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한국文化)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上)

好學 2012. 8. 19. 05:58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上)

 

 


세종, “왕세자빈은 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다워야…”


왕세자빈으로 입궁한 왕비 6명, ‘우회상장’으로 왕비 된 경우 18명
왕세자빈 위한 공식 교육 전무…동성연애와 푸닥거리로 무료함 달래
왕비가 관리하는 살림은 왕도 손 못 대
내외법 강조한 세종 이후 왕과 왕비 별거 생활
성종 비 윤씨, “눈 도려내리라” “손목 자르리라” 하며 왕과 싸워
정치교육 못 받은 왕비·왕대비의 섭정, 왕권 약화로 이어져


필자는 최근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왕세자빈이나 왕비로 책봉됐던 여인들의 생활상을 살펴본 ‘조선의 왕후’(일지사)를 펴냈다.

이 책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에서 정치가로 일생을 보낸 여성의 생활과 활동에 대한 연구이며, 동시에 조선의 결혼과 상례 등을 다룬 풍속사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 조선 왕후의 간택과 입궁 과정, 왕세자빈, 왕비, 왕대비 시절을 간추려 소개함으로써 조선의 정계에 몸담은 여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생활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조선시대 왕은 27명인 반면 왕비는 37명으로 10명이나 더 많다. 이는 훗날 왕비로 추증(追贈)된 경우는 빼고, 왕비로 책봉됐으나 폐비가 되어 선원계보(왕실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왕비를 더한 수다.

  

이 중 어린 나이에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남편인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왕비가 되고, 왕이 죽은 뒤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함으로써 대비가 되어 죽은, 전형적인 왕후의 삶을 산 이는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 단 한 명뿐이다. 이를 포함해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궁에 들어가 왕비가 된 경우도 6명에 불과하다.

  

반면 결혼 후 남편이 변칙으로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이는 11명,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경우도 7명이나 된다. 이러한 통계는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으며, 궁궐 내 생활이 얼마나 불안하고 살벌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元에 처녀 조공하면서 간택 시작

 

조선시대에 대부분의 왕은 10세 안팎에 나이가 비슷한 처녀와 결혼을 했다. 따라서 왕세자빈도 대개 10세 전후에 입궁했는데, 그전에 ‘간택’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왕실은 왕세자의 결혼을 앞두고 왕세자의 나이와 비슷한, 9∼13세 처녀의 금혼령을 내린 후 전국의 처녀들 중에서 왕세자빈을 뽑았다.

 

초기에는 간택사를 지방으로 내려보내 처녀를 뽑아 서울로 데려오도록 한 후, 다시 왕궁에서 왕실의 인원과 정부요인들이 모여 오늘날 미인대회를 하듯이 이들의 인물을 보고 그중에서 왕세자빈을 뽑았다.

 

중종 때부터는 부모의 성명과 아버지의 관직 혹은 작위를 적은 처녀단자를 받아 그중에서 1차로 뽑힌 처녀를 궁중에 모아놓고 세 번의 간택을 했다.

 

17세기 유학자 유형원(柳馨遠)은 그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조선 태종 때 간택이 시작됐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간택은 이미 고려 때 원나라에 처녀 조공을 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다.  

조선이 선 후에도 명나라가 계속 처녀 조공을 원해, 사신이 올 때마다 간택사들이 전국에서 간택한 처녀들을 서울로 데려오면 왕이 이들을 경복궁에 모아놓고 직접 뽑아서 명나라로 보냈다.

 

태종은 한 번에 250∼300명의 처녀 중 40∼50명을 뽑았는데, 이들은 명에 보내져 왕후공작들의 첩으로 분배됐다. 이를 본떠 태종도 간택사를 각 지방으로 보내 처녀를 간택,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간택은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세종이 간택을 통해 3년간 고르고 골라 맞아들인 왕세자(문종)빈 휘빈 김씨를 2년 만에 투기죄로 이혼시키고 다시 왕세자빈을 간택하려 하자 “간택은 인물만 보는 것이지 부인의 덕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관리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세종은 “왕세자빈은 부덕(婦德)이 중요하나 자세 또한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 뒤로도 정부 대신 중에는 간택제도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었다. 선조의 결혼을 앞두고 이이(李珥)와 오건(吳健)이 나서 “가법이 올바르며 인자하고 현명한 이의 딸을 왕비로 맞이해야 하는데, 간택은 단지 인물만 보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왕망(王莽)의 딸도 아버지는 역적이나 효부였으니 반드시 부모를 들출 게 없다”며 간택을 고집했다.

  

반면 정조는 간택제도에 회의적이었다. 정조는 왕세자빈을 간택할 때 “이제 간택의 제도를 버리고 중매를 통해 명문의 숙녀를 널리 구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어느 집안의 처자인지 알지 못하니 하늘이 정해주지 않는 것이 없다. 어찌 인력이겠는가. 오직 하늘의 도움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경들은 인척 중에 서로 전하여 알아보라”고 명했다.

간택제도는 이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세종 이후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져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문자를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왕세자빈이 정해지면 혼례는 주자(朱子)가 정한 가례에 따라 여섯 번의 의례로 치러졌다.

먼저 왕세자의 부모가 왕세자빈 후보의 부모에게 혼사를 청하는 서한을 보내고(납채례), 그 다음으로 혼수를 보내고(납징례), 신부 집에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의식인 고기례를 치렀다. 왕세자빈 후보는 혼례를 치름으로써 왕세자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세자빈으로 책봉받은 후에 왕세자와 결혼했다.

  

결혼식이 있기 전에 왕세자빈의 책빈례를 행하고, 그 후에 왕세자가 왕세자빈의 집으로 가서 왕세자빈을 친히 맞이하는 친영례를 행한 다음 왕세자빈을 궁으로 인도하여 궁에서 결혼식에 해당하는 동뢰연을 치렀다. 조선이 존재한 519년 동안 치러진 왕의 결혼을 살펴보면 간택을 앞두고 처녀들의 금혼령을 내리는 것부터 혼례를 치르기까지 최소 6개월에서 최장 3년이 넘게 걸렸다.

  

조선의 왕세자빈은 대부분 10세 전후에 입궁했다. 따라서 어린 왕세자빈을 교육해야 했지만 조선 초에는 왕세자빈을 위한 특별한 교육이 없었던 듯하다.

  

세종이 문종의 첫 부인인 휘빈 김씨가 시앗을 질투했다고 폐한 뒤에 이러한 일이 다시 없기를 바라고 학식이 있는 여자궁인으로 하여금 두 번째 부인 봉씨에게 ‘열녀전’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러나 2∼3일 동안 배운 후 봉씨가 책을 정원에 던지면서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 하며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세종이 “‘열녀전’을 배우도록 한 것이 나인데, 봉씨가 이와 같이 예의 없이 행동하니 어찌 며느리의 도이겠는가. 부인에게 문자를 가르쳐 정치에 간섭하는 문을 열 필요가 없으므로, 내가 다시 수업하도록 하지 않았다”고 했다.

 

성군(聖君)으로 손꼽히는 세종이 왕세자빈에 대해서만은 정치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에는 왕비와 왕세자빈을 비롯해 시비들에게 훈민정음을 가르쳤다.

  

15세기 후반, 성종의 어머니 소혜의 의지로 왕세자빈에 대한 기본 교육이 자리를 잡는 듯했다. 소혜는 “남편이 어질지 못하면 부인을 제어할 수 없고, 부인이 어질지 못하면 남편을 섬길 수 없다. 오직 남자만을 가르치고 여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피차에 대한 헤아림이 부족한 때문”이라며 여자를 교육하지 않는 관습을 비판했다.

소혜는 스스로 내훈(內訓)을 지어 왕비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후세의 왕비들에게 가르치려 했다. 그리하여 성종 때부터 왕세자빈에게 소혜의 내훈과 유학의 기본서인 ‘효경’ ‘소학’을 가르쳤다.

  

왕비 되면서 갑자기 정치 참여

 

그러나 이 또한 왕세자 교육제도와 같이 체계적이거나 의무적인 것이 아니어서 중종의 비 문정이나 고종의 비 명성과 같은 몇몇 야심 있는 왕비만 소혜의 가르침을 따랐다.

왕세자빈이나 왕비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선조 초에 명종의 비 인순이 섭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내가 문자를 모르니 어찌하겠는가?” 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왕실은 이처럼 왕세자빈을 교육하는 데 소홀하고, 오직 왕자를 낳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왕세자빈도 왕세자의 사랑을 받아 아들을 낳을 일에만 전념했다.

  

문종의 첫부인 김씨가 시중드는 하녀에게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비밀리에 전해오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졸랐다거나, 문종의 둘째부인 봉씨가 세자빈궁전의 늙은 궁인에게 “할미는 어찌 내 뜻을 모르는가” 하며 밤마다 세자를 데려오라고 했으며, 세자가 다른 곳에서 공부를 하면 찾아가 벽에 구멍을 뚫고 엿보고, 시녀로 하여금 남자를 그리는 노래를 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봉씨는 잉태하기에 전력을 다했음에도 임신하지 못하고 후궁 권씨가 아이를 배자 “권씨가 아들을 낳으면 나는 쫓겨날 것이다”라며 소리쳐 울었고, 한번은 임신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낳아도 자식 키우는 재미를 볼 수 없었다. 자식을 낳으면 유모가 육아를 도맡았으며, 연산이 여덟 살 때까지 강희맹과 영응대군 집에서 자란 것처럼 궁중에서 키우지 않고 관리나 왕실 친척의 집으로 내보내 키우기도 했다.

그러므로 왕세자빈은 시어머니인 왕비를 따라 국가행사에 참여하는 일 이외에 별 의무도, 권리도 없었다. 봉씨가 시비들과 동성연애를 했다거나, 김씨가 푸닥거리를 했다는 기록은 왕세자빈들이 무료함을 어떻게 달랬는지 짐작케 한다. 

이렇듯 무료한 나날은 왕비가 되면서 깨끗이 사라지고 갑자기 정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여러 국가행사에 참여해야 하고 궁궐 내 살림을 돌봐야 했던 것. 조선 초에 왕비는 왕과 동좌해 정치에 참여했다.

  

태조가 죽고 명나라 황제가 조문사를 보내왔을 때 “왕은 상복을 입고 대문 밖에 나가 영접했고, 정비는 경연청에서 시녀를 거느리고 서서 특사를 맞이했다”는 기록이나, 태종 6년에 태종이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신하들을 불렀을 때 신하들이 이에 반대하고 돌아가며 “왕과 왕비에게 4번 절하고 나갔다”고 한 기록은 왕비가 왕과 함께 앉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이 내외법을 적용해 왕비로 하여금 남자 신하들을 대하지 못하게 했으나, 17세기 이전까지는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아 왕비들이 남자 신하들을 대했다.   

왕이 일반 국가의 일을 보는 사정전 혹은 선정전에서 왕비도 백관(百官)의 인사를 받았고,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이들을 영접하는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또한 소헌왕후(세종의 비)가 온천장에 갔다 돌아올 때 구경꾼들이 왕비의 행차를 환영했다거나, 소혜(덕종의 비)와 정현왕후(성종의 계비)가 성종의 능에 제사지내고 돌아올 때 병사들이 사열해 날짐승을 날린 일 등은 왕비가 백성에게 통치자로 비쳐졌음을 증명한다.   

 

(계속)