모든 여건이 鄭道傳이라는 인물을 시대의 풍운아로 만드는 데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배경은 世人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환관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명민했던 삼국시대의 曹操(조조)와 매우 닮아 있다. 다만 조조는 스스로 軍馬를 이끌고 천하를 호령코자 한 데 반해 鄭道傳은 李成桂라는 武人을 앞에 내세워 자신의 이상을 펼친 점이 다르다.
 
  이 점에서는 漢고조 劉邦(유방)을 앞에 내세워 天下一統의 大業을 이룬 前漢제국의 일등공신 張良(장량)과 닮아 있다. 그러나 장량은 功을 이룬 뒤 몸을 숨기는 소위 「功成身退」의 처신으로 천수를 다한 데 반해 鄭道傳은 李芳遠의 의심을 사 비명횡사했다.
 
  鄭道傳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당시 鄭夢周(정몽주)를 비롯해 李崇仁(이숭인)과 李存吾(이존오), 金九容(김구용) 등 훗날 성리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쟁쟁한 인물들이 이색의 문하에서 鄭道傳과 함께 공부했다.
 
  마침 공민왕이 反元·親明策(반원·친명책)을 펴면서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대폭 강화하기 시작했다. 鄭道傳은 공민왕 9년(1360)에 성균시에 합격한 뒤 부인 최씨와 결혼해 이듬해에 맏아들 鄭津(정진)을 얻었다. 이어 2년 뒤에 진사시험에 급제해 벼슬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충주의 司錄을 거쳐 개경으로 돌아와 종7품인 典校主簿(전교주부)로 봉직하다가 이내 왕의 비서직에 해당하는 정7품의 通禮門祗侯(통례문지후)로 승진했다. 얼마 후 공민왕이 신돈을 총애하자 이에 실망한 鄭道傳은 이내 사직서를 낸 뒤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했다.
 
  그가 낙향한 이듬해에 부친 鄭云敬과 모친 우씨가 잇달아 사망했다. 鄭道傳은 3년 동안 부친의 고향인 榮州로 내려가 侍墓(시묘)했다. 이때 마침 鄭夢周가 그에게 「孟子」 한 권을 보내 주었다. 鄭道傳은 하루에 한 장 혹은 반 장씩 정독하며 孟子의 「易姓革命(역성혁명)」 주장에 공감했다.
 
  鄭道傳이 고려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만들고자 하는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대략 이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鄭道傳은 3년喪(상)을 마친 뒤 1369년에 삼각산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공민왕이 1371년에 신돈을 伏誅(복주)한 뒤 대대적인 성균관 개혁을 단행했다. 이색이 성균관 大司成(대사성)이 되고 鄭夢周와 이숭인 등이 교관으로 임명되자 이들과 교분이 두터웠던 鄭道傳도 이들의 천거로 정7품의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성균박사의 자리는 명륜당에서 유생들에게 유가 경전을 가르친 뒤 교관들과 서로 성리학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당시 성균관에서는 鄭夢周가 이론에 가장 밝았다. 鄭道傳은 이들과 토론하면서 「논어」와 「맹자」를 비롯한 儒家 경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게 되었다.
 
  얼마 후 鄭道傳은 종6품인 禮儀正郞(예의정랑)으로 승진해 성균박사와 국가의 제사의식을 관장하는 太常博士(태상박사)의 업무를 겸하게 되었다.
 
 
  親元정책에 반대하다가 9년간 귀양살이
 
나주 귀양살이 당시 鄭道傳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鄭道傳이 33세 때인 1374년 9월, 공민왕이 시해당했다. 뒤를 이어 禑王(우왕)이 즉위하자 권문세족인 李仁任(이인임)과 廉興邦(염흥방) 등이 등장해 공민왕이 추진해 온 개혁정치를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다. 당시 고려왕조는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현상이 극에 달해 있었고, 왜구의 침입 또한 극심해 亡國의 징후가 뚜렷했다.
 
  이듬해 초 明나라 반군에 쫓겨 몽골고원에서 元(원)제국의 잔명을 이어 가던 北元(북원)의 사자가 고려를 찾아왔다. 이는 고려와 힘을 합쳐 明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을 논의키 위한 것이었다. 親元派인 이인임 등이 鄭道傳을 영접사로 임명해 北元의 사자를 영접케 했다. 鄭道傳이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大怒(대로)한 이인임은 鄭道傳을 전라도 나주 회진현에 있는 居平(거평) 부곡으로 귀양 보냈다. 鄭道傳은 거평 부곡 내에 있는 消災洞(소재동)이라는 산간마을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목도했다. 「삼봉집」에 실려 있는 「家難(가난)」에는 당시 그의 부인 최씨가 보낸 서신의 내용이 수록돼 있다.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글만 읽으면서 아침에 밥이 끓는지 저녁에 죽이 끓는지 간섭하지 않습니다. 집안에는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식량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 춥고 배고프다고 울어 댑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마다 꾸려 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니 뒷날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 영광이 오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끝내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氣(장기)나 마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이 여지없이 蕩散(탕산)하여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賢人과 君子라는 것이 정말 이런 것입니까>
 
  하늘처럼 믿고 있는 남편에 대한 절절한 원망이 배어 나는 글이다.
 
  鄭道傳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다.
 
  <나에게 朋友(붕우)가 있어 情(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소.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勢(세)로써 맺어지고 恩(은)으로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오. 부부관계는 한번 맺어지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 것이오.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그대가 집을 근심하고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름이 있겠소. 각자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을 뿐이오. 成敗(성패)와 利害(이해), 榮辱(영욕), 得失(득실) 모두 하늘이 정한 것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鄭道傳의 답장에는 가정 및 국가에 대한 근심과 더불어 세인들의 구설과 친구의 배신에 대한 분노가 감춰져 있다. 당시 鄭道傳은 백성들이 의외로 순박하고 유식한 데 크게 놀랐다. 그가 유배지에서 일상적으로 접한 사람은 田父(전부: 농민)였다.
 
  「答田父(답전부)」는 鄭道傳이 부곡 농민의 예리한 세태풍자에 감동되어 쓴 것으로 이름 없는 田父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잘 나타나 있다. 鄭道傳은 田父의 식견에 놀라 그를 「隱君子(은군자)」로 칭송하면서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田父는 농사를 지어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천분으로 알고 살아가는 농민이라고 겸양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鄭道傳은 귀양 3년째에 從便(종편: 편한 곳으로 옮김) 조치로 인해 삼각산 밑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산 밑에 「삼봉재」라는 오두막을 짓고 사방에서 모여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얼마 후 제자들을 이끌고 김포로 이사했다.
 
 
  李成桂와의 만남
 
  세월은 유수같이 지나가 어느덧 유배생활이 9년간에 달하게 되었다. 이 기간은 鄭道傳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그는 스스로 밭갈이를 하면서 의식을 조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 그는 「혁명」의 뜻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鄭道傳은 마침내 우왕 9년(1383) 가을에 지금의 함흥인 咸州(함주)에서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는 李成桂를 찾아갔다. 이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鄭道傳이 왜구 토벌로 명성이 높았던 무장 李成桂를 찾아간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혁명을 모의키 위한 것이었다. 鄭道傳은 李成桂의 군대가 기강이 잡히고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혁명의 성공을 확신했다. 鄭道傳은 이듬해인 봄에 김포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 다시 함주의 李成桂를 찾아갔다. 대략 이때 혁명을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마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해에 鄭道傳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나주로 귀양간 지 꼭 10년 만이었다. 鄭道傳은 이내 典儀副令(전의부령)의 자격으로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鄭夢周를 따라 明나라 수도인 金陵(금릉: 남경)에 다녀오게 되었다. 이는 우왕이 왕위에 오른 것을 승인받고 시호 책봉을 요구키 위한 것이었다.
 
  鄭道傳은 使行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 4월에 종3품인 成均祭主(성균제주)로 승진했다. 얼마 후 그는 外職을 거쳐야만 하는 관례를 좇아 자원해서 경기도 南陽府使(남양부사)로 내려갔다가 이내 守門下侍中(수문하시중)으로 승진한 李成桂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 大司成이 되었다. 마침내 鄭道傳은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때 그이 나이 46세였다.
 
  이듬해인 우왕 14년(1388) 4월, 遼東(요동)출병이 이뤄졌다. 이는 문하시중으로 있던 崔塋(최영)의 강요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조선조 건국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李成桂는 5월22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최영이 제거된 뒤 우왕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이 창왕으로 즉위했다. 이듬해에 창왕마저 폐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했다.
 
 
  田制개혁
 
鄭道傳의 동지이자 政敵이었던 鄭夢周.

  당시 鄭道傳은 「廢假立眞(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세웠다. 「우왕이 사실은 신돈과 반야라는 여종 사이에 태어난 가짜인 까닭에 왕씨의 후손인 공양왕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당시의 석학인 趙浚(조준) 및 鄭夢周 등도 동조했다.
 
  그러나 이색은 우왕과 창왕의 폐위를 반대했다. 그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파면되고 말았다.
 
  鄭道傳은 곧 민심을 잡기 위해 백성들의 숙원사업인 田制改革(전제개혁)에 착수했다. 이는 李成桂 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제개혁에 대한 鄭道傳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전국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한 뒤 인구수에 따라 나눠 주고자 했다.
 
  이를 소위 「計民授田(계민수전)」이라고 한다. 그는 토지수확의 반을 가져가는 지주제를 부당한 것으로 보고 국가는 수확의 10분의 1을 거두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맹자가 주창한 井田制(정전제)의 이상을 구체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지주 출신의 관료는 물론 그간 가깝게 지내며 성리학을 함께 공부한 학우들과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때 鄭夢周는 田制개혁에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내심 鄭道傳의 야심을 읽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에 鄭道傳은 南誾(남은)과 沈孝生(심효생) 등을 새로운 혁명동지로 끌어들였다. 당시 李成桂 일파에 의해 옹립된 공양왕은 유약한 인물로 단지 李成桂 일파의 개혁안을 추인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鄭道傳은 평소에 생각했던 개혁의 구상안을 새 왕조 건립에 앞서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그는 공양왕 2년(1390)에 관직 개선책으로 敎養(교양: 인재교육)과 選擧(선거: 관료선발), 銓注(전주: 관직임명), 考課(고과: 성적평가), 黜陟(출척: 승직과 면직) 등 5조목을 제시해 실천에 옮겼다.
 
  이해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파평군 尹彛(윤이)와 중랑장 李初(이초)가 明나라 황제 朱元璋(주원장)을 찾아가 『공양왕은 왕씨가 아닌 李成桂의 친척이고, 李成桂는 장차 군마를 조련해 요동을 침공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고 무고했다.
 
  明나라의 힘을 빌려 李成桂 일파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鄭道傳이 곧 성절사로 가 이를 해명하며 사건을 일단 무마시켰으나 주원장은 의심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스승인 李穡을 제거
 
  鄭道傳은 공양왕 3년(1391) 정월에 종래의 5軍제도를 혁파하고 三軍都摠制府(삼군도총제부)를 만들었다. 이때 도총제사에 李成桂, 좌군총제사에 趙浚, 우군총제사에 鄭道傳이 취임했다. 이들 3人이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새 왕조 건립에 따른 모든 준비를 완료하게 된 것이다.
 
  이때 鄭道傳은 同判都評議使司(동판도평의사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며 文官의 인사권을 장악한 데 이어 武官의 인사에 관한 軍政權(군정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이해 4월에 공양왕이 백관들에게 災異(재이)를 극복키 위한 求言(구언)의 교지를 내리자 鄭道傳은 이를 빌미로 이색 및 우현보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鄭道傳은 왜 스승인 이색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일까?
 
  논리적으로 볼 때 당시 「廢假立眞」을 내세워 멋대로 군왕을 폐립한 李成桂 일파로서는 우왕과 창왕을 옹립하는 데 앞장선 이들을 용납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이는 곧 스스로 반역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된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새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할 길이 없었다. 스승 이색에 대한 단죄를 요구한 鄭道傳의 모습에서 혁명가로서의 냉혹한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이색이 귀양을 가게 되자 鄭道傳은 곧바로 소위 「科田法(과전법)」으로 불리는 田制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舊세력은 권력과 무력을 빼앗긴 데 이어 자립기반마저 잃게 되었다.
 
  이때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반대세력이 최후의 반격을 가했다. 이해 9월에 대사헌 金湊(김주)와 형조의 관원들이 鄭道傳을 탄핵하고 나섰다. 공양왕이 곧 그 뜻을 읽고 곧바로 鄭道傳을 平壤府尹(평양부윤)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관직을 삭탈해 귀양을 보냈다.
 
  그러나 李成桂 일파의 지원으로 鄭道傳은 이듬해인 공양왕 4년(1392) 봄에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반대세력은 鄭道傳을 제거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鄭道傳을 제거하지 않고는 心腹之患(심복지환)인 李成桂의 세력을 거세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易姓革命
 
  공교롭게도 이해 4월 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자 반대세력들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들고 일어났다. 鄭夢周는 간관을 총동원해 반격을 가했다. 鄭道傳 등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당시 鄭夢周는 鄭道傳 등을 제거한 뒤 李成桂를 무력화하는 방안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이해 4~7월은 혁명파와 反혁명파 사이에 생사를 건 일전이 벌어진 해였다. 오랫동안 李成桂 일파와 행보를 같이 해 오다가 田制개혁 때부터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鄭夢周는 차제에 李成桂 일파를 완전히 거세하고자 했다. 공격의 화살은 鄭道傳과 조준, 남은 등 세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내심 크게 기뻐한 공양왕은 鄭夢周 등과 협의해 鄭道傳을 영주 봉화에서 체포해 甫州(보주: 예천)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때 李芳遠(이방원)이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심복 趙英珪(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鄭夢周를 격살하게 한 뒤 대역죄를 뒤집어씌워 그의 시신을 개성의 저잣거리에 효수했다. 이로써 상황은 일거에 반전되었다. 당시 李芳遠의 나이는 26세였다.
 
  李芳遠의 과감한 조치는 위기에 빠진 李成桂를 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鄭夢周가 제거되자 李成桂 세력을 견제할 힘을 잃고 만 공양왕은 이내 鄭道傳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이해 7월17일 鄭道傳은 마침내 조준 및 남은 등과 합세해 52명의 대소신료의 뜻을 담아 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475년간 유지된 고려의 사직이 무너지고 새 왕조가 탄생했다.
 
한양 全圖

 
  새 왕조의 全權 장악
 
  李成桂는 개경의 壽昌宮(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백관의 최고 합좌기관인 도평의사사의 인준을 얻어 새 왕조 건국의 합법성을 획득했다.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원도 간성으로 옮겨진 뒤 다시 3년 뒤에 삼척으로 쫓겨났다가 이내 그곳에서 죽었다.
 
  鄭道傳은 새 왕조에서 문하시중의 다음 직책인 종1품의 門下侍郞贊成事(문하시랑찬성사)에 임명되어 최고정책결정기구의 수장인 同判都評議使司事(동판도평의사사사)와 국가경제를 총괄하는 判戶曹事(판호조사),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判尙瑞司事(판상서사사), 李成桂의 親兵인 義興親軍衛(의흥친군위)의 節制使(절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는 文翰(문한)의 책임을 맡는 寶文閣大學士(보문각대학사)와 왕을 교육하고 역사를 편찬하는 知經筵藝文春秋館事(지경연예문춘추관사)도 겸했다. 이로써 鄭道傳은 정책결정과 관료인사, 국가재정, 군사지휘, 교서작성, 역사편찬 등 새 왕조 경영에 필요한 모든 요직을 한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얼마 후 鄭道傳은 李成桂가 왕이 된 뒤 최초로 선포한 17조의 便民事目(편민사목)을 발표했다. 이 교서에는 종묘사직의 제도를 비롯해 학교 및 과거제도 정비, 국가재정의 수지문제, 과전법의 준수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는 이색과 이숭인, 우현보 등 56명의 反혁명 세력에 대한 처벌도 언급되어 있다. 이색 등 4명은 유배형을 받았으나 李成桂에 의해 감형되었다. 그러나 이숭인을 포함해 이들의 일부 후손 및 추종자들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鄭道傳은 이해 8월에 裵克廉(배극렴)과 조준 등의 공신들과 더불어 세자 책봉 문제를 태조에게 건의했다. 李成桂는 계비인 姜妃(강비) 소생의 큰아들 芳蕃(방번)을 세자로 책봉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배극렴 등은 방번의 행실이 거칠다는 이유로 강씨의 둘째 아들인 芳碩(방석)을 거론했다. 태조가 이에 동조했다. 이로써 후사문제까지 鄭道傳이 바라는 바대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李芳遠과 대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鄭道傳은 李成桂 사후에 寶位(보위)를 위협할 가장 위험한 인물로 李芳遠을 꼽고 있었다.
 
 
  한양 遷都를 지휘
 
鄭道傳을 제거하려 했던 明태조 주원장.

  얼마 후 鄭道傳은 조선을 대표해 문하시랑찬성사의 자격으로 啓稟使(계품사) 및 謝恩使(사은사)가 되어 明나라로 갔다. 이는 새 왕조 창업의 전말을 알리고 신년인사를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태조 2년 3월에 귀국한 鄭道傳은 얼마 후 동북면 都安撫使(도안무사)로 나가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고 돌아왔다. 조선조 개국 후의 모든 사업이 鄭道傳의 손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태조 3년(1394) 정월 鄭道傳은 중앙군의 최고책임자인 判義興三軍府事(판의흥삼군부사)가 되었다. 의흥삼군부는 고려 말에 설립된 삼군도총제부를 개편한 것으로 새 왕조의 군사를 통할하는 최고기구였다. 李成桂의 親兵인 의흥친군위도 이 기구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왕자와 宗親 절제사들이 侍衛牌(시위패)로 불리는 사병을 거느리면서 이에 반발했다.
 
  鄭道傳은 곧 8개 조목의 兵制개혁안을 올렸다. 왕자나 절제사들이 나눠 갖고 있던 군대통수권과 사병을 혁파해 官兵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골자였다.
 
  이때 李成桂의 관심은 온통 한양 遷都(천도)에 있었다. 그는 한양의 毋岳(무악)을 주산으로 하여 도읍을 건설하자는 河崙(하륜)의 의견을 듣고 직접 지금의 신촌 일대를 답사하는 등 일을 서둘렀다.
 
  당시 대부분의 관료들이 오랜 근거지인 개경을 떠나는 것에 반대했다. 이에 李成桂는 여러 재상들로 하여금 새 수도 후보지에 대한 의견을 올리도록 명한 뒤 직접 지금의 청와대 일대를 답사하고 지관인 尹莘達(윤신달)의 의견을 물었다.
 
  윤신달이 한양이 개경 다음으로 좋은 곳이라고 하자 李成桂는 王師(왕사) 無學大師(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무학대사도 같은 의견이었다.
 
  천도를 결심한 李成桂는 곧 신하들의 의견을 물은 뒤 신도궁궐조성도감 설치를 명했다. 鄭道傳이 곧 천도사업의 총책임자가 되어 신도궁궐조성도감 판사들과 더불어 한양에 내려와 종묘와 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도면을 그려 바쳤다.
 
  이해 10월28일 李成桂를 비롯한 대소신료가 3일 만에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다.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된 지 두 달도 채 안 돼 遷都가 단행된 것이다. 이때는 아직 궁궐을 비롯한 토목공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때였다.
 
  李成桂는 漢陽府(한양부)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
 
  태조 4년(1395) 3월에 鄭道傳은 세자로 책봉된 방석의 스승이 되어 그에게 「孟子」를 가르쳤다. 6월에는 판삼사사로서 「경제문감」을 지어 바쳤다. 이 책은 한 해 전에 편찬한 「조선경국전」의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으로 鄭道傳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인 재상 중심의 관료국가의 구체적인 모습이 소상히 드러나 있다.
 
  이해 9월 드디어 궁궐과 종묘가 완공되어 12월에 새 궁궐로 이사했다. 기공식이 있은 지 꼭 1년 만의 일이었다. 모든 것이 鄭道傳이 생각하는 바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鄭道傳 제거에 나선 明나라
 
  그러나 鄭道傳이 55세가 되던 태조 4년(1395)에 이르러 승승장구하던 鄭道傳에게 시련이 닥쳐 왔다. 그 시련은 밖으로부터 왔다. 이를 흔히 「表箋文(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는 明나라가 이해 정월에 「조선에서 보낸 신년 축하의 글 중 황실을 戱侮(희모: 희롱하여 모독함)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생트집을 잡은 사건을 말한다. 이 표전문은 원래 성균관 대사성 鄭擢(정탁)이 짓고 權近(권근)이 교정한 것이었다.
 
  당초 비적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거머쥔 주원장은 자신의 떳떳지 못한 前歷(전력)으로 인해 자신의 전력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병적인 반응을 보였다. 明나라 개국 초에 빚어진 수많은 필화사건은 모두 이로 인한 것이었다.
 
  주원장은 조선에 대해서도 의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윤이와 이초 등이 李成桂를 모함할 때부터 시종 조선이 北元과 합세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實勢(실세)인 鄭道傳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李成桂는 明나라의 압력에 굴복해 실무 책임자인 金若恒(김약항)을 明나라로 압송했다. 그러자 明나라는 압력의 강도를 높여 최종 결재자인 鄭道傳을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李成桂는 절충안으로 대사성 정탁 밑의 실무자였던 정총과 盧仁度(노인도) 등을 추가로 압송하면서도 鄭道傳에 대해서만큼은 여러 이유를 대어 피해 나갔다. 鄭道傳 역시 자신의 나이가 이미 55세인 데다가 각기병까지 겹쳐 표전문을 고칠 사이가 없었다고 해명하면서 明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때 李成桂는 주원장의 반발을 염려해 鄭道傳이 맡고 있던 삼사판사 자리에 ?長壽(설장수)를 임명하고 鄭道傳을 奉化伯(봉화백)에 봉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도록 조치했다.
 
  이듬해인 태조 6년(1397)에 들어와서도 긴장은 계속되었다. 이해 4월에 明나라에 갔던 조선의 사은사 설장수가 明나라 禮部(예부)의 咨文(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내용 중에는 鄭道傳을 조선의 禍源(화원)으로 지목하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鄭道傳은 이를 정면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곧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해 10월에 鄭道傳은 새로 설치된 有備庫(유비고)의 책임자가 되었다. 유비고는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明나라의 鄭道傳에 대한 공세는 집요했다. 이해 11월 중순에 明나라에서 돌아온 성절사 鄭允輔(정윤보)가 충격적인 소식을 갖고 왔다. 정총과 노인도 등이 주원장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왜 이런 일이 빚어진 것일까.
 
  이는 엄밀히 따지면 정총 등이 자초한 측면이 컸다. 원래 明나라는 권근 등이 사자로 갔을 때만 해도 이내 정총 등을 방면하겠다며 유람도 시켜 주고 새 옷도 주었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 권근은 주원장이 준 옷을 입었으나 정총 등은 태조의 비인 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복을 입었다. 이에 대로한 주원장은 권근만 돌려보내고 정총 등은 잡아서 신문하게 했다. 정총 등은 신문 도중 죽고 말았다.
 
 
  鄭道傳은 요동정벌을 꾀했나?
 
  이해 12월에 兵權의 최고책임자인 판의금삼군사의 자리를 조준이 겸임케 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는 鄭道傳의 요동정벌 계책을 완강히 반대한 조준에게 요동정벌 추진의 멍에를 씌워놓은 것으로 해석해 놓았다.
 
  「태종실록」에 나오는 조준의 卒記(졸기)에 따르면 당시 개국공신 남은과 세자 방석의 장인인 沈孝生(심효생) 등이 李成桂에게 요동정벌을 설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李成桂가 鄭道傳을 불러 의견을 구하자 鄭道傳은 지난날 주변의 異民族으로 中原을 정복한 金나라와 元나라 등을 예로 들며 요동정벌을 권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의 주장은 바로 여기에 토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사건이 왜 하필이면 「태종실록」에 실려 있는 조준의 卒記에만 나오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鄭道傳이 원래부터 고구려의 옛 강토를 수복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태조실록」이 고의적으로 鄭道傳의 긍정적인 측면을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鄭道傳은 생전에 고구려 강토의 회복이 자신의 원대한 이상이라고 말한 적이 전혀 없다. 그의 문집과 저술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커녕 암시조차 없다. 실록에도 그런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明나라의 승인을 얻어 신생 조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鄭道傳이 明나라 침공이 빤히 예상되는 遼東에 대한 선제공격을 계획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략 鄭道傳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를 형성하는 데 최대 걸림돌이 되어 있는 私兵을 혁파하기 위해 明나라와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활용하고자 했을 공산이 크다.
 
 
  私兵혁파
 
  이해 12월 鄭道傳은 의흥삼군부 판사 자리를 좌정승 조준에게 내준 뒤 동북면 도선무순찰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함경도內 각 지역을 구획하고 호구 등을 점검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이는 사실상 백의종군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鄭道傳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鄭道傳은 이듬해 초까지 함경도 일대를 정비하는 일에 열중했다. 李成桂는 태조 7년(1398) 3월에 鄭道傳이 한양으로 돌아오자 연회를 베풀고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때 남은이 鄭道傳을 대신해 私兵 혁파를 위한 군사훈련 강화책을 건의했다. 李成桂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에 훈련을 게을리 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처벌되었다. 이해 8월1일에 李成桂는 사헌부에 명하여 군사훈련을 게을리 하는 자를 문책케 했다.
 
  사흘 뒤 사헌부에서 삼군절제사와 상장군, 대장군, 군관 등 모두 292명을 탄핵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李芳遠을 비롯해 방번과 방과, 방간 등의 왕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왕과 가까운 친족이라는 이유로 사면되었으나 이들이 거느리고 있던 휘하 장수들은 모두 50대의 태형을 받았다.
 
  이해 8월에 들어와 明나라와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자 마침내 私兵이 혁파되고 이에 협조를 거부하던 반대세력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鄭道傳이 요동정벌을 私兵혁파를 위한 수단으로 강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대목이다.
 
 
  王子의 난
 
  이때 또 다른 혁명아 李芳遠은 다시 한 번 비상수단을 강구했다. 李芳遠은 거사 날짜를 8월26일 새벽 2시경으로 잡았다. 실록은 「鄭道傳이 庶孼(서얼)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과 종친들을 모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李芳遠이 선수를 쳐 鄭道傳 일파를 제거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8월26일 밤에 鄭道傳은 남은 및 심효생 등과 함께 왕자들을 죽이기 위해 松峴(송현: 현재의 중학동)에 있는 남은 첩의 집에 모여 모의를 했다. 李成桂가 위독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여러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인 뒤 곧바로 병사들을 동원해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때 李芳遠은 처남인 閔無咎(민무구)와 심복인 李叔蕃(이숙번)과 趙英茂(조영무) 등과 함께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다가 마침 入宮하라는 승지의 전갈을 받고 궁으로 들어가다가 궁 안에 등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의심이 들어 궁을 뛰쳐나와 자택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李芳遠은 곧 이숙번 등과 함께 기병 10명, 보졸 9명, 노복 10여 명을 데리고 鄭道傳이 있는 송현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李芳遠은 보졸들로 하여금 鄭道傳이 있던 집 주위를 둘러싼 뒤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지르게 했다.
 
  이에 놀란 鄭道傳 등은 집을 뛰쳐나와 피신하다가 李芳遠의 보졸들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李芳遠은 鄭道傳을 죽인 뒤 삼군부로 가서 화염을 보고 달려온 찬성 柳曼殊(유만수)와 친군위 都鎭撫(도진무) 朴?(박위)를 참수했다.
 
  이복동생 방번도 楊花渡(양화도) 부근에서 죽이고, 세자 방석도 궁성 서문 밖에서 참살했다. 심효생 등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남은은 몸을 피해 성문 밖으로 도주하다가 李芳遠의 군사에게 붙잡혀 참수당했다.
 
  당시의 정황은 鄭道傳이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한꺼번에 죽이려고 했다는 실록의 기록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당시 鄭道傳은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과 궁 안에 아무 병력도 배치하지 않은 채 왕자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鄭道傳의 죽음과 관련해 실록은 「戊寅難(무인난)」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後世의 史家들은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臣權국가를 꿈꾸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鄭道傳의 祠堂 文憲祠.

  鄭道傳이 만들고자 했던 조선은 君王의 나라가 아닌 신하들의 나라였다. 이는 당시 그가 「경국대전」에서 의정부의 기능으로 總百官(총백관: 백관을 총괄함), 平庶政(평서정: 일반 정서를 처리함), 理陰陽(이음양: 만물의 和氣를 다스림), 經邦國(경방국: 나라를 경영함)을 든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周禮(주례)」에 나오는 이상국가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으로 재상 중심의 臣權(신권)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현대의 내각책임제와 매우 흡사한 통치체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갓 개국한 조선조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통치체제였다.
 
  그의 이런 구상은 조선 개국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李芳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李芳遠은 功臣대열에 끼지도 못하고 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난 데다 私兵마저 혁파되어 武力的 기반을 완전히 상실해 있었다.
 
  그는 鄭道傳이 조선왕조를 창업한 뒤 취중에 곧잘 「漢고조 유방이 子房(자방: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방이 漢고조를 이용했다」며 자신의 功을 은근히 자랑한 사실에 전율했다.
 
  역사상 창업과정에서 大功을 세운 공신들이 취중에 함부로 입을 놀리다가 횡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鄭道傳은 「功成身退」의 이치를 무시 내지 간과한 채 지나치게 자만에 빠져 있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더구나 李芳遠과 같은 혁명아를 敵으로 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조선조는 연산군이 폐위된 이래 臣權이 급속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하들에 의해 보위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광해군마저 폐위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君王은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구차하게 君王의 입지를 찾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中國은 臣權이 유독 강했던 南宋이 멸망한 이래, 이를 거울삼아 明나라가 들어선 후 줄곧 황제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도 조선은 유독 南宋대를 본받아 「君弱臣强(군약신강)」의 臣權국가로 진행해 갔던 것이다.
 
  대다수 학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만일 당시 李芳遠이 거사를 일으키지 않았을 경우 조선조는 초기에 鄭씨의 나라로 되었거나 「君弱臣强」의 나라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는 조선조의 성리학이 중국의 南宋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명분론으로 치달아 마침내 君王이 신하에게 제압당하는 기형적인 臣權국가를 만들어 낸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조는 中宗 이래 늘 君主權이 臣權에 눌리는 기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亂世(난세)에 커다란 위기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조선조가 후기에 들어와 사상 유례 없는 명분론에 빠져 대세를 그르쳐 마침내 세도정치로 일관하다가 亡國으로 치닫고 만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지나친 美化는 곤란
 
  鄭道傳이 온갖 역경 속에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李成桂를 앞세워 고려 말기의 난세를 구한 혁명아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孟子의 「貴民輕君(귀민경군)」 사상에 입각해 백성을 하늘로 삼는 이상국을 세우고자 한 사실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가 구축코자 했던 理想國은 中原과 일본의 상시적인 침략을 늘 경계해야만 했던 조선조의 입장에서 볼 때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鄭道傳의 爲民(위민)과 民本(민본) 사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조준의 卒記에 나오는 근거 없는 얘기를 토대로 그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고자 하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는 식으로 美化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가 세우고자 했던 재상 중심의 관료국가 역시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춰볼 때 시의에 맞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의도적인 貶毁(폄훼)도 문제지만 지나친 褒譽(포예)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양쪽 모두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미래의 지침으로 삼고자 하는 역사탐구의 기본 취지에 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